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고린도 전서12 - 고전 12~14장 부가적 연구

JORC구원열차 2009. 7. 20. 16:24

12. 고린도전서 12-14장 / 부가적 연구

 

이 부분에서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성경은 무엇을 말하는가?”라는 문제에 부딪칠 때에 보이는 방언과 성령에 관한 주장을 검토해 보려 한다.

 

1) “구원을 받은 후에 성령의 세례(침례)가 있다.”

어떤 이들은 사도행전 1장과 누가복음 1장 49절을 근거로 내세워, 기도와 금식을 통하여 “능력받기를 기다리는 것”이 필수적인 일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2장 13절은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성령의 세례(침례)를 받았다고 가르친다. 이 점은 육적인 고린도인들에게 조차도 사실이다. 회심 이후에 성령의 충만함이 있는데,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으나(엡 5:18), 이것은 성령의 세례(침례)를 받으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디 성경연구원의 전 교장이었던 토레이(R. A. Torray)박사는 임종에 앞서서, 그의 가르침과 저서에서 “세례(침례)”와 “충만함”이라는 용어를 혼용했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세례(침례)는 회심 때의 단 한 번이며, 자신을 매일 하나님께 양도할 때에 충만함은 많이 경험한다.

 

2) “이 세례(침례)를 받은 증거는 방언을 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대부분의 고린도 교인들은 그 세례(침례)를 경험하지 못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방언을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12:10/12:30), 12장 13절은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침례)를 받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만일 오순절주의자들의 논리가 맞다면 그들 모두는 방언을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니다. 세례(침례)요한은 태어나기 전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으나 방언을 말하지 않았고, 시대를 통해 내려오며 위대한 성도들도 방언을 말하지 않았다.

 

3) “방언의 은사는 영성에 대한 표시이다.”

고린도 교회는 전혀 영성이 없었다. 이 교회는 바울이 다룬 교회들 중에서 가장 육신적인 교회였으며,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였다(3:1-4). 방언은 심원한 영적인 삶의 표시가 되는 대신, 개별적인 그리스도인에게나 교회 전체에는 극히 가치가 적은 열등한 은사이다.

 

영적인 은사를 받고도 영적인 은혜를 받지 못하는 일은 가능하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이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은 은사들을 보유하는가에 있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이끌었는가 하는 것이다. 방언은 미성숙의 표시이며 열등한 은사이다.

 

4) “방언은 오늘날의 교회를 위한 것이다.”

몇몇 은사들이 임시적인 것이라는 증거는 많다. 예언, 방언, 지식(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진리를 전함)의 은사는 신약 성경이 완성됨에 따라 지나갔다. 고린도전서 13장 8-13절은 이러한 은사들이 지나갈 것이며,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한다. 그것들은 교회의 “어린 시절”에 소속된 것이었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생명과 사역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도행전 20장 17-38절을 읽고 이상적인 신약 사역의 모습을 찾아보라. 방언에 대한 말이라고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5) “신자는 방언하는 것에서 개인적인 유익을 얻는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들은 단 한 명의 성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주어진다(12:7). 이 장들에서는 어떤 은사가 신자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하여 허락된다는 암시는 나오지 않는다. 사실상, 14장 13-15절에서 바울은 방언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라고 명백히 언급한다.

 

만일 통역이 있다면 신자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고, 또 그래야만 영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축복도 없다. 방언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고린도전서 12-14장의 편지와 정신에 위배되는 것이다.

 

6) “방언의 은사는 신자들을 서로 결속시킨다.”

순복음 사업기관, 오순절 운동은 방언에 대한 가르침을 온 교파에 스며들게 하고 있다. 그들의 잡지에 많은 교파들의 목회자와 평신도들의 간증을 싣고 있으며, 이 간증들은 “성령의 세례(침례)”를 통해서 놀라운 축복들을 얻었다고 말한다. 그들을 규합시키는 표어들 중의 하나는 “성령의 세례(침례)가 신자들을 단합시킨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복음주의적인 그리스도인들(Evangelical Christians) 사이에 일어나는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인 것이다. 그들은 “당신은 근본적인 신앙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성령의 세례(침례)는 모두를 위한 것이며, 방언의 은사도 마찬가지이다”라고 추종자들에게 말한다.

 

하지만, 이른바 “성령의 세례”(침례)가 고린도에서 신자들을 단합시켰던가? 교회는 네 방향으로 분열되었다(고전 1:10-13). 그 곳 신자들 모두가 성령의 세례(침례)를 경험하였다!(12:13) 교회에 불협화음과 분열과 논쟁이 있었으며, 또한 방언의 은사도 있었다. 우리가 경험한 바로는, 방언은 교회를 단합시키기는커녕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것이었다. “방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데, 거기서부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7) “성령의 세례(침례)를 경험하는 한, 그 용어가 어떻든 아무 차이가 없다.”

이것은 사단의 그럴 듯한 거짓말이다. 성경의 단어들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며, 우리는 이 말에 순종해야 한다(고전 2:9-16). 성령의 세례(침례)와 성령의 충만함을 혼동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하게 이들을 분리시키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에 입각하여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기초로 삼아야하며,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경의 단어들과 용어들을 이해한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바울이 “무지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였는지 살펴보라. 14장 20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깨닫는 데에 어린 아이가 되지 말라”고 권면한다. 사단과 그의 마귀의 세력들이 얄팍한 그리스도인들을 삼키기 위하여 “영적인 경험”을 흉내 낼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곳에서는 활동할 수가 없다.

 

현대 방언 운동에 휘말리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 운동이 교파의 경계를 넘어 휩쓸고 있으나, 교회에 덕을 세우거나 성도들을 연합시키지는 못한다. 어떤 데에서는 성공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될 때에는 영적인 활동을 지속할 수가 없다.

 

우리는 근자에 이르러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하여 새롭게 강조되고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러나, 우리의 교리가 우리의 삶을 시험하는 것이지 우리의 삶이 우리의 교리를 시험하는 것이 아님을 확신해야 하겠다. 우리가 성령과 그 능력을 아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이며, 성경과 모순된 정서적인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