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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충만의 실제성에 관한 연구

JORC구원열차 2009. 1. 8. 10:30
성령충만의 실제성에 관한 연구
 
I. 서 론
 
A. 연구의 동기와 목적
 
하나님의 영원하신 성령은 신자의 영적 생명의 근원이고 지속이기 때문에 오늘날 신자들에게 가장 큰 관심을 주나 정확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므로 피상적인 지식 가운데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뿐만 아니라 성령에 대한 무지는 성도의 삶에 있어서 성령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게다가 20세기에 밀어닥친 최대의 충격파인 오순절 운동은 성령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괄목할 만한 교회성장을 가져왔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함께 성령에 관한 그 나마의 얕은 기반을 흔들어 버리면서 한국교회를 기형적 이해와 논쟁과 혼란의 와중으로 몰아 넣었다고 하겠다.
 
오순절 계열의 학자들은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고 성령의 체험적인 면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체험을 말씀보다 중시하고 능력과 은사를 성령충만한 삶과 동일시함으로 성령충만한 삶에 대한 이해에 많은 오류를 가져왔다. 여기에 개혁주의학파가 오순절학파에 반대되는 성령세례의 견해를 지나치게 거론함으로 오늘날 성령충만한 삶을 영위함에 있어서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많은 혼란에 부딪히고 있다.
 
그러나 성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도 강조되어야 할 부분은 성령충만이다. 성령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인격적인 성령이 인간의 지(知), 정(情), 의(義)를 점유하고 지배하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이런 삶은 그리스도인에게 능력과 생기와 기쁨이 넘치는 삶을 제공한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사실들로 인해 성령충만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지고 강조되지 않으므로 인해 결국 실제 성령충만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과 관점에서 볼 때 성령충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연구는 무엇보다 절실하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연구는 성령세례의 의미와 역사성 및 단회성을 밝히고 성령신학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성령충만의 정의와 방법과 그 결과를 제시하여 한국교회와 성도들이 성령충만한 삶을 누리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B. 연구 방법 및 범위
 
본 연구의 목적은 성령과 성령충만에 관한 신비적 및 기타 그릇된 인식에서 떠나 성경에 근거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하고 나아가 성령충만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성도들을 돕는데 있다.
 
연구방법은 성경을 중심으로 하고 해석학적인 방법을 치중하며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연구하여 결론에 도달하려 한다.
 
먼저 성령님에 대한 서론적 고찰을 통해 성령님의 인격성과 신성 및 삼위 일체성을 서술하여 근원적 이해로 삼고, 3장에서는 성령충만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며, 이어서 4장에서는 성령세례를 고찰하여 성령충만과의 혼돈을 제거한 후, 5장에서는 성령충만의 실제성을 제시하려 한다. 끝으로 전체적인 요약과 함께 나름대로의 견해를 제언함으로 결론에 이르러 한다.
 
본 연구의 범위는 성령님의 어의와 성령충만의 성경적 근거, 성령세례, 성령충만의 정의와 방법 및 결과들의 고찰로 한정하며 성령의 사역과 은사는 방대함을 피하기 위해 다루지 않음을 밝힌다.
 
II. 성령의 본질에 대한 서론적 고찰
 
A.성령의 어의
 
구약성서에서 성령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루아하"이다. 이 말의 뜻은 공기의 움직임을 말한다. 그러나 문맥에 따라서 이 말은 바람, 폭풍, 호흡, 생명력(vitality)등의 뜻을 가진다. 볼프는 구약성서에 나타나고 있는 "루아하"의 뜻을 여섯 가지로 구분하였다. 즉 바람, 숨, 생명력, 영, 정서, 의지력 등이다.
 
그런데 389회 중에 113회 이상이 바람을 가르킨다고 한다. 그리고 "루아하"가 전체 사용된 것은 136회나 된다고 한다. "루아하"의 전체 사용횟수 중에서 35% 정도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쓰이고 있다.
 
"루아하"가 바람의 뜻으로 사용될 때도 공기 자체가 단순한 자연현상으로만 쓰여지지 않고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활동의 한 도구로서 쓰인다는 것이 구약의 일반적인 특성이다. 즉 바람으로 홍수가 마르게 하시고, 바람으로 메뚜기를 몰아오게 하시고, 바람으로 홍해를 갈라지게 하시고, 바람으로 메추라기를 몰아 오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바람을 일종의 사역자로  쓰셨다. 이 "루아하"는 신적이요, 전능한 것으로 야웨께서 사용하는 군세요, 강력한 현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 바람으로서 "루아하"의 움직임은 하나님의 자기 임의성을 암시하며 "하나님의 신비한 뜻과, 목적에 의해서 움직이는 변혁하는 힘 또는 권세를 의미한다.
 
"루아하"가 생명의 자원인 호흡, 생기, 숨으로 사용될 때도, 일반적인 생명체의 기운으로도 사용되지만 의인법적으로 하나님에게 적용되기도 했다.
 
이때의 "루아하"는 생명의 자원으로 이것이 있는 한 사람은 '산 존재'인 생명체가 되고 그것이 없으면 비생명체인 흙이 되어버리고 생명인 "루아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이다. 즉 생명과 죽음은 "루아하"에 달려 있다. 어디까지나 "루아하"는 하나님의 것이요, 결코 인간 본질에 내주하는 어떤 인간 구성요소는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그것을 받을  뿐이고 루아하의 본질은 오직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이다."
 
때로 "루아하"는 생명력(pathos)을 가지고 있는 '마음'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때에도 인간이나 동물이나 우상에게는 129회 그리고 하나님께 관련되어 사용된 횟수는 136회라고 한다. 이 "루아하"는 아픔을 느끼기도 하고, 의심과 질투도 일으키며, 근심에 잠기기도 하고 겸손해 하기도, 성급해 하기도, 분노와 불만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루아하"가 선한 영, 악한 영이라는 어떤 초자연적인 존재를 가리킬 때도 쓰인다. 여기서는 악신도 역시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하나님은 뛰어나게(pre-eminently) "루아하"를 가지고 계신다. 그는 숨을 쉬며, 살아계시며, 행동하는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역사하는 곳에는 바람이 일어나며 "루아하"가 운동한다."
 
신약성서에서도 성령에 대한 어원은  근본적으로  구약성서와  동일하다.
신약성서에서 성령으로 번역된 말은 대체로 '프뉴마'(pneu'ma)이다. 
이것은 '프네오(pnevw)'라는 동사에서 온 말로써 본래의 뜻은 바람이 불어 공기가 흐르는 것과 같이 숨을 흡입하고 내뿜는 생명력(Vital force)을 의미한다.
 
그것은 바람(요3:8. 히1:7), 호흡(살후2:8. 계11:11.13:15.눅8:55), 생명의 동인 및 상태, 그리고 영(Soul)(막2:8.14:38. 눅1:80. 요11:33.13:21), 또한 정신(Spirit)으로 쓰인다. '푸뉴마' 역시 "삶의 다이나믹한 원리, 그리고 생명력과 활동의 중심으로서 인간의 역동적인 원리"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에게 생명력을 수여하시는 생명의 하나님"(a vital God)이며, "인간의 루아하나 프뉴마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the vivifying gift of God)이므로 인간은 오로지 여기에  의존해 있는 것이다. 성령은 "창조물과 재창조물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불어 넣는 하나님의 숨(God's inpiring breath)"이다. 
 
F.W.Dillistone은 성령을 정의하기를 "인간의 삶 속에 역사하는 하나님(God in action in human life)" 이라고 했다. Alan Richardson도 성령에 대해 설명하기를 "인간의 영(pneuma)은 그의 능력(Dynamis)이며 활동하는 그의 인격이다. 하나님의 영도 마찬가지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이다.(God's Spirit in God acting)"라고 했다.
 
B. 성령의 속성
 
1. 성령의 인격성
 
1) 성령님은 인격적 특성인 지(知), 정(正), 의(義)를 가지신다.
인격의 본질적 요소들을 성령이 가지신 것을 성경이 보여준다. 성령님은 지혜의 영이며,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으로서의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며(고전 2:1) 마음을 감찰하시며 생각하는 지각을 소유하고 계신다.
 
성경은 또한 성령께서 풍부한 감정을 소유하고 계신 것을 증명해 준다. 곧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심정 속에 부어 주시며 근심하시고, 탄식하시며, 시기하시며, 위로하시고, 동정하신다.
 
성령은 또한 의지를 가지신 분이다. 그는 뜻과 계획을 가지시고 그대로 시행하신다. 은사를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는가 하면(고전 12:11)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고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비두니아로 가시는 것을 막으시기로 하셨다.(행 15:6-7)
 
성령님은 예수그리스도와 같이 사랑이 많으시고 지혜로우시며 온유하시고 굳세시며 신실하셔서 우리가 참으로 신뢰하고 사랑할 만한 참 인격자이시다.
 
2) 성경에서 성령님을 말할 때 지시대명사(it)를 사용하지 않고 인칭대명사를 썼다.
요16:7,8, 13-15의 구절에서는 희랍어로 12번이나 성령을 남성단수 3인칭 대명사로 사용한다.
 
챨스 핫지(Charles Hodge)는 "성령은 시적이거나 황홀한 대화 속에서가 아니라 단순한 일상담화 가운데서 교훈적으로 자주자주 인격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인격성은 다른 많은 부차적인 증거들에 의해서 확실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의인화의 원리를 적용시켜 인칭 대명사가 성령께 사용된 사실을 설명하려는 것은 성령해석의 모든 원리를 범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3) 성령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만이 할 수 있는 활동을 하셨다.
즉 성령님은 말씀하시고(마 10:19-20, 행 7:29, 10:19, 11:12, 28, 13:2, 21:11 딤전 4:1, 히 3:7, 계 2:7, 11, 29, 3:6, 13, 22, 14:13) 증거, 책망, 교육, 부르심, 권면, 명령, 인도(요 16:13, 롬  8:14, 마 4:1, 고전 2:10)하시며, 기도를 도우시고(롬 8:26, 엡 6:18, 고전 2:10-11), 위로하시고(행 4:31, 요 14:16, 고후 1:3-4, 요 9:35), 일꾼을 선택하시고 창조사역을 하셨다.(행 1:2, 시 104:35)
 
4)  성령을 다른 말로 표현할 때 인격의 칭호를 붙여 "보혜사"(Paraclete), 즉 돕기 위해 옆에 있는 자란 뜻으로 표현하였다.
(요 14:16, 15:26) 성령님을 인격으로 알고 믿어야 할 중요한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예배에 있어서 중요하다. 둘째 성령의 바른 능력을 알기 위해서다. 성령님을 감화력이나 능력이라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하면 성령을 붙잡아서 이용할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성령을 이용하려는 시몬의 경우처럼 될 수 있다. 반대로 성령님을 인격자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하면 성령께서 나를 붙잡아 주실까 하는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자기의 욕망과 자만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째 인격자만이 인간의 사정을 알고 도와줄 수 있다.
 
성령을 받는다고 하든지 또는 신비적으로 탈선하는 경우는 대개 성령과의 인격적인 정상단계가 아닌 자기감정에 도취된 무속행위라고 지적 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을 인격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개인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의 정상적 성장을 위하여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성령님을  인격으로 인식하는 것은 성령충만한 삶의 근원이 된다.
 
2. 성령님의 신성
 
성경은 성령께서 인격적인 특성뿐 아니라 신성도 겸비했음을 보여준다.
 
1) 하나님의 영은 창조(창 1:2)와 섭리(시 104:30)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잉태(눅 1:35)와 부활과 각 그리스도인에게 영적 선물을 베푸는 일들을  감당하신다.
 
2) 성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다양한 호칭이 그의 신성을 증거 하는바 그는 하나님의 신(창 1:2, 마 3:16), 주의 성령(눅 4:18), 우리 하나님의 성령(고전 6:11), 그의 신(민 11:29), 여호와의 신(삿 3:10), 주의 신(시 139:7), 주 여호와의 신(사 61:1), 너희 아버지의 성령(마 10:20)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고후 3:3), 나의 신(창 6:3), 그의 영(롬 8:11), 그리스도의 영(롬 8:9, 벧전 1:11),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빌 1:19), 예수의 영(행 16:7), 그 아들의 영(갈 4:6), 주의 영(행 5:9, 8:39)등으로 불리워졌다.
 
3) 위의 명칭들은 삼위일체와의 관계를 계시하고 있으며 성령은 하나님의 한위시다.(삼하 23:2-3, 창 1:2, 고전 3:16, 마 12:31-33, 롬 8:9-10)
 
4) 성령님의 속성 - 전지성(고전 2:10, 11), 편재(시 139:7, 요 14:17), 전능(슥 4:6), 진리성(요일 5:7)이 그의 신성을 증거한다.
 
성령님의 신성에 대해 핫지는 "제 4세기 이래 성령의 참된 신성은 그의  인격성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의해 부정된 일이 결코 없었다" 고 말했다.
 
III. 성령충만의 성경적 근거
 
A. 구약성경에 나타난 구절들
 
구약성경에는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별로 없다. 하나님의 신, 혹은 하나님의 영이란 말이 성령과 같은 의미로 표현되었다.
 
출애굽기 31장 3절에 성막을 짓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신이 브사렐에게 충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성막을 짓게 했다는 구절이 있으며 신명기 34장 9절에는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지도권을 인계할 때에 여호수아에게 안수하매 그에게 지혜의 신이 충만하였다고 했고 이사야서 6장 3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특수한 사역을 수행키 위해서 성령충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B. 신약성경에 나타난 구절들
 
신약성경에는 성령충만하다는 구절이 여러 군데 있다. 눅 1:15절에 세례 요한이 잉태되었을 때 성령이 충만했다는 표현이 있고 41절에서 요한의  어머니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으며 6절에는 요한의 아버지 샤갸라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다. 또한 눅 4:1절에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물세례를 받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광야에서 40일 동안 마귀에게 시험을 받았다는 구절이 있다.
 
사도행전에는 2장 4절, 4장 8절, 31절 등에 성령충만이 언급되어 있고 7장 55절에는 스데반이 성령충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엡 5장 18절에는 성령충만 받으라는 명령의 구절도 있다. 성령충만에 관한 구절들의 주석을 살펴보면 눅 1장 15절 주석에서 칼빈은 단지 위대한 약속을 드러내는 특성이 요한에게서 나타날 것이라는 뜻이라 했고 이상근 박사는 육적으로 취하지 말고 영적으로 취하라는 뜻이라 했으며 박윤선 박사는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것은 그가 자기의 사명을 잘 실행하기에 족한 능력을 받았다는 의미다 고 주석했다.
 
또 구로사끼씨는 육적 인간과 영적 인간과의 대조라고 했고 류형기 주석에는 구약에 있어서 성령은 하나님의 잠정적인 은혜로 특별한 인물에게만 주어졌으나 요한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했다.
 
눅 1장 41절에 요한의 어머니도 마찬가지로 잉태 되었을 때 보통 잉태보다 하나님의 특별한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눅 1장 67절의 샤가랴는 당시의 제사장으로서 성역을 수행하던 분이다. 그가 성령충만하였다는 것은 누가의 기록에 있어서 성령은 대개 예언과 계시의  방편이 되어있다고 말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종들에게 보통 때에도 성령의 은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경우에 더 풍성한 성령의 은혜를 받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으며, 이상근 박사도 누가복음에서의 성령은 예언의 경로라고 말한다.
 
눅 4장 1절의 예수님의 성령충만은 예수께서 성령을 소유하시지 못하다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써 성령충만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분명한 사역을 말한다. 칼빈은 그리스도께서 보다 더 풍성한 은혜와 능력의 띠를 띠게 되어서 자기 앞에 놓여진 전우를 맞이하는데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 놓으셨다고 했다.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는 성령의 힘이 마치 외적으로 실재하여 예수를 몰아낸 것 같이 묘사되어 있으나 누가는 전혀 외적 작용과는 다른 것으로  말한다.
 
사도행전에 성령충만을 입은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사도들과  제자들이었다. 행 7장 55절에서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란 말은 그가 일찌기 성령 충만한 은혜를 받았는데(6:5-8)이 장면에 와서는 더욱 충만하였다는 뜻이라고 박윤선 박사는 말한다.
 
행 9장에 사도바울의 눈먼 것이 아나니아의 안수로 나았다는 사실은 성령 충만한 역사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령의 신령한 은사가 그에게 임하여서 성령충만케 한 것은 특별한 주님의 사역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다.
 
행 11장 24절의 바나바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고 했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그의 마음을 주장했고 튼튼하고 강건한 믿음으로 그의 마음을 채웠다. 믿음이 온전한 자라면 성령이 충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성령 충만한 자라면 선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나바는  육신의 욕망을 물리치고 성령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온 마음을 다해 경건을 개발하는데 힘쓴 사람이었다.
 
엡 5:18절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주신 성령의 충만함을  언제나 누리도록 권면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상에서 살펴볼 때 성령충만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그분의 특별한 사역을 위하여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것임과 사역과 봉사에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께서 성령충만을 받으셨다고 하는 것은 공생애의 시작을 의미하며 특별한 주님의 사역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고 일할 때 성령을 충만케해서 주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한다.
 
또한 사도행전의 성령충만에서는 성령충만은 특별한 주님의 사역을 하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성도 자신들의 건덕을 풍성케 하는 것임도 알 수 있다.
 
특히 스데반의 성령충만은 하나님의 사역과 나아가 개인의 건덕뿐만 아니라 성도가 성령충만을 받음으로 인해 초자연적인 삶을 살게 됨을 알게 한다. 행 11장 24절의 표현은 성령충만이란 말씀과 믿음으로 충만한 것임을 말해준다.
 
IV. 성령세례에 관한 고찰
 
근래에는 오순절 사건에 대한 해석문제, 성령세례와 중생과의 관계, 성령 세례와 성령충만의 문제가 성령론에서 주된 논제가 되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서로 극단적인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서 성령론은 심한 혼란과 혼동의 와중에 빠져있다. 그러므로 다양한 학설을 성경에 조명하여 옳고  그름을 밝히고 바른 이해를 정립함이 신학적으로나 목회적 측면에서 절실하다고 하겠다. 이러한 문제들은 오순절 성령세례의 의미와 성령세례의 단어의 어의를 고찰함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될 것이다.
 
A. 성령세례의 의미
 
여러 학자들이 성령세례의 의미를 다양하게 말하고 있다. 가핀은 "성령세례는 한마디로 말하면 오순절 성령강림이다. 오순절 사건은 약칭 성령세례, 성령강림, 혹은 성령선물 등으로 불려지며, 또한 성령에 의한 세례라는 뜻이 있는 동시에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는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큰 차이가 없으나 이 말의 요점은 신자가 성령에 의해서 영적으로 세례를 받는다라는 뜻이다" 고 말했다.
 
핀녹은 성령세례의 용어에 대하여 특수한 용어가 아니라 융통성 있는 은유적 용어라 말하고 있다. 즉 성령의 임함을 말하는 통칭적인 의미로 받아 들여 때로는 성령충만의 동의어로 볼 수 있으며 회심의 경우를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안영복 교수는 오순절 날에 각 사람위에 '성령이 임한 것'을 가리켜 '성령의 세례'라고 말함이 타당하다고 했고 박영선 목사는 "성령의 부어주심"이라고 표현하면서 예수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와 성령님께서 베푸실  성령세례를 구분했다.
 
또한 우희영 목사는 "성령세례란 성령 속에 잠기며 성령 자신으로 말미암아 기름 붓듯, 혹은 물 붓듯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로이드 죤스는 "성령의 보증" 혹은 "성령의 인침"과 성령세례를 동일시했고 부루너(Fredick Bruner)는 세례 받는 것이 곧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이며 성령의 세례가 따로 있을 수 없다고 했는데 스위스 개혁신학자 파디(Ren'e Pache)도 "성령의 인격과 사역"이라는 책에서 동일한 견해를 표현하였다고 하겠다. 칼빈 또한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일시했다.
 
이러한 모든 견해는 대체로 두 가지 주장으로 분류 될 수 있다. 즉 오순절파와 웨슬레안 및 케직파의 견해와 개혁주의(칼빈주의)의 학설이 그것이다. 전자는 중생 후에 받는 이차적 경험으로서의 체험을 성령세례라 해석하며 후자는 중생 시에 받는 어떤 것으로서의 성령세례를 말한다.
 
이렇듯 성령세례의 의미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주의 깊게 고찰되지 않으면 그 실체를 분간하기 어렵다.
 
신 구약 전체를 통하여 성령세례라는 말이 7회 나타나고 있다.(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행 11:16, 고전 12:13) 여기에 인용된 성구들을 살펴보면 복음서의 성구는 세례요한이 자신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을 비교하면서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거니와 그는 성령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시리라"(막 1:8)고 말한 예언적 내용이다. 그리고 행 1:5의 말씀은 예수께서 부활 후에 승천하시기 전 사도와 같이 모인 무리에게 하신 예수님 자신의 예언이며 행 11:16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쓴 것이고 고전 12:31절은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주었던 교훈에 포함되어 있다.
 
먼저 성령세례가 직접 언급된 복음서와 사도행전 1:5을 살펴보면 성령세례는 예언과 약속의 성취로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난 오순절 사건을 의미함을 알 수 있다. 세례요한에 의해 예언되고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약속된(행 1:5) 성령세례가 오순절 날에 성취된 것이다.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하여 이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성취되었음을 명백히 한다.
 
Sanders도 성령세례는 오순절에 내린 성령의 은혜를 가르쳤던 것이다고 말했다. 또한 문법적으로 약속된 세례의 태가 수동태인 것은 성령세례가 받은 자의 행위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동시에 예언과 약속의 성취임을 말해준다 오순절 사건의 특성과 의의를 살펴보자.
 
첫째, 오순절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다.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이는 전혀 없었던 성령이 강림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령은 오순절 이전에도 이미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계셨고 사역하셨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 강림은 인간을 위한 성령의 주된 사역이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즉 예수그리스도의 시대가 끝나고 성령의 주도적 사역이 시작됨을 알리는 사건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은 역사성을 가진다.
 
렌스키도 마태복음 3장 11절을 주해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순절 전에는 성령이 없었고, 오순절 후에 성령이 임했다는 것이 아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오순절 전에는 한 영혼도 구원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차이는 구속 사역이 실제로 완성되기 전에는 성령의 사역이 제한된 예비적이였으나, 그 후에 이르러 성령의 충만이 있었다는 차이다."
 
렌스키 역시 오순절 사건이 성령의 주도적 사역의 시작을 의미한다는 입장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오순절 사건은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것의 시작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성령의 시대의 시작이다. 고든(Gordon) 또한 오순절 사건을 성령시대의 도태의 축으로 해석했다.
 
둘째로 오순절 사건은 구속사적인 사건이다.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성역초기에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줄 분이라고 말한 다음 그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눅 3:17)고 말함으로 성령과 불로 세례 주는 일이 어떤 일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의 종말론적인 사역으로 그의 죽음과 부활과  직결되어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역사상에 구속성취를 이루시고 그 구속을 받아들이는 알곡은 곳간에 모으고, 그 구속을 배척하는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베드로는 요엘 2:28-32을 인용하여 오순절 사건을 설명하면서 요엘서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 비추어 인용했다.
 
베드로는 요엘서의 '그 후에'를 '말세에'로 고쳤을 뿐만 아니라(행 2:17) "저희가 예언을 할 것이요"(행 2:18)를 첨가하여 인용하였다. 그 이유는 오순절 사건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과 아울러 말세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흥미있는 사실은 예수님이 보혜사 성령의 오심과 자신의 죽음을 연계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16:7-8의 말씀 가운데 나타난 예수님의 생각의 방향은 자신이 죽음과 부활, 승천을 거쳐 오순절 성령세례 사건에 있음을 본다. 예수님 자신이 죽으신 후 부활해야만 보혜사가 오실 것을 명백히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오순절 사건은 구속적 드라마의 한 부분으로 성취된 사건이며 다른 구속 사건들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오순절 사건은 예수님의 성육신, 수난, 죽음, 부활, 승천과 함께 고려되어져야 한다.
 
스타트(Stott)와 개핀(Gattin)도 오순절의 성령강림의 의의를 구속사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있다.  개핀은 오순절의 의의를 3가지 차원에서 조명하였는데, 기독론적 차원, 교회론적 차원, 그리고 경험적 차원이다.
 
기독론적 차원에서 볼 때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시는 자는 바로 성자이시다. 오순절은 약속의 성령에 대한 예언이 성취된 날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적이며 기능적이며 종말론적인 섭리사건이다. 십자가로 절정을 이룬 성자의 사역의 절정이었다.
 
셋째, 오순절 사건의 특징은 초자연적인 가시적 현상의 체험이다.
바람같은 소리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과 방언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들은 먼저 상징적 의미로 설명되어져야 한다. 예언과 약속이 성취되었고 새로운 언약시대의 도래가 이루어졌다는 확증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가시적 현상이 나타날 수는 있겠으나 모든 경우와 간구에 의해 이러한 동일 현상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은 합당치 않다고 하겠다.
 
성령행전 이라고 불리워질 정도로 성령의 끊임없는 역사가 상존했던 사도행전의 나머지 부분에 방언을 비롯한 가시적 현상이 교회선교사역에 반복되었다는 제시가 없다. 오순절 사건의 가시적 현상들은 주의깊게 언급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넷째, 성령의 충만을 모든 믿는 자들이 받았고 특별한 능력이 임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케 되고 능력의 은사가 임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목격한 후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약속하신 성령님을 간절히 사모하게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성령님에 대한 간절한 사모와 전혀 기도에 힘쓴(행 1:14)의지의 순종이 막 주도적 사역을 시작하시는 성령님을 그들 속에서 충만히 역사하시도록 했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역사했던 능력 또한 예수그리스도의 예정과 인정하심에 의한 것이지만 성령으로 충만함으로 은사와 능력이 나타났다고 봄이 더욱 보편적이며 일괄성이 있다고 하겠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고린도서에 나타난 성령세례의 언어적 의미를  고찰해보면 성령세례의 의미를 더욱 분명하게 알 수 있다.
 
먼저 세례라는 말의 헬라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상태 또는 이전의 환경이나 상태와의 관계를 바꾸기 위해서 사람이나 사물을 그 외에 어떤 것과 결합시켜 놓거나 새로운 환경으로 이끌어 들이는 것."으로 정의되며 그 번역은  로 들여놓다. 또는  로 끌어들이다 라고 K.S 위스트는 설명한다.
 
성령으로 세례를 베푼다의 31절에서 "성령으로"는 수단을 말하는 성령으로서의 세례, 또는 성령의 세례가 아니라 "성령의 영역에서의 세례를  뜻하며, 성령은 세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 K.S 위스트는 말한다. 또한 믿는 자를 예수그리스도와의 생명적인 결합으로 이끄는 것이지 성령에 의한 세례가 능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고 말했다.
 
결국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의 헬라어 의미는 "죄인이 예수그리스도와 생명적인 결합으로 들어가는 것,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삼으신 것을 의미한다" 성령이 믿는 죄인을 주 예수께서 살아계신 머리가 되신 그 신비체에 들여놓거나 이끌어 들이는 것을 뜻한다.
 
렌스키와 칼빈도 요 1:33과 행 1:5을 주해하면서 세례라는 개념을 구속적인 의미로 해석했다.  이상근 박사 또한 성령의 세례는 위에서 오는 선물로 그리스도와 같이 죽고, 같이 살아 그의 몫이 되는 것이라 하여 성령세례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연합으로 해석했다. 또한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역사적이든 개인적이든 단회적 사건이다.
 
막 1:18, 마 3:11에서 "세례를 주실 것이리라"는 뜻이 단어(배티세이)는 미래능동태 3인칭 단수 동사로서 한번 이루어질 것이 예언되었기에 성령세례는 단회적이라 할 수 있다. 요 1:33의 "세례를 주는" 단어 (배티죤) 역시 현재 분사 능동태 주격 남성 단수 동사로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단회적인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고전 12:3절 마찬가지로 그 동사는 과거의 행동을 가리키는 과거 시제이며 단 한번만의 행동을 가리키는 부정과거이다. 이와같이 성령세례에 관한 주석가들의 해석과 언어적인 의미를 고찰해 보았을 때 성령세례는 죄 씻음과 부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표식으로서의 역할과 생명이 임하는 단일성의 사건으로 이해된다.
 
이상의 고찰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성령세례는 어떤 능력이나 은사의 체험이 중심이 아닌 역사적 구속사적인 사건이요 예수그리스도의 몸과의 결합이며 단회적 사건으로 성령충만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성도가 성령의 은사는 마땅히 사모해야 하겠지만 성령세례를 사모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V. 성령충만의 실제성
 
A. 성령충만의 정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능력과 생기와 기쁨이 넘치는 삶이다. 그리고 이 삶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을 때 가능하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충만한 삶이라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성령충만이 무엇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다.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여 오순절 때 제자들이 체험한 것과 같은 동일한 체험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이러한 체험을 성령충만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성령세례를 성령충만과 구별하면서 성령세례는 단회적 작용이지만 성령충만을 계속적인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학자 중에는 토레이(R.A. Torrey)와 디기(D. Gee) 그리고 윌리암스(E.S. Williams)등의 오순절 계통학자와 브루스(F.F. Bruce)와 옥켄가(H.Ockenga)등이 있다. 이들은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동일한 사역임을 주장하면서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의 경우와 같이 불같은 세례를 부으면서 충만케 된다고 주장한다.
 
이들에게 있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은(엡 5:8)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을 전제로 한 말이다. 즉 처음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은 것을 성령의 세례로 보았기에(행 1:4-5, 2:1-4) 성령충만을 받으라는 말씀을 성령의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과 동일시하였다.
 
따라서 브루스는 "성령세례의 결과가 성령충만이며, 성령충만은 그 후 여러 번 계속된 것" 이라고 하였고, 옥켄가도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경험이 성령충만이고 성령충만 이후에 비로소 능력을 행사 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토레이 역시 "성령의 세례를 성령충만과 동일한 비상한 은혜로 보았다.
 
그러나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데는 많은 문제가 있다. 왜냐 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라는 표현은 성령이 믿는 자의 마음과  정신을 점유하고 있는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충만"이라는 단어는 이 단어가 성령이 아닌 다른 단어와 함께 사용된 실례가 "심히 두려워하여"(눅  5:26)라는 문구에 나타나 있다. 데어는 그의 헬라어 사전에서 여기에 사용된 동사를 "전체 마음을 점유하고 있는 상태"라고 표현하였다.
 
이 점유는 그 마음을 성령이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에베소서 5장 18절에서 그 동사도 조격을 받고 있는데, 그 조격은 그 수단에 의해서 동사의 행동이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동사의 행동은 신자에게  미치는 어떤 지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 말은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으라"로  해석 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충만은 성령세례와 구분되어 지는 성령의  인격적 지배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와같은 견해에 대해서 많은 학자들이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박형룡 박사는 성령세례가 오순절에 임한 것은 부인하지 않았지만 그는 "성령의 충만은 성령세례와 다르다" 고 하였다. 스토트(J.S. Stott)는 말하기를 "성령의 충만함은 성령세례의 결과이며, 세례는 독특하게 처음으로 얻는 경험이고 충만함은 영적생활을 계속하는 도중에 반복하여 받은 성령의 비상한 은혜"라고 하였다.
 
로이드 죤스도 성령의 영향아래 있는 것,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는  것을 성령충만으로 보았다.  빌 브라잎도 "성령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성령의  지배를 받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것" 이라고 보았다.  이외에  R.펙손, J.월부어트, A.머레이 등이 성령의 충만을 인격적인 성령의 지배로 보고  있다.
 
살펴 본 바와 같이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시하는 오순절 계열의  학 자들은 성령의 체험적인 면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체험을 말씀보다 중시하였고 능력과 은사를 성령충만한 삶과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원어에 나타난 것과 같이 성령에 의한 지배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인격적인 영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지배되는 상태를  성령충만으로 보는 것이 정당하다고 본다.
 
B. 성령충만의 실제
 
1. 성령충만과 인간의 의지
 
성령이 믿는 자에게 역사하는 지배는 성령에 대하여 믿는 자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올바르게 순응하느냐에 달려있다. 즉 이 말은 믿는 자는 성령이  그 안에 내재하시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의 훈련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를 구세주로 인정하고 구원에 대해  우리가  그를 믿을 때까지 우리를 구원하지 않으셨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아버지께서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하시도록 보내신 분으로 인정하고 그가  우리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도록 신뢰하기까지는 우리를 지배하시지 않는다. 성령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충분히 지배하지 못하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성령께서 자기들의 마음에서 자동적으로 일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팔마의 말에 귀를 기울어 보면 성령의 더욱 풍성한 내주를 얻는데 있어서 사람의 책임한계는 백 퍼센트이다. 하나님이 주신 방도를 소홀히 한다면 그는 성령을 더 소유치 못할 것이지만 반대로 그가 하나님의 방법들을 사용한다면 그는 성령을 더욱 소유할 것이다. 이 성령의 더욱 충만한 내주를 구할 의무는 완전히 사람에게 놓여있다.
 
그러나 동시에 성령을 주시는 일은 순전히 백 퍼센트 하나님께 달렸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인간이 도와야 할 것이 전혀 있지 않다 하나님이  전부 이끄신다. 사람이 백 퍼센트 책임지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  모든  능력을 주신다. 이것이 은혜 -맨 처음부터 맨 끝까지- 은혜요 절충이 아닌- 의  복음이다.
 
2. 성령충만의 조건
 
1) 성령충만을 사모함.
로이드 죤스는 성령충만을 위해서는 사모함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자신을 드림과 함께 충만해 지고자 하는 소원이 있을 때 성령충만을 받기에 적합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7:37,38에서 성령의 충만을 위해 두 가지 단순한 요구를 하셨는데, 그것은 성령의 지배를 갈급해 할 것이며 성령의 지배에 의해 주 예수를 믿으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라는 말은 성령께서 신자 자신의 모든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지배하시는 분이되시기를 바라는 신자의 열망을 말한다. 우리가 목마르지 않으면 물을 마시지 않는다. 우리가 성령의  지배를  바라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성령이 우리들의 삶을 지배해  주기를 원하는 열망을 갖아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케 되기 위한 소원 속에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속에 있는  죄를 판단하시고 제하시도록 하는 원함 또한 포함되어야 한다.  이것은  세상의 끈과 악한 제도로부터 주님께로 분리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즉 죄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았다는  사실을  우리 삶속에서 효력을 보기 원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 원하는 소원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령의 충만은 참으로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과 그  값을 치룰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들과 그것을 받는 것이 필요하여 다른 모든 것을 버리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다. 예수님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충만히 채워질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진정으로 성령에 의해 지배되기를 원하는 소원은 기도와 말씀의 풍성함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기도와 말씀의 충만이 성령충만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말씀과 기도가 뒤따르지 않는 원함은 지식적이고 피상적 사모함이다.
 
2) 죄를 고백함
스토트는 성령충만의 은혜가 잃어진 때에는 회개와 기도로 그것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성령은 죄 때문에 슬퍼하시며(엡 4:30)  죄인에게  채워 주시기를 그치신다고 하였다. 그런데 회개는 채우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했다.  토레이는 성령의 충만을 성령세례와 동일한  비상은혜로  보면서 성령의 세례를 받는 7가지 방법을 행 2:38에 의해 열거했는데 첫번째  단계로 회개를 들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회개는 마음의 내적 변화를 깊이 느끼게 하는 것으로  사용 되었는데 그 내적 변화는 전 인격을 결정하는 것으로 그들의 죄와 불신에서 떠나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는 인격을 의미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용납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이루어  놓으신 사역임을 절대적으로 믿고 말씀의 빛에 따라 드러난 부분들을 버리고 어둠을 몰아내는 작업들이며 이것이 성령으로 충만케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행 2:38을 통해 볼 때도 그들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면 (세례의 목적과 결과는 죄의 용서이다)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  약속되어 있다.  작은 죄라고 하는 것조차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며 이것이 성령의 충만을 막아 버리는 고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려고 할 때마다 마음에 떠오르는 그 일들을 처리해야 한다.
 
레만 스트라우스는 생활 주위에 있는 모든 시기, 위선, 거짓, 더러운  것을 버리고 진실하도록 하라고 하면서 무례하고, 불친절하고, 상냥하지 않으며, 용서할 줄 모르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회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죄를 회개하며 성결의 옷을 입고 사는 신자는 성령에 민감한 자이므로 성령충만한 신자라고 하였다.
 
그 외에도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생각나는 모든 죄를 자백하고 성령  충만함에 따라 발견되어지는 성품 중에서 우리에게 부족한 점도 모두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허 복구 목사도 성령 충만의 8개  조건중의 하나로 회개를 들고 있고 죄는 신자의 성령의 지배를 방해하므로 죄에서 돌아 설 때에 성령으로 충만케 된다고 말했다.
 
죄인이 내재하는 성령님의 책망을 듣고 그 죄를 스스로 버리지 않는 한 성령님은 그를 지배할 수 없다.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결코 용서함을 받지 못 한다는 말씀도 이러한 의미에서 이해가 가능하다.
 
3) 간구함
우리가 만일 성령의 충만을 받으려면 그 충만을 간구해야  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정도는 우리가 그를 믿음으로 구하는가  않는가에 달려있다. 이것이 우리의 의무이고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이다.  우리가 성령을 위하여 간구하고 그래서 그를 충만히 받으면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를 간구하도록 보내신 분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Torrey는 성령 세례를 받는데 마땅히 밟아야 할 여섯째 단계로 눅  11:13을 말했는데  성령충만을 받는데 있어서도 적용되는 말씀이다.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아니 하겠는냐?" 단지 천부께 구하는 것이다. 분명한 성령의 충만을 받게 하여 줍시사고 구해야 한다.
 
박형용 박사도 "신자가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하여 사람 편에서 이행할 의무들로 지적된 것이 여러 가지인데 기도에 의뢰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라고 하면서 '이 주장의 뒷받침으로 눅 11:13이 인용된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오순절에 성령의 강림을 위하여 10일 동안 기다린 것 같이  오늘의 신자들도 성령의 충만을 위하여 간절히 기다려야 된다는 견해도 있는데  성령 충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로 봄이 옳을 것이다.
 
덤. 라레이도 '자신을 살피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생각나는 모든  죄와 부족한 점을 모두 고백하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완전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 다음 눅 11:13을 따라 성령의 충만을 간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오순절 이후로는 그리스도인은 오로지 간구하였다고 하였다.
 
4) 믿 음
기독교의 모든 축복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다.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써 죄책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며,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음으로써 죄의 세력에서 거룩케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성결의  영의 더욱 충만한 내주는 행위에 의해서 받게 되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  의해서 받게 된다.  성령께서 우리로 성령과 그리스도를 구하여 믿음으로 기도하도록 하심이 사실이나 우리가 그의 내적 임재를 믿음으로 구하면 구할수록 우리들의 생명 가운데 성령께서 더욱 충만히 오시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말씀 하시되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고 하셨다. 현재의 실재성을 나타내는 분사인              은 예수를 계속적으로 신뢰하는 자를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 바 그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되었고 예수께서도 여기서 반복하여 말씀하고 있다.
 
어네 빠쉬(Rene Pache)는 성령 충만하기 위해 우리가 걸어야 할 첫 단계는 믿는 것이라고 하면서 믿음을 세 가지로 설명하였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먼저 그를 믿고 모든 일에 그를 바라보기를 요구하신다는 것을 믿어야 하며, 둘째는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우리 안에 거하시기 원하는  것을 믿어야 하며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믿음으로 받을 수 있는 성령의 약속은 갈 3:14에서도  발견된다.  본 절은 "이는     이는"이라는 두 병행귀로 되어있다. 전절은  그리스도의  속화적 죽음이 가진 이중적 목적을 밝히고 있는데 첫째는 축복이 이방인에게  미친 것이고, 둘째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이다.
 
두 번째 "이는"은 첫째 것에 의거하는 것(그 결과)이 아니라 병행된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둘째 목적은 약속의 성령을 믿는 자에게  주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일찌기 성령을 보내실 것을 약속하셨고(요 14:16-18, 행 1:4) 이 약속은 오순절 때 성취되었는데(행 2:1-4, 33) 신약에서의 성령의  선물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이 보편화 되었고 또 성도와 더불어 성령께서 같이 계시는 것이다.(요 14:16)
 
케드린 마샬은 성령충만의 방법 7가지를 들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때(요 3:8) 성령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상에서  보건데 믿음은 성령과 그리스도가 충만히 거하시는 열쇠요 따라서 죄를  이길 능력을 얻는 열쇠다. 우리의 생명에 성령께서 충만히 거하시도록  믿음으로 기도하면 성령충만을 받게 될 것이다.
 
5) 순 종
많은 사람들이 이 조건으로 인하여 성령충만을 받지 못하거니와 또한  많은 사람들이 다른 어떤 조건으로 보다도 이 조건에 의하여 성령충만의 경험을 맛보게 된다. Torrey는 성령충만 받는 방법 7단계중 4번째 단계에서  순종을 성령충만 받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그는 특히 순종을 해야 한다고 말 할 때 이 순종은 행 2:38에서 우리가 주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모실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있어서의 순종 즉 하나님께서 명하시는데 따라 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순종의 중심은 의지에 있다고 하였다.
 
우리의 의지를 맡기는 일이야말로 성령의 충만을 받는데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조건의 하나라고 했다. 결국 성령 충만이 성령의 지배받음을 의미  하는바 성령의 깨닫게 하심과 감동하심에 순종할 때 성령충만의 실제를 체험케 되며 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자원하는 마음과 의지의 순종없이 성령께서 모든 것을 스스로 해 주시도록 기다리는 것은 성령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인격은 상대 인격을 인정하는데서 그 관계가 유지되고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므로 인격적 순종만이 성령충만을  가능하게 한다.
 
레만 스트라우스는 '빈 마음이 성령충만의 첫 조건이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헌신하고 완전히 복종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성령으로  가득 채워 주실 것이다'고 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리라는 예수님의 최후 분부하심을 순종한 무리들이 성령을 충만히 받았던 점으로  보아서도 그리스도의 분부하심에 대한 순종이 성령충만의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팀리헤이도 어떤 종류의 거절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은 성령충만을 방해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것은 성령의 충만을  방해 한다고 말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자신을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는 것이 성령 충만의 조건임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성령의 모든 지시하심에 극히 유의해야 하며 성령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을 하고 그에게 예민해 지는 것이 그 한 비결이다. 그에게 복종하면 할수록 그의 소원을 더욱 더 지시할 것이며 더욱 더 고무하실 것이다.
 
C. 성령충만의 결과
 
1. 성 화
성령은 우리 속에서 예수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분이며 성화하게 하시는 분이다. 그가 우리의 심령속에서 탁월한 위치를 차지할  때에  주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에 자유가 있으므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는 것이다.(롬 8:12, 고후 3:17)  웨슬레는 성화의 과정을 2단계로  보았다. 즉 초기의 성화와 온전한 성화이다. 초기의 성화는 거듭나서 성화의 단계에 들어는 갔으나 완전성화에 이르기 전의 상태로 불완전하다.
 
이것은 아직도 죄의 세력에서 온전히 헤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단계의 상태는 일반적으로 의심과 공포에 쌓여서 심한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반면 완전한 성화는 신자가 다시  자신의 무능과 자신 안에 남아있는 죄를 자각하고 믿음으로 받는 신앙체험으로  이 순간을 통하여 신자는 마음속에 남아 있는 죄성으로부터 씻김을 받으며 사랑과 봉사에 더욱 큰 힘을 얻어 승리하는 생활의 계기가 된다.
 
웨슬레의 성결론을 성령론적으로 설명할 때는 성령으로 거듭  나는  것이 신생함이니 곧 성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신생한 자는 성령이 그에게 내주하게 된다. 그리고 이 신자는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 온전한 성결에  이르게 된다. 성령충만이란 계속적인 유지를 포함한 용어이기에 성화의 목적론적인 면과 점진 성장의 면을 뚜렷이 함축하고 있다.
 
2. 성령의 열매
갈라디아서 5장에서 성령의 열매는 성령충만과 뗄 수 없는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 바울은 여기서 육체의 일들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바울이 육신과 성령에 의해 산출된  품성을  묘사함에 있어서 비슷한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육체  일들'  '성령  열매'이다. '일들'은 노동을 투입하니 아무 이득을 생산하지 못하고 '열매 맺는  일'은 재배가 요구되나 열매 자체는 직접적 노동의 결과가 아닌 성장과정으로  부터 나온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는 정말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은 성령충만을 위한 조건으로서 육체의 정욕을 이루지  않는  수단은 성령을 쫓아 행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16절), 육체의 소욕의 상세한  목록을 제시하고는(19-21절), 성령의 열매를 그것들과 대조해 놓고  있는  것이다. 특기할 것은 사도가 어떤 개인들의 생활속에 나타나는 이례적이고 일시적인 성령의 역사 곧 방언을 말하는 일과 같은 특별은사(카리스마)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모든 자들에게 베풀어진 은택에 대해 말하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이러한 은사들은 한 단위로 '열매' 즉  추수로  간주되고  있다. 또한 이 성령의 충만함에 의해 생산되어지는 이 열매들은  '그리스도를  닮음'의 완벽한 구현이라고 종종 지적되어 진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의 각  결과들은 '그리스도를 닮음'의 산출이라고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갈 5:22-23에 있는 9가지 성령의 열매를 살펴보고자 한다.  헨드릭슨이나, 스토트, 렌스키 등은 그들의 주석에서 9가지를 각 3가지씩 세 그룹으로 나누어 개괄적인 설명을 한다.  사랑, 희락, 화평은 지극히  근본적인 영적 성품들을 (스토트 :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태도), 오래참음, 자비, 양선은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여러 덕목들을, 충성은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신앙인들의 관계로서의 충실, 온유는 인간의 접촉에 관련되어 있고(스토트 :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겸손하고 부드러운 성품), 절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즉 자신의 욕망과 정욕에 대한 관계를 각각 나타내고 있다.
 
성령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그의 매일의 생활에서  사랑과  기쁨, 화평과 절제 등을 통해서 성령의 지배를 보여준다. 이것은 또한 근본적으로 타고난 좋은 성품이나 좋은 기질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생활을 지배하시는 초인간적인 성령충만의  열매들로써 성품과 생활에서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풍성히 맺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3. 관계의 변화
성령은 인간을 중생시키고 새로운 본질, 새 마음, 새 사고방식, 새로운  모든 것을 주시며 진정한 소망이 되신다. 사람들이 일단  성령이  충만해져서 그의 지배를 받기만 하면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악을 알고 자신들을  쳐서 복종 시키며 "은혜와 그리스도의 지식 안에서 성장하여" 서로의  관계가 주안에서 성숙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변화한다. 성령충만은 하나님을 향해서 감사와 찬송을 드림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뀌게 한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 기쁨과 감격과 찬송이 있다. 늘 원망이 있고 회의가 있던 우리 인생이 찬송과 감사로 바뀌어 진다.
 
둘째는 성령충만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듯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사랑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엡 5:22-28), 이는 남편도 성령의 뜻에  굴복 하고, 아내도 성령의 뜻에 굴복하는 관계이다. 남편과 아내가 성령의  조종에 이끌리어 사는 삶의 관계가 성령충만한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다.
 
바울은 성령충만한 삶의 관계 가운데 세 번째로 중요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설명한다(엡 6:1-4). 자녀들은 주님께 하듯 자신들의 부모에게 순종하되 사랑의 마음과 감사의 마음 그리고 존경의 마음으로 순종하여야 한다.
 
반면 부모들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여야 한다(엡 6:4) 이와같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성령이 조종하는  성령충만의 관계인 것이다.
 
바울이 성령충만의 삶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마지막으로 설명한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이다(엡 6:5-9). 종들은 육체의 상전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순종하여야 한다. 종들은 외형적으로만 순종할 것이 아니요.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반면 주인은 종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의와  공평으로 그들을 대접해야 한다. 왜냐하면 주인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하늘에 계신 주인은 사람을 외모로 보시지 않기 때문이다(엡 6:9). 주인도 종도  그리스도께 하듯 서로를 대하는 것이 성령충만한 관계인 것이다.
 
바울은 성령충만한 삶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이상의 세 관계를  설명했다. 이는 성령충만이 성도들의 매일 매일의 삶과 직결되어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의 삶은 성도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그 형편에서  성령께 철저히 굴복하고 성령의 뜻에 따라 사는 삶을 가리킨다.
 
4. 전 도
성령충만의 결과는 다른 방면에도 많이 나타나겠으나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향해서 불타는 심정을 갖게 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뭐니  뭐니해도 오순절에 성령충만을 받은 제자들이 복음의 능력있는 증인이 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는 행 1:8의 성경 말씀으로 잘 알 수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여기서 성령이 제자들에게 임하신 후에는 두 가지 결과가 뒤따르게 될 것을 알 수 있는데 능력(권능)을 받을 것과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 그것이다.
 
즉 오순절 성령 강림의 결과는 제자들이 능력을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인데 이것이 사도행전 전체의 주제이며, 또한 사도행전의  기록들은 위의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복음 전파의 능력이 성령충만과 관련되어 있음은 예수님의 경우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사도행전의 저자와 동일한 저자인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과 권능이 차례로 나타 나는 데 예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시고(눅 3:21-22),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돌아 오셔서(눅 4:1)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귀의 시험을 받으시고는 (눅 4:1-13)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셨고(눅 4:14) 백성들에게 가르치셨다(눅 4:15).
 
바울 사도의 경우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나 이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나로 이 일에 당연히 할 말을 담대히 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6:19-20) 하였는데 이는 감옥에 갇힌 죄수로서 출옥이나 조금 편한 대우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 않다. 감옥에 있는 죄수로서 더욱 담대히 입을 벌려 그리스도의 비밀을 증거 하도록 그것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
 
성령충만한 자의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타는 간구요 원함이다. 성령충만한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볼때 불쌍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의 곤고함과 그들의 영혼들의 불쌍함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고통과 고난과 어려움도 감수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5. 은사의 체험
은사를 받지 않은 신자는 없다(엡 4:7)고 했지만 성령이 충만한 성도들에게서 은사가 더 많음을 볼수  있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역사 속에 행 2:38에 "베드로가 가로되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한 말씀은 회개하는 자가 성령의 은사를 받게 됨을 시사하는데, 여기에서 "성령의 선물로 받으리나" 한 것은 성령충만과 성령의 은사 주심을 의미한다.
 
마가의 다락방의 문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자 방언을 하는 등 각가지 은사가 임했다.(행 2:1-4)  즉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제자들이 성령충만함으로 능력과 은사를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이 되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볼 때 성령이 충만한 결과 특수한 은사를 체험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은사 주심은 성령님의 주관적 역사이나 성령으로 충만할 때 특별한 은사를 주시는 것이다.
 
VI. 결 론
 
A. 요 약
 
지금까지 고찰한 내용을 요약해보면 제 2장에서는 성령의 어원적  의미와 속성을 밝힌바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으로서 활동하시는 하나님 그 자체이며 인격이심을 말했다. 성령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은 성령충만의 실제를 체험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근원적이고 중요한 인식이다.
 
제3장은 성령충만의 성경적 근거를 살폈는데 성령충만은 신구약 전체를 통하여 나타난 경험이며 하나님의 사역과 봉사를 위해서는 성령충만이 필수적이고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사역과 봉사를 감당할 수 없다.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들은 성령세례 받은 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성령충만한 종들에 의해 수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4장은 성령세례를 고찰한바 성령세례는 오순절 사건을 말하는  것으로 성령시대를 선언하는 예언과 약속이 성취된 역사적 사건인 동시에 예수그리스도의 탄생, 수난, 죽음, 부활과 연관된 구속사적 사건이다.
 
성령세례의 단어의 어의적 의미에 있어서도 그것은 예수그리스도의  몸과의 연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는 마땅히 역사적 및 구원론적으로 해석되고 적용되어야 한다.
 
이점에 있어서 성령세례는 유일한 사건이다. 은사와 능력을 받고  성령을 체험하는 것이 성령세례의 실체와 핵심은 아니다. 성령세례를 구함으로  은사와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성령님의  주관적 판단과 의지에 의해 은사와 능력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충만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을 드려야 한다.
 
5장에서 성령충만의 실제성을 고찰했다. 성령충만의 정의는 나의 의지가 인격적 순종에 의해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한다. 신자의 마음속에 실존해 계시는 성령님의 인격과 소욕을 나의 인격이 인정하고 개인의 삶을 다스려 주시기를 진정으로 원할 때 성령충만의 실제는 체험될 수 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진심으로 사모하기 위해서는 기도와 말씀으로 충만해야 한다. 기도와 말씀이 따르지 않을 때 그 간구는 진실하지 못하다. 의지를 드릴 수 없다. 이점에 있어서 성령충만은 신비적이기 이전에 인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충만을 위해서는 죄를 고백하고 간구하며 사모하고 믿음으로  확신할 때 성령님으로 충만할 수 있다. 성령충만의 실제는 순종으로 나타나고 체험 될 수 있다. 성령의 지배를 받으면 성령의 열매와 전도의 열매는  맺을  수 있고 관계의 개선과 은사와 능력이 주어지고 체험된다.
 
성령충만은 명령형이고 현재진행형이며 복수형이다. 따라서 모든  크리스찬은 성령충만을 매순간 받아야 한다.  성도는 무엇보다 성령충만을 힘써야 한다.
 
B. 제 언
 
성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성령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은 성령충만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 빌리그래함은 90% 이상의 신자가 성령충만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는 성령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성령충만과 성령세례에  대한  그릇된 인식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먼저 목회자들이 성령과 성령세례 및 성령충만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우선적으로 교육 할 것을 제언한다. 또한 성령세례  받으라는 말의 사용을 중단 할 것을 제언한다.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말할 때 거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신비적 요소가 가미되어 특별한 표적을 구하는 심적 상태가 된다. 이로 인해 말씀을 떠나게  되고 불신앙에 빠지게 된다. 그뿐 아니라 성령세례를 받으라고 말은  신학적으로도 맞지 않는 표현이며 그 말 자체가 논쟁과 혼란의 와증에 빠져있다. 성령세례는 오순절 사건에 한정하여 사용함이 좋다고 생각한다. 오순절  사건 외에 단 한번 성경에 사용된 표현을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하고 거론함은  합당치 않는 일이라 하겠다. 무엇보다도 성령충만 받을 것을 강조하고 가르쳐야 함을 제언한다.
 
  1)Edwin H. Palmer, [성령] 최낙재역,(서울:개혁주의 신행협회,1980), p.1.
  2)옥한흠편, [한국교회와 성령운동] (서울:정음출판사,1984), p.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