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고린도전서 10장 / 조심해야 할 점에 대한 경고
이 장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에 대해 다루는 부분을 끝낸다. 바울은 그리스도와(8절) 자기 자신을 본보기로 인용하면서(9절), 이스라엘의 과거 역사를 지적한다. 바울은 아마도 자기들에게는 지혜가 있으므로 유혹이나 죄에 대해서는 삼가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만큼 지나친 자신감에 차 있는 고린도 교회 회중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12절에는 그들에 대한 경고가 나오며, 15절에서는 그들을 “지혜로운 사람들”이라고 부르면서 “경건한 풍자”를 사용한다. 신자는 먹고 마실 자유가 있으나 최소한 이교의 우상숭배에 관련된 세 가지 위험은 조심해야 한다.
1. 죄에 빠질 위험(10:1-13)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은 유혹과 죄에 대한 예증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사용한다. 물론 구약의 이스라엘이 신약의 교회와는 다르지만(고전 10:32) 몇몇 유사한 점이 있다.
1) 이스라엘은 영적인 이점을 소유하고 있었다(1-4절)-
바울은 그들이 바다를 건너고 구름 아래로 행한 사실을 신자들이 경험한 세례(침례)와 비교한다. 그리스도인의 세례(침례)가 신자와 그리스도를 동일시하는 것이듯, 이스라엘의 “세례(침례)”는 그들을 모세와 동일시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과 죄로 부터 구원을 받은 것처럼, 이스라엘은 어린 양의 피로써 애굽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바다를 열어 이스라엘을 지나가게 하심으로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분리하셨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인을 세상과 육신의 굴레에서 분리시켰다. 유대인들은 만나를 먹었으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때에 생명의 떡이신 그리스도를 먹는다. 그들은 초자연적으로 공급된 물을 마셨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구원의 생수(요 4:10-14)와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물(요 7:37-39)을 마신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이란 구절에 난처해 하며, 문자 그대로 바위가 유대인들을 따라 광야를 굴러 온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두 가지 설명이 가능하다. 첫째는 그들을 따른 신령한 바위, 곧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백성들과 함께 여행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해결하셨다고 보는 것이며, 둘째로는, “그들”(them)이란 단어는 원문에는 없는 말이며, 따라서 바울은 단순히 “그들은... 다음으로 신령한 바위로 말미암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반석은 시간적으로 볼 때, 만나를 먹은 후에 대두된 것이므로, 먼저 떡을 먹고 다음으로 물이 나왔다는 뜻이다.
2) 이스라엘은 죄 때문에 망하였다(5-10절)-
하나님은 “그들을 기뻐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9장 27절의 “버림을 받았다”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그들은 인준을 받지 못하였으며, 죄로 말미암아 생명을 잃었다. 그들은 탐심을 가졌고(민 11:34), 우상을 숭배했으며(출 32:1-14), 음행을 자행하였다(민 25:1-9).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여 고의적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였고(민 21:4-9), 불평하였다(민 16:41-50). 참으로 지독한 죄의 항목들이다. 그들이 경이적으로 애굽에서 구원되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심판하셔야만 했다.
영적인 특권이란 죄를 지어도 된다는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특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고 영광을 돌려야 할 보다 큰 책임을 우리에게 부여한다(8절에 유의하자. 바울은 23,000명이 죽임을 당했다고 말하는데 민 25:9 에는 24,000명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은 하루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를 말한 것이고 모세는 전체 죽은 사람을 기록하고 있다. 더러는 나중에 죽은 것이 분명하다).
3) 이스라엘은 오늘날 우리에게 경고가 되고 있다(11-13절)-
구약에서나 신약에서나 어느 편이든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지을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12절에서 지나친 자신감을 경고하고 있으며, 다음으로 13절에서는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있다.
2. 귀신과 교제할 위험 (고전 10:14-22)
바울은 우상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지만(8:4-6), 사단이 사람들을 곁길로 인도하는 데에 우상을 사용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예증하기 위하여 주의 만찬을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미신이 아니다. 왜냐하면 신명기 32장 17, 21절에서 귀신들도 우상들을 통하여 숭배를 받을 수 있음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가 떡과 잔을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교제(친교)를 가지듯, 그리고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막 제단의 제물로 잔치를 베풂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했듯이, 이교도들은 우상 숭배의 향연을 통하여 귀신과 교제한다.
바울은 여기서 “사단 친교 제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단은 가짜교회와 가짜 복음을 가지고 있듯이 또한 가짜 친교 예배를 가지고 있다. 현대의 인류학자들은 이교 숭배와 그들의 우상에 찬탄할지 모르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전 제도가 마귀에게 속해 있으며, 실제로는 “귀신 숭배”라고 말씀하신다. 우상이 있는 곳에는 귀신들이 있다.
물론, 바울이 말하는 바는 떡을 먹고 잔을 마시는 것이 실제로, 그리고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에게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떡과 잔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Doctrin of Transubstantiation)이다.
성경에서 이러한 교리를 가르친 곳은 어디에도 없다. 바울은 연합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교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루는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고, 다음 날은 귀신의 식탁에 참여한다는 것은 모순된 일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귀신의 종교에 개입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만 한다. 기독교에서 용인하는 모든 것이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 종교의 예식에 마지못해 참여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상 귀신들과 친교를 나누고 있는 것이다.
3. 동료 그리스도인을 타락시킬 위험 (고전 10:23-33)
바울은 그의 토론을 끝마침에 있어서 8장에서 펼친 원리를 다시 반복한다. 형제의 양심을 약하게 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일들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유로우며 모든 일들이 합법적이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덕을 세우는(유익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감히 주님의 일을 파괴하는 데에 우리의 특권들을 사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몇 가지 매우 실제적인 규칙으로 끝을 맺고 있다.
1)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도록 살라(23-24절)-
이것은 9장에 나오는 교훈을 요약한 것이다.
2) 지나치게 “까다롭게” 굴지 말라(25-27절)-
수많은 의문을 제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보잘 것 없는 간증이 될 것이며, 구원받은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다. 물어볼 것 없이 고기 시장(푸줏간 또는 도살장)에서 고기를 사라. 모든 음식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며, 우리에게 유익하다. 그리고, 사단은 고기를 가지고 우리를 해칠 수가 없다(8:8).
구원받지 않은 친구의 집에서 베푸는 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면 질문을 하지 말라. 그러나, 만일 거기 있는 그리스도인이 그 고기가 이교도의 제단에서 온 것이라고 말하면, 그리고 그 그리스도인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이 된다면 그 고기를 먹지 말라. 연약한 형제들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는 배고픈 편이 훨씬 낫다.
3)비록 희생이 요구된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라(29-31절)-
바울은 29-30절에서 하나의 논란을 예상한다. “왜 나의 강한 양심이형제의 연약한 양심으로 판단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고, 내가 하나님께 감사한 고기가 무슨 손상을 끼친단 말인가?”
해답은 이러하다.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이거나 간에, 먹거나 마시거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하며, 우리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함이어서는 안 된다. 인간적으로 말할 때는 강한 그리스도인이 연약한 그리스도인에게 숙여야 하는 것은 잘못되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이다. 연약한 그리스도인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은 교회를 욕되게 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4) 영혼을 구원하며 살라(32-33절)-
사람들을 분류하기에는 단지 세 가지의 그룹이 있는데, 곧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고 교회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주님께로 인도할 것을 기대하신다. 그리스도인이 구령자로서 살아간다면 이러한 사소한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무익한 그리스도인, 즉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세상으로 멀리 나아가려고 안달을 한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고 영혼을 구원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첫번째에 두어야 할 것을 첫째로 두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영화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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