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창 3장 / 인간의 타락
1. 유혹 (창 3:1-6)
1) 유혹자
하나님은 죄를 만드신 분이 아니시며 인간을 범죄하도록 시험하지도 않으신다. 우리는 앞서 사탄이 창세기 1장 3절 이하 이전에 죄에 빠졌음을 보았다. 그는 처음에 아름다운 천사였으며, 하나님의 창조를 기뻐하였으나(욥 38:4-7), 그의 죄가 창조 세계를 타락시켰다(사 14:12-17/겔 28:11-19). 사탄은 뱀의 모습으로 하와에게 왔으며 자기의 본성을 결코 나타내지 않았음에 유의하자. 창세기 3장에서 사탄은 속이는 뱀이고 4장에서는 살인하는 자이다(요 8:44).
2) 표적
사탄은 하와의 마음을 목표로 삼았고 그녀를 속이는데 성공했다.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창조된 일부분이다(골 3:9-10). 그러므로 사탄이 마음을 공격하는 것은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이다. 사탄은 거짓말을 사용하는데, 그 자신이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다(요 8:44).
3) 전술
마음이 하나님의 진리를 붙잡고 있는 한 사탄이 우리를 이길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이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자 마귀의 거짓말이 통할 여지가 생겼다. 사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일으켰으며(3:1) 하나님의 말씀을 부인하였고(3:4), 다음으로 자기의 거짓말로 대신하였다(3:5).
사탄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손상시키려 하는 것에 유의하자. 사탄은 하나님이 저들에게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막고 계신다”고 하였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고 그의 사랑에 의문을 일으킬 때 우리는 사탄의 손에 놀림을 당하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되어!”라는 말을 꺼내 유혹을 상당히 훌륭한 것으로 만든다. 사탄 자신이 “가장 높은 분과 같이”(사 14:14)되고 싶어했다. 수십 세기 후에는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하나님으로 섬기면 “세상 모든 왕국들”을 주겠다고 제안했다(마 4:8).
4) 비극
하와는 마귀에게 처소를 제공하지 말았어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마귀)와 대항해야 했다. 이렇게 대화하는 동안 아담이 어디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쨌든 하와는 “임의로”(freely)라는 말을 빼고 3장 2절을 말했고 “만지지도”란 말을 첨부하여 3장 3절의 말을 했으며,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죽을까 하노라”로 변경시켰다.
6절에서는 육신의 정욕(먹음직도 하고)과, 안목의 정욕(보암직도 하고)과, 이생의 자랑(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을 보게 된다(요일 2:15-17 참조).
혼자 죄를 짓는 것은 어렵다.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이 다른 사람과 죄를 나누어 가지게 한다. 아담은 고의적으로 죄를 지어 세상을 심판 가운데 던져 넣었다.
2. 저주 (창 3:7-19)
1) 내적(7-13절)
즉각적으로 순수함과 영화로움을 상실하고 죄책감을 느낀다. 그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벌거벗은 것을 감추려고 하였으나 하나님은 자기 노력이란 옷을 허락지 않으셨다(21절). 이보다 더한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은 욕망을 잃은 것이다. 하나님이 접근하시는 것을 듣고 숨었다! 죄의식, 두려움, 수치심이 불순종하기 전에 그들이 즐겼던 하나님과의 교제를 깨뜨린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남자가 여자의 핑계를 대고 여자는 뱀의 핑계를 대듯 자기 방어가 커가고 있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죄의 비극적인 내적 결과들을 본다.
2) 외적(14-19절)
뱀이 전에는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기어 다니는 짐승이 아니었던 것 같다. 이 단어는 총명과 영화를 암시한다. 그러나 이 피조물이 사탄에게 양보하였고 유혹에 동참했으므로 심판과 저주를 받아 흙 속의 낮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여인의 심판은 임신과 출산의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것이다(딤전 2:8-15). 바울은 구원받지 못한 남자와 결혼한 그리스도인 여자는 아이들을 낳는 데 특별한 위험이 있을지 모른다고 암시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남자에게 내려진 심판은 일하는 것이다.
낙원 대신 황폐가, 동산에서 다스리는 기쁨 대신 밭에서의 땀과 노역을 얻게 되었다. 일이 하나님의 형벌은 아니다. 일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2:15). 형벌은 일할 때의 땀과 노고이며 자연의 방해이다.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저주를 받고 속박을 받게 되었다(롬 8:15-25).
3) 영원히(15절)
이것이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복음이다. 여인의 씨(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사탄과 그의 씨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기쁜 소식이다(갈 4:4-5/3:15- 이하). 이 지점으로부터 흐름이 나뉘어진다. 사탄과 그의 가족(씨)은 하나님과 그의 가족에게 대항한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 사이에 적개심(대립)을 부으시고 사탄이 지옥에 던져질 때 전쟁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계 20:10).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를 다시 살펴보고 사탄에게도 하나님처럼 그 자녀들이 있음에 유의하자.
창세기 4장에서 가인은 아벨을 죽이는데 요한일서 3장 12절에서는 가인이“악한 자에게 속하였다”고 했다. 즉 마귀의 자녀인 것이다. 구약은 대립하는 두 씨들의 기록이고 신약은 그리스도의 출생과 십자가를 통하여 사탄을 이기신 승리의 기록이다."
3. 구원 (창 3:20-24)
아담이 들었던 유일한 복음은 하나님이 3장 15절에서 하신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믿었으며 구원을 받았다. 그가 그 말씀을 믿은 줄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아담이 그 아내의 이름을 “생명” 또는 “생명 수여자”의 뜻을 가진 “이브(Eve)”라고 지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가 죽을 것이라고 하셨고 930년 후에 육신적으로 죽었다. 그러나 그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영적으로도 죽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여인에게서 구세주가 탄생할 것을 약속했으며, 아담은 이 약속을 믿어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죄의 육체적인 결과를 변경시키지는 않으셨으나 영원한 결과인 지옥(hell)은 면제시키셨다.
가죽 옷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가지는 구원을 상징한다.
피가 흘려져야 하고 죄인 때문에 죄없는 생명이 희생되어야 한다. 그들은 나뭇잎으로 죄와 수치를 가리려 했다(3:7). 그러나 이러한 선한 행위는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늘날도 받지 않으신다!
성경에서 옷은 흔히 구원의 상징이다.
탕자가 집에 돌아오자 깨끗한 옷으로 입혀졌다(눅 15:22). 이사야 61장 10절과 스가랴 3장을 보자. 자기의(自己 義)와 선한 행위라는 옷은 더러운 옷(사 64:6)에 지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저희들을 가리려 하셨음에 유의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치에 대한 감정을 인준하셨다. 사람들이 이것을 거꾸로 하여 나체로 돌아가는 것은 타락의 징표인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표준은 항상 “품위있는 복장”에 있다.
22-24절은 이상한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들을 동산에서 몰아내셨다.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생명나무에 대한 권리를 상실했다. 그들이 먹었다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육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이었다. 이 말은 죄로부터 인간을 구하기 위하여 구세주가 오셔서 죽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냄으로 그의 은혜와 자비를 나타내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이 그 곳에 두신 검이 그 길을 막았다. 이 말은 “검 같은 불꽃”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즉,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말해주는 하나님의 불이다. 이제 우리는 로마서 5장을 펴서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가 이 모든 것을 역전시켜 하나님 앞으로 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을 어떻게 우리에게 열어 놓으셨나를 알아보아야 한다.
비교한 것을 유의해서 살펴보자.
첫 아담 그리스도-마지막 아담
흙으로 만들어짐 하늘로부터 오신 주(主)
완전한 동산에서 시험받음-배부름 광야에서 시험받음-배고픔
사탄에게 짐 사탄을 이김
낙원에서 쫓겨남-도둑 죽어가는 도둑에게 낙원을 열음
죄, 죽음, 심판을 초래 의, 생명, 평화를 가져오심
아내를 사랑하여 고의로 죄를 지음 그의 교회를 사랑하셔서 고의로 죽으시고, 죄를 짊어지심
로마서 5장에는 여러 번의 “더욱”이란 말이 나오는 서술들이 있다(9, 15, 17, 20절).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를 아담이 있던 곳으로 보낼 뿐만이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보다 더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 우리는 하나님께 왕같은 제사장들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
4. 창 4장 / 가인의 길
이 장에서의 주연은 가인이다. 네 가지 다른 면으로 그의 성격과 행동이 나타나 있다.
1. 예배자 (창 4:1-5)
4장 1절에는 하나님이 3장 15절에서 하신 약속과 3장 20절에 나오는 아담의 믿음이 둘 다 나온다. 하와는 새 생명을 세상에 가져왔고 그가 약속된 씨인 줄 알았다. “내가 한 남자 - 주님을 얻었다”고 번역할 수도 있다. “가인”은 “얻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선물을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아벨은 “헛됨, 부질없음”이란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에게서 떠난 생명의 무익함을 암시하며 또는 가인이 그 씨가 아니었음에 대한 하와의 실망을 나타낼 수도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일의 분할을 보게 된다. 가인은 땅에 헌신했고, 아벨은 양떼에 헌신했다. 하나님은 앞서 땅을 저주하셨는데(3:17) 가인은 그 저주와 동일시되곤 있다.
예배를 드리는 지정된 장소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둘 다 주께 제물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천사들이 길을 지키는 생명나무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3:24).
히브리서 11장 4절은 아벨이 믿음으로 제물을 가져왔음을 시사하고 로마서 10장 17절은 “믿음은 들음에서 온다”고 가르친다. 즉,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그의 가족이 자신에게 접근하는 방법을 가르친 것이 분명하다. 그중에는 3장 21절에 나오는 피의 희생도 들어있음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9장 22절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만 한다고 진술한다. 그런데 가인은 저주받은 땅에서 피흘림이 없는 제물을 가져왔다. 그의 제물이 진정이었을 수도 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대속의 희생을 의존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셔(레 9:24) 아벨의 제물을 태우셨을 것이지만 가인의 제물은 제단 위에 놓여있다. 가인은 경건함과 신앙에 대한 형식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그 능력은 부정했다(딤후 3:5).
요한일서 3장 12절은 가인이 마귀의 자녀였음을 보여주는데 이 말은 육에 속한 거짓된 의(義)를 뜻하는 것으로 이는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義)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은 자기의(自己義)를 내세우는 바리새인들을 “마귀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으며 아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문책했다(눅11:37-51).
유다서 11절은 “가인의 길”이 피없는 종교의 길이며 의로워지려는 노력과 자기 의에 근거한 종교임을 말한다.
오늘날 세계에는 두 가지 종교만이 있다.
그리스도와 그가 완성하신 일을 의존하는 아벨의 신앙과.
선한 행위, 그리고 인간을 기쁘게 하는 종교적 행사와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가인의 종교이다.
하나는 천국으로, 다른 길은 지옥으로 인도해 간다!
2. 살인자 (창 4:6-8)
야고보서 1장 15절은 죄가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점 커져서 죽음에 이른다고 경고한다. 가인도 그랬다. 실망하고, 화가 나서, 질투하고, 마침내 살인한다. 마음의 증오가 결국 자기 손으로 살인하도록 이끌어 갔다(마 5:21-26). 하나님은 그의 믿음없는 마음과 타락한 안색을 보았다. 하나님은 죄가 들짐승처럼 웅크리고 가인을 멸망시키려고 기다림을 경고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하나님이 경고하고 계시다. 슬프도다, 가인이 유혹의 들짐승을 키우고 문을 열어 주어 들어오게 하였도다! (7절을 “죄의 제물이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의로운 제물을 가져올 또 다른 기회를 주려 하심을 암시한다).
그러나 가인은 경고를 명심하지 않고 그의 동생을 불러 이야기를 나누고는 냉혈(冷血)의 마음으로 그를 죽였다. 가인은 마귀의 자녀였고(요일 3:12),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살인자였다(요 8:44).
3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인간이, 4장에서는 인간에게 죄를 짓는 인간이 나온다.
3. 방랑자 (창 4:9-16)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 동생이 어디 있느냐?”
이 두 질문은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질문으로 그 의미는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죄는 언제나 드러나기 마련이다(가인처럼).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거짓말을 하려고 해도 결국 드러난다. 아벨의 피는 복수해 줄 것을 호소하지만 그리스도의 피는 평화와 용서를 외친다(히 12:24). 하나님은 앞서 뱀과 땅을 저주하셨는데 이제는 가인을 저주하신다.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다른 말로 하면 가인이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주지 않으며,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어야 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도망자, 방랑자가 되어야 했다.
가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지 않았으며, 대신 자책과 실의를 나타냈다.
그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하나님을 비난한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그는 천국에서 거부를 당하고 땅에게 거절을 당한다! 그는 저주를 받아 안식을 잃었는데 이는 믿음으로만 치유될 수 있다.
가인의 공포와 절망에도 유의하자.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은혜로 하나님은 가인을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시고 약속을 증명할 표(mark)를 주셨는데, 문자로 된 표를 주신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가인에게 확신을 가지도록 하신 것 같다. 놀라운 은혜이다!
하나님은 왜 가인을 풀어 놓으셨나? 한 가지 이유가 있으니, 가인은 하나님의 은혜와 죄의 비극적인 결과에 대한 “걸어 다니는 설교”였던 것이다. 오늘날의 인간과 대단히 유사한 모습이다. 휴식이 없고, 절망하고 그리고 좌절한다.
가인은 그의 남은 생애를 방랑하며 보냈는가?
아니다! 그는 정착하여 도시를 건설했다! 우리는 여기서 “문명의 기원”을 본다. 하나님의 영적인 선물을 대신하여 인간이 만든 대용품이다.
4. 건축가 (창 4:17-26)
“놋“이란 “흩어지는 것”, “방랑하는 것”의 뜻이다. 가인이 선택한 바로 그 땅이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 방랑하고 있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면전을 떠나갔다(3:24). 그에게는 피의 종교가 필요치 않았다. 가인은 그의 누이들 중의 하나와 결혼한 것이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 때 쯤에는 아담의 자손이 많았을 것이기 때문이다(5:3은 130년이 지났음을 시사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이복누이와 결혼했는데 가인이 그의 친 누이와 결혼하지 못했을 이유는 없다. 특히 그 때는 죄가 인간의 몸에서 그 댓가를 치루기 전의 시대였다. 그의 아들의 이름인 “에녹”은 “창시”라는 뜻으로 새로운 출발을 나타내고 있으나, 하나님 없는 출발이다.
인간적인 관점으로 평가할 때에 가인의 자손들은 탄복할 만한 사람들이다. 야발(“방랑자”)은 농업 기술을 발견했고(20절), 유발은 “문화” - 음악을 창시했으며, 두발가인은 금속 산업을 처음으로 개발했다. 외양으로 볼 때, 가인의 “도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거절하셨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25절에 보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또 다른 씨 - “셋”을 주시는데 이는 약속된 아벨의 씨 대신 주어진 씨이다. 하나님은 가인의 족속을 개조시키려 하지 않고 저들을 거부하신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홍수 때에 저들을 폐기처분하실 것이다. 가인의 족속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리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을 때, 셋의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와 다시 예배를 시작하고 있다(26절).
오늘날의 문명은 본질상 가인적이다.
오늘날의 문명도 농경, 산업, 예술, 큰 도시, 그리스도의 피를 믿지 않는 종교 등을 지니고 있으며 이 또한 가인의 옛 문명과 같이 멸망을 받을 것이다. 라멕같이 살인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으며, 결혼의 신성한 약조를 무너뜨리는 사람들도 있다(라멕이 했던 것처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마 24:37).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거절하고 인간 자신의 자원을 의지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지나가 버리는 “세상의 제도“에 속하지 않으며(요일 2:15-17), 관여하지도 않아야 마땅하다.
● 라멕의 전언(message / 23-24절) : 이 구절이 좀 더 명확했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하다. 따라서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 다 똑같이 해석하지도 않는다.
라멕은 가인 편으로 아담의 칠대 손인데 하나님의 비위를 상하게 했던 반면에, 셋 편으로 아담의 칠대 손인 에녹(5:21-27)은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을 기쁘게 했다(히 11:5). 가인의 계통은 셋 계통의 참된 신자들로부터 이름조차 본뜬다(에녹-에노스/ 이랏-야렛/ 므후야엘-마할랄렐/ 라멕-라멕). 라멕이 어떤 젊은이에게 상해를 입어 자기 방어로 그 공격자를 죽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이 이 엄청난 살인죄를 지은 가인을 위해 보복해 주신다면, 자기 방어를 위해 사람을 죽인 라멕을 위해서 이를 변호해 주실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두발가인이 놋과 철로 무기를 처음 발명해 냈으며, 라멕은 그의 부인들에게 자랑삼아 무기를 시위했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히브리어의 동사는 미래로 번역할 수도 있다. 즉, “나에게 상해를 입히는 사람은 누구나 목을 벨 것이며 하나님의 보호는 필요 없다. 이 무기로 나 혼자서도 칠십 칠배로 보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첫번째의 오만한 도전이며 전쟁 행위이다.
'구원의 이정표 > 핵심성경연구-구약'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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