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211(목)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사람(막 14:17-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막 14:21)
신문지상을 통하여 흉악 무도하고 잔인한 사람들을 볼 때면 우리는 그 사람을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사람으로 간주 합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처럼 그 존재가 무가치하게 판단받는 것처럼 더 큰 치욕거리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세상에 보탬이 안되고 오히려 해가 되는 사람이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름아닌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가룟 유다입니다.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를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좋을 뻔한 사람"(21절)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룟 유다로 하여금 이러한 평가를 받게 하였습니까? 대체 어떤 사람이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사람이겠습니까?
1. 육체의 정욕을 좇는 사람
요 12:6을 통해 볼 때 유다가 예수님을 제사장들에게 넘긴 이유는 물질적인 욕심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막 14:11에도 보면 돈을 받을 것을 약속받은 후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줄 기회만을 엿보는 흉악한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실망한 이유 또한 인간의 세상적인 욕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직감한 그가 그동안 바라던 세상적 권세와 명예에 대한 인간적 소망들이 하두 아침에 물거품이 될 것이라는 마음에 이끌려 예수님을 배반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받은 돈은 은 삼십냥으로서, 그는 은 삼십에 메시야를 팔아버렸던 것입니다. 그는 정말로 나지 아니했으면 좋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유다처럼 인간적인 육체의 욕심만을 가지고 주를 좇는다면 우리 또한 본문의 유다처럼 주를 배반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야 함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임에도, 반대로 육체의 정욕을 좇아 살다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패망의 길을 가는 것으로서 썩어질 육체의 것들과 함께 패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부와 명예와 권세를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육체의 정욕만을 좇아 그것들을 지나치게 좋아하고 그만 거기에 포로가 되어 버린다면 그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사람이 되고 맙니다. 이점을 명심하십시오.
2. 배반하는 사람
욕심이라는 내적인 동기는 배반이라는 외적인 행동을 낳습니다. 물질적 욕심이 가득했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았습니다. 그것도 입맞춤이라는 가증한 신호를 통하여 예수님을 팔았던 것입니다(막 14:45).
현시대에도 예수님을 버리고 배반하는 사람들이 존재 합니다. 그런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욱 좋을 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많은 신앙인들 중에는 행동으로는 아직 옮기지 않았지만 내적으로는 예수님을 배반하는 모습을 갖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배반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저버리고 자신의 편의에 의해서만 생활하는 모든 것을 통틀어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본성적으로 이러한 배반을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호 13:6에서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내린다"고 말씀하실 정도로 하나님은 배반을 싫어하십니다. 성경, 특별히 구약에 임했던 하나님의 형벌은 거의 대부분이 하나님께 대한 배반의 결과였습니다.
왕하 18:10-12에 나와 있는 사마리아 성의 멸망도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배반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잠 15:10에 보면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마는 죽을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실로 받은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오히려 이를 배반한다면 그 어찌 참된 신앙인이라 하겠습니까? 그러한 사람은 인간적으로나, 신앙적으로나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한 사람입니다.
3. 회개하지 않는 사람
뉘우치지 않는 사람, 즉 자신의 잘못을 진정 회개치 않는 사람은 태어나지 말아야 될 사람입니다. 물론 사람은 잘못을 범할 수도 있고, 또한 잘못할 수밖에 없는 죄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에 대한 진실된 회개도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뉘우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정 악한 사람입니다.
예수의 공생애 시작 전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회개'가 그 초점이었습니다. 마 3:2에 보면 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부르짖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로 기뻐받으시는 자는 과연 누구겠습니까? 아무 죄도 짓지 않는 완전한 의인이겠습니라?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로 하나님이 제일로 기뻐 받으시는 자는 자신의 죄를 진실로 뉘우치고 그 분을 내 구주로 섬김으로써 의롭게 되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 실례로 눅 15:7에 보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때문에 기뻐하는 것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와 같은데 가룟 유다는 진실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알았고 회개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 용서받을 기회를 영영 놓치고 멸망하고 말았습니다(마 27:3-5). 차라리 태어나지 않느니만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똑같이 예수님을 배반했지만 베드로는 곧 돌이켜 진정 회개함으로 새 삶을 얻어 위대한 전도자가 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 쓸모없이 태어난 인간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목적과 소망을 두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과 본분에 부합하지 못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그 사람을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으면 좋을 뻔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느 부류의 사람이며 성도입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꼭 필요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불필요한, 아니 오히려 있어서는 아니 될 존재 입니까? 부디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없어서는 안될 귀한 존재로 살아가시길 축원합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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