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구약

시편6 - 시 32, 51편(고백시)

JORC구원열차 2009. 7. 3. 14:35

6. 시편 32, 51편 / 고백시

 

이 시들의 배경은 사무엘하 11-12장에 나온다. 이 시들은 주의깊게 읽혀져야 한다. 다윗은 자기 이웃의 아내에게 육욕을 품고 간음을 하였으며, 그 남편을 술 취하게 하였고 살해하였으며, 최소한 일 년 동안 이 모든 일을 숨기고 있었다. 그가 이 죄를 범할 때는 젊은이가 아니었으며 성숙한 사람으로서, 광대한 왕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시편 51편은 다윗의 고백시이며 시편 32편은 용서의 노래이다. 요한일서 1장 5절-2장 2절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정결함을 받을 대책을 알려 준다.

 

1. 다윗의 고백 기도 (시 51편)

 

이 기도는 매우 개인적인 기도이다. “나”라는 말과 “나의 죄”라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에 유의하자. 그의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과 주님을 보고 있다.

 

1) 죄를 범한 댓가-

육욕에 빠져 간음을 저지른 것은 순간적인 행위인 것 같다. 그러나 다윗이 치러야만 하는 댓가는 얼마나 엄청난 것이었던가! 시편 32편 3-4절에서 다윗이 죄에 대해 육체적으로 값을 치루어 병이 든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영적인 댓가 역시 컸다. 마음의 순전함을 잃었으며(1-2절), 따라서 씻음을 받고 정결해질 필요가 있었다(7절).

 

여기서 죄에 대하여 쓰여진 단어들을 눈여겨 보자. “죄과”란 반역하는 행위나, 하나님이 그어 놓으신 선을 지나치는 것을 의미하며 “죄악”은 내적으로 굽어있음을 뜻한다. “죄”는 목표에서 빗나가는 것, 하나님의 표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뜻한다. 17절은 다윗의 마음이 더러워졌을 뿐 아니라 굳어졌음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의 마음에 죄를 품고 있으면 마음이 굳어진다. 다윗의 눈 또한 병들었고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죄뿐이었다(3절).

 

더러운 양심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을까를 궁금해 하며 방어적인 사람이 된다. 죄는 또한 귀에도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그는 기쁨과 즐거움의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8절).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벗어난 사람에게는 아무 것도 유익한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다윗의 입술도 병이 났다. 더 이상 간증을 하거나 전도를 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을 찬양할 수도 없었다(13-15절).

 

고백하지 않은 죄만큼 그리스도인의 입을 막는 것은 없다. 다윗의 정신이 병들었다. 그는 지혜를 구해야했다(6절). 속 사람(마음과 영/ 10절)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벗어나게 됨으로써(11절) 기쁨이 없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성령을 가져가시는 것은 아니다(요 14:16 참조).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근심케 하며 이에 따라 그와의 교제와 축복을 잃게 된다(엡 4:30-32). 우리는 죄를 범한데 대한 높은 댓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죄를 고백한 댓가-

죄를 진지하게 고백하는 일에는 회개가 내포되어 있으며, 마음의 진지한 변화를 말한다. 다윗이 죄를 감추고 있는 동안 그는 어떤 일을 모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단이 다윗의 죄를 가지고 대면하자 다윗의 마음은 찔림을 받았고 회개하였다.

 

죄를 시인하는 것과 죄를 고백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고백이란 “사실대로 말하는 것”이다(요일 1:9).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우리의 죄에 대하여 똑같이 말한다면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은 죄 가운데서 태어난 자신의 죄악된 본성을 시인하는 자리에 이르렀다(5절).

 

오늘날에는 값싼 고백이 너무도 많다. 입술로만 “주여, 나는 죄를 범하였나이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은 고백이 아니다. 참된 고백은 상한 심령과 깊이 뉘우치는 마음(17절) 등의 값을 치루게 된다. 이 말은 우리가 고행을 행하여 용서를 얻는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마음이 심히 상하여 하나님께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것을 뜻한다.

 

3) 정결케 하는 죄의 댓가-

선한 행위가 죄를 씻어주지 않는다. 종교적인 행위나 희생제사도 죄를 씻지는 못한다(16-17절).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죄를 씻어 낼 수있다(히 10:1-18/요일 1:7-2:2 참조). 용서란 값싼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댓가를 치루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이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며, 우리의 기도나 눈물로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씻어 내시고 완전히 깨끗하게 하시기를 즐겨하신다(1, 9절/ 사 43:25). 죄를 씻기 위하여 지불한 높은 댓가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미워하게 하며 죄에서 돌이키도록 경고한다.

 

2. 하나님의 정결케 하심에 대한 다윗의 찬양 (시 32편)

 

처음의 두 구절은 바울이 로마서 4장 7-8절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 구절들을 꼭 읽어 보라. “오, 그 반역이 용서를 받고, 가리워짐을 받는 자의 복됨이여!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그의 영혼에는 속임수가 없다고 간주되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도다!” 다윗은 이 모든 죄를 범했다. 그는 율법에 반역하여 불법을 행하고 하나님의 의로운 표준에 접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신의 비뚤어진 본성이 자신을 지배하도록 하였으며, 이 모두 일들을 일 년 동안 덮어 두어 속였다. 잠언 28장 13절을 읽고 다윗의 경우에 적용해 보라.

 

1) 뉘우침에 대한 침묵(3-4절)-

다윗이 자기의 죄를 시인하지 않고 고백하기를 거절하였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 고난을 당하였다. 다윗은 51편에서 볼 수 있듯이 영적으로 고난을 받았으며 육체적으로도 고난을 당하였다. 그는 늙은 사람처럼 되었다. 죄를 깨우치시는 하나님의 손이 밤낮 그를 무겁게 눌렀다. 그는 가물 때의 시내처럼 “말라 붙었다.” 자신의 증세를 보이려고 의사에게 가는 사람들 중에는 사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보여야 할 사람들이 많다. 이 말은 모든 병이 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고백하지 않은 죄가 질병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고전 11:23-32 참조).

 

2) 고백의 흐느낌(5절)-

문자 그대로 말하면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기 시작하리라“가 된다. 다윗은 나단이 그에게 말했을 때 즉시로 죄를 고백하였다(삼하 12:13 참조). 그 때 그는 자신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자기의 죄를 하나씩 벗겨내도록 허락하였다. 다윗의 기도는 “일반적인 기도”가 아니었다. 그는 죄를 특별하게 고백하였다. 그가 고백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용서하셨다. 한 나이 많은 작가는 이런 말을 하였다. “당신이 자신을 조금 사용할수록 하나님은 당신을 더 많이 사용하실 수 있으시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고전 11:31 참조)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미안한 생각을 한다거나 또는 우리가 기도한다 해서 용서하시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시므로, 그의 약속에 대해 신실하시고 십자가에서와 같이 의로우시므로 우리의 죄를 고백할 때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미 대신하여 지불하신 죄들에 대하여는 우리에게 죄값을 치르게 하시지 않으신다(롬 8:31-39 참조).

 

3) 죄씻음의 노래(6-7절)-

다윗의 탄식은 노래로 대치되었다. 그는 “구원의 노래들”에 둘러 싸여 있어서 어디를 보아서도 노래할 만한 이유들을 찾아내었다. 전에는 어디를 보아도 자기의 죄가 보였었다(51:3). 다윗은 우리가 찾을 만한 때에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죄를 발견하였을 때, 그리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 만한 때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사 55:6-7 참조). 만일 우리가 죄를 그대로 버려둔다면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징계하실 수밖에 없다(히 12장 참조). 다윗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그의 피난처이시기 때문이다. 문제가 닥치려면 닥치게 하자. 그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한 두려울 것이 없다.

 

4) 확신의 외침(8-11절)-

하나님은 이제 다윗에게 말씀하고 계시며 그의 길을 인도하시겠다고 확신시키신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며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도다”(시 23:3). 하나님은 무거운 막대기가 아니라 그의 눈으로 우리를 안내하시기를 원하신다. 순종하는 자녀는 아버지의 얼굴, 특히 그의 눈을 지켜보며 그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본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버지하나님의 시야에 계속 머물러 있어야 하며 그를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아야 한다.

 

9절에서 다윗은 두 가지 극단적인 예로서, 충동적으로 앞으로 내달리는 말과 고집스럽게 다리를 버티고 있는 노새를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들 중의 어느 하나도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사랑에 찬 순종으로 한 번에 한 걸음씩 주님과 함께 행해야 한다. 말과 노새들은 채찍과 굴레로 조절을 당해야 하고 그렇지 않고서는 가까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슬프게도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조절할 수 있기 전에 “채찍과 굴레”를 써야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시는 정상적인 방법은 우리를 향한 그의 눈으로 인도하시는 것이다. 말 못하는 동물들은 이해력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엡 5:15-17 참조).

 

그리스도인이 회복된 후에는 사단은 그의 평화와 확신을 해치려고 노력한다. 신자들은 과거의 죄들과 그 무서운 결과들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한다. 그렇다. 불순종에는 씁쓸한 열매들이 있다. 다윗은 어떻게 이들을 발견하였던가! 그러나 10-11절에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들을 보호하시고 붙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주신다. 사악한 사람들에게는 많은 슬픔이 있고, 슬픔은 불순종하는 성도들에게 있다. 그러나 깨끗하게 된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인애와 자비를 경험한다. 다윗이 큰 소리를 외치면서 끝을 맺고 있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과거는 용서를 받았으며 현재는 즐겁다. 그리고 미래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