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영광의 소망
넷째,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궁극적인 영광의 소망이다. 예수님은 분명 자신의 죽음을 넘어서 부활을, 고난을 넘어서 영광을 바라보셨고, 실제로 시련 중에서 ‘그 앞에 있는 즐거움’에 의해 격려를 받으셨다(히 12:2).
고난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영광의 소망이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영원성을 한눈에 보게 해주는 위대한 신약 본문들을 자주 묵상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를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시는 것이다.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일거한 것들이 우리 눈앞에 보이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광’, 이 궁극적 운명, 하나님이 그것을 향해 우리의 고난을 포함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하시는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가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난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미래의 기대는 ‘상’의 형태로 주어지는 보상, “고통 없이 승리 없다” 또는 “십자가 없이 왕관 없다”는 말에 나타난 그런 보상이 아니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값진 유일한 보상, 곧 그리스도의 영광, 그분 자신의 형상이 우리 안에서 온전히 재창조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고난을 하나님의 백성을 영광에 이르게 하는 길로 보는 것은 분명 성경적이다. 그러나 그 원리를 보편화시켜서 모든 고통에 예외 없이 적용시키려는 것은 성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성경은 모든 인간 고통이 영광으로 이른다고 주장할 수 있는 자유를 우리에게 주지 않는다. 예수님이 전쟁과 지진을 새 세계를 알리는 ‘재난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고, 바울 역시 자연의 좌절, 쇠할 수밖에 없는 것과 탄식을 ‘고통하는 것’에 비유한 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이 자비로 구속하신 사람들의 공동체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기” 때문에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는 바울의 확언을 우리도 되풀이할 수 있다(롬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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