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하나님의 고통
그리스도의 고난을 우리의 고난과 관련짓는 여섯 번째의 방법이 있다. 그것은 가장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연대적 사랑(solidary love)의 증거, 곧 우리의 고통 안에서 그분이 개인적이고 사랑에 찬 연대감을 갖는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난이 주는 진정한 아픔은 불행 자체가 아니고 또는 심지어 그것이 주는 고통이나 그것의 불의마저 아니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은 참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무관심한 듯이 보이는 것은 도저히 견딜 수 없다.
십자가는 단번에 이루어진 역사적 사건으로 그 안에서 하나님은 그분의 사랑과 정의로 인해 우리의 죄를 지고 우리가 죽을 죽음을 대신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죄를 담당하시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고난 받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이 타당한가? 하나님은 고통을 느끼시지 않는다는 전통적인 교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라틴어 형용사인 ‘임파시빌리스’(impassibilis)는 ‘고통을 느낄 수 없는’, 그리고 따라서 ‘감정이 전혀 없는’이라는 뜻이다. 그것에 해당하는 헬라어 ‘압한토스’(a[fanto")는 철학자들이 하나님에게 적용한 단어인데, 그들은 하나님의 기쁨과 쾌락을 초월하신 분이라고 선포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그분의 평온함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는 그분께 고통을 준다. “하나님의 진노는 절대적이고 확고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인식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를 인식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고통’은 그분의 진노의 대상을 사랑하려는 그분의 의지를 반영한다.” 그분의 사랑과 진노가 서로 어우러져서 그분께 고통을 준다.
금세기 후반부에 세상을 바라보면 아마 인간 고뇌에 대해 두 가지의 현저하게 눈에 띄는 예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전 세계적인 규모의 기아와 빈곤이고, 둘째는 육백만 명의 유대인을 나치가 대학살한 것이다. 십자가는 이런 악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정당성을 나타내 주는 유일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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