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지식의 믿음으로 마음의 믿음에
“믿음으로”의 믿음과 “믿음에”의 믿음을 분별치 못하여 고통에 헤매는 형제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원합니다.
성경에『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기록 된 증거의 말씀에서 “믿음으로”와 “믿음에”를 분별치 못하여 거기서 더 자라지 못하고 “젖이나 먹고 단단한 못 먹을 자”가 되어 더 성장하지 못하는 “기형아”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는 진리의 영께서 누구를 통하여 대언의 영으로 증거 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록되기를『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히 5:12) 함과 같은 것입니다.
진리는 혼잡한 설명이 아니고 오직 나타나지는 빛입니다.
기록되기를『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 2:17) 함과 같고, 또한『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궤휼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천거하노라』(고후 4:2) 함과 같은 것입니다.
오직 성령을 좇아 행하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를 수 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지혜로는 진리를 분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록되기를『....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2:9) 함과 같은 것입니다.
“믿음으로”와 “믿음에”를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구속”과 “구원”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어두운(육)가운데서는 구별 할 수 없고 오직 빛(영)가운데서만 구별 할 수 있습니다.
구속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죄 사함이고, 구원은 그 사랑이 사람 안에서 그 아들의 죽음과 합하여 이루어지는 사랑의 실체입니다.
그럼으로 구속은 얻은 것이고 구원은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있고 이 사랑이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실체가 없으면 구속은 있으나 구원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구속만 알고 구원을 몰라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구속은 하나님의 사랑이요 구원은 그 사랑이 사람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고 주께서 그의 사도로 권면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속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 이루셨고, 이제는 다만 사람의 마음 안에서 구원 곧 그의 사랑이 이루어 져야 하나님의 일은 끝이 나고 영원한 안식이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갈 4:19)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 곧 “믿음에”입니다.
일만 달란트만 탕감 받고 일백 데나리온을 탕감하지 않으면 자기는『....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엡 1:7) 의 일만 달란트의 탕감을 받고도 자기에게 빚진 모든 사람의 죄 곧 일백 데나리온은 탕감하지 않는 참으로 악한 자입니다.
그러므로 일만 달란트는 “구속 곧 죄 사함”이요 일백 데나리온은 “사랑 곧 구원”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로『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말씀하셨고, 또 주께서 친히『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계명은 곧 사랑입니다.
계명은 아는 것이 아니고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 믿는 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랑(새 계명) 안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 안에 거합니다.
그러므로 구속만 받고 구원은 없이 다 된 줄 알고 사랑 없는 방종만 떠는 무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는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거저 받고 남에게는 거저 주지 않는 새 계명에서 떠나있는 자들입니다.
이는 복음 안에 있으면서도 복음을 복종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살후 1:8) 라고 증거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하신 “지식의 믿음” 곧 일만 달란트의 “복음”만 알고 바로 이어 붙은『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라 하신 “마음의 믿음” 곧 성도에게 주신“영원한 복음”은 몰라서 마음의 쉼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알고 “믿음에”는 못 들어갑니다.
이는 주께서 친히 예언하신『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 22:14) 함과 같은 것입니다.
이제 “믿음에” 이른 우리는 그의 안식 곧 그의 사랑 안에 들어갑니다.
이는 구속으로 구원에, 믿음으로 믿음에,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랑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우리 주 예수로 말미암아 성령을 좇아 아버지의 집에 부르심을 입은 모든 거룩한 형제들이 다 함께 이제 여기에 있습니다.
오! 주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듣고 믿는 구속, 곧“지식의 믿음”과 그 사랑을 영접하여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구원, 곧 “마음의 믿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둘이 아니요 하나입니다.
길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시작은 하나님에게서부터 이고 끝은 사람에게까지 입니다.
그러므로 새 계명은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에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는 시작이시고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끝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는 시작이고 “믿음에”는 끝입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계 22:13) 아멘.
시작은 있어도 끝이 없으면 심는 봄은 있어도 거두는 가을은 없어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울 나무가 됩니다.
다시 사신 그리스도가 내게 다시 사시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는『....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 1:21) 는 구원의 실상이 있습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마 18:33)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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