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과 나의 부활이신 예수님(1)
본문 : 요한복음 11:25-26
-----------------------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할렐루야!
여러분! 우리는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인터넷에서 ‘부활’이라는 단어로 검색을 해 보았습니다. 가수그룹 이름이 ‘부활’이 있나 봅니다. 그 분들 앨범과 기타 내용들이 검색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이 ‘패자 부활전’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또 활동을 그만 두었던 연예인들이 다시 돌아왔다는 의미로 ‘부활’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었고, 스포츠 선수들이 다시 돌아와 예전처럼 잘할 때 ‘부활했다’고 사용했습니다. 부활은 어쨌든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런 부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의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솔직히 인간에게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인간의 능력으로 할 수 없는 것” 그것은 죽음을 막는 일입니다. 혹 조금 더 늘릴 수는 있을지 몰라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히 9:27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죽습니다.
KBS TV에서 ‘생로병사의 비밀’이라는 의학다큐 프로그램을 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첫 번째로 ‘성장호르몬, 현대판 불로초인가’로 시작하여 59번 째 2004년 4월 6일 “수명을 단축시키는 세 가지 - 제 1편 『설탕』”까지 진행되었습니다.
20세기 의학은 수많은 질병치료법을 내어놓았고, 인간의 평균 수명을 43세에서 77세로 두 배 가까이 늘려놓았습니다. 그리고 21세기, 학자들은 인간의 한계수명을 120세, 혹자는 150세까지 예상합니다. 이 프로그램은 “고령이 되어도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람이 먹고, 자고, 활동하는 하는 우리 삶에 대한 총체적인 접근을 통해 ‘건강 라이프 스타일’을 제시한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혼란하게 하는 것은 4번째로 방영된 ‘고기 먹어야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방송입니다. 제가 아는 상식과 세계의 장수마을에서 장수 노인들을 조사한 것에 의하면 소식과 채식을 많이 먹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어쨌든 이 프로그램에서 말하는 것은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키는 것 말하는 것 다 지키려면 그것 신경 쓰다 더 먼저 죽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을 무력화시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절대적 위력을 갖고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죽음을 향하여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큰 소리 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죽음을 무력화시키고 사람들을 거기서 풀어 자유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소식은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이 복음은 구체화되어 세계 속에 놀라운 희망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시편 116: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을 그저 보고만 계시는 것은 아닙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그렇게 유심히 보시겠습니까? 그를 구원하시기 위함입니다. 전도서 7:1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이 세상의 지긋지긋한 생을 마감하게 되어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즐겁지 않았던 고통스러웠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태양이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비추는 하나님의 진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부활의 영생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죽는 날이 절대로 낮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고 했습니다.
오직 주 안에서 죽을 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천국이 준비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천국으로 가지 못하는 사람은 이 죽음 말 그대로 죽음입니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보다는 “부활하시기 위해서 가셨다”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에서는 “장례식”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천국 환송회”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천국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지만 거기에서 죽음을 이기셨습니다. 수치와 불명예의 상징인 십자가를 승리의 상징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무덤에 놓여 있었지만 무덤이 그를 가둬 놓지는 못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부활 신앙”입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는 “종교”일지는 몰라도 “생명과 구원”은 아니며, 부활 신앙이 없는 기독교인은 “교인”일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자녀”는 아닙니다. 이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지, 예수님은 스스로를 “부활”(요 11:25)이라고 칭하셨고, 제자들도 자신들을 “부활의 증인”(행 1:20)이라고 말했습니다.
성경에서 의미하는 부활은 단순하게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 가는 모든 것을 “살리는 것”입니다. 그 살리는 역사는 죽음 이후에 일어날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장차 영생할 뿐만 아니라, 만나는 그 순간 깨진 꿈이 회복되고, 지친 몸이 치유되며, 상한 마음이 위로 받습니다. 부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날마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 충만하면, 어떤 환경과 여건에서도 산 소망과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가롯유다를 대신하여 한 명의 제자를 뽑기로 할 때 사도행전 1:22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에비구레오와 스도이고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행 17:18)
“복음” 그것은 죽음에서의 부활이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바로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일입니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복음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 세상이 주는 향락은 잠시 우리를 즐겁게 해 줄지는 모릅니다. 이 세상의 물질이 잠시 우리를 편안히 쉬게 해 주는 것 같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야말로 잠시입니다. 그날은 눈 깜박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입니다.
어떤 노인이 정원에서 묘목을 심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는 도대체 언제쯤이나 그 나무에서 열매가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노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아무래도 70년은 지나야 될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다시 물었습니다.
“노인장께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있겠습니까?”
노인이 다시 대답을 하였습니다.
“아니오 그렇지 않소. 내가 태어났을 때 과수원에는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었소. 그것은 내가 태어나기 전에 아버님이 나를 위하여 어린 나무를 심어 놓았기 때문이오. 그것과 똑같은 일이지요.”
저와 여러분들의 남은 생애를 주님께 드립시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전도하고 선교하시기를 오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자 양육 자료실 > 예수님은 누구신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4과 - 나의 진리이신 예수님 (요 8:31-47) (0) | 2009.01.20 |
---|---|
제13과 - 나의 길이신 예수님 (요 14:4-6) (0) | 2009.01.20 |
제11과 - 나의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 (요 10:1-18) (0) | 2009.01.20 |
제10과 - 나(양)의 문이신 예수님 (요 10:1-10) (0) | 2009.01.20 |
제9과 - 나의 빛이신 예수님 (요 8:12) (0) | 2009.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