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823(일)
성도의 그릇된 자리 (요일 2:15-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기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 2:17)
더위는 한풀 꺾인 듯이 보이더니만 다시 늦더위가 마지막 기승을 부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제 얼마 안가서 이 무더위도 사라질 것을 생각하니 묘한 아쉬움마저 듭니다,여러분, 얼마 남지 않은 이 무더위를 끝까지 이겨내시고 건강한 여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아무리 예수를 잘 믿는 사람이라도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우리 자신도 알고 세상도 알고 하나님도 아십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데려가실 때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될 때까지는 우리는 불완전성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산상 수훈을 말씀하실 때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하신 것은 완전이라고 하는 이상적인 목표를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것을 의미한 것이지 어느 인간도 완전해졌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완전이라는 목표를 향해 노력 분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타락하거나 후회스러운 그리스도인이 되고 맙니다. 달을 향해 쏘다가 가로등을 맞추는 한이 있어도 목표는 완전을 향해야 됩니다.
한강은 동쪽에서 서해 바다로 향해 흐릅니다. 강줄기가 때로는 남쪽으로 흐르고 북쪽으로도 흐르고 심지어 동쪽으로 향해 흐르는 때가 있어도 전체 흐름은 서쪽을 향해 흐르는 것 같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방향으로 갈 때도 있고 심지어 죄짓는 때가 있어도 전 생애의 분명한 방향은 하나님을 향해 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때로는 그릇된 자리에 들어설 때가 있습니다. 물질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도 그릇된 자리에 들어설 때가 있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에는 즉시 돌이켜 그릇된 자리에서 나와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 그릇된 자리에 들어갔던 성도들의 예를 들어 우리 자신들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낙심의 나무 아래 있는 성도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가 그 한 예입니다. 그는 위대한 승리자였습니다. 그는 갈멜산상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들과 대결하였는데 그들은 두 단을 쌓고 바알 신에게 빌고, 그 다음 엘리야는 홀로 하나님께 제단을 쌓고 기도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 450명은 아무리 기도를 하고 몸을 상하게 하며 피를 흘려도 불의 응답이 없었으나 엘리야는 기도하자마자 즉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고 나무를 태우고 돌과 흙과 물까지 태워 버렸습니다.
이 때에 군중들은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바알 선지자들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날은 큰 승리와 기쁨의 날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소식이 이세벨의 귀에 들리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네가 내 선지자들을 죽였으니 내일 이 맘 때에는 너도 그 선지자들의 하나처럼 죽게 되리라' 고 했습니다.
이 위협의 소식을 듣고 엘리야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지금까지 그와 함께 하신 사실을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전에 어떻게 승리하게 하셨는지도 잊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도망가기 시작했습니다. 브엘세바에 도달해서는 기진맥진해서 두려운 가운데 로뎀 나무 밑에 주저 앉았습니다. 엘리야가 생각하는 것은 오직 이세벨의 위협의 말이었고 하나님께 구한 것은 죽여달라고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우리들도 이처럼 낙심과 절망의 나무 아래 주저앉을 때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돌아와 주시고 지난날을 축복해 주신 것도 잊어버리고, 과거에 어려운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죽을 고비에서도 살려주신 것도 다 잊어버리고 낙심하고 절망할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고 이것저것 세상만 바라보고 낙심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앞으로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습니까? 들에 있는 백합화도 기르시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모르신 채로는 결코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사 26:3에 "주께서 심지가 견소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이 말씀은 마음이 항상 하나님께 머물러 있는 자에게 완전한 평안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문제가 생길 때, 난관에 부딪칠 때, 하나님을 쳐다보는 대신에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문제입니다. 절망의 나무 아래 앉아 있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태도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만일 우리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우리가 필요할 때 아무 도움도 못 주는 분이라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낙심의 나무에서 뛰쳐나와 믿음의 눈을 들어 전능하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봅시다.
2. 안일의 옥상에 있는 성도
어느 날, 다윗 왕은 궁전의 옥상에서 기지개를 켜며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아름다운 여인을 통하여 유혹이 들어왔습니다. 그는 마귀의 시험에 넘어가서 10계명 중 적어도 4계명을 범했습니다. 이와 같이 해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이 지내던 사람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되고 큰 환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한가한 머리는 마귀의 작업장이다' 고 했습니다. 얼마나 진실된 말입니까?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바쁘지 않을 때 유혹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안일(selfease)의 옥상에 있습니다. 그저 교회 명부에 이름이 올라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우리가 구원받고 그가 주신 축복을 생각할 때에 주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안일하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안일은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동록이 쇠붙이를 갉아먹듯이 안일과 게으름이 성도의 영혼을 갉아먹습니다. 모든 성도의 영혼은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영적 성장의 기회를 주고, 헌신의 생활을 통하여 영혼이 성장하도록 기회를 줍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성도로서의 책임을 가볍게 여깁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은 '지난주에 비가 와서 교회에 못나왔습니다.', '지난주에 너무 더워서 교회에 못나왔습니다.', '친구가 와서, 머리가 좀 아파서 교회에 못나왔습니다.', '내 아내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못왔습니다.' 하고 여러 가지 핑계를 대지만 이런 것들이 월요일 직장에 못나가는 핑계는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왜 교회에 못 나가는 핑계는 많습니까? 안일한 생활은 교인들로 하여금 범죄케 만드는 때가 많습니다. 안일이 다윗을 실족하게 했던 경우처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특권을 받은 사람인데 그 특권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부지런히 그 책임을 다 해야겠습니다. 안일주의의 옥상에서 내려와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히 일합시다.
3. 의심의 감방에 들어간 성도
세례 요한은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불타는 열심으로 복음을 전했고 많은 사람이 그의 메시지를 통하여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잡혀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 갇혀서 지내는 동안 나날이 약해지면서 의심이 그의 영혼을 쏠기 시작했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말하기를 '이 사람이 과연 그리스도인가, 또 다른 사람을 기다려야 할까?'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의심의 감옥에 갇혀 보았습니까? '정말 그럴까? 성경이 정말 하나님의 말씀일까? 정말 내가 구원받았을까? 죽은 후에 정말 천당이 있을까?' 하고 의심이 들어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빨리 물리치지 않고 의심의 마귀를 그대로 용납하면 의심이 사랑을 식어지게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다가 의심하기 시작하면 곧 사랑이 식어지는 것처럼 성도가 마음에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식어집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우리의 사람을 원하십니다. 사람이 어떤 것을 사랑하면 가장 좋은 것을 주고싶어 합니다. 그러나 의심이 생겨서 사랑이 식어지면 그에 대한 헌신의 열정도 식어집니다.
예를 들면, 제가 복음 전파자로 소명받은 것을 의심하고 복음을 믿지 못한다면 나의 열심은 식어지고 또 죽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 혹 의심을 품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그렇다면 그 마음을 주님의 사랑의 빛 앞에 온전히 드러내 놓고 밝게 하십시오. 그리고 그의 말씀과 그의 행하신 일들을 생각하십시오. 기도의 응답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진리와 그리스도의 실제를 바라보고 당신을 위해 행하신 일을 바라보고 의심의 감옥에서 속히 나오시기 바랍니다.
4. 다툼의 자리에 있는 성도
예수님께서 어느 날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말다툼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낮은 자가 되려고 할 때 높은 사람이 되고, 큰 자가 되려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대부분의 교회가 이런 자리다툼 때문에 분쟁이 일어나곤 합니다. 높은 자리를 탐하는 신자들 때문에, 뒤에서 섬기기보다는 앞으로 나서고자 하는 사람들 때문에 분쟁과 시험이 오는 것입니다.
주님의 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자리도 감사히 받는 남녀 성도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성도들 간에 다툼이 생길 때 성령을 근심시킵니다. 그런 자리에서 나와 어떤 위치에서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자 할 때 신앙생활의 기쁨과 승리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5. 자만의 자리에 들어간 성도
시몬 베드로가 그 한 예입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악한 자들이 나를 죽음에 넘기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실 때 베드로는 '아닙니다. 주님, 그들이 나를 먼저 죽일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베드로가 잘하는 말 같았지만 이것은 자만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의 자만과 교만이 육신에서 나온 것임을 알기 때문에 "사단이 너를 밀 까부르듯 해서 너를 넘어뜨리려고 한다" 고 말씀하셨는데, 과연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습니다. 밀 까부르듯 하는 사단의 시험이 올 때 그의 자만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우쭐할 때, 자기의 공적이나 자신을 너무 높이 생각할 때가 사단에게 붙잡히는 때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성공적으로 잘 할 때 그것이 자기의 재능이나 공로나 머리가 좋아서 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분명히 멀지 않아 넘어지고 맙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 때문이지 자기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 (고전 3:6)고 했습니다. 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소리나는 구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신을 나타내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만 중요하게 여길 때에 자만의 구덩이에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롯이 그 한 예입니다. 롯은 삼촌 아브라함과 헤어져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하게 발전한 듯 보였던 악하고 음란한 도성 소돔으로 들어갔습니다. 한 때는 많은 돈과 명예를 얻은 것 같았지만 결국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그의 아내와 딸들은 그 죄악된 세상에 푹 빠져 헤엄칠 정도가 되었고 롯 자신도 거의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롯의 처는 소금 기둥이 되었고, 사위는 불타 죽고, 집과 재산도 다 불타버렸고, 과부가 된 딸들은 깊은 죄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롯과 같은 교인이 많습니다. 세상과 섞여서 한 손으로는 교회를 붙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세상을 붙잡고 있습니다.
세상의 비탈길에 서서 하나님과 좋은 교제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한 목사님과 젊은 여신도 사이에 댄스에 대해서 논쟁이 벌여졌습니다. 그 여자는 세속적 생활은 그 신앙 생활에 아무 영향도 주지 않고 전도하는데도 지장이 없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그러면, 이 다음 댄스홀에서 전도해 보십시오' 했더니 그 여자는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약속대로 춤을 추다가 파트너에게 '당신 그리수도인이냐?' 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면서 '당신은 예수 믿소?' 라고 되묻더랍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 파트너가 '그런데 여기서 뭘 하는거요?' 하고 핀잔을 주더랍니다. 세속의 비탈길에 서 있는 신자들에 대해서 세상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길에 서 있는 사람은 영역도 있을 리가 없습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영역을 빼앗고 영향력을 잃게 만듭니다. 요일 2:15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하고 했습니다.
교인들도 즐겁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법으로 즐거움을 누려야 합니다. 인생의 최선의 즐거움을 누리되 세속적인 방법으로 살면 안됩니다.
지금까지 성도가 들어가지 말아야 할 그릇된 자리를 여러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낙심, 안일, 의심, 다툼, 자만, 세속화 이런 것들이야말로 성도가 정말 경계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은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겨 그릇된 자리로 들어가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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