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구약

열왕기상5 - 왕상 17~18장(엘리야의 승리)

JORC구원열차 2009. 6. 30. 00:27

5. 열왕기상 17-18장 / 엘리야의 승리

 

민족이 죄와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어 민족이 참된 신앙으로 돌아오도록 초청하셨다. 선지자란 “예언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는 또한 “정면에서 말하는” 사람인 것이며,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고 백성들의 죄를 폭로하였다. 디셉 사람 엘리야가 이와 같은 선지자였는데 그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약 5:17). 그러나 큰 용기와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두 장에서는 여호와께로부터 온 두 가지 명령, 즉 “가서 숨으라! 가서 보이라”는 말씀에 순종하는 엘리야를 보게 된다.

 

1. 사적인 사역-“가서 숨으라” (왕상 17장)

 

누가복음 4장 25절은 가뭄이 삼 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열왕기상 18장 1절에서 우리는 “3년째에” 갈멜산의 대결이 발생했음을 발견한다. 따라서 가뭄은 엘리야가 갑자기 아합의 궁정에 나타나 “가뭄이 3년간 계속될 것이라”고 선포하기 6개월 전에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비가 없다는 것은 백성의 죄에 대한 형벌이었다(신 11:13-17/대하 7:12-15).

 

아합과 그의 사악한 이방인 아내 이세벨은 그 백성을 바알 숭배로 이끌어 갔는데 이 종교는 우리가 가히 설명할 수 없는 부도덕한 것이었다. 3년 간의 가뭄이 지속된 것은 엘리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었다(약 5:17). 그는 메시지를 전달하고는 그의 공식적인 사역에서 3년 간 은퇴했었다. 이 기간 동안에 여호와께서는 은혜롭게 그를 돌보셨다. 순종하는 종은 자기 주인의 신실한 돌보심에 언제나 의지할 수 있다. 엘리야가 경험했던 세 가지 훈련을 살펴보자.

 

1) 마른 시내(2-7절)-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정확히 어디로 가라는 것과, 무엇을 하라는 것까지 말씀하셨다(잠 3:5-6/시 37:3-6 참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대한 엘리야의 사역을 철회하신 사실은 그들의 죄에 대한 또 다른 심판이었다(시 74:7-9). 여호와는 엘리야에게 시냇물을 마시도록 허락하셨고 매일 먹을 떡과 고기를 공급하셨는데 이것들을 엘리아에게 전해 준 것은 까마귀였다.

 

까마귀는 성경에서 첫번째로 그 이름이 나오는 새이다(창 8:7). 이 새는 부정한 새였으나 놀라운 목적으로 이 새를 사용하셨다. 엘리야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떡과 물과 고기를 즐기는 동안 100명의 선지자들은 동굴에 숨어서(18:4) 떡과 물만으로 지내야 했다. 그런데 시내물이 마르는 날이 왔다. 이것은 엘리야가 죄를 범했다는 뜻인가, 아니면 그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위하여 다른 장소를 예비하셨다는 뜻이었으며, 이것은 엘리야가 여호와를 신뢰하였고 시냇물을 신뢰한 것이 아님을 상기시킨다.

 

2) 텅빈 통(8-16절)-

하나님의 말씀은 시련의 때에 하나님의 종을 인도한다. 그러나 “이방인의 땅으로 가라 과부가 너를 먹일 것이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명령인가(눅 4:22-26)! “사르밧”이란 “정련”이란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종을 용광로에 넣고 연단하고 계심이 분명하다. 엘리야가 과부의 가난함을 알고 기분이 어떠했을지 상상해보라. 그녀는 마지막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이 잘못된 일은 결코 없다. 과부가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첫자리에 두었을 때 하나님은 그녀와 아들과 손님에게 공급해 주셨다.

 

14절에서 엘리야가 이방 여인 앞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높였음을 주목하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을 그분께 드리는 일이다. 남은 일은 하나님께서 돌보실 것이다. 주님은 몇 개의 보리떡과 물고기로 오천 명을 먹이시지 않으셨는가!

 

3) 죽은 소년(17-24절)-

마른 시냇물은 엘리야의 시련이었고 죽은 아이는 과부의 시련이었다. 큰 축복 다음에는 대개 큰 시험이 오기 마련이다. 그 과부의 믿음이 18절이 시사하듯이 실패해야 했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시편 119편 75절과 사무엘상 3장 18절을 보고 실망과 시련 중에서 취할 올바른 대처 방법을 알아보자. “그 소년을 내게 달라”는 것이 엘리야의 대답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서 죽은 소년에게 다시 생명을 주실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첫번째 부활의 사건이다. 선지자는 시체를 그의 개인용 객실(지붕 위에 있는 다락)로 데리고 가 그 소년의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가 그 아이의 죽은 몸 위에 자기의 몸을 대고 뻗쳐있을 만큼 그 소년을 위하여 고민하였음을 눈여겨 보자!

 

“죽은 자를 영적으로 살리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따라야 할 본보기이다. 기적은 여인으로 하여금 믿음의 간증을 하게 했다. 그녀가 말씀을 전혀 믿지 않았던 것은 참으로 나쁜 일이다.

 

2. 공적인 사역-“가서 너를 보이라” (왕상 18장)

 

개인적으로 훈련을 받고 시험을 거친 다음에 이제는 공적인 일을 위해서도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에게 사악한 아합왕과 대면하라고 명령하신다(18:1). 우리는 한 번의 설교를 위하여 3년을 기다린 엘리야의 인내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1) 엘리야와 오바댜(1-16절)-

오바댜는 타협적인 그리스도인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의 생애는 엘리야의 생애와는 직접적인 대조를 이룬다. 엘리야는 주님을 공개적으로 섬기며 두려움이 없는 반면에 오바댜는 아합을 섬기며(7-8절), 여호와를 은밀히 섬기려 한다(3-4절). 엘리야는 “영문 밖”에 있었으며(히 13:13) 오바댜는 궁정 안에 있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으나 오바댜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나라를 구하기 위하여 애쓰고 있는 동안에 오바댜는 말들과 노새를 구하기 위하여 풀을 찾고 있었다. 엘리야가 오바댜를 대면하자 깜짝 놀란 종은 선지자를 신뢰하려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엘리야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그가 은밀하게 행했던 헌신적인 일들에 대해 “자랑”해야만 했다(13절). 오늘날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엘리야가 아닌 오바댜의 길을 걷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2) 엘리야와 바알(17-29절)-

선지자는 아합왕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왕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 또한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악한 사람은 언제나 세상에 생기는 문제거리들을 신자들의 탓으로 돌린다. 그들 자신의 죄 탓으로 돌리는 일은 결코 없다. 경쟁은 엘리야와 아합 사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 있었다. 이 민족은 두 길 사이에서 절름거리며 흔들리고 있었으나, 이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온 것이다(출 32:26/수 24:15/마 12:30). 그들의 죄에 직면하여서도 백성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21절).

 

엘리야는 참 하나님이 불로써 응답하시리라는 불가능한 상황을 요구하였다. 물론 그는 하나님께서 “불로 응답하시는 일”이 과거에 가끔 있었던 일임을 알고 있었다(레 9:24/대상 21:26). 하나님의 종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신뢰할 때 그는 두려움이나 실패를 느끼지 않았다. 물론 바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응답할 리가 없었다. 사단은 백성들을 속이기 위하여 불을 보낼 수도 있었다(욥 1:16/계 13:13).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을 허락지 않으셨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를 조롱하였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시 2:4). 이교도들은 거짓 하나님이 응답해 주기를 바라서 어느 정도의 극단에까지 이르고 있는지 깜짝 놀랄 일이다(시 115편 참조). 저녁 제사를 행할 즈음(오후 3시)에는 바알이 거짓 신임이 모두에게 분명해졌다.

 

3) 엘리야와 이스라엘(30-46절)-

바알을 섬기는 것이 어리석은 일이며 죄임을 폭로하는 것은 엘리야가 그 날 해야 할 임무의 반이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일은 민족이 여호와를 예배하도록 되돌리는 일이었다. 엘리야가 백성들을 개혁하기 위해서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는 그들을 다시 살리기를 원했다. 우선 그는 백성들이 무너뜨려지도록 버려두었던 제단을 수리하였다. 이것은 축복을 받기 위한 첫단계이다. 개인적인 헌신의 제단을 수리하며, 가족제단, 희생의 제단, 하나님과의 교제의 제단을 보수하라. 열 두 개의 돌을 사용함으로써 엘리야는 그들이 한 마음으로 단합하였음을 백성들에게 상기시켰다. 왜냐하면 여러 해 동안 이 민족은 죄로 말미암아 분열되어 있었다.

 

사람이 불을 붙이기에 불가능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엘리야는 나무와 희생제물에 네 통의 물을 세 번씩이나 부었다. 이것은 물 열두 통을 뜻한다. 선지자는 믿음으로 간단한 기도를 드렸으며, 하나님의 불은 나무와 희생제물과, 물과 제단까지 모두 태웠다. 그러나 엘리야는 여전히 할 일이 있었다. 먼저 거짓 선지자들이 죽임을 당해야 했다(19절/ 그들 중 850명/ 신 13:1-5 참조).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39절)라는 지식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우리는 악을 미워해야 하며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제거해야만 한다. 심판은 언제나 축복을 위한 길을 준비한다.

 

그리고는 선지자가 왕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길에 있을 때에 비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왕이 출발하여 길을 갈 때에 엘리야는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3년 반 전에 그는 가뭄을 위하여 기도했었다(약 5:17). 그는 깨어 기도하는 법을 알고 있었으며(골 4:2) 또한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시기까지 기도로 버티는 법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죄가 심판을 받기 전에는 축복의 소나기를 보내지 않으실 것이다. 오래지 않아 하늘에 검은 구름이 덮이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며 비가 왔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초인적인 힘을 주셔서 왕의 마차보다 앞서 달리게 하셨으므로 그와 마차는 이스르엘까지 경주해 갔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일한다는 것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공적으로 행하시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의 감추어진 생활은 우리의 공적인 생활을 위하여 준비시키는 것이다. 마른 시내의 훈련, 텅빈 통, 죽은 소년의 훈련들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갈멜산의 승리를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사 4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