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자기희생적 사랑
우리 죄를 거부하는 자기부인이나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는 자기 긍정은 결코 자기도취라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와 반대로, 이 둘은 모두 자기희생의 수단이다. 자기이해는 자기를 주는 것으로 이끌어야 한다. 십자가의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 안에서 나타나는 바, 자신을 주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십자가는 시종일관 집요하게 바로 이것으로 우리를 부른다.
십자가의 기준과 세상의 기준이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가장 극적으로 대비되어 진술되고 있는 곳은 야고보와 요한의 요청 및 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와서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니다. 이르시되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시를 원하느냐. 여짜오되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으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예비되었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해 분히 여기거늘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어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주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35-45)
35절(‘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과 45절(‘인자의 온 것은...섬기려 하고...주려 함이니라’)에서, 전자는 이 이야기의 서론이고 후자는 결론이다. 예수님은 연약삼과 수치 가운데 자신이 십자가에 달리셔야 할 것을 아셨다. 그것은 완전히 대조되는 것이다.
첫째로, 이기적인 야심과 희생 사이의 선택이 있었다.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는 그 형제의 말은 분명 이제까지 드려진 기도 주에서 최악의, 가장 뻔뻔스럽게 자기중심적인 기도라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선택은 권세와 섬김 사이의 선택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영예와 함께 권세를 원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예수님의 여광 주에서 예수님의 양편에 ‘앉게’해 달라고 구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그들이 마루 위나 쿠션 위의 자리, 등받이가 없는 의자나 팔걸이가 있는 의자가 아니라 와의 보좌를 꿈꾼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세상은 권세를 사랑한다. 예수님은 “이망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들이 너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라고 말씀하셨다(42절). 그분은, 동전에다 ‘경배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말과 함께 자신의 머리를 그려 넣어 주조하는 로마의 황제들을 생각하고 계셨을까? 아니면 꼭두각시 왕에 불과했으면서도 폭군과 같이 다스린 헤롯 일가를 생각하고 계셨을까? 권력에 대한 열망은 우리가 타락으로 인해 갖고 있는 고유한 것이다.
세 번째 선택은 안락과 고난 사이의 선택으로 그것은 지금도 해야 하는 선택이다. 영광 주의 보좌를 달라고 함으로써 야고보와 요한은 명예와 권세에 더하여 편안한 안정을 원하고 있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 그들은 떠돌이 방랑자가 되었다. 그들은 쾌적한 집이 없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한 것일까? 예수님이 그들의 질문에 대해, 그들이 그분의 잔과 세례에 참예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셨을 때 그들은 재빨리 입심 좋게 “할 수 있나이다”라고 응수했다(38-39절). 하지만 분명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헤롯이 좋아했다고 하는, 연회 전에 먼저 사치스러운 목욕을 하는 그런 메시야 연회의 유리 술잔을 꿈꾸고 있었다.
야고보와 요한의 정신은 여전히 남아 있다. 특별히 풍요함으로 뒤덮여 있는 우리에게는 더욱 그렇다. 안전을 주장하는 것은 십자가의 길과 양립될 수 없다. 성육신과 속죄는 얼마나 대담한 모험이었던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인간의 죄를 지기 위해 자신의 특권을 버리신 것은 얼마나 관습과 예절을 깨뜨린 것인가!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서가 아닌 다른 곳에서는 안정을 누리지 못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항상 적어도 일정한 만큼의 불안정과 위험 그리고 거부를 아버지를 위해 받아들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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