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과 - 그리스도교의 권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 하여 버리시리라.”(계 22:18~19) 본 장에서는 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변경을 가하지 말라는 경고를 담은 요한계시록과 기독교의 권위 문제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요한계시록 (The Book of Revelation)
이 책은 신약에 하나밖에 없는 예언서입니다. 때때로 묵시록(Apocalypse)이라고 부르는 이 책은 사도요한이 썼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이라고 부릅니다. 사도요한이 그의 말년에 소아시아(터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밧모섬으로 유배당해 갔을 때 거기서 쓴 것입니다. 아마 성경 가운데 가장 늦게 기록된 책일 것입니다. 이 책은 소아시아에 있던 주님의 일곱 교회에 보낸 것입니다. 이들 일곱 교회 중에 두 교회는 매우 칭찬을 들었고 두 교회는 매우 혹독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세 교회는 칭찬도 받고 비판도 받았습니다.
이 책은 요한이 “주의 날”에 본 환상을 기록한 것입니다. 주님의 날이란 주의 첫 날(일요일), 곧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의미합니다. 아마 성경의 어떤 책도 이렇게 추상적인 문제를 다루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 책에 나온 수많은 사물과 상징들이 각각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아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이 책을 연구하는 데 있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계시록은 “반드시 속히 될 일”(계 1:1)에 대한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즉, 요한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그대로 기록한 것입니다. 둘째, 이 책은 매우 상징적이라는 점입니다. 대체적으로 성경의 기록은 문자적 해석을 할 수 있지만 예언서는 다릅니다. 예를 들면 여기에 나오는 일곱 촛대는 이 책의 수신자들인 일곱 교회를 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상징과 환상을 해석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책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특히 난해한 구절에 대해 자의적 해석을 내리는 신학자나 대부분의 시간을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해서만 설교하는 사람들에 대해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교는 청중들의 흥미를 유발시킬 수는 있으나 듣는 사람들에게 많은 혼란을 주게 됩니다.
요한계시록 20에서 22장까지는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본 공과의 마지막 장에서 다루게 될 것입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끝을 맺습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21) 이제 기록된 성경은 끝났습니다. 성경은 약 1900년 전에 완성됐지만 책 중의 책인 이 책의 영향은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권위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인들이 신약 성경을 권위 있는 책으로 인정하는가?”라는 점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신약 성경의 계명들을 오늘날에도 적용시켜야 할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그리스도교 분열의 원인은 권위의 문제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권위가 교회에 있다고 믿습니다.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이 권위라고 여기면서도 어떤 성문화된 교리로 따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신약 성경이 믿음과 실행의 유일한 권위라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점에 대해 어떻게 말씀하셨을까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권위)를 내게 주셨으니.”(마 28:18) 성부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이 변화하신 산 위에 계실 때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거 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마 17:5)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예수께서 “그 가르치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마 7:29)을 보고 놀랐습니다.
사복음서를 살펴보면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에 이와 같은 권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의 명령에 순종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권위 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으로부터 모범을 받은 사도들의 말씀에도 우리는 순종해야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권세가 자신에게 있음을 말씀하신 후에 사도들에게 그 권능을 주시고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 19~20) 더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그들을 모든 진리로 인도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요 16:13). 이와 같이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권세를 갖고 가르쳤으며 서신을 써서 보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들의 가르침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그들의 권면과 가르침은 예수님의 권면이나 가르침과 부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경고
오늘날에는 예수님도 사도들도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진 몸으로 이 세상에 거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들의 말씀이 기록된 신약 성경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기록된 신약 성경을 그리스도를 따르는 권위이자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할 권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영감으로 기록된 이와 같은 가르침에 변경을 가하는 일은 다음과 같은 경고를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6~8)
여기에서 보면 “복음”에 무엇을 더하거나 제외함으로써 그것을 왜곡시키는 것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지내쳐 그리스도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요이 1:9)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것을 우리가 말해야 할뿐만 아니라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우리도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성경의 명령이나 교훈의 본질을 오늘날 21세기에 맞춰 변경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사도 시대에 침수로 행했던 세례의 방법을 약식(물 뿌림)으로 변경하는 것 등은 성경의 교훈을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신조, 교리, 혹은 신앙 고백 등을 하나님 말씀과 같은 권위로 받아들여서는 안됩니다. 사람이 만든 그와 같은 것들이 성경을 이해하는데 혹 도움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와 같은 것들을 권위로 받아들인다면 지내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그와 같은 신조(교리)들이 서로 모순을 일으킨다는 바로 그 사실이 성경과 일치될 수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다음 세 장에 걸쳐 우리는 신약 교회의 본질에 대해 살펴 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제1세기의 초대교회가 어떠했으며,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해야만 하는지를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권위로서 우리에게 보여 준 순전한 원리를 공부하게 될 것입니다.
'제자 양육 자료실 > 평신도 교육 교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평신도 일반 30강 (제26과)-교회의 예배와 재정 (0) | 2009.02.20 |
---|---|
평신도 일반 30강 (제25과)-교회의 명칭과 통일성 (0) | 2009.02.20 |
평신도 일반 30강 (제23과)-바울 서신과 일반 서신 (0) | 2009.02.20 |
평신도 일반 30강 (제22과)-성경적인 세례 (0) | 2009.02.20 |
평신도 일반 30강 (제21과)-구원을 얻는 믿음 (0) | 2009.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