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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 십자가 - 알리스터 맥그래스

JORC구원열차 2009. 1. 9. 00:23
 
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 십자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 박삼영 옮김 / 규장 / 2004년 3월 / 196쪽 / 8,000원
 
 
▣ 저자 알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
알리스터 맥그래스는 존 스토트와 제임스 패커의 뒤를 잇는 개신교 복음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다. 1953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태생으로 학생시절에는 수학, 물리, 화학 등 과학을 공부했고, 옥스퍼드 대학에서 분자생물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자연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서 사귄 그리스도인 친구들의 삶에 감화를 받아 마이클 그린과 같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강연에 나가기 시작했다. 진정한 기독교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면서 회심했고, 전도유망한 과학자의 삶을 버리고 신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한때 자유주의자의 길을 걷기도 했으나 자유주의가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된 후, 복음주의자가 되었다. 마르틴 루터, 존 칼빈 같은 종교개혁가들과 조나단 에드워즈, 존 오웬, 리처드 백스터 같은 청교도 신앙가들의 사상이 그의 복음주의 신학의 토대가 되었다. 최근에는 자연과학에 대한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자연과학이 신학에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고찰한 3부작 Scientific Theology 시리즈 (1부: Nature, 2부: Reality, 3부: Theory)를 완성했다. 그는 지금도 신학, 과학, 영성, 기독교 변증, 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오가면서 기독교가 우리 사회에 진정한 해답이 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의 책으로는『자존감』,『복음주의와 기독교적 지성』,『회의에서 확신으로』,『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10인』(IVP),『예수를 아는 지식』(규장),『이신칭의의 현대적 의미』,『십자가로 돌아가라』(생명의 말씀사),『종교개혁 사상입문』(성광문화사),『역사속의 신학』(대한기독교서회),『복음주의와 기독교의 미래』(한국장로교출판사),『The Unknown God, Glimpsing the Face of God(Lion), Why Does God Allow Suffering?(Hodder & Stoughton)』등이 있다.
 
▣ 역자 박삼영
총신대학교와 총신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위클리프 홀에서 이 책의 저자인 알리스터 맥그래스 교수의 지도로 ‘존 칼빈 신학에서 교회론의 위치’를 연구했다. 저서로는『동양우주론의 철학적 반성』과 『기철학을 넘어서]』등이 있고, 역서로는『기독교 세계관』,『IVP성경사전』 등이 있다. 서울 남표교회를 섬기다가 현재는 송파 방이동에서 새길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십자가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전달하기 위해 씌어졌다. 이 책의 진술 방법은 매우 전통적이다. 여러 각도의 경사면을 조사하고자 높은 산의 기슭을 걸으며 탐색하는 탐험가처럼, 이 책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다양한 이해를 제시한다. 이 책은 독창성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이 책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관한 2천 년 기독교회의 통찰의 보고에 접근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일반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을 섬기는 목회자들의 요구에 부흥하기 위해 집필되었다.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이런 풍성한 통찰은 교회의 소유인 동시에 이 책을 읽는 당신의 소유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런 풍성한 통찰이 당신의 것이 되어 당신의 신앙과 이해가 깊어지도록 하기 위해 씌어졌다.
 
▣ 차례
한국어판 서문
 
머리글
 
1장 2천 년 전 갈보리 십자가 처형장으로 가다
2장 2천 년 전 예수 부활의 소문으로 술렁이던 예루살렘 거리로 가다
3장 예수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4장 예수 십자가 수난의 5가지 코드
5장 나를 변화시키는 예수 십자가
6장 담대한 삶으로 이끄는 승리의 십자가
 
결론
 
후주
역자 후기
저자 소개
 
 
 
내가 정말 몰랐던 예수 십자가
 
알리스터 맥그래스 지음 / 박삼영 옮김 / 규장 / 2004년 3월 / 196쪽 / 8,000원
 
 
 
1장 - 2천 년 전 갈보리 십자가 처형장으로 가다
 
우리는 상상력을 이용해 2천 년 전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난다. 마치 우리가 제삼자의 눈을 통해 보듯이 십자가를 바라볼 것이다. 이것은 발견을 위한 여행 이상의 일이다. 이는 재발견이요. 재각성을 위한 여행이다.
 
오늘날 기독교는 많은 부분에서 진부해져가고 있다. 이것은 재앙이다. 개념과 용어, 이미지에서 본래의 신선함을 잃어버렸다. 기독교의 위대한 사상과 용어와 이미지가 진부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변화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생각하고 말할 때 기독교적인 방법의 순수함과 생동감을 회복하고 십자가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사상을 난생 처음 발견했던 그 시점으로 돌아갔다고 상상하려 애써야 한다. 지성의 눈으로 하나님의 사랑, 죄 용서, 영생의 약속 등과 같은 내용을 붙잡을 필요가 있으며, 거기에 함축된 놀라운 뜻을 음미해보아야 할 것이다.
 
좋은 신학이란 우리의 기독교적 사고 위에 수북히 쌓여 있는 먼지들을 털어 내는 것과도 같다. 단조롭고 진부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우리를 방해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기쁨을 주기도 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가 만일 그 깊이를 충분히 맛보기 원한다면 지금까지 배운 것들을 잊어버려야만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부활의 지식에 대해 마음을 닫는다. 우리는 죄 용서에 대한 바울의 영광스러운 선포를 잊는다. 우리는 마치 처음인양, 십자가를 경험할 준비를 하고 우리가 목격하게 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망각의 과정을 잘 준비한 다음, 우리는 이제 상상력을 이용해 2천 년 전 예루살렘으로 여행을 떠난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crucifixion)이라는 처형법을 선호했다. 아마도 십자가형은 지금까지 고안된 처형법 가운데 가장 잔인한 방법일 것이다. 그것은 죄수가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 서서히 죽게 하는 처형법이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시체를 줄지어 매달아 놓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반란의 결과가 무엇인지 뼈저리게 느끼게 하는 것은 없었다. 로마인들은 먼저 처형할 사람의 허리까지 옷을 벗기고 채찍질을 시작한다. 채찍 끝에는 갈라진 뼈 조각이나 거친 쇠붙이를 매달아 놓았다. 그 채찍에 맞는 희생자의 등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 다음 로마인들은 희생자들에게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처형 장소까지 운반하도록 했다. 이것은 그들을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목적이었다.
 
처형 장소에 당도하면 죄수의 옷을 벗긴다. 육체적인 고통에 공개적인 망신이 더해지는 것이야말로 십자가형을 더욱 비하시키고, 그 형벌의 효과를 증폭시키는 일이다. 그런 다음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들은 보통 죄수의 손목에 목을 박는다. 십자가에는 사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장치가 있다. ‘쎄딜레’(sedile)라 부르는 엉덩이 받침대가 십자가 중심 기둥의 중간쯤에 있는데 죄수의 몸이 아래로 쏠리지 않도록 막는 그것은 죄수가 너무 일찍 죽어버리지 않도록 지연시키는 역할을 한다. 유월절 어린양들마저도 이보다는 훨씬 자비롭게 도살된다.
 
십자가의 형을 집행하는 데 걸리는 시간에는 제한이 있었다. 형 집행자들은 해가 진 다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그 죽음의 과정을 단축시키는 방법으로, ‘꾸 드 그라스’(coup de grace, 즉 자비로운 일격)라 하는 ‘죽음의 일격’을 고안해냈다. 그들은 희생자의 두 다리를 부러뜨렸다. 그러면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몸을 지탱할 수 없게 되고, 가슴에 가해지는 압박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폐가 제 기능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어 이내 죽고 만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는 바로 그 사실은 그가 하나님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증거였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일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다니, 그래 그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일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온갖 종류의 논리적인 매듭에 꽁꽁 묶여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런 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는 어떤 깊은 논리도 충분하지 않다.
 
석양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울 때, 로마 병사들은 양옆에 달린 다른 두 사람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그러나 그들은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조금 다르게 행한다. 그는 이미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짐작하건대, 벌써 죽었겠지? 병사들은 구태여 그의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하지 않다. 대신 창으로 그의 허리를 찔러 깊은 상처를 내고 말았다. 여기서도 우리는 그 피를 볼 수 있다. 그 피는 응고된 것처럼 보인다. 아까 죽지 않았다고 해도, 이제는 확실히 죽었을 것이다. 모두가 그렇듯 티끌에서 티끌로 돌아간 것이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일어나야 할 일이다. 이제는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사람이 그렇게 끔찍하게 죽을 수밖에 없었었던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누구든지 십자가 위에서 죽는다면, ‘확실히’, 그리고 ‘분명히’ 죽는다. 로마 병사들은 사람이 죽었는지 죽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방법을 똑똑히 알고 있다.
 
2장  - 2천년 전 예수 부활의 소문으로 술렁이던 예루살렘 거리로 가다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면, 절망의 상징인 십자가가 희망의 상징으로 변해버린다. 그것은 모든 것이 사라져서 다시는 회복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세상의 가장 암울했던 시기에 태동된 희망을 상징한다.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는 소문이 무섭게 퍼지고 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그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 이야기에 전율을 느끼고 있다. 물론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 뭔가를 ale기란 어렵다. 그런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황당한 이야기들을 믿게끔 되어 있다. 특히나 유대인들은 이 땅에서 부활이 일어날 거라고 믿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 남자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일은 오히려 당연할 법도 하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전혀 말이 안 되는 일 같다. 유대인들이 부활을 믿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세상의 마지막 때에나 일어날 일이다.
 
만약 소문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충격을 줄 것이다. 행여나 ‘유대인의 왕’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살아나기라도 한다면,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좋지 않은 소식일 것이다. 그것은 반란의 불씨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로마의 관리들은 이 소문이 ‘허구’라는 것을 입증하지 않는 걸까? 분명히 저들은 이 부활 사건의 첫 목격자가 여자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대 사회에서는 여자가 목격한 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사실을 어린애도 알고 있다. 저들이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꾸며냈다면 그런 점들을 고려했으리라. 그 부분을 수정했더라면 약간 더 믿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생각해 보라. 그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언제 어디서든지 누구나 그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역사상 모든 인류가 그를 만날 수 있다는 소리인데,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모두 단순한 착오였을 것이다. 그저 속기 쉽고 우매한 하층민들이 어떤 병적인 망상에 미혹된 것이다. 그것은 단지 그들이 바라던 소망의 성취일 뿐이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사람들이 집단망상에 빠졌다는 추측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사용된 언어가 그렇다. 그들은 “예수가 자신들에게 나타났다”라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그들의 표현에는 예수를 본 것이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으로 보일 여지가 전혀 없다. 예수를 본 사람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제자들에게 모습을 드러낸 사실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활’이라는 현상의 객관적인 측면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예수는 죽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의 십자가 처형에 뭔가 실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통 로마 병사들이 사람들을 처형하는 방법은 매우 신중하다. 더욱이 그 대상이 예수였다면 그들은 아마 좀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을 것이다. 예수를 제대로 죽이지 못했다면 그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정신을 잃었다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다. 처형자들은 그가 당연히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제대로 확인해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믿는 것은 아주 바보가 아니고서는 힘들다. 그 누가 십자가형을 당해 반쯤 죽은 사람을 보고 부활했다고 생각하겠는가? 어떻게 며칠 동안 굶주리고, 또 몸을 꿰뚫은 상처에서 그렇게나 많은 양의 피를 흘린 사람을 ‘죽음의 정복자’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어쩌면 무덤과 관련한 어떤 혼란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예수의 제자들이 아마도 예수가 묻힌 곳 주변을 배회했을 것이다. 그러다 누군가가 예수를 원래의 무덤보다 좀더 나은 장소로 옮기기로 마음먹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것만으로는 제자들이 저토록 변화되었을 리 없다. 예수가 재판 받고, 처형될 때만 해도 저들은 숨죽이고 눈치나 보는 일단의 패배자들이었다. 그것은 누구나 다 안다. 저들의 리더격인 한 사내는 자신이 예수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자신감으로 가득 차 보인다. 저들은 변화되었다. 거기에는 뭔가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일 진짜 사실이라면? 정말로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면 그것은 이 세상의 원리와 사고방식을 뒤엎는 일이 아니겠는가? 분명 부활은 예수를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는 유일한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 이전에 그 어느 누구도 그렇게 높임을 받지는 못했다. 예수는 세상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아나 새롭고 영광된 지위를 얻은 것이다. 십자가 위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의 의미는 다시금 새롭게 해석되어야만 할 것이다. 십자가는 예수가 하나님께 징벌 받은 것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만 부활의 광채 속에서 그런 생각은 소멸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십자가의 의미는 무엇일까? 십자가를 둘러싼 길고 긴 논쟁의 종지부를 찍을 시점이 온 것 같다. 아마도 매우 흥미로운 결론이 나올 것 같다.
 
먼저 부활은 예수의 신분에 대해 뭔가를 말해줄 것이다. 마지막 날에 있어야 할 부활이 돌연 예수를 통해 이 시대에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 나머지(즉, 세상의 심판과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도 지금 여기서 일어나야 한다. 그럼 예수의 부활이 아니 어쩌면 부활한 예수 그 자신이 우리를 심판한다는 것일까? 그렇게 본다면 예수와 하나님은, 두 분이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말이 된다. 그것은 예수가 우리를 권하고 심판하고 거룩한 영광을 드러내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행했다는 의미가 된다. 아마도 우리는 앞서 말한 것과 같은 관점에서 예수의 생애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예수가 단지 한 인간에 불과했다면 우스웠을 이야기가, 그가 정말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니 완벽하게 앞뒤가 맞아 들어간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셨다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건널 수 없는 심연에 다리가 놓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매우 고민해왔다. 그래서 대개 ‘형용할 수 없다’는 말로 끝내기 일쑤였다. 하지만 이제는 놀라운 방식으로 그분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 친구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람의 사랑과 같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에 관해서는 어떤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현실에 어떤 의미를 갖는다는 말인가? 우리는 태어나서 죽게 된다. 인생을 위해 바치는 모든 시간이 낭비인 것처럼 보인다. 사실,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이 세상의 잘못된 부분들을 모두 정리해버린 것 같다. 세상에는 정의가 없는 것 같다. 예수와 같이 훌륭한 사람이 왜 처형당해야만 하는가? 그를 죽이는 데 사용했던 그 잔인한 방법은 인간 본성에 내재해 있는 잔학성의 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살 만한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인간인 예수가 처형됐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에서 이 세계의 모순을 종합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십자가는 그 자체로 절망과 좌절의 상징일 뿐이다.
 
하지만 예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면, 절망의 상징인 십자가가 희망의 상징으로 변해버린다. 십자가는 우리 자신의 인간적 자원에 희망의 근거를 두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보여준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곳에 희망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제멋대로이고 절망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희망을 가지고 믿음을 지켜야 할 새로운 이유를 제시해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그의 업적과 관련을 맺을 수 있다는 말인가? 죽음을 이긴 부활에 대한 소망이 도대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 세상이 끝난 후에도 영원히 지속된다면 어떨지 상상해 보라 그것은 마치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깨어지지 않으며 멸절하지 않는, 우리가 끝까지 붙들 수 있는 어떤 것을 시작한 것과 같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죽음의 권세가 무너졌다면, 다른 나머지 세력들은 어떻겠는가? 우리를, 우리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도록 자신의 정교한 사슬에 묶어두고 있는 죄는 어떤가? 나사렛 예수가 죽는 것을 지켜본 사람들은 알아차리지도 짐작하지도 못했지만, 뭔가 매우 중요한 어떤 일이 저 십자가에서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아마도 대사건의 시작일지 모른다.
 
3장 - 예수 십자가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약성경은 십자가를 통해 객관적인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선언한다. 십자가가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신약성경은 십자가로 인해 새롭게 변화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복음이란 오히려 십자가와 부활사건 그 자체라기보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놓여 있는 그 사건들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예수가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우리를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우리는 사건이 역사 속에서 가지는 의미를 정립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신약성경, 그 중에서도 특히 바울서신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주 나타난다. 맨 처음, 사도들의 설교는 공통적으로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라는 간결한 주제를 담고 있었다. 사도행전의 초기 설교들은 이 경험에 대한 짜릿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점차 깊은 고찰이 일관되게 나타나기 시작한다.
 
부활에는 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우선, 부활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예수가 이제는 우리의 ‘주’(Lord)이심을 보여준다. 부활의 예수의 사역이 권세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따라서 과거 예수가 자신에게 그런 권세가 있다고 주장했던 것들이 이제 사실임이 입증된 셈이다. 그리고 예수가 하나님이라면, 첫째로 우리는 그 순간 하나님에 대한 가장 훌륭한 시각적 예시를 본 것이 된다. 이 시각적 예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예수를 본 것은 아버지(성부 하나님)를 본 것이다. 둘째로, 성육신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를 낮추심에 대해서도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 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셨다. 그것도 로마 황제로서가 아니라, 제국 변두리의 누추한 어딘가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로서 말이다. 따라서 우리도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신약성경은 기본적으로 여섯 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1.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2. 신약성경은 십자가를 통해 객관적인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선언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극적으로 변해버렸다.
3. 신약성경은 십자가가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다고 분명히 말한다.
4. 신약성경은 십자가로 인해 새롭게 변화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효과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5. 신약성경은 우리가 십자가로 변화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6. 신약성경은 우리가 변화 받은 후의 새로운 삶과 생활에 대한 지침을 제공해준다.
 
4장 - 예수 십자가 수난의 5가지 코드
 
신약성경 기자들이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각각의 십자가 코드에 대해 우리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 코드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 코드가 그리스도와 동떨어진 우리의 형편에 대해 시사하는 점은 무엇인가? 어떻게 그 코드가 주는 이점을 붙들 수 있을까?
 
십자가는 위대한 건축물과 같다. 이 건축물에 대한 몇몇 접근 방식은 마치 건물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게끔 멀리서 대성당을 바라보는 것과 유사하다. 다른 방식들은 건물의 탑이나 부벽, 벽화, 제단, 지하실 등을 사진으로 찍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각각 고유한 기여를 하고 있지만 그것 중 일부를 제하고 본다면, 전체에 대한 그릇된 인상을 받게 된다. 이번 장에서는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찾을 수 있는 다섯 종류의 이미지(코드)를 살펴볼 것이다.
 
1. 전쟁터 이미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전15:57) 부활절의 그 대반전(大反轉)은 승리의 외침이다. 그리스도의 승리는 모든 유한한 인간의 종말을 변화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우리는 매우 정직하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매일같이 수백만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날 희망도 없이 죽어 가는데, 대체 한 사람이 죽음의 마수에서 구출된 것이 뭐가 그렇게도 중요하다는 말인가? 우리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 질문에 대한 부분적인 해답은 예수의 정체에 대해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바를 깨닫는 데 있다.
 
부활은 인간의 실질적인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상징이다. 부활은 하나님께서 일그러진 인간 존재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원하시며 또 해결하실 수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하지만 부활이 단순한 상징만은 아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났다. 부활은 아마도 전체 구원 역사를 통틀어 가장 강력하고 짜릿하며, 주목할 만한 사건일 것이다. 부활은 완고한 인간들을 회복시키기 위한 기나긴 과정의 화려한 절정이다. 혼돈에 빠진 이 세상의 정점에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면, 부활은 최초의 타락 이후 줄곧 인간을 괴롭히고 있는 이 무질서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고 있다. 죽음은 가장 강력한 적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이기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나머지 세력들도 곧 힘을 잃고 무너져 내릴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다.
 
십자가는 ‘자유’라는 뜻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켰다. 성 금요일은 마치 하나님이 죽었거나, 잠들었거나, 혹은 무관심하다는 생각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 그러나 부활절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역사하시며, 보호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피조물들의 구원과 평강을 위해 열정적으로 애쓰시는 분이다.
 
그렇다면 십자가를 통해 성취하신 이 일에 대한 이미지가 죄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주는가? 죄는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는 군대와 같다. 죄는 분열을 조장한다. 죄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끌어와서 자기 속에 빠뜨린다. 우리가 자유롭게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 더 힘센 사람이 와서 우리를 풀어 주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구원이 바로 그렇게 죄의 힘을 꺾어버린 것이다.
 
그렇게 죄와 죽음과 악의 힘이 꺾였다면, 그것들이 여전히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는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1944년 6월에 있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1년 만에 찾아왔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유럽의 전역에서는 분명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억류되어 있던 사람들의 마음도 달라졌다. 우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아직’ 승리가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이미’ 승리했다. 죽음이나 악, 죄와 같은 적들을 하나님이 완전히 멸하시는 그 날에 앞서 부활이 선포되었다. 적들의 등뼈는 부서졌다. 이제 우리는 승리의 감격 속에서. 적들의 기나긴 압제의 밤이 끝날 것을 기억하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2. 법정 이미지
 
기독교에서 구속에 관해 논의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공의와 의로우심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의적으로 아무렇게나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분의 의로우심을 충족시키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역사하신다. 죄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피조물에게 지시하신 도덕적 명령을 거스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죄는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인 차원의 반항만이 아니다. 창조 세계의 도덕적 질서까지 공격하는 것이다. 죄는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죄는 공적으로 다뤄야 한다. 죄는 우리의 지속적인 안녕이 달려 있는, 창조 세계에 대한 도덕적 명령의 존속을 위협한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도덕적 명령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어떻게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을까? 그냥 과거와 현재, 미래의 모든 죄를 한꺼번에 용서하고 없애버리면 되는 것이 아닌가? 아마 이런 식으로 질문한다면, 그것은 죄의 심각성을 부인하는 처사가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무엇보다 십자가가 중요해진다. 십자가는 죄의 무서운 심각성을 드러내주고 이를 정죄한다.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친히 인간의 죄짐을 짊어지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고후5:21)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의해 죽고 의에 의해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 2:24)
 
우리가 어떻게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을 수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세 가지 큰 개념을 생각해보았다.
 
첫째 : 대표성 - 이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인류에 대한 약속의 대표자로 이해할 수 있다. 믿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맺은 언약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순종하심으로, 언약 백성의 대표자로서 우리에게 온전한 죄 용서와 승리를 얻게 하는 은혜를 주셨다.
 
둘째 : 참여 - 바울의 유명한 표현을 빌리자면, 믿는 자들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거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힌 바 되어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참여한다. 결과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순종하심으로 성취하신 모든 유익을 함께 나누게 된다.
 
셋째 : 대속(代贖) -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대신 십자가에 달리신 ‘대리인’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죄인된 우리의 자리에 서게 하셨다. 그분의 상처로 인해 우리는 나음을 입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롬4:25).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은 재판관의 기준에 의해서 옳다고 선고받은 것이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것은 칭의에 대한 어떤 ‘교리’(doctrine)가 아니라, 칭의에 대한 ‘사실’(fact)이다.
 
‘칭의’(justification)를 오늘날 흔히 쓰이는 말로 바꾸면 무엇이 될까? ‘칭의’의 가장 근본적인 개념은 ‘옳게 만듦’(making right)이다. 영어의 ‘justification’이라는 단어는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다’라는 구약의 개념을 옮긴 것이다. 또한 ‘믿음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과 더불어 바르게 살아가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른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칭의’라는 단어가 ‘하나님과 더불어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말로 바뀐다면 바람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이신칭의)라는 말을, 우리가 ‘믿음 때문에 의롭게 된다’는 뜻으로 오해하곤 한다. 다시 말해 ‘믿는다’는 행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로운 상태로 만들어 주실지 아닐지를 결정하신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행위를 통해 의에 이른다는 교리에 빠져서 믿음을 단지 선행의 한 종류 정도로만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것은 그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믿음이란 마치 그리스도의 공로가 우리에게로 흘러 들어오는 통로와도 같다. 믿음이란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의 삶에 적용되도록 하는 수단이다. 이것은 절대 인간 행위의 결과로 구원받는다는 칭의 교리가 아니다.
 
이신칭의 교리는 인간의 윤리적 행동이 가치가 없다거나 필요 없어진다는 것이 아니다. 마르틴 루터는 과일 나무의 비유를 통해 이렇게 설명했다 칭의란 하나님께서 건강한 뿌리(믿음)를 가진 나무를 심어주신 것이며, 이로써 자연스럽게 열매(선행)가 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것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높은 도덕적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의롭게 된 이후로는 높은 도덕적 경지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절대 안 된다.
 
십자가의 법적 이미지는 ‘양자삼음’(adoption)이라고 표현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롬8:23;9:4;엡1:5)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어린아이라 하더라도 부잣집의 양자가 되면 그 집의 모든 부와 지위를 누리게 된다. 양자가 되는 것은 친자식과 똑같은 상속권을 부여받게 되는 일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친자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다. 그 지위가 태생적으로 주어졌든, 법적으로 주어졌든,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모두 똑같은 상속권을 가지고 있다는 뜻도 된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이며, 그리스도와는 공동 상속자’인 셈이다(롬8:17).
 
그렇다면 상속권은 무엇에 대한 권리인가? 그 유산은 바로 고난과 영광이다. 갈보리에서 받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주님을 영광에 이르게 한 것처럼, 우리도 영광에 이르기 위해서는 같은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영광으로 가는 값싼 길을 배제한다. 영광은 오직 고난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는 자들은 장차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광을 받게 되고, 동일한 상속권을 받게 된다. 따라서 고난은 영적인 수치나 모욕의 상징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믿음의 유산에 참여하고 있다는 표시이다.
 
구약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예언적 과거’라는 시제가 사용되고 있다. 선지자가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행하실 일들을 내다보게 되면, 그의 언어는 변하기 시작한다. 즉, 실제로는 미래에 벌어질 일이 과거형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선지자는 미래의 사건들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이해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과 그들을 사로잡고 있는 죄의 권세와 실재, 그리고 형벌로부터 구속하시기로 약속하셨다. 그 구속의 이상은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래의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 있기에 그것은 현실의 일이다.
 
죄인인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거듭나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힘을 낼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의로운 것처럼 여기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의롭게 되리라고 선포하고 계시며, 우리는 그 확고한 사실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이다. 장차 병이 완쾌될 것을 알고 있는 환자처럼, 장차 의로워질 죄인이기에 기뻐하고 확신 가운데 평안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픽션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 내어주시면서 자신의 신실함을 보여주신 한 거룩한 존재(하나님)왜 맺은 신실한 언약이다.
3. 관계 이미지
 
우리는 인간관계의 비유를 통해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가 십자가로 인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깊이 깨달을 수 있다. 그중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개념이 있다. 첫째는 바울의 ‘화해’ 개념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후5:19). 화해는 관계가 끊어져 어려움에 처한 두 사람이 다시 관계를 회복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둘째는 용서이다. 손상된 관계가 온전하게 회복되기 위해서는 용서가 필수적이다. 용서는 상처받은 사람이 상처를 준 사람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아팠는지 이야기할 수 있을 때에 일어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도록 내어주면서 감내하신 첫걸음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동시에 그분께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깨닫도록 하신다. 십자가를 통해 내미신 그 용서의 손길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를 너무나 가슴 아프게 한다. 우리는 전정한 죄에 대한 진정한 용서를 제안 받고 있다. 십자가는 실제적인 문제들을 정면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관계가 변화되어 가는 이미지들이 그리스도가 없는 우리의 삶에 대해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다는 것을 지적해준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하신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기독교는 이런 소외와 타락을 설명하는 데에 효과적인 이미지를 사용해왔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우리가 얼마나 깊이 타락했는가를 보여준다. 그 단순한 사실은 인간의 본성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또 얼마나 회복이 절실하게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또한 십자가가 그런 필요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를 보여준다.
 
4. 감옥이미지
 
감옥에 갇힌 사람들만큼 ‘절망’이미지를 강렬하게 전달해주는 것은 없다. 죄란 우리의 삶에 강제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세력, 또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리고 그 힘에 대해서 우리가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자각은 우리에게 참을 수 없는 무력감을 불러일으킨다. 자신의 상황을 바꿀 수 없는 인간의 이 ‘무기력함’이라는 주제는 구약성경 전체에 잘 나타나 있으며, 구약성경은 이에 대해 구속과 구원과 갱신을 위해서는 ‘주(主)를 의지해야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신분으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역사하셨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을 바벨론의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오게 하시려고 역사하셨다. 그리고 이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역사하고 계신다. 어떤 의미에서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동일한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의 현실이 지니고 있는 더 심각한 문제들을 지적해준다. 그 문제들은 애굽이나 베벨론에서의 구체적 상황들과는 비교가 안된다. 그것은 애초에 그런 상황들을 만들어낸 좀 더 근본적인 힘을 직시하게 한다. 이 힘은 인간의 권력에 대한 갈망이나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려는 욕망 등이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것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포함된다. 이것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황에 국한된 것들이 아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 본성의 끈질긴 특성들이다. 이 근본적인 세력들로부터 우리가 자유로워질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신약성경은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를 죄의 지배에서 자유롭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능력과 의도를 나타낸다고 말한다. 십자가에 대한 이런 측면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일련의 효과적인 이미지들이 있다. 그 가운데서 특별히 ‘속전’(贖錢, ransom)과 ‘구속’(救贖, redemption)이라는 두 가지 개념이 중요하다.
‘속전’이라는 이미지는 다음의 세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 : 해방 - 속전은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에게 자유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인질의 해방과 인간의 해방, 감금의 종결을 가리킨다. 우리는 죄의 속박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함을 얻었다(롬8:2;히2:15).
 
둘째 : 지불 -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자유에 대한 ‘대가’라고 말한다. 이는 구속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를 상기시킨다.
 
셋째 : 누구에게 속전이 지불되는가? - 몸값은 일반적으로 인질을 잡고 있는 사람이나 그의 하수인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신약성경에는 우리의 자유를 위한 예수님의 죽음이라는 속전이 (사탄 등) 어느 누군가에게 지불되었다는 암시가 없다.
 
그렇다면 ‘구속’이 진정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용어의 어원이라 할 수 있는 헬라어는 ‘시장에서 벗어남’이라는 뜻으로 번역된다. ‘구속된다’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대접받게 되는 것이다. 신약성경은 구속의 이미지를 통해 십자가를 설명할 때, 동시에 두 가지를 역설한다. 첫째, 신약성경은 구속의 값비싼 대가를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구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죽어야 했다. 둘째, 신약성경은 기꺼이 그런 대가를 감수하고서라도 우리의 자유를 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심에 주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속에 대한 값을 모두 치르시고, 우리의 자유와 존엄성을 그냥 선물로 주겠다고 하신다.
 
끝으로, 감옥의 이미지를 조금만 더 생각해보자. 이 고립은 좌절과 절망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결박되어 있거나 손발에 수갑과 족쇄가 채워져 있을 수도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외로움과 무기력감, 절망의 이미지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복음에 의해 바뀌었다. 우리 인생의 감옥문이 부서져 열리고, 자유의 몸이 되어 화창한 햇살 속으로 걸어 나오라고 초대받고 있다.
 
5. 병원 이미지
 
‘치유’는 종종 성경에서 ‘구원’의 이미지로 사용되었다. 바꿔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와 부활로 성취하신 것을 건강을 회복하는 과정에 비유하는 것이다. 죄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고, 우리는 치유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치유 이미지가 십자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가? 첫째, 치유 이미지는 그리스도의 고난에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확인한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53:5). 둘째, 치유의 과정은 그 자체가 복음에 대한 강력한 시청각 교재이다. 지금 우리는 원래 의도했던 상태에 있지 않다. 우리는 비록 지금 아프지만, 이런 우리가 갈보리에서 상처 입은 의사의 정성어린 치료에 우리 자신을 신뢰하고 맡긴다면, 건강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리가 부러졌고, 모두가 목발이 필요하다. 우리가 죄인이 아닌 척하는 것은 이미 모든 증상이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병이 들지 않았다고 부정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부인하는 행위가 당신의 체면을 세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당신의 생명을 구하지는 못할 것이다. 병을 인정하는 것이 치유의 첫걸음이다. 죄를 인정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용서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도움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들이다. 십자가의 이미지는 의사를 신뢰하여 우리 자신을 그분의 보살핌에 기꺼이 맡기도록 해준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이해하신다는 것을 안다면 그런 의사의 보살핌에 우리 자신을 좀더 쉽게 맡길 것이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그분께 맡길 수 있다. 왜 그럴까? 그분이 우리보다 앞서 이 길을 가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과 고통을 나누셨다.
 
끝으로 치유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치유가 진행되는 과정 동안 우리는 중간지대에 위치해 있다. 우리는 여전히 건강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아픈 상태이며, 동시에 회복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건강한 상태이다. 그래서 사람은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이다. 실제로는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완전히 치료하실 것이라는 분명한 보장과 약속 때문에 의롭다. 그래서 그는 소망 안에서는 완전히 건강하지만, 사실상 죄인이다. 우리는 죄와 맞서 싸워, 죄가 우리를 사로잡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죄를 완전히 제거하실 때까지 우리는 죄와 맞서 싸워야 할 것이다.
 
5장 - 나를 변화시키는 예수 십자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죄 사함에 대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외부에서 진정한 변화가 있었고,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도 변하게 되었다.
 
‘변화’ 이미지는 십자가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십자가가 누구를 변화시켰는가? 하나님인가, 우리인가? 우리가 이 질문에 답할 때는 십자가에 대한 주관적인 이해와 객관적인 이해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주관적으로 이해할 때 십자가는 우리를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객관적인 이해는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둘러싼 외부환경을 변화시켰다. 단지 외부를 인식하는 방식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 변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기 때문에 소외되었다고 느낀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인이기 때문에 스스로 죄인이라고 느낀다. 누군가 “좋아질 거야, 걱정하지 말고, 자 편하게 있어봐”라는 심리치료를 한다고 하자. 심리치료가 정서적으로 효과가 있을지 몰라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생명을 앗아가는 질병을 치료하는 데는 실패할 것이 분명한바, 그것만으로 당신의 상황을 구원했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십자가에 대한 타당한 접근법은 이런 사안을 함께 지적한다.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기는 하지만 이제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죄 사함에 대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우리 외부에서 진정한 변화가 있었고,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도 변하게 되었다. 이제 우리의 감정은 실제 상황과 일치한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위해 행하신 그 위대한 일이 우리의 상황과 감정 모두를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는 의심의 문제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우리는 ‘확실함’ 가운데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따라서 의심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의심은 하나님에 대한 지성적인 난제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훨씬 근본적이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려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본성이다. 이 인간 본성은 자연스럽게 어떤 지성적인 문제들과 결합된다. 의심은 죄성으로 가득 찬 인간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힘 또는 세력의 표현이다.
 
이런 의심의 문제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이룩한 다음의 두 가지 이미지로 이해해보자.
 
첫째 : 전쟁터 이미지 - 죄처럼 의심을 적으로 간주하라. 의심은 하나님께서 선하시고 약속에 신실하신 분이심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여, 당신이 ‘믿음’이라는 음식을 먹지 못하도록 굶기는 것과 같다는 점을 생각하라. 부활의 승리는 죽음을 삼켰고, 죄를 패퇴시켰다. 그리고 의심은 이제 제자리에 놓여 있다. 십자가 사건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거기에 계시지 않았다고 믿도록 하지만, 갈보리에서 현존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권세는 부활로 인해 고스란히 드러났다. 하나님의 약속이 의심을 이겼지만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의심의 공격과 싸워야 한다.
 
둘째 : 병원이미지 -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에서 이루신 일로 우리의 상처받은 본성은 치유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로 치유함을 받았다고 해도, 이 병의 증세는 지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다. 의심도 역시 남아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늘 관심을 가져주기 바라는 어린아이와 같다. 관심을 쏟으면 쏟을수록 더 큰 관심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 의심을 증명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죄짐을 지워 주는 것으로, 의심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자. 아직까지 긴 치료과정이 남아 있다. 우리의 병은 장기적이고 심각하다. 하지만 치명적이지는 않다.
 
6장 - 담대한 삶으로 이끄는 승리의 십자가
 
십자가는 공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걱정하고 겁에 질려 있는 본성에 강력한 치료제 역할을 한다. 십자가에 의해 죽음의 날카로운 칼날이 무뎌지고 부활이 승리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안다.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를, 십자가가 의미하는 그 모든 것들과 연합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우리는 짧으면서도 난해한 ‘믿음’(faith)이라는 단어를 다시금 재발견해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에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믿음이란 어떤 것들을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둘째, 믿음은 신뢰이다. 내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라고 한다면, 나는 “그 약속을 신뢰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인격에 대한 우리의 전인격적 반응이다. 셋째,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약속의 존재와 그 신뢰성을 알았다면, 그 약속에 반응해서 그것들이 약속하고 있는 것과 그로 인한 유익을 받을 필요가 있다. 십자가를 이해할 때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이 세 번째 요소이다. 믿음은 우리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주며, 주께서 순종하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죄 용서, 은혜, 영생 등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준다. 오래된 표현이기는 하지만 이 ‘그리스도의 공로’가 믿음으로 인해 우리 소유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음은 추상적인 교리들에 대한 ‘동의’라기보다는, 루터의 지적대로 그리스도와 성도 상호간의 헌신과 연합을 의미하는 ‘결혼반지’이다. 신부와 신랑이 연합된 것처럼, 믿음은 성도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만일 그 둘이 한 몸이고, 결혼이 거짓이 아니라면..... 자연스럽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모두 공동의 소유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은총과 생명과 구원으로 충만하다. 인간의 영혼은 죄와 죽음과 파멸로 가득하다. 이제 그 둘 사이에 믿음이 자리하게 되면, 죄와 죽음, 파멸은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은총과 생명, 구원은 신자의 것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이것이 앞서 4장에서 살펴보았던 구속의 다섯 가지 이미지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 중 세 가지를 생각해보자.
 
첫째 : 전쟁터 -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셨다. 우리가 비록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전리품을 나눠 갖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그저 선물로 주어진 이 새 세상과 새 시대로 나아가도록 초대된 것이다.
 
둘째 : 관계 - 잘못이 없는 쪽이 먼저 용서해줌으로써 단절의 슬픔이 화해로 변한다. 하지만 관계가 진정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용서도 수용되어야 한다. 용서는 쌍방통행로이다. 믿음은 이렇게 용서하고 용서받는 관계와 같다.
 
셋째 : 병원 - 믿음은 당신을 살려낼 약을 주겠다는 제안에 동의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를 치유하고 온전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하지만 상황을 변화시키려면, 우리가 그 회복의 제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미숙하고 소극적인 믿음은 그저 하나님에 대한 몇 가지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는 데 그치고 만다. 하지만 살아 있는 믿음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인, 살아 계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연합시키며, 그분에 의해 변화된다.
 
18세기에 아이작 뉴턴은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대학에서 아주 중요한 발견을 했다. 한 줄기 빛이 프리즘을 통과하면 여러 색으로 분산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일곱 가지 색은 빛 속에 원래부터 있었다. 십자가의 모든 메시지는 인간이 처한 어떠한 상황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개개인마다 요구하는 것은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갖고 있다면 복음은 그 상황에 맞춰져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이 개개인에게 확실한 영향을 끼치도록 진지하게 숙고하는 노력이 필요한데, 첫째, 이것은 복음이 그 어떠한 상황에도 부합하는 내용을 제시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둘째, 개인의 상황을 알게 되면 십자가의 메시지를 그들의 필요에 꼭 맞도록 더 잘 전달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복음을 알고 친구를 알라.
 
타락한 인간의 본성이 갖기 쉬운 두려움과 걱정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두려움과 걱정은 실재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이런 공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준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처한 상황에 대해 걱정하고 겁에 질려 있는 본성에 강력한 치료제 역할을 한다. 십자가에 의해 죽음의 날카로운 칼날이 무뎌지고 부활이 승리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제 우리는 죽음에 담대히 맞설 수 있다. 히브리서는 이 점을 힘있게 논증한다. 예수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히2:15)고 죽으셨다고 선포한다. 사망이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끊을 수 없다.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전 15:54).
 
결론 - 인생을 역전시키는 희망의 십자가를 바라보라
 
기업체들은 로고를 디자인하는 데 막대한 돈을 쓴다. 그들은 기업체의 이미지를 일반 대중의 마음 속에 각인시키기 위해 광고업체를 통해 로고를 제작한다. 로고는 어떤 특정 기업이나 단체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해주는데, 최소한 사람들이 어떻게 봐주었으면 하는지 말해준다. 그러니 어떤 집단이 교수형을 치를 때 사용하는 목매는 밧줄이나 가스실이나 전기의자를 로고로 채택한다면 완전히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런 류의 상징이 기독교의 로고가 되어 널리 통용되고 있다. 교회나 기타 기독교 관련건물에서 단지 십자가를 볼 수 있는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건물들을 아예 십자가 형태로 건축하기까지 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어리석은 십자가를 내세우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훨씬 더 호의적인 이미지를 가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신약성경이 기록되던 시대에도 기독교가 십자가 때문에 나쁜 평판을 들었다. 바울은 십자가를 중요시하는 기독교의 특징을 두 부류에서 모두 꺼린다는 점을 간파했는데,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수치스럽게 보았고, 헬라인들은 완전히 미친 짓으로 보았다(고전1:23).
 
하지만 십자가에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십자가 고유의 능력이 있다. 십자가는 기독교가 현실적인 종교임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십자가가 고통과 죽음을 상징한다는 점은 기독교가 인생의 암담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시기 위해 우리가 고난 받고 죽어 가는 이 세상으로 들어오셨다. 십자가는 감추어진 영광을 상징한다. 십자가는 이 세상에서 직면하는 나쁜 상황에 맞서,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한다. 십자가는 늘 슬픔과 눈물로 얼룩진 세상을 변화시키는 희망의 상징으로 서 있다.
 
이제 십자가를 생각해 보라. 죽음과 고통의 세상 한가운데 있는 희망을 상징하는가? 그렇다. 이 어두운 세상에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아니 그 이상을 상징하는가? 그렇다. 간략히 말해서 십자가는 이 세상 속에서 역사하는 희망을 상징한다. 하지만 세상은 없어질 것이고, 영생의 소망만이 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