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그리스도의 십자가

5-2. 율법을 만족시킴

JORC구원열차 2009. 11. 9. 20:29

5-2. 율법을 만족시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을 ‘만족시켜야’ 할 도덕적 필연성을 설명하는 또 다른 방식은, 율법을 높이 드는 것이다. 죄는 ‘불법’이요(요일 3:4),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는 것이다. 법을 어겼을 때는 반드시 형벌이 뒤따르게 된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들이 어긴 법에 대한 형벌을 박데 되는 것이다. 죄인은 간과될 수 없다. 율법은 존중되어야 하고, 그 존엄서이 지켜져야 하며, 율법의 정당한 형벌은 시행되어야 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율법은 ‘만족되는’ 것이다.

 

이 진리의 대중적인 예화가 바로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다리오 왕의 이야기이다(6장). 그는 백이십 명의 방백을 세워서 바벨론을 통치하게 하였고, 그들 위에 총리 셋을 두었는데, 이 통리들 중 하나가 바로 다니엘이었다. 나아가서, 다니엘의 뛰어난 자질과 탁월한 봉사 때문에 왕은 다니엘을 동료들보다도 더욱 높은 자리에 앉힐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다니엘의 동료들은 그를 시기하게 되었고, 즉시 다니엘을 실추시키기 위한 계교를 꾸미게 되었다. 마치 매처럼 다니엘을 감시하면서 그들은 다니엘의 행동에서 공적인 활동에 부합되지 않거나 비효율적인 것을 발견해서 탄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4). 그래서 그들은 이제 다니엘의 사생활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다니엘의 정규적인 신앙생활고 관련된 기술적인 흠을 잠음으로써 그의 유죄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왕을 설득해서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 넣기로 한’ 율법을 세우며 한 금령을 정하게 한 것이다(7절). 믿을 수 없을 만큼 어리석게도 왕은 그들의 덫에 걸리고 말았다. 조서에 어인을 찍음으로써 그는 ‘메대와 바사의 변개치 아니하는 규례를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칠 수도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8-9절).

 

이 법령이 포고되었다는 사실이 다니엘의 귀에도 들어갔지만, 이것이 그의 일상적인 일을 바꾸게 하지는 못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에 열려 있는 위층의 방에서 무릎을 꿇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은 그의 습관이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인하여 심피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내려고 힘을 다하여 해가 질 때까지 이르매”(14절).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일으킨 법적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해결책도 발견할 수 없었다. 방백들과 총리들은 그에게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의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변개하지 못할 것’임을 상기시켰다(15절). 그래서 다리오는 마지못해 그 법에 따라,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으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법이 승리하였다.

 

다리오는 다니엘을 존중했으며, 그를 구할 길을 찾기 위하여 오랫동안 애를 썼다. 하지만 법은 제 길을 가야하며, 짓밟혀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도 죄인을 사랑하시며, 우리를 구원하기를 간절히 원하시지만, 정당하게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그렇게 하실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연고로, 율법의 형벌이 시행되며, 그 신성함이 모장되는 십자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음에 복종하신 것은, 도덕법에 대한 그분의 순종과 마찬가지로 ‘능동적인’(자발적이고 확고한) 것이었다. 성부의 뜻에 대한 예수님의 순종은 그분의 행동이나 사역 그리고 사는 것이나 죽는 것에 있어서까지도 오직 한 가지로 동일한 것이었다. 그분이 율법의 요구를 성취하신 것과, 율법의 정죄를 담당하신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유익을 준다. 율법에 대한 이런 두기지 순종은 십자가의 효력에 필수적이다.

 

하나님의 도덕법에 대한 불순종이 정죄를 가져다주는 참된 이유는, 하나님이 그 법에 구속되는 까닭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법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데일이 말하듯이 율법에 대한 하나님의 관계는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일체(identity)의 관계다....하나님 안에서 율법은 살아 있다(alive). 율법은 그분의 보좌에 앉아서, 그분의 홀을 휘두르며, 그분의 영광으로 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 자신의 도덕적 됨됨이의 표현이며, 그분의 도덕적 됨됨이는 언제나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나다니엘 디목크(Nathaniel Dimock)는 이 진리를 잘 파악하고 있다.

 

율법의 요구와, 율법의 엄혹성과, 율법의 정죄와, 율법의 죽음과, 율법의 저주...이 모든 것 속에는 하나님의 부분적 완전성을 반영하지 않는 것이 없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은 무엇이든지 율법에게로 돌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기인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