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의 영성론(靈性論) - 이상호 교수
제1부 - 요한복음의 영성 이해
I. 성령의 근거
1. 로고스와 성령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요한 복음서를 영적인 복음이라고 말하였지만, 성령이라는 말이 요한 복음서에 얼마나 적게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원어 상으로 “성령”(푸뉴마 하기온)은 요한 복음서에서 단 세 번밖에 나타나지 않는다(요 1:33, 20:22). 이같은 숫자는 다른 복음서들에 비해 유별나게 적은 숫자다. 요한은 때때로 성령을 의미하는 생각으로 그저 ‘영’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성령으로 번역하는 때가 많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 때문에 요한이 성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영이라는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아마도 성령을 다른 표현으로 대신하여 말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요한에게는 요한 나름의 특이한 말들이 나타난다. ‘생명’이라든지 ‘영원한 생명’ 또는 ‘로고스’와 같은 표현들이다. 혹시나 그와 같은 표현들이 성령이나 성령을 따라 사는 영성 생활을 가리키는 표현들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요한복음서 서두에는 다른 복음서들과 같은 예수의 탄생 기사도 없을 뿐만 아니라 탄생에 성령이 개입한 이야기도 없다. 그 반면에 로고스가 육신으로 나타나셨다는 기록이 있다. 성령으로 태어나신 것을 부정한 것은 아닌 것이 분명하다. 로고스로 오셨다는 것은 곧 성령으로 오셨다는 요한의 표현일 수가 있다. 요한복음서의 주요 부분 가운데서 간접적인 표현이나마 요한은 말씀 곧 로고스가 성령이시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성령을 주시기 때문이다”(3:34) 라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며 또한 그것이 성령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말씀 또한 영이요 생명이라고 한다(6:62). 요한은 예수가 성령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가 생리적인 출생의 면보다도 영적인 면을 더 무게 있게 보았던 것이다.
성령으로 난 사람(원문에는 영으로 난 사람이라고 함)에 관해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고 한다(3:8). 이 말의 뜻은 성령으로 태어난다는 것이 생리적으로 출생하는 종류의 출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일이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것을 뜻하는 것인데 요한복음서의 서문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한다. 그런 사람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인간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다”(1:13).
예수의 기원에 관해서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고 하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곧 성령으로 오셨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초대 교회 전반에 걸쳐서 이해되고 있는 성령의 특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심을 받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령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신 분은 인자이시다(3:13). 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독생자이시고 그를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이 거듭 요한 복음서에는 강조되어 있다. 요한의 기독론의 특색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내심을 받은 그분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진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3:34). 이 점에 있어서 요한의 주요 부분과 로고스 서문과의 내용이 일치한다.
서문에 따르면 말씀은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1:1). 그것은 로고스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라는 로고스의 기원을 말한 것인데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내려 주신 것은 성령이라고 초대 교회 전승들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데 비해서, 요한은 독특하게 하늘로부터 유래한 것이 로고스라고 하는 것을 더 강하게 역설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유래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이 생리적인 출생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로고스로 세상에 오셨다는 로고스의 면을 강조한 것이며 초대 교회가 성령으로 잉태하신 것을 기적이나 초자연적인 출생으로 풀이하고 있었다는 것에 비해서, 요한은 성령의 역할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그의 뜻으로 해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2. 예수와 성령 세례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본격적인 기록은 세례 요한의 증언의 기사 가운데 처음으로 나타난다(1:29-34). 이 기록 가운데서 중요한 요지가 밝혀진다. 곧 성령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으로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리스도는 성령을 받으신 분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가 바로 신자들의 영성 생활의 근거가 되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해 준다. 요한의 증언의 초점은 바로 이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설명한다면 모든 신자들의 성령 체험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이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에 관한 기사는 분명히 초대 교회의 전승에 근거한 것이다. 요한은 그 전승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그러나 그 전승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 요한복음서는 초대 전승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요한복음은 요한복음 그 나름으로 기사를 수정하여 다시 쓰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선명한 수정의 흔적은 세례 요한의 증언이다(1:29-34). 세례 요한은 다만의 증인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가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다던가 또는 예수께서 그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는 전승의 이야기는 완전히 삭제해 버린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 요한복음서 기자의 의도가 숨어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이 주는 것과 같은 물의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으로 묘사할 의도에서 그리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예수께서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성령의 세례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으신 분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받으신 분으로 본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 요한은 이렇게 증언한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 같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보았다(테데아마이)라는 동사의 시상은 분명히 깨달음에 이를 만한 시간을 포함한 과거의 일로 이야기한 것이다. 전에도 세례 요한은 말했다는 것이다. “내가 전에 내 뒤에 한 분이 오실 터인데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고 말한 일이 있다는 것이다(1:30). 요한복음서는 시종 일관 이 점을 역설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1:1-2).
복음서의 중도에서도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있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8:58). 분명히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처음부터 하늘로부터 성령을 받으신 분으로 확신하고 있다. 또한 성령은 일회적인 체험이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와 이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았다는 말 가운데 머무르다(카이 에메이넨)(1:32)라는 동사와 33절의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의 머무르다(메논)라는 동사에 대해서 학자들의 의견은 매우 무게 있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곧 예수의 성령 체험은 그가 세례를 받으셨을 때에만 있을 수 있었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포함한 연속적인 일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는 것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왔다는 기사에 관해서 요한복음서는 공관 복음서의 기사와 근본적인 차이점을 나타내 보인다. 이 기사는 전승에서 온 것은 분명하지만 각각 복음서 기자들의 이해하는 방법에는 큰 차이가 있어 보인다. 공관 복음서의 마태나 누가는 성령이 강림하는 것을 가시적인 현상이나 육안으로 체험할 수 있는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태에 의하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 같이 자기 위에 내려오시는(‘에르코메논’이라는 동사를 덧붙여 행동적인 면을 더 강조한다) 것을 보셨습니다”(마 3:16) 라고 말함으로써 육체적인 동작으로 묘사하였다. 누가복음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소마티코)” 내려왔다고 함으로써 그 나타난 모양이 완전하게 육체적 형태로 나타난 현상으로 묘사하였다(눅 3:22). 공관 복음의 그와 같은 면과 요한 복음서의 기사를 비교해 볼 때 확실하게 요한 복음서의 성령 강림의 모습은 영적인 현상이다. 요한은 그와 같은 육체적인 동작을 나타내는 어떤 보조적인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의 강림은 오로지 영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영적인 의미의 성령 체험은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여 크리스천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의 위에 성령이 강림하였다는 이야기를 보도하는 일에 있어서 요한복음서가 공관 복음서와 다른 점은 바로 이 점이다. 요한복음만이 다음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성령이 내려와서 어떤 사람 위에 머무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인 줄 알라”는 것이다(1:33). 그리스도는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신자들이 성령을 체험할 수 있고 영성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그리스도를 통하는 길이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자들은 성령을 받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의 증언 가운데 이것이 밝혀져 있다. 그의 증언을 수록하고 있는 요한복음서의 의도는 올바른 영성 생활은 그리스도에게서 근원 된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서는 시종 이런 입장을 지키고 있다. 복음서의 주요 부분에서 이것을 시사하고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 같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7:38-39). 또 요한복음서의 후반부인 고별 담화문 속에서도 이것을 또 다시 다짐해 보인다(14:26).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성령 체험과 영성 생활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다는 일이 초월적 신비에 빠지거나 비합리적인 황홀경(엑스타시) 체험이 아니다. 하나님의 로고스를 따르는 것과 로고스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사는 생활 속에서 성령의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멋대로의 성령 체험을 요한은 배격한 것이다.
기독교가 이방 세계로 선교를 확장해 나갈 때 흔히 있을 수 있는 현상은 선교지의 토착 신앙의 영성 체험을 본 따기 쉬운 것이다. 또한 신비적인 경험에 의지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치심과 상관없이 자기 식으로의 영성 체험을 내세우기도 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카리스마적 운동 가운데는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한 번도 본보여 주신 일이 없는 방법의 성령 체험으로 자기의 영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그와 같은 그릇된 영성 체험을 견제하는 의미에서 요한은 특별히 건전한 영성 생활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건전한 영성 생활이란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둔 영성 생활이다. 그리스도에게 근거를 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에 토대를 둔 영성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를 둔 영성 생활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처음부터 분명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 요한복음서의 성령 이해의 특징이다.
3. 은혜와 진리
공관 복음서 전승에 의하면 세례를 받으신 다음의 예수는 성령이 충만하여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이기신 기사가 나타난다(마 4:1-11, 막 1:12-13, 눅 4:1-13). 마태와 마가에는 없지만 누가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성령이 충만하여 요단강에서 올라오셨다”고 한다(눅 4:1).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는 그와 같이 성령이 충만하셨다는 이야기는 없다. 그와는 달리 요한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고 하는 기록이 나타난다. 공관 복음서의 성령이 충만하셨다는 기사와 비교가 된다. 공관 복음서에서와 같은 초대 교회의 전승을 요한의 이해 방식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 추측이 된다.
충만하다는 표현의 원어(플레에레스)는 누가와 요한이 일치한다. 성령에 관련해서 사용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요한은 성령에 관한 말이 기대되는 자리에 성령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그 자리에 은혜와 진리라는 말을 쓴 것이다. 예수께서 성령이 충만하셨다는 것이 요한에게 있어서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셨던 것으로 이해된 것이다. 여기에 요한의 의도가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의 은사라는 것은 초자연적인 능력의 충만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것이며 성령 체험은 은혜와 진리를 따르는 생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언어상으로 볼 때 은혜와 성령 사이에는 그다지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성령의 은사를 말할 때 헬라어로는 ‘카리스마’라고 한다. 은혜의 원어도 ‘카리스’로써 ‘카리스마’와 같은 말에 속한 것이다. 그러므로 ‘은혜’도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은혜라는 ‘카리스’가 진리라고 하는 말과 함께 사용될 때에는 히브리어의 사랑과 진리(“헤세드와 오메드”)를 헬라어로 번역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가능성도 매우 크다. ‘헤세드’는 사랑으로도 번역할 수 있다. 사랑은 성령의 은사에 속한다. 실제로 바울은 성령의 은사의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때 사랑을 성령의 은사 중의 가장 큰 은사로 들었던 것이다(고전 12:31이하). 그리고 그것을 은혜의 선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이 예수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으로 말할 때에는 성령이 충만하신 분이라는 것을 뜻한 것으로 보아 마땅하다.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은혜와 함께 진리도 충만하신 분이라고 말한다(1:14). 진리도 성령을 의미한다. 요한은 보혜사 성령을 말할 때에 진리의 영이라고 불렀다(14:17, 15:26, 16:13). 성령의 주요한 성격을 진리로 표현한 것이다. 요한 복음서에 있어서 진리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구구하다. 한때는 영지주의나 헬라 사상적인 배경이 있는 것으로도 해석했었다.
그러나 구약성서에 나타난 진리 개념이라든지 또는 구약의 경‧외전이나 사해 사본을 참작해 볼 때 요한복음서가 말하는 진리의 뜻은 유대인들의 사고방식과 매우 거리가 가까운 것이다. 잠언에 의하면 진리는 지혜를 뜻하고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다(잠 23:23). 사해 종파의 글에 있어서나 경‧외전에 있어서 진리는 신도들이 행하여야 할 윤리적인 선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의 영은 선한 일로 인도하는 영적인 힘이다(유다의 유언 20:1, 5, IQS 3:6 etc).
요한은 행한다는 말과 함께 진리라는 말을 사용한다. “진리를 행하는 사람은 빛으로 나아간다”고 한다(3:21).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라는 것은 사람이 행하여야 하는 윤리적인 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요한의 진리 개념은 구약의 ‘오메드’에 가깝다. ‘오메드’는 지성적인 의미의 범주에 속한 것이 아니라 도덕적 범주에 속한 것이다. 요한의 진리가 얼마나 오메드의 뜻을 충실하게 따를 것일까에 대해서 다드(Dodd)는 어느 정도 의심을 갖기는 하지만 은혜와 진리라는 두 말의 합성은 히브리어 구약의 표현의 영향일 것으로 본다. 그것은 실천적인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믿는 후대 사람들에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대로 살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다.” 요한은 진리가 행하여야 하는 행동적 윤리에 속한 것임을 분명하게 한다(8:31-32). 제자들이 행하여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불렀다(17:17). 그리고 그 말씀은 진리의 영이 가르쳐 주는 것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들으신 말씀으로서 장차 제자들이 마땅히 행하여야 하는 일에 관한 것이라고 보았다(16:13). 크리스천들이 행할 바 도덕적인 선에 속한 것이다. 그리고 진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말씀을 가리킨다(8:45).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라고 하신다. 요한이 본 진리다. 진리가 곧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신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이다(1:17,18).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는 것과 하나님을 나타내 보이셨던 분은 바로 그분이시라는 것이다(1:17,18). 그리스도가 되시는 진리를 알게 하는 것은 곧 진리의 영이시라는 것이다(16:13).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의 성령에 대한 이해를 정리해 보자. 요한은 서두부터 성령의 역할을 기록해야 할 부분에서 성령을 대신하여 로고스와 로고스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통해서 사람들이 충만하게 체험할 수 있는 은혜와 진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함으로써 요한은 성령을 통해 일어나는 일들이 초자연적이거나 기적적인 카리스마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의 계시와 같은 면을 더욱 중요시하고 있다. 또한 그 말씀을 믿고 행함으로써 체험할 수 있는 윤리적 생활면을 영성 생활의 더욱 중요한 열매로 본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서가 뜻하고 있는 점은 영성에 속한 모든 체험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하는 점이다. 성령 체험의 원천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초대 교회는 성령 체험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집단이었다.
교회가 시작되고 발전해 나가는 데 있어서 성령의 도우심이 결정적이었다고 확신하였던 만큼 신자들은 성령의 은사를 받는 것을 가장 큰 자랑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고린도전서에 바울은 성령 체험이라고 할 때 아마도 신비적인 방법으로나 자기도취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었던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기독교가 유대를 떠나 안디옥으로, 또는 아라비아, 소아시아나 마게도니아 그리고 로마와 이집트로 확장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그와 같은 여러 이교도들의 지역으로부터 토착적인 영성 체험의 방법을 본받았었을 가능성의 위험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어느 모로 보거나 건전한 성령 체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리라고 본다. 광신적이고 흥분된 상태의 모든 영성 체험이 과연 모두 올바르고 바람직한 성령의 체험일까 하는 의문을 갖게 하며 반성과 재고의 필요를 느끼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와 같은 가정 아래서 요한 복음서를 볼 때 요한복음서는 공관 복음서 전승과의 현저한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II. 영원한 생명과 영성 생활
1. 거듭남과 성령
앞에서 이미 우리는 요한복음서가 성령이라는 표현을 조심스럽게 유보하며 로고스나 진리나 은혜와 같은 표현으로 대체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요한복음서는 또 다른 하나의 독특한 표현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표현이다. 요한은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다음의 짧은 글로 요약하여 말하였다. “여기에 기록한 것은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당신들로 믿게 하고 또 믿고 그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 20:31).
생명을 얻게 한다는 것이 요한 복음서를 기록한 가장 큰 목적이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는 생명이라는 말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거의 동의어가 되다시피 하는 같은 말이다. 요한은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을 거듭 되풀이하여 강조하고 있는데 그 생명을 누린다는 것이 혹시나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 체험과 영성 생활에 해당한 표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6:63). “내가(예수가) 너희에게 한 그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6:63). 요한은 예수로 하여금 이렇게 말씀하시도록 하면서 영과 생명을 밀접하게 연결 짓는다.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요한은 말하고 있다. 그것은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말씀 때문인 것이며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령(영)을 주시기 때문이라고 한다(3:34). 예수께서 주시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4:14). 그가 주시는 물은 마시는 그 사람의 속에서 샘물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 곧 이어서 요한은 영과 진리로 예배드려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4:23). 생명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예수께서 주시는 물과 관련하여 요한은 말하면서 “믿는 사람은⋯⋯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같이 흘러나올 것”이라고 하며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7:38-39). 이렇게 생명과 성령을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본다.
이와는 경우가 다르기는 하지만 목숨이나 생명을 가리킬 때에도 영이라는 표현을 썼다.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다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후 머리를 떨어뜨리고 숨을 거두셨다고 하는데 원문에는 유일하게 요한복음서만 영(프뉴마)을 거두셨다는 표현을 쓰고 있다(19:30). 목숨을 ‘프뉴마’(영)로 표현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구절들을 통해 볼 때 요한이 말하는 생명과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성령이나 영과 밀접히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생명을 갖는다는 말은 영성 생활의 목적에 도달한다는 말이기도 하며 생명을 누린다는 말이 곧 영성 생활을 의미하는 것 같이 보인다.
생명과 성령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잘 드러내 주는 것은 거듭나는 생활에 관한 니고데모와 예수와의 담화 가운데 잘 나타난다. 요한에게 있어서 생명은 거듭나는 체험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듭남의 목표가 생명이라는 말을 직접으로 하지는 않는다. 거듭남의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일이라고 한다(3:5). 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것이라고도 한다(3:3)(본다는 말은 경험한다, 맛본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과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게 된다는 말이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공관 복음서의 전승을 살펴봄으로써 확인할 수가 있다. 니고데모와의 담화와 같은 전승의 배경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율법 학자와의 대화가 공관 복음서에 나타난다. 마가에 따르면 어떤 율법 학자가 가장 큰 계명에 관해서 예수께 물었다(막 12:28-34, 마 22:34-40, 눅 10:25-28). 마가에 따르면 그때 예수께서는 대답하셨다. “너는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다”(막 12:34).
공관 복음서에서 니고데모와 같은 율법 학자의 질문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지에 관한 물음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것이었지만 누가의 보도에 따르면 율법 학자는 이렇게 물었다는 것이다.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물음의 내용을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었다고 본 것이다(눅 10:25). 공관 복음서의 저자에게도 이미 율법 학자의 하나님 나라에 관한 물음이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 밝혀져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공관 복음서에서 이것을 보충할 만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누구든지 어린이의 심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맞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거기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다(막 10:15, 마 18:3, 눅 18:17). 그런데 이 경우에 있어서도 누가는 의회원 중의 한 사람의 질문과 연결 지어 놓는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눅 18:18).
분명한 사실은 이미 공관 복음서의 기자들 사이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관한 질문은 곧 영원한 생명에 관한 질문과 동일한 것이라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은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을 하고 난 다음에 다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반면에 영원한 생명이 이 대화의 주제로 계속 나타난다(3:15,16, 34). 거듭남으로 얻게 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이다.
거듭나는 체험이란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3:5). 곧 성령을 뜻하는 ‘영’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거듭남의 이야기는 세례의 이야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1장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이라는 말을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증언하도록 한 바 있다(1:33). 3장의 니고데모의 이야기까지 세례의 주제는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2장에서 가나의 혼인 잔치에도 곧 세례와 같은 정결 예법에 관한 기사가 나타난다. 세례라고 하는 주제를 이어받아 성령으로 거듭나는 문제로 화제를 옮겨간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물로 만의 세례의 중요성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 예수께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물로 세례를 받으셨다는 전승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보도하지 않는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보도를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하는 숨은 의도는 명확하다. 비록 물의 세례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물로 주는 세례 의식만으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판단인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는 물의 세례를 요한으로부터 받으실 필요가 없으신 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 반면에 세례의 참 뜻은 성령을 받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성령은 예수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것임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령 체험은 영적인 것이며 물과 같이 형태를 가진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는 것을 밝혀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의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영으로) 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고 하신다(3:8). 그러므로 니고데모의 대화 속에 나타난 거듭남의 이야기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관한 말씀이었음과 동시에 그것이 성령 체험을 의미하는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2. ‘생명’,‘영원한 생명’
요한에게 있어서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곧 영성 체험(혹은 성령 체험)을 한다는 말이다. 생명은 성령의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요한은 성령의 은사를 받아 삶을 얻게 되는 영성 체험을 영생을 누린다는 말로 표현한 것이다. 생명이 영성 생활을 뜻하는 것임을 요한은 거듭 강조하고 있다. 사마리아 여자와의 대화 중에서 예수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이 되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할 것이다”(4:14). 이 말씀이 있고 난 다음 또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에게 예배드리는 사람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4:24). 더욱 더 직선적인 표현이 발견된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라는 말씀이다(6:63). 예수께서는 자신의 말씀에 관해서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신다(6:63).
“영원한 생명”이 성령 체험과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또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언어 상으로 헬라어의 “영원한 생명”(조에 아이오니오스)은 순수한 헬라어라기보다는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번역된 표현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묵시문학에서 종말론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오는 세대”(하예 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헬라어로 번역될 때에 “영원한 생명”이라고 번역될 수 있는 것이다(단 12:2).
다니엘서를 제외한 다른 묵시 문학에서도 그와 같은 예가 발견된다(제4에스라서 7:12-13). 다드(Dodd)는 그것이 묵시 문학의 마지막 날에 해당하는 앞으로 오는 미래적인 새 날을 뜻하는 표현이었다고 판단한다. 그의 판단은 충분한 문헌적 근거가 있는 말이다. 사실 요한도 역시 영원한 생명이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았음이 분명하다. 요한은 수시로 마지막 날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에 영원히 누리게 될 생명에 관해서 말하고 있다(11:23-26). 마지막 날의 종말론적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성령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가 없다. 요엘서를 인용하는 초대 교회는 마지막 날에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행 2:17).
쿰란 종파의 종말 사상에도 성령 강림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을 참작해 볼 때 요한은 바로 극적인 성령 강림을 직접으로 말하고는 있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이라는 종말론적 표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종말론적 새 시대에 반드시 성령 강림이 수반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던 묵시 문학적 종말 인식을 전연 외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요한이 종말론적 의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성령 체험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데 대해서 의문을 가져 볼 수 있다. 요한이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로 종말론적인 삶을 표현한 것이라면 거기에 어떤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요한은 마지막 날에 맛보게 될 성령 체험이 어떠한 것이어야 할지를 남달리 관심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마지막 날에 받아야 하는 성령의 체험을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요한은 종래의 성령 체험에 대한 관념을 일부 시정을 하고 참으로 올바른 방법으로 영성의 체험을 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는 변화의 정신으로 표현을 바꾸어 사용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물의 세례와 같은 종교 행사만으로는 영성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영성적 체험이 동반해야 한다.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물리적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생리적인 현상도 아니다. 요한은 초대 교회 안에 있어 왔던 성령 체험의 신체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모양의 ‘카리스마’ 영성 체험을 장려하지 않고 그것과 대치할 수 있는 영성 생활을 천거한 것이다. 바람직한 영성 체험은 영적인 것으로서 물리적이거나 신체적인 기적 현상을 목표하는 것이 아니다. 영성 체험은 참 삶을 누리는 것이다. 요한의 표현을 따른다면 생명 또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방도는 어떤 방도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를 통해서 나타내 보여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말씀이 영성 생활의 근거가 된다. 말씀을 따라서 영성 생활을 하는 것이다. 또한 영성 생활에 요긴한 양식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씀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이 생명의 양식이다. 이미 요한은 영성 이해에 있어서 초대 교회로부터 전승을 이어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에 강조의 초점을 두고 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3.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
성령의 체험이나 영성 생활은 예배를 통해서 경험할 수 있다. 요한은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추천한다. 예배라고 하면 일정한 장소에서 정규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있고 그 밖에도 특별하게 드리는 성례전이 있다. 성례전으로는 세례와 성찬이 초대 교회 안에서는 대표적인 것이다. 세례가 영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관해서는 이미 언급했으므로 여기에서는 세례의 문제는 제외하기로 한다. 다만 일반 예배와 그리고 성례전의 하나인 성찬 예식으로 한정해서 요한의 뜻하는 영성 생활과의 관계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초대 교회의 예배의 순서에는 성경 읽기와 기도와 찬미와 말씀의 증언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와 같은 예배의 순서들을 통해서 영성 체험을 기대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신령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먼저 여기에서 지적된 것은 유대인들의 고정 관념을 시정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예배드려야 한다고 한다. 신령으로 예배드린다는 것은 그와 같은 고정 관념을 시정하는 것이다. 요한은 2장에서 이미 그것을 시정하고 있다. 성전은 예수 자신이라는 것이다(2:13-22). “이 성전을 허물라. 그러면 내가 사흘만에 다시 세우겠다”(2:19)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 성전은 자기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2:21).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미 분명하게 밝힌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이 산 위에서도 아니오 예루살렘에서도 아닌데서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드릴 때가 올 것이다”(4:21).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리는 예배이다. 예배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며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영을 받음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그리스도가 영성 생활의 모든 기초가 된다. 예배를 새롭게 하는 영적 새로움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유대교나 이방 종교나 할 것 없이 그들의 고질적인 문제의 또다른 하나는 우상 숭배였다. 우상 숭배는 인간이 만든 예배의 대상이다. 인간이 만든 것을 숭배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다운 진리의 예배가 아니다. 영과 생명이 없는 허수아비의 예배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과 생명력이 있는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다시 일깨운다(4:24). 신령으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신령이 인간의 신령함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미라는 브라운의 지적은 매우 날카로운 지적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떠나서 사람 스스로의 영적인 능력으로 과시하려는 영성은 영성이 아니다.
브라운이 역설하는 것은 여기에서 신령이라고 하는 영이 사람의 영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과 사람의 영, 곧 사람의 신비적 체험을 엄연하게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배드리는 태도에 관한 문제이다. 자기도취의 황홀경은 진정한 의미의 신령한 예배가 아니다.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에 부합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신령과 진리의 예배는 예배의 근거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골자로 한 것이다.
성령은 유형한 형태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활동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말은 바로 이런 뜻도 있는 것이다. 요한은 처음부터 바로 이 무형적 속성에 더 많은 중점을 두어 왔다. 무형적인 그 속성들은 그리스도의 육신을 통해서 계시되었다. 요한의 표현을 따르면 그리스도의 그 무형적인 요소들은 ‘사랑’과 ‘진리’와 ‘생명’과 같은 것이다. 때로는 세상의 ‘빛’이라는 표현을 썼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하신 것이다. 요한 일서의 표현은 요한의 본 뜻을 바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던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이다(요일 1:5, 4:8,16). 진리로 예배드리며 성령을 체험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하나님의 무형적인 심성을 체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진리와 생명과 같은 것으로 내용을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배와 성례전은 생명력이 있어야 한다. 살아 있는 예배라야 한다. 신령으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예배가 생동적이어야 하며 생명력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을 이사야서 31장 3절에 비추어서 새롭게 이해해 본다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이사야에 의하면 애굽인들은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그들이 타는 말은 고기 덩어리요, 정신이 아니라고 한다(히브리 원본에만 있는 것임).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유대교의 신관(神觀)은 육신적 요소와 대조한 것이다. 영이란 정신이 없는 고기 덩어리와의 대조를 말한 것이다. 때때로 예배와 성례전이 고기 덩어리만의 움직임인 것으로 흘러 나간다면 생명력이 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
사람이 타는 말에 비교해 본다. 말들을 영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은 것이다. 말들과 같이 몸만이 뛰는 예배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력이 있는 예배라고는 할 수 없다. 신령으로 드리는 예배란 바로 이 생명력을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이 임재하는 예배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영으로 드리는 생동감이 넘치는 예배는 반드시 기독교의 예배만을 의미한 것은 아니다. 그와 반대로 영이 결핍된 예배가 반드시 유대교의 예배를 두고 말한 것도 물론 아니다. 낡은 계약의 유대교든지 새 계약의 그리스도 교회이든지 영으로 예배하지 않을 때에는 다함께 죽은 예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오는 생명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성례전에 관한 문제이다. 성례전 가운데는 주님의 만찬이 있다. 주님의 만찬은 ‘유카리스트’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은 만찬의 의식도 진리와 영으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먼저 야기되는 문제는 과연 요한복음이 성례전을 가리켜 말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느냐 하는 문제다.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하지 않는다. 성만찬을 가리키고 있다는 암시를 주는 본문은 6장이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의 이야기(6:1-15)와 생명의 떡이신 예수에 관한 말씀이다(6:30-56).
브라운은 적극적으로 이 기록의 배후에 성찬의 의미에 관한 의도가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의 학자들이 상반된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요한에 기록된 말의 표현이 초대 교회의 성찬 예문과 잘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한복음 6장 51절 하반의 “내가 줄 떡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다”라는 말은 고린도전서 11장 24절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와 누가복음 22장 19절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라는 말과 내용상으로 일치한다.
성찬을 전제하였든지 아니하였든지 보다도 더 명확한 사실은 요한이 성례전에 관련되는 축자적이고 물질적인 의미들을 배격하는 의도가 있다는 점이다. 성찬을 축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성찬의 떡이 실제로 예수의 살이라고 믿는다. 요한의 예수는 “내가 줄 떡은 나의 살이다”(6:51)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말의 오해가 없도록 설명을 덧붙이신다. “육은(살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라고 다시 말씀하신다(6:63). 그것은 축자적인 해석을 반대하신 것이다. 때로는 성찬을 대할 때 마술적인 효능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이그나시우스는 성찬의 떡을 죽지 않는 떡이라고도 불렀었다. 그와 흡사한 물질적 해석을 요한이 배격한 것이다. 요한은 성례전에 있어서도 성령과 진리로 행하여야 한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암시한 것이라고 본다. 신령과 진리로 성례전에 참례하는 일이란 바로 예수를 믿는 신앙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양식으로 삼아 생명을 얻는 일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생활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양식 삼아 살아가는 삶이 곧 신령과 진리로 성례전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것이 영성 체험이다.
4. 생명의 떡과 하나님의 일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와 성찬은 자연히 생명의 떡과 생명의 물의 이야기로 옮겨져 갔고 생명의 물과 생명의 양식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화제로 이동해 간다. 성령의 생활을 뜻하는 생명이란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 그의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삼는다는 것인데 생명의 양식으로 이루어지는 영성 생활이란 하나님의 일을 실천하는 윤리적 생활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요한의 특징이 된다. 요한은 유달리 하나님의 일(에르곤)의 ‘일’이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다. 몇 차례의 예외를 제하고서는(3:19,20,21, 7:3,7,21, 8:39,41)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그가 뜻하시는 바를 가리킨다. 그리고 영성 생활을 의미하는 생명과 영원한 생명에 직접적으로 결부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요한의 하나님은 일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나타내 보이신다.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고(6:40) 빛을 주시며 자기의 뜻을 나타내신다(5:20, 9:3,4). 보내심을 받은 아들은 보내신 하나님의 일을 하신다(10:33-38). 그리스도는 기능 면에 있어서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5:17)고 하신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아들도 하기 때문이다(5:20,36). 그것은 여러 가지의 선한 일들이다(10:32).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사람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일이다. 살리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다. 복음서의 처음과 나중 부분에서 요한은 예수께서 성령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밝힌다(1:33, 20:22). 복음서의 중심 부분에 와서는 예수께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행하심으로써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또한 행할 것을 가르쳐 주신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믿는 신자가 실천하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게 되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과정에는 그리스도를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의 떡을 얻는데 조건이 있다. 일꾼으로서의 일을 해야 한다. “추수하는 이는 삯을 받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매를 거둔다”고 말씀하신다(4:36). 첫째로 해야 할 일은 믿는 일이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 하고 사람들이 물었을 때 예수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일이다”(6:28) 라고 대답하신다. 믿는 사람들이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이다. 말씀을 들어야 하며(8:47)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 “너희가 내 말대로 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 하게 할 것이다”(8:31)라고 말씀하신다. 진리는 행해야 하는 일들이다(3:21). 진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다(17:17). 영성 생활은 말씀의 실천을 포함하는 것이다.
윤리의 실천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이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은 본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었다. 믿는 사람들은 그를 본받아 행하여야 한다. 행할 바 일은 서로 사랑하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새 계명을 주셨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13:34). 영성 생활의 절정은 14장 20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다. 영성 체험의 극치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내 계명을 받아 행하는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14:20-21)라는 것이다.
영성의 체험은 사랑의 실천을 필수적 조건으로 삼고 있다. 영성 체험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이라면 영원한 생명에 관해서 요한이 기록하는 예수의 기도문 가운데에 있는 말씀을 참작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그것이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성하여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사옵니다⋯⋯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하였습니다”(17:3-7).
이 기도문 가운데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행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보여준다. 그러므로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와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영성 생활은 말씀에 입각한 윤리의 실천 생활을 반드시 겸하여야 한다는 것이 요한의 영성 이해인 것이다.
III. ‘파라클레토스’, ‘성령’ 그리고 ‘진리의 영’
1. 말의 뜻
요한이 특이하게 선택한 또 하나의 중요한 용어는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이다. ‘파라클레토스’는 ‘로고스’와 마찬가지로 요한 만이 특별하게 사용하는 용어 중의 하나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초대 교회 전승에는 낯선 표현이었다. 초대 교회는 성령의 체험이나 성령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가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그와 같은 성령을 요한은 초대 교회가 흔히 사용하지도 않는 생소한 용어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다. 파라클레토스는 요한이 초대 교회가 전하는 성령을 토착화의 과정을 거쳐서 새롭게 해석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다. 성령이라는 표현이 이색적이고 피부에 와 닿기가 더딘 풍토에서는 친절하게 더 알기 쉽고 더 육감적이며 토착적인 표현을 요한이 발견하여 그것으로 전승이 믿어 내려오던 성령을 풍토에 맞게 다시 해석한 것이 아닐까 하였다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의 의미가 무엇인지 또한 요한이 파라클레토스를 통하여 무엇을 의도하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참으로 많은 연구가 있어 왔다. 현대에 이르러서 요한의 시대에 알아들을 수 있었던 파라클레토스라는 말이 아직도 그 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게 확인해 놓을 수 없는 실정이다. 이 말은 순수한 헬라 말이다. 유대교를 배경한 초대 기독교의 많은 용어들은 히브리어나 아람어에서 기원한 것들이었고 근원을 구약이나 유대 문헌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그러나 파라클레토스의 경우에 있어서는 유대적인 근원을 언어학적으로 찾아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것을 시도해 보아 왔던 학자들의 견해도 매우 복잡하게 다양하다. 종교사학파의 학자들은 파라클레토스의 사상적 또는 문학적 배경에 대한 많은 연구를 제시하여 파라클레토스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지만 완전히 통일된 이론에 도달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다.
요한이 어느 정도 초대 교회의 전승에 충실하였으며 어느 정도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첨가하였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얼마나 전승이 물려준 성령관을 요한이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는지 또 얼마나 그것을 수정하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며 새롭게 전하려고 하고 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최근까지의 연구들이 상당한 도움이 된다. 그 연구들을 바탕으로 하여 이 문제를 취급해 보는 것이 좋겠지만 결정적인 해답은 요한복음 자체의 문맥 속에서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2. 파라클레토스와 성령
파라클레토스는 신약성서 가운데서 오직 요한의 문서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표현이다. 요한복음에 4번 나타난다(14:16,26, 15:26, 16:7). 또한 요한 일서에서는 1번 등장한다(2:1). 신약성서의 어느 곳에서도 같은 말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 말은 헬라 말이다. 구약의 히브리어의 번역일 가능성도 학자들은 연구해 보았다. 그러나 칠십인 역(LXX) 어느 곳에서도 파라클레토스는 발견되지 않는다. 랍비 문학에 사용된 히브리어 가운데는 헬라어의 파라클레토스의 음을 빌어온 듯한 낱말들이 있다. ‘프르클리트’란 자음으로 구성된 낱말은 파라클레토스의 헬라어 발음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발견된 랍비 문학은 미슈나로서(아보트 4:11) 요한복음이 기록되기보다 아주 후대의 문헌이며 요한복음의 배경 연구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문헌이다. 그러므로 파라클레토스라는 낱말을 요한이 사용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요한의 독자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경향을 따른 것이 아니라고 본다.
파라클레토스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든지 간에 이것이 요한이 독자적으로 택하여 사용한 용어이며 요한의 특이한 의도를 나타내 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요한의 의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를 읽는 독자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표현이라는 확신 아래서 이 말을 마음놓고 사용한 것이 아닌가 본다. 요한에게만 특이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 특이한 표현을 가지고 요한은 기존의 초대 교회 전승이 전해 주고 있는 성령을 가리켜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요한은 파라클레토스가 성령을 가리켜 말한 것임을 직접 밝힌다. 요한은 말한다. “보혜사(파라클레토스)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파라클레토스 토 푸뉴마 토 하기온’)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14:26)다고 하며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을 가리키고 있음을 분명하게 드러내 보인다. 사실 한국 교회에서는 파라클레토스와 성령을 연결 지어 “보혜사 성신”이라는 하나의 고유명사로 부르는 것은 정당한 일이며 원문에 충실한 번역에 근거한 것이 되기도 하다.
파라클레토스란 표현을 사용한 곳은 14장에서부터 17장까지의 특별한 구간에서 뿐이다. 그러나 그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다른 부분에서 요한은 성령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를 믿는 사람은⋯⋯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같이 흘러나올 것이다”라고 예수는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라는 것이다(7:39).
그 구절을 14-17장의 보혜사에 관한 설명에 비추어 볼 때 보혜사는 바로 요한이 말하고 있는 성령과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7장에서 요한은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성령을 말하고 있으나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으시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이 사람들에게 임하시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14장 아래의 보혜사의 경우도 그렇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혜사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며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낼 것이다”(16:7).
두 구절을 나란히 비교해 볼 때 7장의 성령과 16장의 보혜사는 근본적인 공통점이 나타난다. 곧 보혜사나 성령이나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난 다음에 하나님으로부터 믿는 신자들에게 보내심을 받게 될 성령을 가리킨 것이다. 성령에 관해서 요한은 어김없이 초대 교회의 전승을 계승한 것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신 다음 초대 교회는 곧 성령을 받게 된 것이다(행 1:5, 요 20:22, 1:32-33, 마 28:19, 눅 24:49).
전승을 따르면 부활하신 후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받게 될 것을 예고하시고 또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고 그리스도는 세상 끝날 까지 제자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 있어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전승의 성령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요한 역시 보혜사가⋯⋯오시면 그가 예수를 증거 하실 것이며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된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공관 복음서의 전승에서와 같이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기사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날 까지 언제나 제자들과 함께 계시리라는 것이 보장되어 있다. 파라클레토스 기사 속에는 파라클레토스를 제자들에게로 보내신다는 말씀과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로 다시 오시겠다는 말씀도 함께 들어 있다(14:28, 16:16, 15장 참조).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공관 복음서의 성령의 또하나의 공통점이 나타난다. 박해와 탄압 속에서 심문을 받게 될 제자들을 위한 성령의 도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전승의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잡혀 끌려갈지라도 너희가 무슨 말을 할까 하고 미리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말할 것을 지시하여 주시는 대로 말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성령이시다” 라는 것이다(막 13:11). 요한의 보혜사 성령도 그와 같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보혜사 성령이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겠”다는 것이다(14:26).
요한이 성령에 관해서 전승을 따르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축자적으로 전승과 동일한 표현을 반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라고 하는 자기 특유의 표현을 가지고 성령을 말하고 있다는데 는 무엇인가 요한의 심정에는 성령 강림에 대하여 새로운 이해와 특별한 의미를 첨가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요한은 파라클레토스를 성령이라고 말하지만 성령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는 것을 선호한다(14:17, 15:26, 16:13). 파라클레토스를 성령으로 표현한 것이 한번뿐이라는 사실에 비해서 전리의 영으로 표현한 것은 무려 세 번이나 된다. 파라클레토스를 성령이라고 하기보다 차라리 진리의 영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것이 요한의 심정이다.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오히려 보혜사 성령에 대한 더 적절한 표현이라고 본 것이 아닌가 한다.
‘하기온’이라는 말이 붙은 성령이라는 명칭을 요한이 빈번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하기온이 없이 그저 “영”이라는 말을 가지고 성령의 역할을 자주 이야기하고 있다. 영(프뉴마) 또는 관사를 붙인 영(토 푸뉴마)이라는 말을 도합 18번이나 요한이 사용하는 것을 보아서 요한이 성령을 가리킬 때 차라리 성령이라는 표현보다는 다만 영이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 것 같이 보인다. ‘영’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였다는 것도 성령에 대한 요한의 숨은 의도에서 온 것이 아닌가 의심스럽다.
초대 교회에 있어서 성령에 대한 이해는 몇 단계를 거쳐온 것으로 보인다. 누가⁃사도행전 및 공관 복음서가 이해했던 성령의 역할은 그런 것이었다. 놀라우신 성령은 물적으로 가시화 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이적과 기사를 낳게 한다. 그것이 유대에 근거를 두었던 최초의 교회의 성령 체험이었던 것이다. 바울은 그와 같은 것을 바울 이전의 초대 교회의 교회의 양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바울도 그와 같은 성령의 놀라운 능력의 역사를 그대로 시인하고 인정한다. 방언의 능력과 기적의 역사를 시인하였다. 그렇지만 바울은 이런 현상에 대하여 우려를 표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와 같은 일보다도 더욱 중요한 성령의 은사들이 많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의 능력을 성령의 기능으로 더욱 중요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성령의 능력은 윤리적으로 선한 행실을 가져오게 하는 힘이라는 면을 바울은 더욱 더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바울을 거쳐 온 모든 초대 교회의 전승을 따르면서도 요한은 자기 나름대로의 새로운 이해를 첨가한다. 새로운 이해란 곧 새로운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새로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새로운 성령 이해를 촉구한 것이다.
요한은 초대 교회가 높이 평가하고 있었던 황홀함의 체험과 카리스마적인 요소를 겨냥하지 않고 반면에 합리적인 말씀과 은혜와 진리 면에 근거한 영성 생활면을 더 높이 평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의도를 나타낸다. 그와 같은 요한의 특이한 의도를 살리기 위해서 요한은 파라클레토스와 진리의 영이라는 새로운 표현을 도입한 것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전승과의 많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전승과 다른 요한의 특색을 드러내는 표현으로서 우리의 관심을 끌게 된다.
그러면 파라클레토스의 뜻은 무엇인가? 흔히 파라클레토스의 연구가들은 그 말의 사전 상의 의미를 밝히는 일로부터 연구를 시작하기도 한다. 사전 상의 의미로써 그 말의 어근을 추적해 보는 일이 중요하다. 파라클레토스는 동사 파라칼레인으로부터 온 것이다. 간구한다는 뜻이다. 파라클레토스는 그 동사의 수동형으로 된 명사이다. 도움이 필요하므로 간청하여 불러들인 사람이라는 뜻이다. 일찍이 그런 의미에서 카운슬러나 변호사를 뜻하는 것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파라클레토스는 능동적인 뜻을 가진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런 경우에 그 말의 뜻은 남을 위해서 간청하는 사람이라는 뜻이 되며 중보자나 대변인으로 풀이된다. 또 다른 뜻도 있다. 파라클레토스는 파라클레시스와 관련된 낱말로 위로나 위안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도 본다. 그런 경우에는 위로해 주는 자라는 의미로도 풀이된다. 이처럼 언어학적으로 보기만 하더라도 파라클레토스는 다양한 뜻을 가진 낱말이다.
그러나 사전 상의 의미만을 가지고 그 뜻을 헤아려 본다는 것은 충분한 방법이 되지 못한다. 요한의 시대에 그 말이 하나의 고유명사로 사용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가리켜 사용되어 온 고유명사였는지를 알아보아야만 한다. 그것을 알아볼 만한 직접적인 문헌은 없다. 요한을 제외한 신약의 다른 곳에서나 또한 인접의 문헌 가운데서도 바로 그 말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파라클레토스가 직접 발견된 문헌이 없다 하더라도 간접으로나마 그 용어의 배경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파라클레토스의 의미를 보다 세밀하게 설명할 수가 있을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은 요한의 전체에 흐르는 문맥을 통해서 요한이 어떤 신학적인 의미를 적재시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는 방법이다. 이 두 가지의 연구를 통해서만 비로소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의 충분한 의미를 정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의 연구, 곧 역사적인 배경 연구와 요한복음서의 전체의 맥락에 관한 모든 연구가 마무리되었을 때만 파라클레토스의 의미를 충분히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배경 연구
이십세기에 들어서면서 파라클레토스 사상의 기원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널리 시도되어 왔다. 주로 종교사학파의 학자들이 위주가 되어 배경의 연구를 한 것이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가 직접 사용된 문헌은 없었다. 다만 간접적인 방법으로 유사한 다른 용어와의 비교를 통해서 배경 연구를 하여보는 것이다. 그같은 연구들을 크게 다음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만다교의 야와르(Yawar) 사상
한동안 종교사학파의 거장들은 요한 복음서의 역사적 배경을 헬라적이고 노스틱적인 세계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 왔었다. 요한의 사상이 노스틱주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보았던 것이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도 노스틱 종교였던 만다교의 표현에서 빌어온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만다교의 문헌에는 야와르란 존재가 있다. 그는 천사적인 존재로써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 20세기 초반에 바우어(W. Bauer)는 바로 요한복음서가 있기 전에 만다교가 있었고 만다교의 영향이 요한의 파라클레토스 사상에까지 미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보다 앞서 루돌프 불트만(R. Bultmann)은 만다교 등의 노스틱 문서와 요한복음의 유사한 증거를 더 많이 제시하면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 사상이 만다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만다교의 도우시는 천사, 야와르에게서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같은 존재로 볼 수 있다고 하였다. 만다교의 야와르도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같이 의인들의 있을 곳을 마련하며 계시자의 역할을 하며 박해를 직면한 신자들을 돕는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가 만다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첫째의 이유로 위에 언급한 학자들이 비교의 도구로 사용한 만다교의 문헌들은 요한과 동 시대의 문헌도 아닐 뿐만 아니라 요한 보다 몇 세기 후대의 문헌이라는 점이다. 후대의 만다교로부터 이전의 요한 복음서가 영향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다드(C.H. Dodd)는 만다교의 문헌들이 신약 시대의 기독교보다 아주 후대의 문헌이라는 것을 매우 설득력 있게 결론짓는다. 그 뿐만이 아니다. 보른캄과 레이몬드 브라운을 위시한 많은 학자들은 여러 가지 면에 있어서 만다교의 야와르는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와 다르다는 점들을 지적하고 있다. 드로우어(E.S. Drower)의 비교 연구에 의하면 만다교의 야와르가 도우시는 신화적 존재를 뜻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있을 뿐만 아니라 브라운에 따르면 요한에 나타난 파라클레토스라는 헬라어가 도우시는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는 것이다. 보른캄은 만다교의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가능성에 반대되는 점들을 지적하였다.
노스틱 사상이 아니더라도 헬라의 영향을 받은 유대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아심을 가져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필로의 글이나 헬마스 문학 가운데서 파라클레토스와 비교해 볼만한 것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필로의 경우 로고스는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변호해 줄 대제사장의 역할을 하며 요한의 경우에도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들의 기도를 하나님께 상달케 하는 다리의 역할을 함으로써 본질적인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보혜사를 그리스도에게 적용하여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의 중보자 역할을 가진 것으로 표현하는 요한복음은 필로의 보혜사 사상을 그리스도에게 적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다드는 말한다. 그러나 다드는 한번도 파라클레토스가 직접으로 필로의 문헌에 나타났다던가 또는 필로의 중보자 사상이 요한의 그것과 비교될 만한 증거를 제시해 주지 못한 채로 그와 같은 추측을 한 것이다.
위에서 알아본 결과로서는 요한의 파라클레토스는 헬라 세계나 헬라화된 노스틱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증명할 만한 확실한 증거를 제시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것이다. 요한은 성령을 파라클레토스라는 용어로 표현하였을 때 굳이 성령의 활동을 헬라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런 용어를 택한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구약의 고별문
헬라 종교와의 관련이 거의 없는 것이라고 판단됨에 따라서 다른 가능성의 모색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어 왔다. 요한의 파라클레토스의 배경을 구약과 유대교의 문헌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요한복음서의 파라클레토스라는 표현은 예수의 고별 담화문인 14장으로부터 17장 사이에만 나타난다. 문헌의 양식을 분석하는 연구는 요한에 나타난 고별 담화문이 일정한 문학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또 그 일정한 형식이 구약에 나타난 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의 후계자를 약속하는 고별문의 문학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뮬러(Muller)는 유대교의 문헌 가운데서 요한의 고별 담화와 비교가 될 만한 고별 담화 문학 형식을 지적하였다. 유대 문학에는 세상을 떠나가는 스승과 지도자들이 그들의 죽음에 실망하는 제자들과 추종자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떠나는 스승이 남기는 담화를 수록한 기록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요한의 보혜사 성령에 관한 기사는 고별 담화문 가운데서 발견된다. 요한복음서의 고별 담화는 13장으로부터 시작하여 17장에 이르는데 이 담화문은 고별 담화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이 양식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몇 가지의 주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첫째는 스승이신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리라는 것을 예고하며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이 있고, 그 다음에는 후계자가 되는 위로자 보혜사를 선생의 대신으로 보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 따르며, 끝으로 그 후계자가 될 보혜사는 영이시라는 것과 영의 역할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야기한다. 전체를 놓고 볼 때 그 후계자는 세상에 남아 있게 될 제자들을 위로해 주는 위로의 역할을 담당한다. 그리고 보혜사라고 하는 낱말은 위로해 주시는 이라는 뜻이 있다.
구약을 중심한 유대의 문헌에도 이것과 비교해 볼 수 있는 고별 담화의 문헌들이 있다. 민족의 지도자가 되는 모세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의 일을 기록한 고별의 기록이 있다. 모세는 죽기 전에 자기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마지막 말을 남겼다(신 32:44 이하). 그 기록에서 모세의 죽음이 예고된다. 모세는 세상에 남아 있게 될 그의 백성들에게 축복의 노래를 남긴다(신 33:1 이하).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하나 하나를 위한 축복과 기원이었다. 축복 가운데서 분명한 것은 주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며 위로해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시려고 하늘에서 구름을 타시고 위엄 있게 오신다는 것이다(신 33:3,26). 백성들에 대한 간곡한 부탁은 모세가 전하여 준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다. 율법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곧 그들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떠나는 모세와 같은 후계자를 하나님은 보내 주시리라는 것이다. 모세는 자기의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안수하니 여호수아는 지혜의 영을 받게 된다. 이것은 모세라는 지도자가 세상을 떠날 때의 고별 담화의 내용이다.
열왕기 하서에는 엘리아의 고별에 대한 기사가 있다. 고별 담화가 요한의 그것과는 꼭 같은 문학의 형식은 아니지만 세상을 떠나는 엘리야는 세상에 남아 있게 될 제자, 엘리사에게 떠나게 될 것을 확실하게 밝혀 주고 난 다음 제자 엘리사에게 “내가 무엇을 네게 해 주었으면 좋겠느냐?”고 묻는다. 그때에 엘리사는 “스승님의 능력을 두배나 내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대답한다. 이 기록은 담화로만 이어지지 않고 있다. 엘리사는 스승이 하였던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는데 처음에는 실패하였으나 그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난 다음에는 능력을 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왕하 2:1-15). 스승이 세상을 떠날 때 스승이 가졌던 영적인 능력을 그의 제자에게 물려주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구약 성경 안에서도 스승의 이별을 주제로 하는 담화와 이야기를 찾아볼 수 있다. 그 담화 속에는 한결같이 후계자를 세워 주게 될 것이 약속된다. 후계자는 스승이 가지고 있던 것과 같은 영을 받게 된다. 담화나 이야기의 양식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요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고별 담화는 구약 성경의 고별 담화와 구조적으로나 성격적으로 서로 상통하는 것이 있다. 구약의 경우에서와 같이 요한의 담화문 속에서도 떠나는 스승을 계승하는 보혜사를 보내 주실 것과 또한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 주시리라는 약속을 남겨 놓으신다. 비교를 통해 볼 때 구약적인 배경은 요한의 고별문을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4. 요한의 문맥 상으로 본 파라클레토스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이다. 성령 강림에 대한 요한의 표현이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가 세상을 떠나신 다음 제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내 주실 성령이다(14:16,26, 16:7). 예수를 계승해서 보내심을 받게 될 보혜사 성령에 대한 요한의 기록은 주로 기능 면이 강조되어 있다. 인격적 존재로서라기보다 그가 하시는 역할에 관한 것이 비중이 크다. 첫 번째의 기능은 예수의 말씀을 다시 회상하게 하는 일이다. 파라클레토스로서의 성령의 일차적인 역할은 예수의 떠나심으로 말미암아 실망에 차 있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 스승이 살아 계셨을 때에 가르치셨던 모든 교훈들을 다시 기억하게 하시는 역할이다(14:26). 예수로부터 받은 것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다(16:15). 파라클레토스 성령은 진리의 영으로서(14:17, 16:13)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고 한다(16:13). 그것은 제자들에게 진리를 알게 하신다는 말이다. 진리는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다.
그리스도가 진리라고 말한 것은 주로 그의 가르치심을 포함해서 말한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말한다면 하나님의 진리이다(요 17:17). 파라클레토스는 “자기 마음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것만 일러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는 미래에 관한 예언적인 말씀도 포함되어 있었다. 보혜사는 또한 앞으로 올 일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신다.
파라클레토스의 또다른 중요한 역할은 예수의 부재 시에 예수를 대신하여 제자들 가운데 임재하시는 존재로서의 기능이다. 세상을 떠나신 예수는 사후에도 파라클레토스의 존재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신다. 물론 파라클레토스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예수와 동일한 존재라는 말은 아니다. ‘다른 보혜사’(요 14:15)라고 한다. 그는 영적인 면에서 생전의 예수와 동일한 분으로 제자들 가운데 영원히 계실 것이다(요 14:15). 직선적인 표현으로 말한 곳은 없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을 살펴 볼 때 파라클레토스는 살아생전의 예수와 같으신 존재라는 것을 암시해 준다. 병행되는 점들을 브라운은 열거해 보았다. 그 중의 몇 가지만을 예로 들어본다. 파라클레토스는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오신 분이다. 예수도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세상에 오신 분이다. 예수의 요청을 받아서 아버지는 성령을 주신다.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아들을 주셨다. 아버지는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신다. 그와 같이 아들도 파라클레토스를 보내신다. 파라클레토스는 예수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았다. 예수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보냄을 받으신 분이다.
비교를 통해서 브라운은 이렇게 결론짓는다. 실제로 모든 면에 있어서 파라클레토스에 관한 이야기는 예수에 관한 이야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다른 보혜사는 또 한 분의 예수라는 것이다(⋯⋯“another Paraclete is another Jesus”). 보혜사의 역할은 부재 중의 그리스도가 신비로운 영성적 체험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 가운데 항상 같이하신다는 것이다. 예수의 기도 가운데서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 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또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요 14:20).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모두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신다는 말씀이다(요 17:20). 영성 체험은 그리스도 체험이다. 성령의 체험은 그리스도의 동참이다. 요한의 성령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임재를 체험하는 것이다.
다음의 기능은 위로자의 역할이다. 박해를 직면하여 공포에 떨고 있는 신도들을 도우며 그들에게 위안과 용기를 주신다. 그것이 파라클레토스의 중요한 역할 중의 하나이다. 고별 담화는 위로로 시작된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요 14:1).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예수는 말씀하신다(요 15:18 이하).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은 신자들이 걸려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다(요 16:1). 보혜사 곧 진리의 영이 오시면 신자들에게 기쁨을 안겨 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는 울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슬픔에 싸여도 그 슬픔이 기쁨으로 변할 것이다”(16:20). “내가 다시 너희를 보게 될 때에는 너희의 마음이 기쁠 것이며 그 기쁨을 빼앗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하신다”(요 16:22).
끝으로 보혜사 성령은 선교의 사명을 도우신다. 초대 교회의 전승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선교의 사명을 당부하신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는 부탁이다.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받으라고 하신다(요 20:22). 보혜사가 오시면 자기를 증거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또한 믿는 신자들도 그의 증인이라는 말씀을 하신다(요 15:26-27). 증인이 된다는 것은 선교를 의미한다. 파라클레토스가 오심으로 믿는 자에게 주시는 사명은 선교의 사명과 전도의 능력이다.
IV. 맺는 말
클레멘트가 요한복음서의 특징이 영적인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그가 말하는 영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초대 교회의 영성 이해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클레멘트는 요한복음이 진정한 의미의 영성적인 복음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요한의 영성 이해는 초대 교회의 성령 체험과 동일하지 않다. 공관 복음서보다도 늦은 시기에 기록된 요한에게는 같은 전승의 계승자이면서도 영성 운동에 대한 갱신의 흔적을 보인다. 요한은 영성 생활이 확고하고 건전한 근거 위에 서야 하는 것이라고 본다. 크리스천의 영성 생활의 표준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제시해 준다. 그 표준은 성령의 근원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근원은 하나님과 또 그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그리스도시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근거로 하는 영성 체험이 크리스천으로써 참된 영성 체험을 하는 것이다.
초대 교회의 카리스마 체험은 가시적이다. 뜨거운 불로 표현되기도 하고 초자연적인 기적에 더 치우친다. 그리고 방언과 엑스타시적인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요한은 그렇지가 않다. 처음부터 합리적이다. 성령의 성격을 로고스나 은혜나 진리와 같은 말로 표현하면서 합리적이고 건전한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진리에 근거한 성령의 체험을 강조한다. 성령 체험을 요한은 생명이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로 표현한다. 그 때마다 체험은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에 의한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성령 체험은 인간의 일시적인 도취에 빠져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생활이다. 영성 생활에 필요한 양식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신 말씀이다. 동시에 요한의 영성 생활의 중요한 부분은 윤리적인 실천이다. 생명에 이르는 생활의 방법 가운데는 진리를 행하는 일이 포함된다. 건전한 영성 생활은 실천 생활이 동반해야 하는 것이다.
결국 요한의 영성론은 말씀에 근거하는 믿음의 생활이다. 믿음의 생활은 실천을 동반해야 한다. 요한의 성령론은 영성론이다. 생활 체험을 가리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에게 있어서 성령은 영성 생활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삶을 뜻하는 것이다. 생명력을 가진 살아 있는 삶이 영성 체험이다. 그것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서 요한의 영성 이해는 초기의 초대 교회에 비해서 매우 진보되고 갱신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요한의 영성 이해는 오늘의 교회의 건전한 영성 생활의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영성 체험은 성령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삼아야 하고 그의 보내심을 받아서 그의 말씀과 진리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그리스도를 바탕으로 하는 영성 생활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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