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위에기쁨/신약성경 자료

마태복음 연구 25강

JORC구원열차 2009. 2. 16. 21:04

마태복음 연구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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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1. 마태복음서의 기록의미와 내용

2.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라는 말의 교훈은 무엇인가? (마 1장)

3.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될 것이라는 예언(미5:2)과 그 의미 (마 2장)

4.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의 교훈 (마 3장)

5. 예수님의 복음전파와 각종 병 고침에 대한 내용(마 4장)

6. 산상수훈, 팔복과 그 의미는 무엇인가?(마 5장)

7. 주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을 해석한 내용(마 6장)

8.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인가?(마 6장)

9. 거짓 지도자와 참 지도자를 구별하는 표준(마 7:15~20)

1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마 9:9~13)

11. 예수님으로부터 안식을 얻는다는 말의 의미와 안식의 삶에 대하여(마 11:28~30)

12. 성령을 훼방하는 죄 (마 12:31~32)

13.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신 근본이유(마 13:10~15)

14.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태도와 그 조건 (마 16:24~27)

1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결혼관(마 19:3~12)

16.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원인과 말씀 (마 19:23)

17.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세상 나라의 질서와 다른 점(마 20:25~28)

18.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성전의 의미(마 21:12~17)

19.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7가지 화 (마 23:5~36)

20. 말세에 나타난 세 가지 징조 (마 24:4~14)

21. 예수께서 정하신 성만찬 제도의 의의 (마 26:26~30)

22. 가룟유다의 뉘우침과 자살이 주는 교훈 (마 27:3~5)

2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 (마 27:45~50)

24.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의 변화된 삶의 관계 (마 28장)

25.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적 의미 (마 28: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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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태복음서의 기록 의미와 내용

 

마태복음서의 기록목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핵심은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바로 그들이 기다렸던 메시아이심을 입증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마태는 무엇보다도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함으로서 예수님이 그의 삶과 사역을 통해 어떻게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셨는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는 예수님의 혈통을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고 있으며(1:1~17),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예수님의 역할을 강조(1:1, 9:27, 12:23, 15:22, 20:30~31, 21:9, 21:15, 22:41~45)하면서 혈통적 계보관계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태는 예수님의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을 은폐하려는 유대인들의 시도에 대항하여 부활의 역사적 실재성을 강조하였습니다(27:62~66, 28:11~15).

 

마태복음의 중요한 내용은 이 책이 유대인들이나 유대교로부터 개종한 이방인들을 염두에 두고 기록되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마태가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하여, 구약의 증거에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는데, 여기에는 구약성경의 직접인용과 암시가 100회 이상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선지자로 예언된 바"와 같은 구절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그 실례입니다.  예수 생애의 각 장면마다 마태는 한 사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구약의 본문과, 예수의 사역으로 성취된 예언들을 함께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며 히브리인에게 약속된 메시야로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라는 것이 마태복음의 위대한 신학적 주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는 자기 백성에게  배척을 받고 유대인의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마태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으며,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완성 또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역사적 사실에서 근거한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유대인의 영적인 왕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과 동시에 모든 백성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2.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라는 말의 교훈(1장)

 

마태복음 1장 12절에서 16절까지는 바벨론 포로 이후 예수님이 탄생할 때까지의 시기, 즉 포로시대와 신구약 중간사 시대의 계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16절 말씀 하반절에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the husband of Mary, of whom was born Jesus who is called Christ)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말씀하는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의 원어적 의미는 "그리스도라고 불리워지는 예수"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Christ)라는 말은 '크리스토스'라는 헬라어를 음역한 것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메시아흐'에서 기원합니다.  그런즉 '메시아'와 '크리스토스'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해석되는 동일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한글 개역성경에는 '메시아'와 '그리스도'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구약에서는 어떤 사람에게 '사명'을 베풀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으며 기름부음을 받은 자는 그때부터 공식적인 사명 자가 되어 주어진 역할과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대제사장/출29:7, 29:29, 민수기35:25), (족장/대상16:22), (왕/삼상16:12, 왕상17:15). 

 

구약성경에는 왕, 제사장, 선지자 등이 특별히 기름부음을 받았으며, 그들은 그 시대의 사명자로서 하나님 앞에서 맡은바 직무에 충실한 삶을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제사장/레8:12), (왕,선지자/왕상19:16, 시2:2), (선지자/사61:1), (왕/단9:25),  이것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과 결코 무관치 아니함을 뜻하며 결과적으로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가 오래토록 기다렸던 메시야로서  하나님께서 보내신 인류를 구원할 유일한 사명자요, 만왕의 왕이시며, 대제사장이심을 가리키고 있습니다(눅7:37~46, 요11: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와 주(JHVH)로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받아들이는 믿음의 가장 기본적인 행위이며 이러한 고백을 통해서 죄인된 우리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3.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될 것이라는 가장 직접적인 예언 (미5:2)과 그 의미(2장)

 

베들레헴(Bethlehem : 떡집, 생명의 떡)은 원래 '에브랏' , '에브라다' 로 불리웠던 지명으로(창35:16~19, 시132:6) 나오미와 보아스의 고향임과 동시에(룻1:1,19,  4:9~11), 다윗의 고향이며 사무엘이 이곳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은 곳(삼상16:1~18)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2장 5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은 미가서 5장 2절의 말씀을 그대로 적용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유대인이 학수고대하고 있는 메시야라는 역사적 사실을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고 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가서 5:2). 

 

베들레헴은 유다 지경내의 작고 아름다운 마을로서 유대산지의 동쪽 사면에 위치했으므로 큰 도시로 성장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비천한자를 높이셨던 하나님은 비천한 이곳을 택하셔서 영화롭게 변화시켰습니다. 의미심장하게도 '베들레헴' 은  '떡집' 이라는 의미를, '에브라다' 는 '열매가 풍성하다' 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명이 해석하듯 전 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을 풍성히 제공하실 예수께서 (요6:48) 이곳에서 출생하셨던 것입니다(눅1:32~33).

 

미가 선지자는 히스기야 시대에 이사야 선지자와 함께 활동한 예언자로서 유다와 예루살렘 지역에서 예언활동을 하였습니다. 특히 미가 선지자의 예언 중 메시야의 탄생장소에 관한 내용은 이사야 선지자의 예루살렘에 대한 예언과 일맥상통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사2:2~4).  이처럼 구약성경의 예언대로 메시야가 베들레헴에서 탄생한 것은 성경의 모든 기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반드시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구약의 성취를 보여주는 특징의 한 예로서 구약의 모든 사건과 내용은 허구가 아니라 실체가 분명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며, 하나님의 계시가 성령의 영감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4. 예수님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말의 교훈(3장)

 

마태복음 3장 11절 말씀은 세례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차이점을 적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I indeed baptize you with water unto repentance, but He who is coming after me is mightier than I,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carry.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and fire).

 

세례 요한은 성령세례를 그리스도의 사역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메시야를 환영하는 사람들에게는 깨끗하고 정결케 하는 불로, 배척하는 자들에게는 진노의 불로 본 것 같습니다  이 두 가지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과 연관되어 있습니다(마 3:12). 세례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결단하는 한 가지 세례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메시야의 더 큰 사역이 성령 (Holy Spirit)의 임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날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많은 학자들의 견해가 있으나,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성령세례도 같이 받는다는 것으로 성령세례를 중생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견해와, 중생과 성령세례를 다르게 보아 성령세례를 성령충만의 출발점으로 보는 두 가지 견해를 중심으로 교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견해 중 어느 것이 더 성경적인가 하는 것 보다 두 가지 견해 모두 성령의 사역과 지배를 받음으로서만 구원에 이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사실에는 이론이 없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불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은 종말론적인 사건으로 볼 때 불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가 확연히 구별되어 불심판을 받게 되는 엄청난 결말을 의미합니다.  

 

결론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현재 믿음으로 사는 자는 장차 세상 끝날에도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만 성령의 지배를 거부하는 불신자들은 장래에 임할 무서운 불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교훈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5. 예수님의 복음전파와 각종 병 고침에 대한 내용 (4장)

 

마태복음 4장 23절에서 25절까지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확장이 적극적이며 실재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마태복음의 5대 강화 중 제 1 강화인 산상수훈(5장~7장)을 위한 도입부로서 9:35~38절의 평행절과 함께 중요한 암시를 담고 있습니다. 즉 이는 일정기간 동안 예수의 사역이 계속 확장되어 보다 더 결정적인 교훈과 사건의 때가 성숙되어 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기적으로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다가옴을 선포하시고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한 자세와 준비에 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인간의 종말론적 구원이 그들을 향한 목표였지만 현실적 구원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많은 자들의 정신적, 육체적 질병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과 그분이 베푸시는 사랑과 치유의 기적에 군중들은 끊임없이 몰려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시 그리스도의 추종자(Christ - follower)였을 뿐 아직 그들의 전 인격이 그리스도를 신앙화한 그리스도인(Christian)은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눈에 보이는 예수의 인간적 측면, 즉 치유자, 지도자의 측면만 보았을 뿐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자, 하나님, 심판자로서의 영적 특성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은 갈릴리를 중심으로 유대전역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특별히 병든 자와 약한 자들에 대하여 치유하시면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병고침과 이적 등에 더 큰 관심을 갖고 따라 다녔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푸신 각종 이적과 치유는  메시야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증거를 나타내기 위한 복음적 수단이었을 뿐이었는데 그들은 메시야를 바라보지 못했고 오직 치유와 기적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따르는 목적이 단순히 육체적 치유, 물질적 축복, 액땜을 위한 정도의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의 진실을 왜곡시키는 아주 잘못된 발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적 자세와 삶은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의 은총에 항상 감사하고 찬양과 경배와 영광을 돌려드리며 더 나아가 우리의 생명까지 주를 위해 바치는 헌신적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6. 산상수훈 - 팔복과 그 의미(5장)

 

마태복음 5장은 7장까지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교를 바탕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특히 5장 3절에서 11절까지 나와 있는 여덟 가지의 복은 천국의 복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있지만 종국적으로는 완전한 하나의 복을 말하고 있습니다. 팔복은 처음의 네 가지와 다섯 번째부터 여덟 번째까지 두 가지를 분리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처음 네 가지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는 의가 없음을 발견하는 단계를 말하고 있으며 다음의 네 가지 복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이 행하여 할 책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팔복에서 말하는 복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이"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성도가 누리는 축복의 최상급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이 가져오는 결과는 바실라이아(천국)이며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세계 속에서의 행복과 평화인 것입니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왜 복이 있으며 그 복은 무엇인가? (마 5:3, 눅 6:20)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Blessed are the poor in spirit,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마태복음 5:1~7:29까지의 말씀은 산상수훈, 즉 팔복 (beatitudes) 에 관한 내용입니다. 팔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특별한 복됨의 선언으로 정의 할 수 있습니다.

 

5장 3절에 있는 말씀 가운데 심령이라는 단어는 성령을 가리키는 말과 동일한 프뉴마 (pneumati)로 해석됩니다. 가난한 자(ptochoi)와 관련해서 기본적인 두 가지 정의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경제적으로 불리한' 자들,  곧 정상적인 삶을 사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물질이 결여된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영적으로 불리한' 자들,  '영적으로 갈급한 상태에 있는 자' 들에게 더욱 더 큰 의미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메시지를 경청한 사람들로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그들 자신에 대한 혹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한 자만심을 회개하였습니다(마3:2~9).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영적 빈곤상태에 빠진 백성인 것입니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첫째, 스스로의 한계성을 느끼고  하나님밖에 도와줄 분이 없음을 인정하는 자(시69:29, 70:5, 74:21, 86:1~6, 사 61:1, 습 3:12), 둘째, 하나님 앞에서 오만한 자들과 반대되는 생활을 하기 때문에 그 오만한 자들로 부터 박해를 받는 자이고(시37:14, 86:14),  셋째, 자신의 죄를 통회하며 회개하는 자입니다(시 34:6, 51:17, 사 66:2).  

 

이러한 사람이 받게 되는 복(마카리오이)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에 동참한자가 누리는 영적 특권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임하는 영역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수고의 댓가로 얻을 수 있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에서 비롯되는 선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영육간에 축복과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애통하는 자의 복은 무엇이며 그 결과는 무엇인가?(마 5:4, 눅 6:21)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Blessed are those who mourn for they shall be comforted).  

 

고통은 무엇인가? 사람을 비참하게 하고 극도의 슬픔과 비애를 느끼게 하는 행위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고통하는 자는 헬라어로 "호이 팬둔테스"로  읽혀지며 이것은 자신에게는 구원받을 아무런 의가 없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회개하고 자복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누릴 수 있는 복은 과연 무엇인가?  애통은 사람들이 내세웠던 윤리적 가치와 도덕적 규범에 대한 교만을 슬퍼하며 회개하는 영적 애통을 말하며 이로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의를 향하여 애쓰는 아음에 대한 위로의 축복인 것입니다.

 

3) 온유한 자가 누리는 땅의 기업에 관한 축복은 무엇인가?(마 5:5, 롬 4:1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Blessed are the gentle for they shall inherit the earth)  

 

온유한자는 헬라어로 "호이 프라에이스"라고 읽으며, 자신의 의를 나타내지 않고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을 가득 품고 있는 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온유를"부드러운 마음으로 살며 노하기를 더디하며 절제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적 격노에 대하여 관용을 취하는 덕성"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온유란 잘못된 것에 대하여 회개하고 회복되기를 인내함 으로 기다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말하며 이러한 예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이되어 우리도 동일한 온유를 가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유함을 가진 자가 누릴 기업으로 받을 땅은 무엇인가? 세상의 죄악으로 만연되어 있는 이 땅을 말하는 것인가?  멸망을 초래할 이 땅은 결코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는 모든 곳을 말하고 있으며  천국의 축복을 기업으로 보장하신다는 대명제인 것입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받을 배부름의 축복은 무엇인가?(마 5:6, 눅 6:21)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Blessed are those who hunger and thirst for righteousness, for they shall be satisfied).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쫓아서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모든 경우의 부족과 필요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의에 풍족하고 갈증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과 타협하며 불의한 삶을 통하여 부와 명예와 삶의 만족이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경우 모두 어느 한쪽은 목마름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땅의 목마름과 갈증도 피부로 느끼면서 인내함으로 이겨나가지만 풍족하고 갈증이 없는 사람은 영적갈증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의와 영적 갈급함을 느끼며 의지하는 사람들의 갈증과 배고픔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의 배부름은 영혼의 평안함과 하나님의 은총인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배부름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온다는 불변진리의 축복인 것입니다. 

 

5) 긍휼히 여기는 자의 긍휼에 관한 축복은 무엇인가?(마 5:7, 막 11:25)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Blessed are the merciful, for they shall receive mercy) 

 

긍휼(矜恤)은 가엽게 여겨서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통과 어려움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도움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자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까지도 자기 자신의 고통으로 여겨 함께 극복하는 것이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삶의 고통과 시련과 어려움을 도와주고 그들의 삶에 함께 동참하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불쌍히 여기고 십자가에 친히 돌아가신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에게 배푸신 은혜로 부터 기인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베푸는 긍휼로 인하여 우리가 또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풍성한 자비와 은혜로 긍휼의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가 누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축복은 무엇인가?(마 5:8, 히 12:4)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Blessed are the pure in heart, for they shall see God) 

 

마음은 헬라어로 "카르디아"를 말하는 것으로 심령으로 해석되는 "프뉴마"와는 다른 정신, 의지, 감정을 포함하는 인간 존재의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헬라어 "카다로스"라는 "청결"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섬기려는 두 가지 마음과 탐욕으로 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이 청결한 사람은 마음속에 존재하는 기본적인 정신과 의지가 비록 세상에 몸을 담고 있지만 그 마음만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려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항상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함을 믿음으로 계승하며 예수님의 순수한 신부의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는 축복은 직접적인 대면보다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의 모범을 말하는 것입니다.

 

7) 화평케 하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축복은 무엇인가?(마 5:9, 롬14:1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shall be called sons of God)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를 만드는 자', 또는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 '화목을 사랑하는 자'로 해석되는 헬라어 "호이 에이레네포이오이" 로 신약성경에서 본절에만 나오는 단어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과 화평하거나 불화한 사람들 사이에서 화목을 위해 그들에게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하는 사람입니다. 즉, 본래 죄인이었던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놓여 있는 평행선과 같은 높은 담을 허물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화평케 하는 자의 본질적인 모델인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받아 모든 성도들이 그들과 그들 사이에서 화목을 주도함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와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곧 천국백성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천국을 누릴 수 있는 영광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축복중의 축복인 것입니다.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들이 누리는 천국 소유권은 무엇인가?(마 5:10, 벧전 3:14)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Blessed are those who have been persecuted for the sake of righteousness, for theirs is the kingdom of heaven)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결코 자유로운 곳이 아닙니다. 그들이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려 할 때에 고통을 받게 되고, 우상과 타협점을 찾아 현실적이 될 것을 요구받게 되며, 또 한 온갖 음해와 술수에 휘말리며 많은 누명과 슬픔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12절은 "무릇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을 것"이라고 결단을 준비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누려야 할 최상의 선택인 천국을 위하여 인내하고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러한 핍박을 받을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천국은 단지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관광명소가 아닌 것입니다. 아무나 접근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축복의 열쇠를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특권인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의를 위한 핍박은 유한한 세상에서 결코 한시적일 수밖에 없으며 또한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7. 주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을 해석한 내용(6장)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마 6 : 9~13).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And forgive us our debts,  As we forgive our debtors.  And do not lead us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Yours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주기도문(Lord's  Prayer)은 예수께서 꼭 이렇게만 기도하라고 만들어준 유일한 형식은 아니지만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모범이며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가장 완전한 모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은 본문 앞 절에서 과시를 위한 기도(5~6절), 중언부언하는 기도(7~8절)를 비판하시면서 기도의 정직성, 진실성을 강조한 이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에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리의 삶을 사는 자들이 어떻게 기도해야 하며 무엇을 간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서론과 여섯 가지 문제를 간구한 본론,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송영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이것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짧은 기도문이 모든 기도의 내용을 완전하게 함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 나라가 중심 주제인 주기도문의 서론은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부를 수 있는 자격을 부여 받았다는 것입니다. 보혈의 공로로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얻어 하나님을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의 고백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번째 간구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9절) 인데 우리의 기도목표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거룩성은 복음의 전파로 하나님의 권위와 자비와 영광이 온 세상에 드러나기를 간청하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기도는 자신의 세상적 유익이 목적이요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 최우선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기는 행위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서 거룩함같이 자신의 삶과 행위를 성령의 능력으로 거룩하게 함으로서만이 가능한 것입니다(벧전 1:15~16, 살전 4:3,8).

 

두 번째 간구는  "나라이 임하옵시며"(10절) 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간구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땅을 인간이 거주하는 제 1의 영역으로, 하늘을 하나님과 천사가 있는 제 3의 영역으로 보았습니다. 따라서 하늘에서 천사들이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듯이 우리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재 간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10절)인데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완전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이 땅에서도 성취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여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지속되는 축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이 복음전파를 통하여 이 땅에 성취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축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네 번째 간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11절) 인데 여기서 오늘날은 날마다, 매일로 번역되기도 하며(epiousion), 그 의미는 생존과 현재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공급받는 양식을 포괄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양식이란 반드시 음식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생활의 필요들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성도들이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고 복음전파하는 일에 필요한 세상에서 양식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이유로 가정을 내 팽개치고 직업도 없이 방황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곡해한 것입니다. 성도의 바른 생활은 자기와 가족의 위치를 잘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자신의 삶과 일상생활을 통하여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을 계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 가르친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중심의 삶(잠 30:8~9)과 성도의 일상생활 깊숙히 찾아오셔서 세밀히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자를 체험하게 하려 함인 것입니다.

 

다섯 번째 간구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12절) 인데, 본절에서 죄로 번역된 헬라어는 '오페일 레마타'(opheilemata, 영Debts)로서 '빚'에 해당하는 말입니다. 죄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해결될 수 없는 채무관계를 야기 시켰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진 모든 죄를 탕감해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진 이러한 탕감의 원칙들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확대되어 지기를 원하는 간절함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해 용서받은 우리가 마땅히 남의 허물과 실수를 용서해야 할 것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는 주님이 우리를 용서하신 사실에 근거하고 있으며 우리가 이웃을 용서(성도가 일상에서 범하는 허물에 대한 용서)함으로서 자신이 죄 사함받은 자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용서를 한없이 베푸시면서 죄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인내하심과 자비하심은 구원의 사역을 위함이며 우리도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 간구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인데 본절의 시험은(Peirasmon, 영Temptation) '시련의 때'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시험은 일반적으로 사단의 유혹으로부터 오거나 자신의 정욕에 이끌려 당하는 것입니다(약 1:13). 그러므로 사단의 능력과 악의 요소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해 주실 때에만 우리는 시험을 당치 않고 극복하며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지금도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벧전 5:8). 우리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시험을 피할 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고전 10:13). 이것은 구별된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 아래서만 모든 시험과 악으로부터 견디며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묵상하도록 노력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결론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13절)으로 하나님께 대한 칭송과 감사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칭송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대하여 감동하여 드리는 무한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모든 것은 축복이며 무한한 행복입니다. 이것을 당당하게 고백하는 믿음의 소유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의 것으로 고백하는 겸손한 사람이며 더 나아가 주님이 원할 때에 자신의 물질과 명예와 생명까지도 헌신할 수 있는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입니다.

 

 

8.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성경적인가?(6장)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리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19~21)

Do not lay up for yourselves treasures on earth, where moth and rust destroys and where thieves break in and steal but lay up for yourselves treasures in heaven,  where neither moth nor rust destroys and where thieves do not break in and steal.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보물(thesaurous, 영treasure)은 예수님의 말씀가운데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의 칭송과 하나님의 보상을 비교하고 있습니다(마1~18). 하나님 나라는 이 땅의 모든 것을 팔아도 얻을 수 없을 만큼의 높은 가치가 있는 영원한 생명력있는 보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마13:44). 이것은 제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데 투자하는 시간과 에너지와 자원들은,  지상의 보화와 재물을 확보하고 잡는데 투자된 노력보다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훨씬 더 크고 영속적인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쌓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위해 재물을 사용하지 말라는 강한 경고의 뜻입니다. 이것은 실재의 상황에서 사람의 마음이(kardia) 그만큼 현실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주의적이란 결론에서 귀결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참으로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땅의 모든 재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잠간 위탁하신 것이라는 사실이며  인간은 단지 그 물질을 위탁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에 따라서 물질의 사용 용도를 행하는 사람이므로 결코 자신의 생각과 이익을 위해 재물을 활용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본래 재물 그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는 예가 허다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복음전파에 사용되는 것이 진정한 가치의 실현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진정 하늘에 보물을 쌓는 지혜로운 사람이며 그 마음이 천국을 향하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자본과 물질의 지배가 날로 확산되고 있는 물질만능주의가 만연되 사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과 물질에 굴복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물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재물의 유혹과 세상적 풍요와 행복에 빠져 재물을 섬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도의 삶에서 정도를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축복과 영원한 기쁨을 누릴 수 있다는 강한 믿음 속에서 이 땅에서 생명력있는 유일한 소망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9. 거짓 지도자와 참 지도자를 구별하는 표준(마 7:15~20)

 

마태복음 7장 13절에서 29절까지의 말씀에는 두 길(13~14), 두 나무(15~20), 두 고백(21~23), 두 건축자(24~29) 에 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양자택일적인 교육방법은 유대주의와 헬레니즘 철학에서 공통적으로 쓰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가지 방법론의 중심에는 항상 하나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정직하고 진실성있는 그리스도인은 분명 좁은 길과 같은 천국 가는 길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으며, 그 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가득히 맺혀 있고, 불법을 행치 아니하는 지혜로운 사람이며 반석위에 세운 건축자와 같은 삶일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pseudopr opheton)는 과거나 현재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마태가 복음서를 기록할 때에도 유대주의적이며 영지주의적인 경향을 가진 지도자가 상당수 있었습니다(골 2:8, 딤전 6:20~21, 요일 4:1). 그들의 특징은 양의 옷을 입고  온다는데 있습니다. 순진하고 온화하여서 외적으로는 전혀 손색이 없는 지도자로 보여집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탐욕과 포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례요한과 달리  그들은 의의 길을 따르지 않습니다(21:32). 노략질하는 이리들같이 자기들의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양을 멸망시키려 합니다. 순진하고 온화하여서 외모로는 전혀 손색이 없는 지도자로 보여지지만 내면에는 온갖 탐욕과 포악이 도사리고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백성으로 드러날 것입니다(마 7:21~23).

 

예수님의 경고는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 거짓 지도자들도 함께 있을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거짓지도자를 구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이며 그 가운데 첫째가 진실성(정직성)을 통하여 구별하는 것입니다. 거짓지도자는 이중인격자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양들을 기만하고 이용하려 들지만, 참지도자는 어린양들을 위해 자기의 생명까지도 희생하려 합니다( 요 10:11). 둘째로 열매를 통하여 구별하는 것입니다.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듯이 거짓 지도자들은 결국 그들의 악독함과 위선적 생활을 드러내고 말지만, 참지도자는 아름다운 열매(karpon) 곧, 사랑의 열매, 의의 열매, 생명의 열매, 성령의 열매를 많이 맺습니다. 예수님은 참 지도자로서 성도들을 위해 생명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성도들에게 생명의 삶, 소망의 삶, 은혜가 풍성한 삶을 주셨습니다. 

 

이와같이 좋은 나무는 가라지의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좋은 씨같이(마 13:37~38) 하나님께서 심으셨고(마 15:13) 하나님께 속하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것들을  행함으로 즉, 하나님의 뜻을 행함으로 구별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agathos).

 

 

10.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 (마 9:9~13)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생애를 살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의 순수한 구원사역이 당시의 정치, 종교지도자들의 경계와 핍박의 대상이 되었음을 끊임없이 보게 됩니다. 마태복음 9장에서도 중풍병자의 치유(1~8), 세리 마태 집에서의 식사(9~13), 두 소경의 치유와 귀신의 추방(27~34) 등의 이적 뒤에는 이에 대한 당시의 정치 종교적 기득권층의 질시와 비방이 항상 따라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정치적 혁명이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진정한 정의와 사랑을 가르친 예수님의 교훈이 결과적으로 권력자의 탐욕과 부패의 죄악성을 여실히 드러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세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게 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특정 정치, 경제, 사회의 비판에 앞서 보다 궁극적인 신앙과 정의의 회복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 땅의 어떤 제도도 완벽할 수는 없지만 신앙의 빛은 그 자체가 남을 온전케 해 줄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지도자들이 악하였지만 그들을 정치적, 군사적으로 대항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이기시되 평화적, 비폭력적, 희생적, 훈육적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정치적으로 부패한 그들과 야합하지도 않으셨으며 오직 빛과 같은 말씀으로 어두움을 비추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상호인정과 우의, 평화와 사랑, 언약 공동체의 확인을 의미하는 표시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예수께서 세리, 죄인(sinner)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의미가 깊은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전율법인 할라카(Halacha)가 죄인으로 규정하는 창녀, 포주, 세리와 같은 저급한 직업에 종사하는 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이런 자들과 함께 했다는 것은 예수께서 친히 낮아지심으로서 죄인을 사랑하시는 구주시요 친구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보통사람들은 죄인들과 함께 함으로서 죄의 속성상 그 영향을 받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의 악을 정화시킴은 물론 의인인 척 착각하는 바리새인들보다 자신의 죄로 인하여 갈등하고 연민하는 영혼들에게 먼저 찾아가셨다는 점에서 깊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무조건 의인을 버리고 죄인을 구원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의인이 단 한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롬 3:10). 이 말은 스스로 죄인임을 고백하고 예수를 믿으며 구원을 갈급해 하는 자들을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킴으로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하며 의인인척 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한 경고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모두 지키는 척 자랑하며 자신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보통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려고 노력하지만 결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도 오랜 신앙생활로 인하여 형식적이고 제도적이며 습관적인 교회생활을 답습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며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는 긴장된 삶을 살며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길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눅 18:13).

 

 

11. 예수님으로부터 안식을 얻는다는 말의 의미와 안식의 삶에 대하여 (마 11:28~30)

 

모든 사람들에게 베푸신 이 위대한 구원의 초청은 삼중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첫째, 와서 구원을 받으라. 둘째, 제자의 도를 배우라. 셋째, 멍에를 메고 주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멍에는 규범아래서의 훈련입니다.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대조적으로 예수의 멍에는 의외로 쉽습니다. 이 구절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 희망적인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원어인 헬라어의 문법적 상황을 이해하면 더욱 깊은 이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즉, '수고하고' 는 능동태이고, '무거운 짐 진' 은 수동태이며, 또 양자 다 그 시제가 동작과 상황의 연속을 암시하는 현재분사로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스스로가 또 타의에 의해서 세상 짐에 억눌려 있는 가련한 우리를 부르시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꼭 짝(pair) 이 되어 두 사람이 함께 메었는바 예수께서 주신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함께 메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쉼은 일상적인 우리의 휴식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말씀입니다. 여기서의 쉼은 만족, 평안, 휴식, 즐거움을 총칭하는 것으로 이미 천국이라는 영원한 쉼터가 있으나(막 4:26~29) 종말에 가서야 완성되듯이 성도의 영혼의 쉼도 점점 더 확장되어가는 전진적이며 생명력있는 쉼입니다. 주님의 멍에가 쉽고 가벼움은 결코 예수의 가르침보다 더 준엄하고 엄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짐은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는 것이기 때문이며, 선하고, 바르고,  너무나 좋은 것이기 때문이며, 나 혼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랑으로 메기 때문에 가볍고 우리에게 쉼을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죄의 짐을 지고 고통하며 장차 임할 무서운 심판 앞에서 불안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참 안식을 주시기 위해 그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순종하여 주님께로 나아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는 자는 누구든지 참 안식에 들어가는 축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안식은 곧 구원이며 장차 누리게 될 영원한 천국과 안식을 이 세상에서 미리 체험한다는 의미에서 영원한 안식과 직결됩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이러한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며 거룩하게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일만을 거룩하게 지키며 나머지 6일을 통제 불능의 상태에서 세상적으로 사는 관용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된 삶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매일매일 구원의 기쁨 속에 감사와 찬송이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은 마태복음의 기록목적과 그 성격에 관하여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시학자들은 12장을 마태복음의 핵심장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실 마태는 복음서의 첫장을 통하여 메시야, 즉 왕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족보까지 나열하며 확증하려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으로서의 기능과 지위와 권력을 전혀 행사하지 않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의 저항은 죽음이라는 극한 상황을 초래하였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은 안식일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먹은 일과 예수께서 회당에서 병자를 고쳐준 일들에 관하여 종교지도자들과 극심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12장 8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말씀하면서 그 논쟁의 종지부를 찍은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장은 끊임없는 논쟁과 협박과 조직적인 처형과정 속에 고독한 진리의 계승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12. 성령을 훼방하는 죄 (마 12:31~32)

 

마태복음 12장 22절에서 32절의 말씀은 바리새인에 대한 강력한 경고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서 그가 다시 보고 말할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바로 다윗의 자손으로서 메시야가 되심을 증거하는 표적이었습니다(마11:5). 동시에 이것은 사단에 대한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오히려 예수님이 귀신 왕 바알세불 곧 사단의 하수인으로 그의 능력에 힘입어 이런 일을 했다고 주장 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메시야에 대한 증거를 억지로 왜곡한 것으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죄였습니다.

 

그러므로 훼방이란 특히 서기관들의 행위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뚜렷하게 남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의 사역을 사단의 일로 돌리는 것도 성령을 훼방하는 심각한 죄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스스로를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미칠 수 없게 한다는 뜻이며 영원한 소망이 없는 위치에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의 사역을 믿지 않는 것은 성령의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며 이것은 살아계신 인격체인 하나님을 모독하고 훼방하는 것임과 동시에 사단의 동조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즉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난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을 부인함으로서 결국 불신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으로 여전히 죄의 종노릇하는 상태에 있으므로 결코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들이 범하는 것과 동일한 죄의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만 아니라 부인하고 훼방하는 죄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가 되는 것입니다.  

 

 

13. 예수님께서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신 근본이유(마 13:10~15)

 

마태복음 13장 1절에서 52절까지의 천국의 비유는 본서의 5대 강화(discourse) 중 제 3 강화인데 천국 비유집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모두 7가지의 천국비유가 나오는데 천국비유들은 천국의 현재성에서 미래성까지를 종합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과 함께 이 땅에 도래한 천국이 최종적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되어 가는 과정을 몇 가지로 나누어 비유한 것입니다.   

 

먼저 천국복음의 전파단계가 1) 씨뿌리는 자의 첫째비유(3~9)로 제시되고 그 결과  이 땅의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백성이 함께 섞여 살게 된 상황이 2)가라지 비유(24~30)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 후 점점 더 확장되어 가는 교회운동의 외적 측면이 3)겨자씨 비유(31~32)로, 내적측면이 4)누룩비유(33)로 보여지고 나서 참 천국을 그 마음에 소유하는 자의 기쁨이 5)감추인 보배 비유(44)와 6)진주 비유(45~46)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끝날 참 교회의 성도와 세상의 백성들 사이를 완전히 구분 짓게 되는 대사건이  7)그물비유(47~48)로 암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비유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관점은 완전한 숫자인 7가지 비유를 통하여 천국의 절대성과 완전성과 거룩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함이며, 또 하나는 천국 비유의 생활처럼 천국도 일상생활처럼 분명하고 확실한 실재의 삶인 것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서 전반에 걸쳐 주님께서는 중요한 영적 진리들을 비유를 통해 전달하셨습니다. 그것은  첫째 영적 이방인들에게 진리를 은폐하기 위해서 였습니다(막 4:10~12).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외식과 구전을 율법과 동일시한 것을 정면으로 공격하셨고(마 23:13~36, 막 7:1~13), 사두개인들의 교리와 종교적 권력의 남용을 질타하셨습니다(막 11:15~19, 12:18). 또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정치적인 의미로 곡해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주님께서 정치적인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메시야라는 명칭을 공개적으로 사용하셨다면 그들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을 것입니다. 따라서 비유를 통해 말씀하셨고 이는 대적자들이 고소할 조건을 찾기에 부족하게 만들었습니다(막 14:55~59).

 

둘째, 주님께서는 영적인 교훈들을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비유는 질문을 제기했던 율법사와 청종들에게 이웃사랑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고, 탕자의 비유는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 주님께서는 청중들의 적대적 의도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비유를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그리고 그것이 임하는 모든 영역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즉 복음을 신앙하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인정하고 그 비밀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있는 많은 무리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직접적으로 듣는다 해도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그 의미를 모르거나 왜곡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야로 영접하는 자들, 곧 복있는 자들(마13:16만이 그 의미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고의로 비류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처럼 거룩한 천국이 그리스도의 박해자, 훼방자, 외식하는 자들 앞에서 무시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침해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깊은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마7:6)

 

 

14.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태도와 그 조건 (마 16:24~27)

 

마태복음 16장 13절에서 28절까지의 말씀은 신약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13~20절은 메시야직, 22~23절은 속죄에 관한 말씀, 그리고 본문은 제자직에 관한 말씀 등 세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제자들의 잘못된 메시야 왕국관을 깨우쳐 주신 예수는 이제 그 나라의 일군으로 일할 제자직의 본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와 아울러 예수께선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분명히 종말론적 축복이 주어질 것을 역설하고 계시는데 이는 우리들에게 장차 예수와 함께 영광을 누리기 위해서는 현재의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롬 8:17)을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죄와 파멸 그리고 죽음으로 묶여 있는 것을 자각하고,  그리스도에게서만 구원을 찾으며 죄에서 돌아서는 것을 말합니다. 자아를 이처럼 부인할 때 그리스도가 우리 속에 들어오시며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자신을 낮추는 척,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는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최고로 여기며 주님의 말씀에 온전한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을 말합니다(빌 3:8).

 

또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적극적 의미에서 능동적으로 진리를 위하여 고난을 자청하는 이 두 가지가 제자들에게 동시에 요구되고 있습니다. 한편 이때까지 예수는 당신이 십자가형을 당할 것이라는 것(막 15:21~32)을 말씀하지 않았으므로 예수께서 죽으신 후 이 말은 단순한 상징을 넘어 엄숙한 제자 결단의 조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즉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의 생명을 주님의 것으로 간주하고 주님이 원하시면 생명까지도 즉시 드릴 수  있는 자세로 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목숨이란 헬라어로 '프뉴마' 인데 이는 '영혼' , '생명' 으로도 번역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에 집착하여 자신을 부인하거나 죽음에 넘기우지 못하는 것을 의미하며,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명에 집착하지 않고 부인한 상태에서 주님을 위해 온전히 헌신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 그 어떤 수치와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오히려 기쁨으로 여기고 오직 주님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목이나 귀에 거는 장식품 정도로만 여기고 세상 명예와 이익을 위해 삶을 쫒으며, 작은 일에도 자아를 드러내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십자가의 의미를 전혀 알지  못하는 무지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미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갈 2:20).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흘리신 피값으로 대신 사신 주님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더 이상의 나는 없고 오직 주님만이 나타나는 삶의 태도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15.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결혼관(마 19:3~12)

 

그동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메시야적 권위에 근거한 여러 행동들에 대하여 도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종내는 예수를 자기의 종교적 신념으로 죽이기 위하여 각종 신학논쟁을 획책하여 왔습니다(마 9:1~13, 12:1~21, 15:1~20). 마태복음 19장 1절에서 12절까지의 본문 말씀도 역시 이혼문제와 관련한 결혼관에 대하여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세례요한이 헤롯의 부당한 이혼을 비판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처럼(마 14:3, 막 6:17~18) 이 문제는 미묘한 성격을 띤 논쟁거리였습니다(마 14:1~12). 그리하여 바리새인들은 얼핏 이론적인 듯한 이 논쟁을 통하여 예수님을 정치적 곤경에 넣고자 시도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논쟁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참모습은 21:23~ 22:46 에 가장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결혼의 원리는 인간의 복잡한 이론으로 설명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로서 하나님의 축복하신 순결하고 신성한 생명유지의 법이었다는데서 찾아야만 합니다(고전7:25~38). 당시 유대 율법자들의 가장 큰 맹점은 모든 권위의 기준을 하나님의 창조 질서 자체 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자기들의 지식과 율법조항에서 찾으려는데 있습니다. 당시 이혼의 합법적인 근거에 대하여 랍비들의 의견은 분열되었습니다. 

 

보수 율법주의자였던 '샴마이' 추종자들은 남편이 아내에게서 성적인 불륜을 찾지 못하면 이혼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자유주의 율법자였던  '힐렐' 의 추종자들은 사소한 것 까지를 포함한 여러 가지를 이혼의 이유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 지배적이었던 이들의 견해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께서 남편과 아내를 창조하신 근본목적을 인용했습니다(창 1:27, 2:23~24). 예수님께서는 창세기 1장을 통하여 4가지 원칙적 사실을 암시하였습니다.

 

1) 창세기 1장의 창조기사는 한낱 설화나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인 실제사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했으며,

2) 결혼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고,

3) 일부일처제는 한 남자인 아담과 한 여자인 하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으며,

4) 하나님께서는 결혼의 가족 공동체를 깨는 이혼을 싫어하신 것입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성적 합일체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전인격적 차원에서 하나님의 법과 생명을 전제로 한 공동운명체가 됨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당위성을 설명함으로서 개인의 가치관과 판단에 따라 이혼하는 일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이혼규약이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창조원리와 더불어 결혼도 창조하셨는데 죄는 결혼관계에서도 큰 해독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죄는 사람을 완악하게 했으며 이 완악함은 결혼을 하나의 속박으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이 속박을 풀고 싶어합니다. 모세의 규약은 인간의 이러한 완악한 상태에 대한 양보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처럼 모세의 규약을 통해서 사람의 완악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모세의 이혼규약으로 결혼의 영구성과 순결성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뜻을 변경할 수 는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9절 말씀은 성도의 결혼관이 얼마나 엄정하고 철저한 것인지를 잘 보여줍니다. 당시로서는 간음은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었습니다(신 22:22~29). 그런데  십계명은 어기지 않았지만 성적 탐닉을 하는 방법만으로도 이혼에 해당했던 것입니다(잠 5:15~19, 히 13:4).

 

창세기 2장 24절 말씀은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는 결혼에 대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남자가 부모를 떠나는 것입니다. 즉 결혼이란 부모의 의존과 보호로 부터 독립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결혼한 남자가 정신적, 사회적으로 계속해서 부모에게 의존하여 있기 때문에 부부갈등,  고부갈등 등의 가정불화가 생기는 것입니다.

2) 아내와 연합하는 것인데 결혼이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뜨거운 사랑과 신뢰로 연합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결혼생활은 잘못된 것입니다.

3)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녀간의 성적 연합을 의미합니다(고전 7장). 주님께서는 결혼이 인간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 짝 지워진 엄숙한 제도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6절).

 

현대 사회에서는 이혼율이 급증하고 결혼관과 가정관이 파괴되는 경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유명연예인들의 이혼과 불륜과 재혼의 습관적인 풍토는 성경적으로 아주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에게서 이혼문제는 아주 심각한 것입니다. 성격, 빈부격차, 교육정도 등 많은 이유로 이혼이 더 이상 수치가 아닌 우리 사회에서 기독교인의 이혼은 세상이 아닌 하나님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인 것입니다.

 

이혼이 낳은 사회적 문제의 심각성은 당사자 간에도 평생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가 남게 되지만 더 무서운 것은 자녀들의 문제입니다. 이들의 대부분이 결손가정으로 분류되어 문제 청소년이 되는 악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부모의 잘못으로 인해 자녀들이 평생 어두움 속에서 지낼 수도 있는 죄를 되물림하는 아주 나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혼이 가능한 것은 간음죄(마 19:9)와 불신으로 인한 이혼요구(고전 7:15) 두 가지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성경관을 이용하여 이혼의 명분있는 도구로 사용할 것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과 기도로 끝까지 인내하며 우리를 지금까지 기다려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하며 가족공동체를 지킬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독신주의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은, 수동적 의미에서 결혼생활의 결격사유자로 볼 수 있는 1) '태로부터 된 고자' 와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철저히 헌신하기 위하여 결단한 자로서 단순한 금욕이상의 능동적 봉사를 행하는 자로 볼 수 있는 2) '스스로 된 고자' 를 독신으로 지내는 경우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녀의 결혼제도를 정하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축복을 하셨습니다. 결혼생활을 통해서 남편과 아내와 가족의 사랑을 체험하고 성도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것이 기독교 가정의 바른 자세일 것입니다.

 

 

16.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려운 원인과 말씀 (마 19:23)

 

마태복음 19장 16절에서 30절까지의 말씀은 부자청년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막10:17~31, 눅18:18~30).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고 고백하면서 내심으로는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는 부귀와 권세, 쾌락과 교만을 더 원하는 자, 또 눈앞의 쾌락을 누리면서도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하는 실존적 불안가운데서, 참 믿음이 아니라 조건적 행위로 구원을 얻으려 하는 자들의 잘못과 위험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 내용은 특히 휴머니즘과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큰 교훈을 주면서 동시에 많은 고민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성경 내용으로 볼 때 부자청년은 외면상으로 볼 때 아주 모범적이고 건전한 생활을 하는 선한 부자였습니다. 그는 부자이면서 도덕적으로도 훌륭했고 종교적 열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지킬 때 그의 진정한 부족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율법은 지키면 지킬수록 자기 부족을 더욱 깨닫게 만듭니다. 외형적인 율법을 불안하게 지켜왔던 이 청년에게서 예수님이 지적한 그의 부족한 부분은 바로 물질이었고 이것은 청년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그가 소유한 물질관으로 인해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부자청년의 신앙적 고민도 바로 물질이었습니다. 그 물질의 소유와 선택과 방향과 쓰임의 용도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부자청년은 스스로에게 권한이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의 물질은 곧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십일조라는 것에 그 정당성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아닌데 십일조를 내라는 것은(말라기3:10) 세리들과 다를 게 전혀 없는 착취일 것입니다. 십의 십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감사하는 의미에서 그 본질을 항상 잊지 않고 살아가고자 하는 계약적 의미에서 십일조는 상징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도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두 물질만능주의를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실재적이고 명확한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 부자 청년과 같이 물질과 신앙의 두 가지 문제 앞에서는 끊임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신앙인지 우리 스스로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세상의 재물과 쾌락, 그리고 돈의 힘에서 만족을 찾고 이것을 지키며 보전하려는 욕구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그러한 물질의 힘으로 권력과 명예와 사랑을 쟁취하기도 하며 모든 사람들의 주목과 관심을 받기도 하는 것에서 더욱더 그러한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부자들 주변에 그만큼 사람이 많이 따르는 것도 바로 그 사람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가 소유한 물질 때문인 경우가 더욱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돈으로 허물도 덮고 돈으로 내가 원하는 물질과 내가 원하는 이성도 얻을 수 있다는 물질만능주의는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한 최면처럼 서서히 다가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때문에 다른 것은 양보해도 물질 만큼은 양보할  수 없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에 무관심해져서 죄의 문제, 구원의 문제에 대한 해결을 얻을 수도 없고 얻으려는 욕망도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24절 말씀에서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침공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곳을 통과 하려면 약대가 싣고 가는 짐을 모두 내려놓고 약대만 겨우 지나가게 되는 곳이라 하여 침공문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생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주님을 따르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과 같은 맥락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형식적이고 타성적이며 물질만능주의에 편승되어 있는 현대 기독교인들을 위하여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단상에서 축복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아 십일조가 풍성해지고 교회의 많은 일을 하는데 쓰도록 하자는 좋은 취지와 의미를 담고 있지만 바로 거기에 사탄마귀가 물질만능이라는 위험요소를 아름답게 포장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모여 있지만 물질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진리처럼 과용되고 있는 현대교회는 여전히 하나님께 그 답을 찾으려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성경 그 어디에도 물질로서 하나님의 역사를 바로 세워가는 예는 없었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가 끊임없는 세월의 변화 속에 진리를 조금씩 훼손하여 변질을 시킨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물질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분이며 모든 것이라는 것을 항상 깨달으며 되새김질하는 삶이 전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은 물질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기인한다는 분명한 원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물질로 부터 자유하며 하나님만으로 살 수 있는 힘이 있는가 하는 것인데 그것은 원래는 가능한 것이었지만 우리의 죄로 인하여  온전한 삶은 불가능합니다. 다만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회개의 삶과 말씀을 늘 가까이 하려는 습관을 통하여 스스로를 견제하며 다스리고자 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단에서 쏟아지는 물질에 대한 축복의 메시지가 우리에게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영적인 신앙인들은 지각하며 느껴야 할 것입니다. 

 

 

17.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세상 나라의 질서와 다른 점 (마20:25~28)

 

마태복음 20:20~28 절의 말씀은 18:1~4에 나오는 사건을 재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장은 어린아이에 대한 교훈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고 겸손해야 하며 또한 교회공동체에서 어린아이를 아무 생각이 없는 아기로 취급하여 열외대상에 놓고 실족시켜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아울러 어린아이처럼 낮아지는 삶, 순결하고 연약한 성도의 삶으로서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지하고 구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모든 삶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목표가 분명한 삶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0장은 이러한 18장에 나와있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어리석음에서 나온 것으로 순수성을 잃어버린 상호 비교하며 경쟁자의 심리가 강한 어른의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것입니다. 서열화와 우월성에 습성화 되어 있는 어른들의 사고는 자기중심적이고 권력에 줄을 서려는 탐욕에 익숙해져 있는 삶의 형태를 나타내는 보편적인 유형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21~23)과 17장(22~23), 그리고 20장(17~19, 막10:32~34, 눅18:31~34)에서 기록하고 있듯이 예수께서 수난과 관련되어 있는 자신의 메시야적 사역에 대해서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베대의 아내가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주의 좌, 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간청한 것과,  이에 대해 열 제자가 분히 여긴 것은 저들이 아직 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메시야적 사역의 성격을 오해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막10:32~34).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는 살로매를 가리키고 두 아들은 사도 야고보와 요한을 말하고 있습니다(마4:21).

혹자는 살로메가 예수의 모친인 마리아와 자매지간일 것으로 추정하는데 그렇다면 살로메는 예수의 이모, 야고보와 요한은 이종 사촌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그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정치적 메시야로 곡해하는 잘못을 범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살로메는 예수의 친인척으로서 당연한 권리를 요구하며 청탁을 생각한 것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살로메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보다는 유대의 통치자요 권력자로 잘못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나라는 장차 그리스도께서 의로 통치하실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는 세상 종말에 완성될 나라라는 측면에서 미래적이기도 하고(마6:10,16:28),  예수님의 지상사역으로 말미암아 이 나라가 이미 이 땅에 근간을 두었다는 측면에서 현세적이기도 합니다(눅17:21). 구약에서의 잔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징하는 말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시75:8, 사51:17).

 

마태복음 20:22~23절에서는 이 말을 자신의 죽음과 관련지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잔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죽음에 동참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과 방향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 잔을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아 함께 마실 영광의 축배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는 장래에 어떤 식으로든 예수의 수난에 동참할 자들이었습니다. 야고보는 12사도 중 최초로 순교하였으며(행12:2), 요한과 그 외 제자들도 예수의 복음을 인하여 많은 수난을 당하였습니다(고후11:23~27). 

 

예수께서는 살로메와 그의 아들들의 일로 심히 분해하는 제자들에게 자기를 낮추는 삶이 될 것을 강력히 경고하고 있으며, 이것이 천국백성의 삶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마20:26). 이 말씀은 세상의 성장원리와 정면으로 배치될 수 있고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 그의 낮아지심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겸손의 모범을 친히 실천하심으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의 성육을 통하여 인간 최저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스스로 종의 형상을 취하시고 항상 남의 궁핍함을 돕기 위해 활동하셨습니다. 그는 수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시며 용서하신 구주이십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여기심으로 희생의 의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의 겸손의 최고의 모범은 그가 친히 자기의 생명을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위하여 대속물로 준 사실에 있습니다(마20:27~28).

 

이러한 원칙들은 세상의 원칙과는 대조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모순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질서는 섬김과 봉사와 겸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맛보고 살아가는 성도는 이러한 질서에 순응해야 할 것입니다. 높아지고자 하는 자는 낮아지며 낮아지고자 하는 자는 높아진다는 성경말씀의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18.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는 성전의 의미 (마 21:12~17)

 

니산월 9일인 안식일(토요일)에 벳바게에 도착하신 예수님(마21:1)께서 주일(니산월 10일)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마21:2~17). 이 날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1주간으로서 고난주간 첫주일이 되며 고난주일 또는 종려주일이라고도 합니다. 본문성경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월요일에 예수님께서 성전 정화를 하심으로 교회의 원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B.C. 966년 솔로몬왕에 의해 기공되어 959년에 완공되었습니다(솔로몬 제 1성전). 그 후 성전은 파괴되었고 스룹바벨에 의하여 B.C. 516년에 재건되었습니다(제 2성전). 다시 헤롯에 의해 복구작업이 시작되었는데 그 성전이 바로 헤롯의 제 3성전입니다. 이 성전에서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은 외국돈을 성전에서 통용되는 돈으로 바꿔주거나 성전관리를 위해 모든 성인들이 내야 하는 반 세겔로 바꿔주는 자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어  폭리를 취하는 일을 겸업했습니다.

 

또 다른 무리인 비둘기 파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값비싼 짐승을 헌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둘기로 대신 드렸는데 이것을 파는 사람들이 성전내부까지 들어와 상행위를 하였던 것입니다. 자칫 이러한 일들은 당시의 어려운 교통이나 금융거래의 어려움을 감안한다면 납득할 수 있는 일들로 여겨질 수 있으나 성전 본래의 기능과 메시야의 구속사역으로 볼 때  아주 위험한 사고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처음에는 성전 밖에서 이루어졌으나 점차 성전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급기야는 서로의 이익을 많이 남기려는 욕심에서 불의한 방법이 난무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성전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제사를 위한 성서로운 곳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또한 이들로 말미암아 성전 제단에 바칠 마음의 준비를 미리하는 것이 아니라 편리에 따라 주일인 당일에 와서야 하는 예배의 준비성마져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엔 좋은 의미에서 시작된 이러한 상황들은 오늘날 우리의 예배드리는 모습과도 흡사한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도 오랜 신앙생활로 인하여 타성에 젖은 예배준비가 되고 있고 이러한 의미없는 참여가 습관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정화를 이룩하는 과정에서 교회를 "내 집"이라고 표현하였으며, 또한 "기도하는 집이라"(마21: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교회를 내 집이라고 표현함으로서 교회의 소유권에 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신 것입니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예수님의 방침이 변한 게 없다면 우리가 다니고 있는 교회 또한 그 소유권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정작 예수님은 빠지고 교회의 정치지도자들의 전유물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성해 보아야 할 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교회를 기도하는 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본래의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가 오늘날 우리 교회를 보며 되짚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기도보다는 각종 문화센터와 교양강좌, 굳게 닫쳐져 있는 본당, 아무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는 각종 시설물들, 교회는 지금 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변명으로 항상 진리를 훼손하지 않는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점점 축소되고 자유의 덩어리는 한없이 커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의 본래 기능이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 이라고 하셨으며 이를 회복시키고자 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성전의 기능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에 대한 예표였음을 나타낸 것이며 자신이 바로 메시야임을 공포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실 때에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진 사건은 성전의 기능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통한 구속의 완성으로 끝난 것을 의미합니다(마27:51). 결과적으로 주님의 성전 정화사건은 자신이 바로 성전의 기능을 완수할 메시야이며 구세주이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19.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7가지 화 (마23:5~36)

 

마태복음 23:1~39의 말씀은 고난주간 3일째인 화요일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수께서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3가지 질문과 그들에 대한 자신의 질문(마22:15~46)을 마무리 지으며 외식하는 자들에게 주신  경고로서 다른 공관복음서(막12:38~40, 눅20:45~47)에는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지만 본서에는 아주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수의 경고는 설교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서론(마23:1~12)에서는 바리새인들의 근본적인 종교적 결함을 지적하면서 성도들이 지켜야 할 올바른 종교윤리를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론(마23:13~36)에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7가지로 지적하면서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결론(마23:37~39)에서는 외식하는 자들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장차 멸망당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일곱 가지 화'로 불리워지는 본문 성경은 누가복음 11:37~54절에 나오는 여섯 가지 화와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첫째 화와 둘째 화(마23:13~15)는 자신뿐만 아니라 구원을 얻으려는 다른 사람마져도 실족케 한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셋째 화(마23:16~22)와 넷째 화(마23:23~24)는 하나님 앞에서 전도된 가치판단을 드러내는 자에 대한 경고입니다. 다섯째 화(마23:25~26)와 여섯째 화(마23:27~28)는 외식주의자들에 대한 경고이며 마지막 일곱째 화(29~36)는 선지자를 박해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죄악은 살인이나, 간음, 도적질 같은 것이지만(마19:18) 그에 못지않게 증오하시는 죄악이 곧 외식행위와 형제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행위(마15:14)임을 알 수 있습니다(막7:1~23).

 

예수께서 선고하신 '화'는 단순히 분노에 의해서 내리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엄숙한 심판으로 선언되어진 것일 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무한한 연민을 나타낸 것이며 또한 미래에 대한 예언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화는 두 가지 국면과 관련되어 있는데 첫째는 지금 곧 임할 현세적인 심판(마24:1~2)과 재난과 관계되어 있고, 둘째는 영원한 세계에서 받게 될 형벌과 관계되어 있습니다(계20:7~15). 결과적으로 예수께서 이같이 화를 내신 것은 외식하는 자들을 자복하고 회개시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인내와 노력을 하셨는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첫 번째 '화'(마23:13~14)를 받는 이유는 그들이 오히려 천국문을 닫는 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죄의 성격은 '외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스스로 잘못 해석함으로서 자신들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하는 율법을 신앙하는 사람들까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초래한 돌이킬 수 없는 우(愚)를 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무서운 화를 선언하심으로 복음을 잘못 전하는 자들을 경고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사역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예수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것이지 바리새인들의 율법을 행하는데(마19:16) 있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화'(마23:15)는 이교도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이 그들의 선생인 바리새인이나 사두개인을 보고 배워서 이제는 이교도의 악에다 유대인의 악덕까지 더해진 것에 대한 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을 지옥자식에 비유했는데 지옥이란 헬라어로 '게헨나'인데 문자적으로는 예루살렘 서남쪽 '힌놈의 골짜기'(왕하23:10, 대하28:3, 렘2:23, 7:31)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곳은 아하스왕 이후에 몰렉신을 위해 아이를 불에 태워 제사를 드리던 곳으로 '영원한 지옥의 불 형벌'을 나타낼 때 이곳의 이름이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가르친 잘못된 신앙때문에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화를 선언받게 된 것입니다.

 

세 번째 '화'(마23:16~22)에서 바리새인들은 성전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으나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잘못된 해석을 내린 것입니다. 이러한 그들의 잘못된 해석은 물질을 탐내는 세속적인 가치 기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성전보다 성전을 장식하는 금을 더 귀하게 여겼고 거룩한 제단보다 제단에 받쳐진 예물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이 같은 배경에는 맹세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신앙을 과시하려는 허영심이 나타나 있으며 현세적이며 물질주의적인 사고가 그들의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내에서 물질만능주의 사상은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의와 사랑을 통째로 삼켜버리고도 버젓이 군림하고 있습니다. 말씀으로 해결하여 회개해야 할 문제까지도 물질로 적당히 해결하려는 경우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만연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것을 은혜라는 이름으로 수용하고 허용되고 있습니다. 신앙과 교회활동이 물질로 주도된다면 바리새인들에게 임한 화가 우리에게도 똑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 '화'(마23:23~24)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외형적인 면은 지나치게 강조하면서도 율법의 근본인 의와 인과 신은 완전히 무시해 버린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의는 공평과 판단, 인은 자비, 신은 성실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신앙본분입니다. 그러나 바래새인들은 이러한 율법의 근본정신을 버리고 율법의 형식만을 추구하다가 무서운 저주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포도주를 마시기전에 망으로 걸러내는 작업이 있는데 그것은 불결한 곤충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며, 하루살이나 약대도 불결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처럼 오늘날 거룩하고 구별된 삶을 외면한 채 십일조 헌금이나 물질을 내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 처럼 하는 성도들에게도 바로 이 네 번째 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다섯 번째 '화'(마23:25~26)에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외식적인 삶이 겉은 깨끗하나 안에는 온갖 더러움이 가득한 그릇으로 비유되었습니다. 즉, 그들의 외모나 품성은 거룩하고 아름답게 나타나지만 그들의 내면적 삶은 탐욕과 방탕과 온갖 더러움이 가득한 불의의 삶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중인격자들에 대한 주님의 경고를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악에 물든 마음을 깨끗케 하는 일은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고 오직 심령을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셔야만 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케 하려 하는 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고 그 앞에 엎드려야 하는데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내려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실 뿐만 아니라(잠3:34), 그를 구원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욥22:29).

 

여섯 번째 '화'(마23:27~28)는 유대인들의 외식적인 종교 상태를 말하고 있으며 그들의 이중적인 삶의 습관적인 태도를 죄악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일컬어 '회칠한 무덤'(27)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겉과 속을 아름다움과 죽은 자의 뼈와 추잡함(27)으로 비유함으로서 이러한 양극단의 신앙인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일곱 번째 '화'(마23:29~36)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외식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당대의 의인이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 요한으로부터 저주를 받을 만큼 사악하였으며(마3:7), 또한 거리낌 없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그리스도를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을 정도로 잔인무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구약시대에 순교한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세우면서 자신들이 조상 때에 있었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 조상의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니 강퍅하기 그지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그들의 실상을 꿰뚫어 보시면서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고 말씀하시면서 저주를 선고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이러한 자들을 바라보시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라고 그들을 비난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선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야 말로 사단의 앞잡이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반대하는 자들임을 선언한 것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서 좋고 나쁨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마7:17~18). 우리도 말로만 갖는 미사어구와 선을 쌓는 일을 버리고 진정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20. 말세에 나타난 세 가지 징조 (마24:4~14)

 

마태복음 24:1~25:46 까지는 마태의 5대 강화중 제일 마지막인 감람산 강화(제5강화)를 말씀하고 있으며 마태복음 24장은 종말에 대한 예언 즉, 말세의 징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신구약에 나오는 모든 예언이 그러하듯이 예수께서 예루살렘 멸망에 관해 예언하고 있는 이 부분도 "예언의 복합성취"라는 개념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즉  이것은 1차적으로는 A.D. 70년경에 있을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2차적으로는 세상종말, 즉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날에 관해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부분의 각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어느 한 구절을 따로 떼내어 당시의 역사적 정황에 적용시키려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종말과 관련한 어떤 비의(秘意)를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종말을 맞이 할 성도의 자세에 대하여 역점을 두고 계심을 유의해야 할 것입니다(마24:4,13,23,33). 그것은 종말에는 각종 재난뿐 아니라 성도들을 미혹하려는 악의 세력이 횡행하는바 자칫 잘못하면 누구라도 쉽게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종말의 무서운 실상에 대하여 예언하시면서 그때에 자신이 큰 능력과 영광으로 재림하시어 성도들을 자신의 영광의 자리에로 불러 주실 것을 약속하심으로(마24:30,31) 우리들의 소망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에 나타날 징조 가운데 성도들에 대한 끊임없는 미혹과 유혹이 조직적이고 폭력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종교적인 미혹(마25:5), 난리와 소문과 전쟁(마24:6,7), 천재지변(마24:7), 흉흉한 민심(마24:9~10) 등 그 어떠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성도들을 천국문턱에서 끌어내리려 할 것입니다.

 

말세의 첫 번째 징조는 "자칭 그리스도라 하는 자들이 많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드다와 갈릴리 유다가 일어났고(행5:36~37), 어떤 애굽인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행21:38).

 

그 외에 많은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으며,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의 종말기에는 더욱 많은 거짓 그리스도가 여기저기서 일어나 성도들을 반드시 유혹할 것입니다(요일2:18). 그러므로 성경은 고린도후서11:13, 데살로니가후서2장, 디모데전서6:3 등 여러 곳에서 이러한 거짓 그리스도를 경계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말세의 두 번째 징조는 "난리와 난리의 소문"입니다.

난리 곧 전쟁은 가까이에서, 그 소문은 멀리서 백성을 위협하는 것입니다. 또 곳곳에 기근과 지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근은 전쟁의 산물입니다. 말세에 종족과 국가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기근으로 인한 것입니다. 앞으로 인구의 팽창과 지구의 오염으로 식량문제와 물부족 문제는 더욱 심각해 질 것입니다. 지진 또한 말세의 징후 중 하나입니다. 지진은 하나님의 진노의 표시로 나타나며 말세의 심판징조입니다. 이러한 무서운 천재지변은 말세의 분명한 징조로서 오늘날 현재에도 끊임없이 겪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각국의 기아사태, 멕시코와 중국과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지진과 홍수들,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온현상, 중동지역을 비롯한 세계전역의 분쟁지역 등 성도는 이러한 일련의 현상들을 바르게 직시하며 주의 재림이 가까운 줄 알고 깨어 있어 신앙생활을 바르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성도들은 때의  표적들을 억지로 하나님의 은밀한 계시로 여기고 짜 맞춰 보려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말세의 세 번째 징조는 "박해"입니다.

초대교회 때에는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아 순교했으며 오늘날에도 아무 이유 없이 미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마10:22, 요15:21). 밖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 많은 성도들이 핍박을 당하고 교회 안에서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미혹을 받아 시험에 들어 성도를 팔아넘기고 서로 미워하고 불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서 수천년을 이어오던 교회공동체가 위협받고 해체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또 한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마7:15,24:5, 딤후2:17~18) 말씀으로 성도들을 유혹하고 미혹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공격대상에는 믿음이 성숙되어져 가는 영성을 갈급해하는 심령에 타격을 주고 있는 경향이 매우 강한 것입니다. 그것은 말세에 믿음이 연약하고 신앙이 약한 사람은 그대로 두어도 스스로 넘어지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4장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종말의 때에 신앙을 지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축복이 있음을 약속하는 것으로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 신앙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항상 깨어 있어 말씀과 기도로 무장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1. 예수께서 정하신 성만찬 제도의 의의 (마26:26~30)

 

마태복음 26장 17절로 부터 시작되는 유월절 성 만찬은 예수께서 죽음을 앞두고 맞이하는 마지막 저녁(목요일)이었습니다. 평행구절인 누가복음 22:7~13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말씀으로 유월절 식사를 준비한 제자는 베드로와 요한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식사를 준비한 장소는 예루살렘 성안의 한 다락방이었는데, 혹자는 그 집이 마가 요한의 집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확인되지는 않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이들은 유월절 만찬을 반드시 예루살렘 성안에서만 먹어야 했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예루살렘 성내에서 유월절 식사를 예비하도록 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제자들에게 유월절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신 까닭은 곧 죽으실 때가 임박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를 통하여 유월절 어린양이 식탁에 오르듯 자신의 육신이 인류를 위한 대속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질 때를 가르쳐 주려 하셨던 것입니다(막14:22~26).

 

유월절 만찬의 순서는 알 수 없지만 식사가 시작된 후 예수께서는 다시 한 번 자신이 가룟유다에 의해 팔릴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대제사장들로 부터 은 30세겔을 받은 가료유다가 그들에게 예수를 완전히 넘겨주는 것을 의미합니다(마26:14~16, 47~50, 막14:1~2, 14:18~21, 14:43~52). 이처럼 예수께서 자신의 수난에 대하여 재차 예고하신 까닭은 장차 그 일이 이루어졌을 때 자신이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킨 메시야라는 점을 제자들이 분명히 깨닫게 하기 위함이며, 자신을 파는 그 사람에게는 피할 수 없는 화가 임할 것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를 최측근에서 3년이나 함께 동행하였지만 그 분을 정치지도자 이상으로 보지 못하는 결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미 은 30세겔을 받고도 성만찬에 참여하여 오히려 예수께 되묻는 위선과 불신앙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의 마음속에 사단이 자리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눅22:3). 이처럼 사람이 성령에 속해 있지 않고 사단에 붙들려 있으면 그의 종국은 불의, 추악, 탐욕, 시기, 살인 등의 각종 죄악을 저지르며 더 나아가 예수를 배척하며 대적하는 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롬1:29~30). 가룟유다에겐 이러한 유월절 만찬이 자신의 인생을 회복하는 결단의 마지막 기회이기도 하였지만 그는 그것을 회개의 기회로 삼지 않고 저주의 결행을 강행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수십년을 교회만 왕래하며 인생의 취미생활 정도로만 여기는 불행한 삶이 될 것이 아니라 성령충만함으로 매일매일 회개와 은혜의 삶, 매일매일 십자가의 삶을 간구해야 할 것입니다.

 

성만찬의 의미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 은혜를 감사하는데 있습니다. 성만찬에서 떡은 그리스도의 삶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성찬식에서 떡을 떼며 포도주를 마시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살을 찢어주시고 피를 흘려주신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언약의 피가 요구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창6:18, 8:20, 출24:6~7). 이것은 상호간에 맺어진 언약이 생명을 두고 맺어진다는 언약의 엄중성과 공의성을 나타내기 위한 이유입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당신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당신을 믿는 그의 백성들과의 영원한 새 언약을 세우신 것입니다(히7:22, 8:6).

 

성만찬에 대한 견해는 각 교파마다 다릅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명령에 따라 빵을 떼어 나누는 의식을 행하였으며 그 후 이것이 미사성제라는 형태로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카톨릭교회는 성찬식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우리 몸속에서 실제로 예수님의 살과 피가 되어진다고 가르칩니다. 교리에 의하면 빵과 포도주라는 두 형색의 바탕에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가 실체로 변화하여 바로 그 성체 안에 현존하며, 미사성제 중에 그리스도 자신이 희생의 제물로서 성부께 바쳐지게 되는데 신자들은 이 성체를 배령함으로서 그리스도와 일치하는 은총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마틴루터는 떡과 포도주 "안에, 옆에, 아래에" 예수님이 실재적으로 함께 하신다고 가르칩니다(공존설).

한편 쯔빙글리같은 사람은 하나의 기념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찬식에 주님이 영적으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성찬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의 수단으로 주신 제도입니다. 은혜의 수단은 말씀과 기도와 세례와 성찬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말씀과 기도와 세례, 성찬들을 형식적으로 생각하고 타성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별히 성도가 성찬식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대속의 은혜에 감격치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예식은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카이노스)으로 함께 마시는 날까지 계속해서 시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일년에 한두번으로 그칠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과 그 깊은 의미를 기억하며 좀 더 많은 기회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22. 가룟유다의 뉘우침과 자살이 주는 교훈 (마27:3~5)

 

마태복음과 사도행전 1:16~19에 나와 있는 유다의 죽음에는 약간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마태는 유다가 목메어 죽었다고 하나 사도행전에는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는 '피밭'이라는 이름을 피값으로 땅을 샀기 때문이라고 하는 반면 사도행전에는 유다의 피 때문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은 사도행전의 저자와는 달리 이를 예언의 성취(마27:9), 즉 예수의 죽음 및 그와 관련된 중요사건들은 모두 구약의 예언을 성취시킨 사건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때 예수님의 제자였던 가룟유다는 그의 스승이며 메시야인 예수를 팔고난 후 비참한 죽음으로 자신의 죄값을 다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의 자살 사건은 비록 그가 참된 회개를 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는 않았지만  그도 결국에는 예수의 무죄성을 인정하고 죽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것입니다.

 

뉘우침이란 헬라어로 '메타멜로마이' 인데 이것은 '후회함' 을 뜻하고 회개를 의미하는 '메타노에오' 와는 다른 해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의 뉘우침은 단순히 자신이 저지른 행동을 후회하는 감정적인 처사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의 회개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유다는 그리스도께서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치고 자기가 받은 은 30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다시 갖다 주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라고 시인함으로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고백이 아니었고 여전히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고백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네가 당하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유대 지도자들의 태도는 가룟유다 보다도 더 강퍅해져 버린 최악의 심령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스스로 목메어 죽음으로서 비극적인 최후를 마치게 되는데 이것은 결국 예수께서 그에게 선고하셨던  저주(마26:24)가 그대로 성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 앞에서 자살하는 것이 왜 죄악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사무엘상 31:3~4에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다 사건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그를 정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여러 정황을 볼 때 가룟유다는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가룟유다와 같은 사람을 정죄할 권리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심판자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요5:22, 9:39, 행10:42) 한 분이십니다. 외형적으로 가룟유다는 주님과 동행한 사도였습니다. 그는 바로 옆에서 예수님의 치유와 기적을 체험했으며 증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유다의 배신은 함께한 제자들은 물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큰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 무슨 직분을 맡고 있는가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항상 나 자신의 부족함으로 고백하며 겸손하게 섬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일수록 무죄한 사람이 아니라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함으로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마음과 생각과 행동으로 범죄치 않도록 항상 말씀과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사단의 화살에 맞지 않도록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해야 할 것입니다(엡6:10~18).   

 

 

23.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신 가상칠언 (마27:45~50)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오전 9시, 유대시간으로는 제 삼시가 되는 것입니다 이로서 수난시대였던 예수님의 사역은 일단락되는데 십자가상에서 7가지의 말씀으로 유언을 대신하였습니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 말씀은 채찍으로 살을 찢으며 옷을 나누고 십자가에 못을 박고 언덕에 세운 로마병정들의 가혹한 행위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말씀입니다. 영적 무지로 인하여 자신이 메시야임을 깨닫거나 알지 못하는 가운데 십자가에 못박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른 모든 관계자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하나님의 첫 번째 메시지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알게 모르게 예수님을 못박는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또 스데반의 순교를 기억하며 복음 전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날 때 오히려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23:43)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지 않고 그 나라에 들어갈 것으로 믿고 확신하는 강도의 놀라운 믿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헬라어 '파라데이소스'는 낙원으로 번역되는데 신약성경에서 세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눅23:43, 고후12:4, 계2:7). 이러한 강도의 회개와 구원을 향한 열정적인 믿음은 죽음을 앞둔 마지막 끝자락에서도 신앙을 붙들려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우리들의 신앙도 죽음에 이르기까지, 또는 생명을 바치기 까지 주를 위해 헌신하는 믿음의 생활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강도의 구원은 단순히 죽음 앞에서 거저 줏은 것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에 함께 매달려 있는 같은 처지의 죄인에게 영원한 생명을 의지하고 신앙한다는 것은 사람의 논리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역은 십자가 처형장에서 까지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 (요19:26~27) 

예수님은 운명하시기전에 모친의 앞날을 염려하셨습니다. 그 당시 요셉은 이미 죽었고 형제들은 주가 메시야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모친을 돌 볼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격적인 예수님의 모습을 끝까지 보여주심으로 십자가 상의 고통이 현실적이고 육체적이며 어려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27:46,막15:34, 눅23:34, 요19:28~30)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로 번역되는 이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부르짖으셨던 가상칠언 가운데 네 번째 말씀입니다. 이러한 예수의 부르짖음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은데 대한 최대의 정신적 고통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우리들에게 그가 당한 십자가 수난이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생생하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전혀 죄가 없으신 분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세상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신 철저한 죄인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증오와 보응이 얼마나 엄격하고도 무서운 것인가를 깨달을 수 있으며,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예수의 모습(빌2:6~8)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대속적 죽임을 당하면서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헌신적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5) "내가 목마르다"(요19:28)

우리에게 성령의 생명수(요4:10~14, 7:37~39)를 주신 예수께서 저주의 목마름을 겪으시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육적인 욕구를 채우는 동안 영적인 갈증은 없는지 우리의 신앙을 항상 점검해 보고  말씀과 기도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6) "다 이루었다"(요19:30)

성육신하신 예수께서 대속적인 죽음을 통해 구원의 사역을 완성하신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들에게 소망이 되시며 구원이 되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의 열정이 우리들의 심령에 살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흠 없고 죄 없으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7)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예수님이 숨을 거두시기 전 하신 이 말씀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취침 전에 하던 기도이기도 합니다. 묵시적인 부활을 의미하기도 하는 듯한 이 말씀은  모든 것을 완성한 이후의 복된 영생을 소망하는 간절함이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애도 마지막 순간까지 주를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의 손에 의지하여 천국 가는 복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교회들의 상징이기도 한 십자가를 바라보며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교회의 홍수라 할 만큼 우리 주위에서 십자가는 흔히 볼 수 있는 네온사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의 신앙은 갈수록 이기적이고 이해타산적이 되어가고 있음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잊지 않는 매일매일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24.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의 변화된 삶의 관계 (마28장)

 

빈 무덤을 목격했다고 해서 제자들이 부활 신앙에 이르게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빈무덤은 제자들을 당황하게 했으며(눅24:12, 24), 유대인들로 하여금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이장하였다는 주장이 나오는 등(마26:64, 28:13) 각종 소문이 난무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예수님을 다시 만날 때에 비로소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모든 복음서들의 대미를 장식하는 결말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최종적 메시지이면서 기독교 신학의 가장 큰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극단적으로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고전 15:17) 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기독교의 모든 진리를 믿는다 할지라도 만일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면 이 역시 헛될 것이며 구원을 받지 못하는 자라고 할 것입니다(롬10:9~10).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부활을 믿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자연현상을 초월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것은 자연법칙의 순리성만을 파악했을 뿐, 자연을 창조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질서를 깨닫지 못한 자의 미욱함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 것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 때문인 것입니다(고전2:10~14).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체포되셨을 때 제자들은 한결같이 도망을 갔습니다(마26:56). 그때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공포 속에서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소위 수제자라고 했던 베드로는 주변을 맴돌기는 했지만 그 결과 오히려 예수님을 저주까지 하는 죄를 저지르는 등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의 본래의 생활로 되돌아갔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십자가 사건은 기독교의 종말적 사건이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제자들에게 종말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물론 3년여를 함께 동행 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부활이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좌절과 절망에 빠졌고 본래의 생활로 되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였던 것입니다. 사흘이 지난 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의 삶과 미래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충격적이고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났고 대화를 나누었으며 만져보고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에게 그 이전의 신앙과 확연히 다른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주어진 믿음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신 이후에도 또 다시 본래의 생활로 복귀하지 않는 복음전파의 생명력 있는 삶을 계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때론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일들이 눈앞에 있어도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더욱 선명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선포하였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이토록 당당하게 만들었으며 확신에 넘치게 만들었습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었으며 그와 동시에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출입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의 부활은 영적부활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는 완전한 부활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 몸은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영광의 몸이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신뢰와 선포가 그들을 변화시켰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 부활의 신앙을 믿고 복음전파의 대열에 뒤쳐지지 않는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5.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적 의미 (마 28:16~20)

 

부활하신 예수께서 승천하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행1:8~9) 지상대명(至上大命, Great Commission)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함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에게 주시는(엡4:4) 명령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라야 할 성도들에게 맡겨진 사명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가정, 직장, 학교나 지역사회로 가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어 전도하여 얻는 새생명을, 외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하는 신앙을 갖게하며, 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엡4:13~15) 그를 말씀으로 양육하라는 것입니다(마28:19).

 

그런데 이러한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먼저 자신이 영적으로 철저히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 최선의 영적 무기는 하나님을 경외하고(요9:31), 기도로서 그 분과 대화, 교제하는 것이며(막9:29),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서 항상 그 분의 선하신 뜻을 분변하는 것(시119:9,97~100)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큰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복음사역은 결실(막4:20)을 맺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 한 제자는 갈릴리에 가서 예수님이 명하신 산에 모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경배했지만 오히려 의심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지상명령을 주시기 전에 그러한 명령을 주시는 근거를 밝히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셨으니"(마11:27, 요3:35, 13:3, 17: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명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님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주신 것임을 깨닫게 합니다.

 

1) 너희는 가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의 복음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1:8) 전파되어야 하기 때문에 복음을 직접적으로 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회는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교회(Come Structure)와 전도하기 위해 흩어지는 교회(Go Structure)의 균형과 조화있는 발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오늘 한국교회의 실정을 보면  모이는 교회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기현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지상명령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2)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특정지역, 특정집단, 특정민족, 특정계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이고 우주적인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개교회주의의 팽배와 대교회주의를 목표로 하는 기형적이고 기업적인 발전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구제와 사회복지를 실현하며 지역민들을 선도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며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여 성령의 놀라운 역사를 함께 체험할 수 있도록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과 성령은 항상 함께 있고 그것이 우리의 삶과 현재와 미래에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고 있음을 예수그리스도는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3)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전파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전하고 가르치는 자의 개인적 사상이 아닌 주님의 뜻을 전파하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행함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약2:36.)

 

4)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명령을 준행할 때에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을 약속합니다.

헬라어에 '에고 에이미' 라는 현재형을 사용하여 현재적으로 항상 함께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따라서 성도의 삶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며 성령으로 항상 충만해 있는 삶인 것입니다.

 

복음은 이와 같이 사람에게 향하고 있으며 그 대상이 무제한적이고 그 기간이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무제한적인 것입니다. 또한 복음은 그들에게 말씀을 가르치며 깨닫게 하고 성령의 이름으로 믿음을 더욱더 굳건히 하여 실천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 주님 오시는 그날에 함께 천국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의 중심에는 예수그리스도가 있으며 또한 우리의 중심에는 역사하는 성령이 계시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