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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위에기쁨/성경 일반자료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by JORC구원열차 2009. 1. 8.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차 례
01.  주님을 기쁘시게 함
02.  성령충만을 받으라
03.  성령충만의 정의
04.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이 교회 안에 있음
05.  성령충만을 명하신 이유
06.  성령충만의 포괄적 정의
07.  성령 충만해야 하는 구체적 이유들
08.  성령충만의 결과
09.  성령충만을 받기 위한 마음자세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 너희는 열매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예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저희의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움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이 빛으로 나타나나니 나타나지는 것마다 빛이니라.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에베소서 5장 10절∼16절)
 
구원을 받지 않은 사람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주님과 함께 성령을 따라서 살아간다는 확신을 갖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고 막연히 교회당에 왔다 갔다 하고 자기의 생각과 방법대로, 자기의 열심으로만 살아간다고 하면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지를 올바로 이해하고 또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합당하게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보여 주시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은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약속대로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스라엘 뿐 아니라, 온 세상 죄를 그 몸에 담당하시고 죽으시고 장사되심으로 인간의 모든 죄와 저주를 해결하시고, 죽음의 권세를 깨치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소망을 주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가신 후에는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그 사실을 우리에게 깨닫고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그 은혜를 확실히 깨닫고 믿는 사람들 마음속에 성령이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까지 성령을 모시고 성령과 함께 성령께 순종하는 생활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구원이고 또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영원한 목적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천국에서 거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사람들은 이 땅에서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며,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곧 성령을 모시고 사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으며, 구원받을 때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갈 3:2). 그러므로 우리의 몸은 성령이 계신 성령의 전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고전 6:19∼20).
 
우리 몸은 과거에 죄 가운데 팔려서 죄 가운데 행하던 몸인데 영원히 멸망 받을 이 영혼과 육신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피로 사셨습니다. 우리 영혼만 사신 것이 아니라 우리 육신까지 사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후에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이 몸도 이제는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 몸도 값으로 사셨으니 우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몸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 땅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 천한 육신 속에 주님의 성령이 계신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의 몸도 주님이 값주고 사신 것이므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령을 따라 올바로 행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것이며, 이는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01. 주님을 기쁘시게 함
 
에베소서 5장의 이 말씀에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생애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께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가 시험하여 보라"(엡 5:10).
 
구원받은 이후에는 내 육신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시험해 보아야 합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엡 514)
 
이 말씀에서 '죽은 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 곧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며, '잠자는 자'는 구원은 받았는데 아직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과 관계없이 세상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직 육신에 속해서 사는 사람들을 잠자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잠자는 자는 자기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지금이 몇 시인지도 모르고, 자기의 할 일도 모르고, 자기가 있는 자리 옆에 송장이 있는 것도 모릅니다. 잠자는 사람은 송장 옆에서도 잘 수 있는 것처럼, 거듭난 사람이 신앙적으로 잠자면 거듭나지 못한 죽은 자들 틈바구니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거듭난 사람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모순입니다.  그것은 송장 옆에 살아있는 사람이 잠자면서 송장과 함께 뒹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 리라' 깨어있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생활을 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을 하고 깨어 기쁘시게 하는 생활을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 것입니까?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없는 자같이 말고 오직 지혜있는 자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5∼16).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이 살아서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주님의 뜻을 이해할 뿐 아니라 행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고 알면서 행치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하니하면 죄니라"(약 4:17).
 
알면서 행치 못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왜 못합니까? 육신이 너무 강해서 입니다. 속사람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만 이 속에 육신의 세력이 너무 강해서 내 마음의 법과 싸워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그 마음이 육신의 생각에 끌려갑니다. 그래서 원하는 하나님의 뜻은 행치 못하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뜻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굴복치 않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구원을 받았어도 육신을 따라 살고 육신의 생각대로 살면 그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원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가 된다는 것입니다. 마귀만 하나님을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육신도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고 하나님의 근심거리가 되고 하나님을 탄식하게 한다면 그것도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자식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할 줄 모르고 부모님의 뜻도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살고 부모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면 그 자식은 정말 문제입니다. 하나님께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실 수 있는 분도 성령이시고, 그 뜻을 행하게 하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그러면 성령이 계신다고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할 수 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뜻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속사람보다 겉사람의 세력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못합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02. 성령충만을 받으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옙 5:18).
 
"술 취하지 말라." 술 취하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술 취한 사람은 말도 함부로 하고 행동도 함부로 합니다. 평소 때 얌전하고 용기도 없던 사람이 술만 먹고 나면 어디서 용기가 나는지‥‥그래서 어떤 사람 앞에 가서 자기 마음에 있는 맡을 하려고 술 한잔 먹고 가서 그 술기운으로 한바탕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술이 들어가면 하늘이 돈짝 만하게 보이고 큰 대로도 골목길처럼 보이는지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술 취하는 것은 방탕의 시작이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시작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술이 술을 부르고 그 다음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고 합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런데 여기 왜 술취하는 것과 성령 충만하는 것을 비교해 놓았습니까?
 
오순절에 성령을 충만히 받은 120명의 성도들이 예수님을 죽인 자들 앞에 가서 '너희들이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다"고 담대하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스라엘 중의 어떤 사람들은 '저 사람들이 술 취했다'고했습니다. 베드로는 '술 취한 것이 아니고 요엘 선지자가 말한 대로 하나님이 주신 성령으로 하는 일이다'고했습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평소에 할 수 없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담대히 행합니다. 육신의 세력에서 그를 이기게 합니다. 그래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술 취하는 사람은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꼭 반대이기 때문입니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분 좋으라고 취하는 맛으로 먹는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과거에 술을 좋아했더라도 이제는 사정없이 끊고 다시는 술 취하는 방탕함에 빠지면 안 됩니다.
 
얼른 생각하면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특별한 사람만 받는 것으로 여기기 쉽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꼭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성령충만에 대해서 오해를 합니까? 성령충만을 받으면 방언을 한다든지, 병을 고친다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멋지게 전한다든지, 깜짝 놀랄만한 기적을 행한다든지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충만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올바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03. 성령충만의 정의
 
성령의 충만이라는 것은 성령을 받았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거듭난 사람 속에는 성령이 계십니다. 거듭난 것이 확실하면, 몰라도 계십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 세상에 태어났으면 머리도 있고, 눈도 있고, 코도 있고, 입도 있고, 귀도 있고, 손가락 열 개, 발가락 열 개 등 외부적으로 갖출 것을 다 갖추고 있습니다. 내부적으로 그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기능이 있습니다. 몰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있다는 것과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심장이 있지만 심장이 약하다든지 위장이 있지만 약해서 병이 난다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와같이 성령이 계셔도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과 생활을 주장하시는 것과 육신의 세력 때문에 성령이 그 마음과 생활을 주장하지 못하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계시지만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아니하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성령충만을 성령세례와 혼동을 합니다. 구원을 받을 때 성령을 받았고 성령을 받을 때 성령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은 성령을 받은 후 주님의 생명을 우리 안에 더욱 풍성히 받는 것입니다.
 
 
04.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이 교회 안에 있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리(요 1:14).
 
예수님 안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있던 충만이 이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있습니다. 성령이 거듭난 사람들 속에 오셔서 한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몸속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속에는 피가 통하고 신경이 통하고 몸에 필요한 모든 영양이 골고루 공급됩니다. 그리고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신경이 연결되어서 머리의 뜻이 온 몸에 전달됩니다. 이 몸에는 계속적인 공급이 있습니다. 공기도 들이마시고 물도 마시고 필요한 모든 영양을 섭취합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머물러 계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고 그 안에 계속적인 공급이 있습니다. 그 공급을 정상적으로 받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 29∼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 졌으니"라는 말씀대로 정상적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공급받을 때 충만해집니다. 몸 전체 안에 여러 지체들이 있는데 이 지체들 중에 어느 부분이 제일 충만할까요? 주먹으로 꽝 치면 주먹이 제일 충만한 것 같고, 입으로 말할 때에는 입이 제일 충만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떻습니까? 골고루 충만해야 정상입니다.
 
어느 한부분이 충만하고 어느 부분이 덜 충만하면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피가 통하고 영양이 공급되고 신경이 통하고 어디든지 감각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정상적으로 모든 것을 공급받을 때 그것을 가리켜 충만이라고 하고 충만해졌다고 합니다.
 
 
05. 성령충만을 명한 이유
 
그러면 에베소서 5장에는 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까?
정상적인 공급을 받는 사람은 충만한데, 정상적인 공급을 못 받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라는 말씀대로 예수님 안에 있는 충만이 우리에게 계속 공급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 입니다(요 10:10). 구원받을 때 기쁘고 감사한데 얼마 후에는 그 감사도 시들어 버리고 기쁨도 적어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정상적으로 공급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구원받는 은혜는 한번이지만 구원받은 후에 계속 공급해주시는 충만한 은혜가 있습니다. 그 풍성한 생명을 공급받을 때 그 구원의 기쁨이 날로 더하고 하나님께 감사함이 더하고,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위해서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꼭 무슨 큰 일을 하는 신앙적으로 아주 성장했다는 그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로서 정상적으로 자라 가야 합니다. 그것이 어린아이로서 충만한 것입니다. 정상적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 충만한 상태입니다.
 
 
06. 성령충만의 포괄적인 정의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골 3:16).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생명으로 채워지는 것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말씀으로 마음에 가득 채워지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이 소원이 있는 영혼 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면 즉시 그 말씀을 다 깨달을 수는 없지만 성령으로 말미암아 조금씩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구별된 삶을 삽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
 
성령충만은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이 그 사람을 주장하고 주님의 말씀이 그 사람의 생각을 완전히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라는 말씀은 성경지식이 풍부하다는 것도 물론 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마음과 생활 속에 주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어디 가든지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주님의 뜻대로 행하고자 하는 그 마음으로 항상 채워져 있는 그 상태를 가리켜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8∼19).
 
구원받을 때 우리가 처음 주님의 사랑을 깨달았지만 주님의 사랑을 다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어린아이가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알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다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아주 작은 부분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점점 자라면서 부모의 사랑을 더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길러보면서 그때에야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을 깨닫고 뉘우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이후에 그리스도인들과 교제하면서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갑니다.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는 것은 지식으로 다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늘을 두루마리로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그것이 과장이 아니고 사실인 것입니다. "그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그 높고 거룩한 곳에서 이 낮고 천한 인간, 지옥 제일 밑바닥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죄인까지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온 세상 사람들 중에 한 사람도 잃어지지 않고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그 넓은 하나님의 사랑, 독생자를 세상에 죽는 데까지 내어주신 그 깊은 하나님의 사랑, 영원히 변치 않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점점 더 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혼자서는 모릅니다. 모든 성도와 "함께"라고 했습니다. 어떤 유행가에 "당신을 알고부터 사랑도 알았습니다, 사랑을 알고부터 행복도 알았습니다."는 노래가 있듯이, 사랑할 때 사랑이 무엇인지 더 압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자마자 그 사랑이라는 것을 진정으로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가운데 그 사랑이 점점 더 승화되고 그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채워질 때 하나님의 충만함이 거합니다. 또 성령충만이라는 것은 주님께 내 마음과 내 생애가 온전히 사로잡힌 생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헤를 주셨나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엡 4:7∼8).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승천하심으로 우리에게 선물 곧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성령이 오셨을 때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았습니다. 과거에 마귀 권세에 사로잡혀서 영원한 멸망으로 끌려가던 우리를 주님이 사로잡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사로잡은 사람들입니다.
 
바울 사도는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행 20:22).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끄는 도다)"(고후 5:14)라고 말했습니다.
 
강권이란 강제로 끄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마귀에 사로잡혀 끌려갔습니다. 이제 우리는 거기서 해방되고 주님께 사로잡혀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끄는 대로 가는 것입니다. 바을 사도는 예후살렘으로 갈 때 거기서 죽을는지 살런지 알지 못하지만 사랑에 끌려, 성령에 매임을 받아 나아갔습니다. 주님께 내 마음과 내 생애가 완전히 사로잡힌 그것을 가리켜 성령충만이라고 합니다.
 
물이 얕은 곳은 내가 발로 뛰어 건너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내 키를 넘어버리면 그 위를 걸어 갈수 없습니다. 바닥을 딛고 걸어갈 수 없습니다. 물위에 떠가야 합니다. 이와 같이 성령이 내 마음과 내 생애를 완전히 사로잡아서 그 성령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는 생활이 성령에 사로잡힌 생활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주님의 말씀과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주님의 손에 완전히 사로잡혀 살아가는 생애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정상적인 것이므로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꼭 받아야 되는 이유는 그것이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며, 그래야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07. 성령 충만해야 할 구체적인 이유들
 
성령 충만하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 안에서 정상적으로 자기의 할 일을 알고 충실하게 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97).
 
그냥 내 생각과 방법대로 열심히만 하면 됐지 지체를 따지고 할 필요가 있느냐 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 방법대로 하나님께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로서 머리가 명령하는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발견하고 지체로서의 직분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 개인적으로는 육신의 소욕을 이기고 육신의 세력을 주님 앞에 굴복시켜야 합니다.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벧전 2:11).
 
내 마음의 법과 싸우는 육체의 소욕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이 세상의 온갖 유혹과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육신과 자아가 싸우면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과  싸울 수 있는 것은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을 받아야 육신의 세력을 이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나 교회적으로나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목사든, 집사든, 주일학교 반사도 청년들도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앞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위에서 뒤에서 봉사하는 사람도 다 충만해야 합니다. 특별한 일을 하는 사람만 충만하고, 우리 같은 평신도는 성령 충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성령 충만해야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으며, 가정에서 직장에서 학생은 학교에서 올바른 자리를 지키면서 빛 되게 살 수 있습니다. 입이나, 손이나, 발이나 똑같이 충만해야 되는 것처럼 교회 안에 있는 각각의 그리스도인들이 충만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 되기 원하십니다. 부모도 자식이 정상적인 인격자가 되고, 정상적인 사회인이 되고, 한 인간으로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원하듯이,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자녀들이 정상적으로 살아가기 원하십니다. 정상적으로 되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됩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면 지극히 정상적으로 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잘 이행하기 위해 살고 있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롬 14:7∼8).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생활이 그렇습니까? 살아도 자기를 위해서, 고생해도 자기를 위해서, 어려운 일을 해도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자기를 위해서 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것은 저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자기를 위해서만 살다가, 자기를 위해서만 고생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한 평생을 마치려면 차라리 주님 앞에 빨리 가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천국에 우리에게 온갖 좋은 것, 우리가 기대하던 모든 것을 다 준비해 두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땅에 남아있는 이유는 주님을 위해서, 우리를 통해서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주를 위해 사는 것인지,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되고, 그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어느날 죽음이 찾아올 때 구원을 받은 그 날부터 주님 앞에 가는 날까지 그 기간이 짧든 길든 '잘 샅았다 그런대로 후회없이 미련없이 잘 살았다. 내가 바울처럼 큰 일은 못했을 지라도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고하는 고백이 나오도록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설 때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는 칭찬을 받도록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충만 없이 자기 의지를 가지고, 자기 지식을 가지고, 자기 열심과 자기 방법대로 주님을 위해 살려고 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자기의 어떤 지식과 자기 열심과 자기의 재능과 자기의 방법, 자기의 끈질긴 의지 그것만 가지고 주를 위해 사는 것을 성령충만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입니다. 잘못하면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도전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일을 도리어 그르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만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시지 않고 어떤 일을 하라는 분이 아닙니다(눅19:22). 하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그 생명과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08. 성령충만의 결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3)
 
성령 충만한 사람은 자기가 무슨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떠들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묵묵히 자기 위치를 지키며 자기의 할 일을 할 것입니다. 자기 분량 이상도 말고, 이하도 말고, 마땅히 할 일을 합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을 하려는 것은 교만입니다.  자기 위치 이하를 하려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그것은 비굴한 것이며 불순종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자기 위치를 알고 남이야 뭐라 하든 묵묵히,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기신 일을 양보하지 말고 포기하지도 말고 무관심하지 말고 묵묵히 해 나가는 것입니다.
 
애를 들어 발가락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보이지 않게 냄새 나는 신발 속에 들어있지만 새끼발가락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걸어가는 모습이 다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정상적인 위치를 지킬 때 그 사람은 주님 안에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큰 일 하는 사람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작은 일하는 사람도 있어야 됩니다. 성령 충만함을 받으면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사람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자기의 할 일을 합니다. 빈 양철통의 소리가 요란합니다. 그 안에 무엇이 채워지면 소리가 잘 안 납니다. 그 마음속에 텅 빈 사람이 뭔가 큰일을 한 것처럼 떠들어대고, 또 자랑하고 불평이 많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음이라"고했습니다.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한 성령 충만한 사람은 항상 하나님 앞에 감사한 마음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고, 영혼의 평화와 기쁨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 15:11).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27).
 
세상 사람들이 돈 많고 육신적으로 모든 것이 조건이 좋기 때문에 기뻐하는 그런 기쁨 말고, 세상 사람들이 얻는 그런 평안 말고  전연 다른 평화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과 달리 아무 것도 없어도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대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합3:17)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내 구원의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그 즐거움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그 구원, 주님이 주신 그 평화와 소망, 그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에 웃음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까? 왜 근심 걱정이 가득합니까? 왜 고민하고 불만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독생자를 보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 은혜는 얼마나 엄청난 것입니까? 그 은혜를 잊어버리기 때문이 아닙니까? 성령 충만하면 성령은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우리 안에 불일듯이 일깨워줍니다. 더 풍성한 은혜, 더 새로운 기쁨, 주님을 향한 사랑과 주님의 평안이 있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사람들이 자기를 외면해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잘못한 것 없으면 떳떳하게 주님이 주시는 은혜로 만족하고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회락이라"(롬 14:17).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은 것과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을 항상 마음속에 누리고 사는 것이 성령충만입니다. 마음속에 있는 불만과 짜증을 해결하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09. 성령충만을 받기 위한 마음자세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우선 성령이 자신 안에 계신 줄을 확신해야 합니다.
 
"너희 몸은 너회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알아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태리 어느 공원에서 한 사람이 겨울에 굶어서 얼어 죽었는데, 그 사람 주머니에서 평생 먹고도 남을 수표가 나왔답니다. 그런데 왜 굶어 죽었겠습니까? 아마 수표가 뭔지 몰랐던 모양입니다. 이와같이 성령이 계셔도 성령이 계신 줄 모르면 답답합니다.
 
성령이 계신 줄 모르면 그 성령의 인도를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성령의 충만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계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받지 않으면 안 될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야 합니다. 구원받는 것도 자기가 멸망 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구원을 절실히 사모해야 구원받듯이, 성령충만 받기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구원받은 이후에 우리가 주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주님이 맡기신 사명들 감당하기 위해서, 교회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 육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주님 앞에서 올바로 살아가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또 성령충만을 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 간절한 필요성을 느끼고 목마른 자가 물을 사모하듯이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그 다음에 성령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말씀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도, 말씀을 깨달음으로 된 것처럼, 구원받은 후에도 하나님의 모든 생명의 충만함과 은혜의 충만을 말씀을 통해서 받습니다. 하나님에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더욱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말씀을 상고해야 합니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골 3:16)
 
하나님은 성경으로 우리를 교훈하고, 책망하고, 고치고 교육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합니다(딤후 3:16∼17). 온전케 한다는 말도 충만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성경말씀 배우기를 게을리 하는 사람은 성령충만을 받을 수 없으므로 성경을 배우는데 열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쓰시도록 하나님께 쓰임을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순종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배워야 하며. 그 마음이 있으면 말씀이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더욱 기도를 힘써야 합니다.
 
"너희 중에 아비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1 ∼13)
 
신령한 은혜를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기 위해서 지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셨습니다. 인간으로서는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는 말씀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더욱 효과적으로 봉사하고 주님이 맡기신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 성령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육신의 조그마한 행복을 구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돈을 사모합니까? 날씨는 추워지고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하는데 남편은 돈 벌 생각을 하지 않고 아랫목에 누워 있습니다. 부인은 '여보, 우리 쌀독에 쌀이 다 떨어져 가고, 연탄도 넣어야 하고 애들 겨울옷도 준비해야 하고, 등록금도 미리 준비해야 하는데 어쩌죠?'하니 남편이 벌떡 일어나더니 '뭐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오. 돈만 있으면 되지 않소' 하더랍니다. 그걸 누가 모릅니까? 없으니까 문제이지요.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생활 속에 여러가지 문제가 있지만 성령충만을 받으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러니까 성령충만을 절실히 구해야 합니다. 또한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성령이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 역사하시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과 생활 속에 합당치 못한 죄들이 있으면 성령이 역사하실 수 없습니다.
 
"자기의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시 19:12).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숨은 죄"에는 남이 모르는 죄 뿐 아니라 나도 잘 모르는 죄도 속합니다. 평소에 내가 잘 생각하지 못한 죄가 있는 것이 드러나면 가차없이 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영원한 길로 인도해 가십니다. 히브리서 11장에는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경주하는 사람이 한 짐 걸머지고 어떻게 달음질합니까? 가능하면 가볍게 해서 경주하는 것처럼 신앙 생활하는데 거리끼는 것, 마음속에 방해되는 죄들이 있거든 재빨리 처리해야 신앙의 경주를 잘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을 배우는 가운데 거리끼는 것이 있으면 덮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덮어놓고 성령충만을 받으려고 기도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약 4:6). 물은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겸손한 사람 마음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혹 교만할까봐 육체에 가시, 곧 병을 주셨습니다. 바울은 평생 견디기 어려운 병을 짊어지고 살았으며 많은 고난과 역경을 겪었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이 머물러 있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비둘기는 어린 양 위에 머물러 있습니다. 어린 양이 사자처럼 변해 버리면 비둘기는 놀라서 날아가 버릴 것입니다. 우리 마음 속에 포악한 마음, 교만한 마음, 잘못된 마음이 있으면 성령의 능력은 떠납니다.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익은 곡식은 머리를 숙입니다.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알면 안됩니다. 성령충만을 받으려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쳐 헌신해야 합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 12:1).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이 몸으로 과거에는 죄짓는데 사용했지만 이제는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실 수 있도록 바쳐야 합니다. 드린다는 것은 주님의 것인 줄로 확신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으로 알고 주님의 뜻대로 사용하도록 드리는 것입니다. 몸도 내 것이고 건강도 재주도 전부 내 것이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성령충만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다스리십니다. 주님의 것을 주님의 것인줄 알고,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고 드리면 주님이 뜻대로 쓰실 것입니다. 성령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참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순종하는 자에게 더욱 순종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해서는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친밀한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은 교제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으로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3)는 말씀대로 한 몸이 된 교회 안에 성령이 계시고 그 안에 성령의 계속적인 공급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상적인 교제가 없이 자기 혼자서 믿음과 성령이 충만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성경에서는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나느니라"(골 2:19)고했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
 
두 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다는 것은 자기를 주님께 바친 사람, 주님 뜻대로 살고자 간절히 원하는 몇 사람이 교제할 때 주님이 역사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숯불을 모아놓으면 이글이글 탑니다. 이것을 나누어 놓으면 꺼져 버립니다. 주님은 교제 안에서 착한 일을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제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충만함을 받을 수 있으며, 정상적인 교회의 지체로서의 역할을 할 때 지체 안에 붙어 있었기 때문에 주님 안에서 함께 영광을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