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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코프의 조직신학 - 서론 (제1부 교의신학의 개념과 역사)

JORC구원열차 2009. 1. 8. 09:57
벌코프의 조직신학 - 서론 (제1부 교의신학의 개념과 역사)
 
이 책은 조직신학의 교과서로 여겨질만큼 개혁신학에 있어서 조직신학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책이다.
이 부분은 상권의 서론의 내용이다.
서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첫번째 부분은 '교리신학의 개념과 역사'라는 부분이고, 두 번째 부분은 '교의학의 제원리'라는 부분으로 교리에 대한 인식 방법과 성경의 영감론 등에 대해 다루고 있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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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 교의 신학의 개념과 역사
 
<1장은 교의 신학의 명칭에 대한 간단한 부분이기에 생략한다.> 
 
2. 교의의 성격
 
1) 교의라는 명칭
 
교의(Dogma)라는 말은 헬라어의 도케인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는데 고전 헬라어에서 '도케인 모어'라는 뜻은 "내가 보기엔 어떻다. 내 생각에는 어떻다"라는 뜻으로 개인적인 확신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교의란 단순히 종교적인 것 뿐만 아니라 철학적이고, 정치적인 것도 포함된다. 현대 교의에서도 이런 점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성경적인 교의는 성경적 진리를 교회의 권위로 체계화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개혁신학에서 교의는 성경전 진리에 기반을 두고, 교회가 권위를 둔 것으로, 항구성과 안정성은 있지만 무오하지는 않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런 교의에 대한 정의는 현대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된다. 현대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슐라이에르마허는 교의를 감정적이고 경험적인 것으로 보았고, 리츨은 교의를 관적인 신앙으로 보았다. 이 모두 교의의 개관성을 무시하는 것이다.
 
2) 교의의 형식적 특성
 
저자는 이런 현대 신학의 교의의 개관성에 대한 부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통해 교의릐 특성을 정의한다.
 
첫째 교의의 주자료는 성경에서 나온다. 
개혁신학은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본다.(포사이드, 바르트, 불트만, 미클럼 등의 현대 신학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속적 행동만을 계시도 본다.) 따라서 개혁주의의 교의는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하고 있다.
 
현대 신학의 아버지인 슐라이에르마허는 교회 교의의 자료는 성경이 아닌 기독교적 의식이나 기독교적 경험에 서 이끌어 내었다. 그는 신앙의 항목들을 언어로 표현된 경건한 감정의 개념'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관점에 의하면 교의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가 아니라 인간 경험이 되게 된다.
 
현대의 리츨학파의 신학 역시 교의를 왜곡시킨다. 리츨학파의 카프탄은 신앙을 내용으로서의 신앙이 아니라 신뢰로서의 신앙으로 바꾸고 있다.
 
현대의 윤리학파 역시 교리를 진리로 보기보다는 삶의 관점에서 본다. 화란의 샨테피 더 라 소셰이 교수는 "교리는 삶을 딸, 삶을 통하여 생겨난다. 교리는 진리가 영혼 속에서 생명이 되었을 때 그 진리를 숙고하는 마음의 열매이다."
 
둘째 교의들은 교의적 성찰의 산물이다.
저자는 이 책의 처음부터 교의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이성적 작용이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진리를 체계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인간 안에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 그 마음을 주장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라는 것이다. 즉 성령께서 인도하여 교의를 체계화하게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경 지면에서 확정된 형태의 교의를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슴에 계시된 진리들을 숙고함으로써 교의를 얻는다. 기독교 의식은 진리를 내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재생산하고 거대한 통애체로 보고자 하는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지성이 이 성찰을 지도하고 인도하기는 하지만 그 성찰은 그저 지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 도덕적이고 감정적인 것이기도 하다. 지성, 의지, 감정, 즉 전인격적이 활동한다. 인간 영혼의 모든 기능과 내적 삶의 모든 호라동이 최종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더 넓게 보면 이 성찰 활동의 주체는 그리스도인 한 개인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교회 전체이다.(P29)"
 
"그 일은 깊은 영성, 경건한 열정, 하나님의 말슴에 계시되어 있는바 진리에 대한 기꺼운 복종, 진리와 그 진리가 갖는 의미에 대해 늘 향상하는 통찰력을 얻고자 하는 애타는 정열, 성실한 석의적 연구, 구성 능력 등을 필요로 한다. (P30)"
 
셋째 교의들은 어떤 합법적인 교회가 공적으로 정의한 것이다.
교의는 또한 공적인 교회가 그것을 구체적으로 공식화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이 공식적인 교회에 대해 로마 카톨릭은 교회연합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개혁교회는 개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대표한다. 물론 이 개교회가 속한 상급교회가 있다면 그 개교회는 상급교회의 교의를 따라야 한다.
 
3) 교의의 필요성
 
현대에는 교의의 필요성이 부정되고 있다. 현대 기독교는 교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삶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칸트로 부터 시작된 인식론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인식을 부정함으로 신적인 지식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판단을 이론적인 판단이 아니라 실천적인 판단에 두었다. 그리고 이런 칸트철학은 현대의 리플 신학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현대의 경건주의와 실용주의 역시 교리의 필요성을 부정한다.
 
"경건주의의 특징은 종교에서 모든 종류의 지성주의를 혐오하며 정서주의와 경험을 종교적 삶에 대한 유일한 참된 표현으로 칭송한다. 경건주의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마음의 피난처 곧 감정의 자리로 물러감으로써 교리적 논쟁의 말다툼으로부터 피할 것은 명한다. 미국에서는 경건주의가 행동조의라는 꽤 반가운 친구를 만난 셈인데, 행동주의는 우리가 만약 주의 일에 분주하기만 한다면 무엇을 믿든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주장한다.(P34)"
 
그러나 저자는 교의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한다.
 
첫째는 성경이 이 교의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딤전2:4)"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엡4:13)"
 
두번째는 교회의 통일성을 위해서이다.
성경은 교회를 '진리의 기둥의 터(딤전 3:15, 4:13)'라고 부르고 그것을 지키라고 말하고 있따.(유다서) 또한 사도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같은 말을 하라'고 권면함으로서 한 교회 안에서 통일된 교의를 가질 것을 명령한다.
 
세번째는 교회의 의무가 교리상의 일치를 한다.
교회는 공통된 신앙고백을 각고 있으며 당연히 하나의 교리를 요구한다. 이것은 에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진리의 수탁자로, 보호자로, 증인으로 임명 받았으며, 이것은 교회가 진리에 대한 명확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네번째는 세상에서의 교회의 위치기 일치된 증거를 요구한다.
세상은 교회가 어떤 곳인지를 알고 싶어 하고, 교회는 이것에 대해 분명히 말해 주어할 의무와 권리가 잇다.
 
다섯번째로 교의가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험이 가르쳐 준다.
교회는 항상 교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교의를 비판하고, 부정하는 교회 역시 교의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역사상 교의가 없는 교회는 없었다.
 
4) 교의에 필요한 요소들
 
이런 교의에는 사회적 요소와 전통적 요소, 권위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사회적 요소란 교의가 개인의 신앙고백뿐만 아닌 공동체의 신앙 고백을 포함하고 있음을 말한다. 전통적인 요소란 교의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형성되었음을 의미한다. 권위적 요소라 교의가 성경의 권위에 기초를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가톨릭은 교의가 교회의 권위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함)
 
"개신교 교회는 그들의 교리가 성경지닐에 대한 올바른 공식화라고 보는 까닭에 그것들을 수용되기를 기대하지만, 교회가 진리를 확정함에 있어서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한다. 그리고 만약 교의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권위가 없는 것이다.(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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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성도들은 교리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논리적으로 교리를 이야기하는 사람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교리는 단순히 인간의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작용하신 인간에 주신 마음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것이 벌코프가 교리에 대해서 계속해서 주장하고 있는 냉용이다. 또한 그는 교리를 철저하게 교회와 관련하여 이해한다. 교리가 교회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며, 그래서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런 내용들을 통해 교회와 교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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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의 신학의 개념
 
1) 교의와 교의학의 관계
 
이번 장에서 저자는 교의가 과연 학문이 될 수 있는지 교의와 교의학의 관계를 이야기 한다. 저자는 교의학은 성경적이며, 동시에 교회적이라고 말한다.
 
"교의학은 교회의 교리를 전체적으로 연구하며, 신앙의 각 항목을 그 전체와의 관련 속에서 검토한다. 교의학 그 자체는, 무엇보다 먼저 성경적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교회적인 특징도 갖는다.(P42)"
 
그래서 저자는 교의의 형성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의한다.
 
첫째, 신앙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생겨한다.
"교의들은 주문할 수 없는 것이다. 교의들은 신학자 개인이나 과학적 신학 일반이 만들어서 바깥으로부터 신자들의 공동체에 부과하는 그런 것일 수 없다. 교의들이 만약 그렇게 만들어지고 제시된 것이라면 아마도 교회의 신앙을 참으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고,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며, 그 결과 권위있는 것으로 인정받지도 못할 것이다. 교의들은 열정적인 영적 삶의 기간에, 진리에 대한 광범위하고 진지한 숙고와 깊은 종료적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둘째, 신학은 교의들의 형성에 보조적인 역할을 해 왔으며 또 종종 그래 왔다. 
"교의들이 단순히 신학의 산물일 뿐이라는 주장을 거부하면서도 우리는 교회가 교의들을 최종적으로 작성함에 있어서 신학에 많은 신세를 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셋째, 교의신학은 교회의 교의들을 그 자료의 핵심으로 삼는다.
"교의는 신학이 집 지을 때 쓰는 재료의 핵심으로서, 신학은 그것을 조직적인 구조로 세우게 되며, 따라서 당연히 전체 체계의 구성과 형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2) 교의 신학의 대상
 
교의 신학의 중심 대상은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학문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전제로 가능하였다. 17세기의  몇몇 신학자들은 실천적인 면을 강조하여 "교의 신학이 구원에 이르는 참 종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삶, 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 섬김 등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교의신학이 칸트에 이르러 전환을 이루게 되었다. 칸트의 현상론은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것은 이론적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슐라이에르마허는 교의 신학을 객관적인 것에서 주관적인으로 바꾸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보다는 신앙의 감정을 다루는 것으로 보았다.
 
이런 현대신학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교의신학을 객관적인 학문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당신의 창조로부터 떨어져 게시는 하나님이 아닌 당신의 피조물들과 관련되신 하나님을 신학의 대상으로 본다."는 명확한 견해를 가지고 교의 신학의 방향성을 주장한다. 특히 화란의 신학자 카이퍼는 조금 다른 경향을 보이는데 그는 하나님님을 학문적 연구의 직접적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하고, 그가 자신에 대해 계시한 내용이 학문적인 내용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교의 신학의 학문적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셨고 따라서 자신에 관한 참된 지식을 인간에게 알려 주셨다는 것, 둘째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이 신적 지식을 취하여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셋째는 인간은 하나님 및 하나님께서 당신의 피조물들과 가지시는 관계를 더 잘 이해하려는 목적으로 이 지식을 조직화하려는 충동을 자기 안에 갖고 있다는 것이다.
 
3) 학문으로서의 신학
 
현대에 신학의 학문성을 부정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신학이 관찰 할 수도 없고 또 경험적인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 즉 인간의 이론적 지식의 범위 너머에 있는 대상을 연구하는 일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학이 신학의 확실성의 근거를 학문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권위인 인간의 이성에서 찾지 않고 권위 있는 계시에서 찾는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신학자들은 두 가지 대응을 한다. 첫째는 신학을 학문보다 낮은 위치로 놓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학의 기존의 연구방법을 포기하고(보수주의자?), 현대의 이성적인 방법을 채택함으로서 학문적인 지위를 유지하려는 것이다.(현대의 자유주의자)
 
이에 대해 저자는 어떤 관점에서 신학의 학문성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학의 학문성 자체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연구를 목표로 하는 신학의 학문적 지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것이라고 말하고 만약 이성적이고, 경험주의적인 방법으로만 학문의 범위를 정할 때 신학이 그 범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또 한편으로는 학문이란 체계화된 지식으로 인간의 통상적 지식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것이며, 이 지식은 그 대상의 성경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얻어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런 부분에 의해서 계시에 의한 신학의 학문성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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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 철학을 공부하면서 신학 역시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의해 체계화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또 그것을 추구했었다. 그러나 신학을 접하면서 결국 우리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계시를 배우고, 체계화하는 것은 단순히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임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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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교의학의 과제, 방법론 및 분류
 
1) 교의학의 과제
 
저자는 현대 신학자들에 의해 교의학의 목표, 과제가 많이 변질되었다고 본다. 저자가 현대 신학의 시초로 보는 슐라이에르마허는 교의학의 과제를 교회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경험하는 감정들을 기술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는 교의학은 이 종교적 감정이 갖는 내적 의의에 대한 지적인 표현이요 해석일 따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될 경우 신학은 주관적인 것 외에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리츨과 그 학파들은 슐라이에르마허의 주관주의를 극복하려 했지만 그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경험을 교의학의 목표로 보았다.
 
트리췰은 교의학을 기독교를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객관적인 우수성을 확보하는 것에 두었다. 그는 교의학자의 세 가지 단계를 제시했는데 첫 번째는 다른 종교와 비교하여 기독교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기독교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라고 하고, 두 번째는 기독교의 본질을 발견하는 것인데 그 본질은 상황과 세월에 따라 바뀌기 때문에 시대 속에서 그 본질을 파악해야 하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해석된 기독교를 하나님, 인간, 구속 등에 관한 교리로 공식화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쉐더는 이런 현대 신학은 인간중심적인 이해를 거부하고, 교리학은 하나님 중심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하나님이 자신에게 계시한 내용을 체계화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바르트는 교의학은 교회가 쓰는 하나님과 관련된 언어들을 신적계시와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현대 신학과 관련되어 저자는 개혁주의 교의학의 과제를 제시한다. 하지는 교의학의 목표를 "절대적으로 타당한 진리를 학문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기독교 교리의 총체를 포괄하는 일"이라고 주장하였고, 바빙크는 "교의학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관련된 계시의 내용을 지적으로 재생산하는 바로 그 사명을 갖는다."고 말했다. 저자는 이를 통해 개혁신학의 과제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제시한다.
 
첫째는 건설적인 과제로서 교회의 신앙을 구체화하고 조직화 하는 것이다. 둘째는 증명적이고 방어적인 과제로 자신들이 주장하는 체계의 진리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셋째는 비판적인 과제로 자기가 제시하는 체계에 대해 엄격하게 비판하여 진리에서 벗어날 가능성에 대해 항상 염두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2) 교의학의 방법론
 
교의학의 내용의 원천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는 여러 가기 견해가 있다.
 
첫째는 성경을 원천으로 삼는 것이다.
기독교는 정통적으로 성경을 신학의 원천으로 보았다. 성경이 신학의 원천이라는 의미는 정도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다른 것과 비교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신학의 원천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투레틴, 카이퍼, 바빙크, 톤웰, 기라드류 같은 다른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성경을 가리켜 유일한 원리, 즉 신학의 유일한 원천이요 규범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신학자가 하나님의 일반 계시로부터도 하나님에 관한 어떤 지식을 얻을 수 있음을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죄가 세상에 들어온 이후 인간이 하나님의 일반 계시로부터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은 오직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연구할 때 뿐으로서, 이 성경에는 죄의 어두운 그림자로 인하여 어두워지고 왜곡되었던 하나님 원래 자기게시의 요소들이 재공포 되고, 교정되고 해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는 하나님에 관해, 또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과 맺으시는 관계들에 대해서 신뢰할 만한 지식을 얻기 위해 항상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뿐만 아니라 특별 계시가 아니고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얻을 수 없는데. 이 지식이 가장 중요한 지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교의신학의 체계는 오직 성경의 토대 위에만 세울 수 있다.(P67)"
 
그러나 이런 성경을 원천으로 삼는 방법은 현대 신학에서 많이 비판되어 있다. 바르트 역시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인정하나 그것이 전적인 하나님의 계시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바르트의 신학에 붙여진 가장 최근의 이름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라는 이름이다. 바르트는 일반계시를 부인하며, 현대신학의 주관주의를 강력하게 반대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있어서 특별계시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렇지만 이 사실에 근거하여 그가 신학의 원천으로서의 성경개념에 있어서 개혁주의 개신교와 일치한다고 추론하면 그건 잘못일 것이다. 첫째로 성경은 하나님의 특별계시와 동일시되어서는 안 되며, 단지 그 계시에 대한 증거로 인정될 수 있을 뿐이며, 둘째로 특별계시는 항상 말씀하시는 하나님일 따름으로서 절대 객관화되어 책 안에 정지되고, 그래서 성경이 메첸 박사의 말대로 '신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최고의 교과서'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특별계시는 신학자가 쉽게 자기 자료를 모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따라서 특별계시는 성경도 아니고 성경의 일부분도 아니며, 그저 성경이 증거하고 하나님에 관한 교회의 언급이 시험받아야 하는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하심일 따름이다. 그리고 신학이 어디서 자료를 찾느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하심과 진정으로 일치하는 한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선포에서라는 것일 뿐이다.(P69)"
 
두 번째는 교회의 가르침을 원천으로 삼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은 로마 카톨릭에서 매우 강하다. 로마교회는 성경과 전승을 모두 교회의 손을 통해 받았기에 성경과 전승 모두가 신학의 원천으로 인정될 수 있긴 하지미나 신앙의 참된 원천이요 규칙이 되는 것은 변경할 수 없는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대한 저자는 진리와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를 오해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교회를 낳은 것이 진리이지 교회가 진리를 낳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교회를 신항의 원리로 인정할 수 없다고 말한다. 교회의 모든 주장과 가르침은 성경의 시험을 받아야 하며 성경적인 보증이 있는 한에서만 타당한 것이라고 말한다.
 
세 번째는 기독교 의식을 원천으로 삼는 것이다.
슐라이에르마허 및 리츨의 영향 아래 있는 많은 신학자들이 기독교적 의식, 즉 마음 속에 경건한 감정 등을 신학의 원천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는 이것은 신앙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기에 기독교의식을 신학의 원천으로 삼는 것은 거꾸로 된 것이라고 말한다.
 
앞의 이런 교의학의 자료들을 다루는 방식에도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는 사변적인 방법이다.
이것은 경험적인 방법과 반대되는 말로서 선험적인 양식으로 관찰과 경험에 의해 주어진 자료들 대신 이미 주어진 절대적인과 보변적인 진리로부터 상대적이고 개별적인 진리를 연역해 내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경험적인 방법으로서 선험적 진리를 거부하고, 오직 경험에 의해 주어진 것만을 진리로 인정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기원적 - 종합적 방법이다.
이것은 권위적인 방법이라고도 불리며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진리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한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이것의 시작은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종합적 방법을 적용함에 있어서 신학자는 성경으로부터 각기 따로 떨어진 교리들만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말씀으로 계시된바 전체로서의 신적 진리를 받는다. 사실들은 계시된 진리에 대한 표현이며, 진리들은 성경 지면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사실들을 설명한다. 성경의 가르침들은 그것들의 거대한 통일체 안에서 보게 되는데, 이는 성경이 따로 떨어진 교리들이 서로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다양한 방법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P79)"
 
3) 교의학의 분류 방법
 
이 부분에서는 교의학을 어떻게 분류할지를 이야기 한다. 여기에는 삼위일체적 방법, 분석적 방법, 언약적 방법, 그리스도론적 방법, 왕국 개념에 기초한 방법, 종합적인 방법을 제시하며 저자는 종합적인 방법을 가장 좋은 것으로 말한다. 그리고 종합적인 방법이란 신론, 인간론, 그리스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으로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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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분을 읽으면서 성경적인 교리를 가르친다는 것, 그리고 성경적인 진리를 주장한다는 것이 세상의 학문과의 끊임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신학을 하는 사람, 성경적 진리를 연구하는 목회자들은 자기 안에서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려는 유혹을 이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도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면서 계속해서 내가 싸워야 했다는 것은 지식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가르치려는 욕구였다. 쉬우면서도, 명확하고 간단하게 진리를 가르치는 것은 자기를 수없이 깨뜨려야 하며, 또한 계속된 연구와 깊은 탐구로서 자신이 먼저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와 확신이 있을 때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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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교의학의 역사
 
1) 고대 교회 시대
 
초기 교회에서 기독교 교의가 헬라철학과 영지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런 중에 올바른 성경적 교리를 정립한 인물은 어거스틴이다. 특히 그는 여러 가지 저서를 통해 펠라기누스적 사상에 반대하고,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해했고, 삼위일체론을 정립하였다.
 
2) 중세 시대
 
중세 시대 신학은 스콜라주의와 신비주의가 주도했고, 특히 플라톤의 실재론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론이 대립을 하였다. 대표적인 신학자로서는 안셀름이 있다. 그는 특히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라는 책을 통해 속죄론의 만족설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자로서 아벨라르는 도덕감화설을 주장하였다. 중세 후기에는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유명한 신학자가 등장했다. 그는 [신학대전]을 통해 로마교회의 신학을 집대성하였다.
 
3) 종교 개혁 시대
 
종교개혁시대는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를 통해 신학을 정립하였다. 이의 시초는 루터의 유명한 [노예의지론]이다. 그러나 루터의 제자인 멜랑히톤은 윤리적 요소와 도덕적 행동을 가미함으로서 루터에서 멀어졌다. 후에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틀을 만들었다.
 
4) 개혁주의 스콜라시대
 
17세기에 이르러 신학은 논증적이되고, 이에 대해 반발로 개혁주의 내에서도 스콜라주의적인 방법을 도입하였다. 대표적인 학자로서는 칼빈의 뒤를 이은 테오도르 베자가 있다. 그에 의해서 타락전 예정설의 기초가 세워졌다. 이에 반발하여 언약주의와 알미니우스주의 사우무르 학파들은 개혁주의에서 이탈하는 흐름을 지니게 되었다.
 
5) 합리주의 및 초자연주의 시대
 
18세기부터는 합리주의와 경건주의가 등장한다. 합리주의는 신학을 수학적으로 단순화하는 것이였고, 이성주의적으로 신학을 해석했다. 이에 반해 경건주의는 실천적인 경건을 강조하였다.
 
6) 현대 신학 시대
 
현대 신학의 시작은 슐라이에르마허이다. 그는 종교적 경험을 종교의 본질로 보고, 이것을 통해 교의를 체계화 하였다. 이것을 통해 주관적인 신학을 확립하였다. 이에 반해 헤겔과 그의 제자들은 객관적이고, 철학적인 사변적인 신학을 주장하였다. 이런 극대적인 대립을 해결하러 중도파가 나왔다. 이들은 나름대로 중도적인 신학을 주장하였지만, 슐라이에르마허의 주관주의를 시작으로 삼았다. 근대에 이르러 알브레히트 리츨에 의해 리츨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는 종교적 진리는 기독교적 삶으로 보았다. 특히 그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높임을 받는 그의 삶이 하나님으로부터의 가치를 가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현대신학에 맞서 카이퍼와 바빙크가 개혁주의를 부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