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로마서9 - 롬 8장(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JORC구원열차 2009. 7. 17. 07:52

9. 로마서 8장 / 죄의 권세로부터의 자유

 

본 장은 성화에 대해 다룬 부분의 절정을 이루며(6-8장), 또한 율법과 육신으로 말미암아 제기된 질문들에 답한다. 본 장 전체를 통하여 성령이 지배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육신을 정복하고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살게 되는 것은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본 장을 세 구절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정죄함이 없음-성령과 율법 (롬 8:1-4)

 

이 구절들은 7장에서 나오는 논쟁의 결론을 이루고 있다. 바울이 7장에서 구원을 다루는 것이 아님을 명심하자. 그는 신자가 죄악된 본성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데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로부터 무엇을 받을 수 있으신가?

 

대체로 하나님은 모든 생각과 행위를 정죄하셔야 마땅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를 성취하시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다. 여기서 “정죄”라는 단어는 지옥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5장에서부터 제시된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울은 일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다루며, 그리고 우리가 아직 “육신에 거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하여 죽어 있으므로, 율법은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실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신자로 하여금 “성령 안에서 행하게 하실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요구에 대처할 수 있게 하시기 때문이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자신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옛 본성의 능력 안에서 “선한 일”을 행하기를 기대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날은 참으로 영광된 날이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정죄함이 없음”을 이해하게 되면,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그를 대신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얼마나 영광된 구원을 소유하고 있는가! 따라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 권고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빚이 없음-성령과 육신 (롬 8:5-17)

 

신자는 두 가지 “뜻”(마음)을 품을 수 없다. 그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육신의(육체에 속한)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반목할 수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 생명과 평화를 누리면서 성령에 속한 일들을 사모할 수 있다. 육적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대해 아무런 빚이 없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8:12). 우리의 빚, 우리의 채무는 성령께 대한 것이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은 구원하는 믿음을 부여하고 우리 안에 새로운 본성을 심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안에서 매일 증거하고 계신다. 우리는 성령께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단히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성령은 우리를 대단히 사랑하시며 우리 안에 사신다. 매일 그는 우리의 육신적이고 이기적인 것을 참으신다. 매일 그는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근심하시지만 우리를 사랑하시며, 하나님의 인치심에 따라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 그리고 영원한 곳에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된 축복들의 보증이 되신다(고후 1:22). 성령이 안에 거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성령은 15절에서 “양자의 영”이라고 불리워진다. 육신대로 사는 것, 또는 율법 아래 사는 것(자신을 법 아래 두는 것은 육신대로 사는 것이다)은 속박 아래로 우리를 이끌어 가지만,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광된 자유의 생활로 우리를 인도해 간다. 신자에게 있어서 자유란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장 나쁜 노예 생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자유는 율법과 육신으로부터의 자유이며, 이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신약에서 “양자”는 고아를 가족으로 맞아들이는 오늘날의 양자와는 그 뜻이 같지 않다. 이 단어를 직역하면 “아들의 지위“인데, 가족이거나 외부에서 손아랫사람을 취하여 정당한 상속자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신자는 출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이고 양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상속자이다. 사실상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된 상속자이므로 그는 우리가 영광 가운데서 그의 유산을 받기까지는 유업을 받으실 수가 없다.

 

하나님께 감사하자. 신자는 육신(“fersh”/ 신체의 의미가 아님)에 대해 만족케 하거나 제멋대로 하게 두거나, 육에 순종할 빚이 없다. 그 대신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육신의 행위를 “죽음에 넘겨주어야 하며”(억제하다- 8:13/골 3:9-), 성령께서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을 지도하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3. 끊어짐(분리)이 없다-성령과 고난(8:18-33)

 

신자가 비록 지금 고난을 당하지만 그리스도가 돌아오실 때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다. 사실상, 세상 만물(19-21절에서는 “피조물”)은 아담이 불순종한 탓으로 인하여 죄의 속박 아래 탄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마침내 사단을 정복하실 때에, 그는 전 피조 세계를 그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이며, 모든 자연이 우리와 더불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된 자유”를 누릴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감격적인 구원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하다(5장). 우리는 죄에 대하여(6장), 그리고 율법에 대하여(7장) 죽었기 때문에 죄의 권세에서 자유하다. 어느 날 우리는 자연이 그 무서운 속박에서 구조될 때 죄라는 그 자체에서 자유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으나 양자될 것, 즉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다. 영은 구원을 받았으나,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소망가운데 기다릴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앞으로 우리가 구원받을 일의 첫 열매로 “내주하시는 성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죽는다 해도 구속의 날에(엡 1:13-14) 우리를 인치신 성령은 우리의 몸을 생명 가운데 일으키실 것이다(8:11).

 

22-26절에 나오는 세 가지 “탄식”을 살펴보자.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22절),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며 탄식한다(23절),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중재하시면서 탄식하신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방문하셨을 때에 친히 탄식하셨음을 눈여겨보자. 피조물의 괴로운 속박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부담스러우시겠는가! 그리스도는 우리들뿐 아니라 죄의 노예 상태에서 모든 피조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어떠한 값을 치르셨던가!

 

바울은 우리가 소망 중에 이러한 고난을 견디어 가는 동안 우리에게는 성령으로 기도하는 특전이 있다고 지적한다. 길고, 아름답고, 사람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 “신앙심이 깊은” 기도들이 너무도 많다. 바울은 가장 영적인 기도는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말 없는 탄식임을 시사한다.

 

어떤 번역은 26절을 “말로 몹시 깊이 탄식한다”고 번역하고 있다. 성령은 우리를 위하여 중재하시며, 이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성령이 원하시는 것을 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 최선인지를 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성령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신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8:29).

 

우리는 8장 29절의 목적을 인하여 8장 28절의 약속을 주장할 수 있다. 8장30절에 나오는 모든 동사들이 과거시제로 사용된 것에 유의하자. “신자는 부름을 받았고 의롭게 되었고, 영광을 받았다.” 우리는 이미 영광을 받았는데 왜 이 세상의 고난 아래 무기력한가? 할렐루야! 놀라운 구주이시다!

 

바울은 32-35절에서 다섯 가지 질문을 하며 이에 대해 명백하게 답함으로써 끝을 맺는다.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에 대해 안달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증거는 많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그의 가장 좋은 것을 주셨으며 그밖에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것이라도 거저 주실 것이다.

 

누가 우리를 죄 때문에 고발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우리는 의로워졌고 이 일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정죄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으며 하나님의 오른 편에서 우리의 변호사로서 살아 계신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가? 없다. 마귀자신(38절에 나오는 “권세자들과 능력”)도 할 수 없다.

 

정죄가 없고, 빚이 없고, 끊어짐도 없다!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