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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석위에기쁨/성경 일반자료

장로교회에서 신앙고백서의 중요성

by JORC구원열차 2009. 1. 8.
장로교회에서 신앙고백서의 중요성

서론
 
오늘날 우리 한국 장로교회는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 
즉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데 이 세속화를 막고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할 힘이 교회에 없다는 것은 더욱 심각한 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름대로 각각의 교회에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모색해 보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60-70년대에 와서는 C.C.C를 중심으로 '성경공부'가 유행되어 이 방식을 교회에 도입해 보았지만 교회는 회복 될 수 없었다. 
 
70-80년대에 와서는 두란노 교회의 '경배와 찬양'을 중심으로 찬양의 열풍과 부흥회를 중심으로 한 전도집회가 유행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80-90년대에 와서는 순복음 교회를 중심으로 '은사주의 운동'이 전 교회에 유행처럼 번지고 또한 미국의 부흥하는 교회를 모방한 프로그램들이 한국 장로교회 안에 홍수처럼 쏟아졌지만 성과가 없었다. 
 
그 중에 '빈야드 운동'과 같은 것은 90년대 중반에 엄청난 감동을 주면서 수많은 교회에 영향을 주었지만 결국 이단 운동으로 끝을 맺었다(통합측-95년, 합동측-97년, 고신측-96년).  그리고 미국 교회 모방 운동은 90년 후반에 와서는 더욱 큰 영향을 한국 장로교회에 지금까지 주고 있다. 즉 새들백교회, 윌로우크리닉교회 등 주로 상담과 내적치유와 같은 인간 심리학을 적용한 프로그램들이 큰 유행을 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한국 장로교회는 50년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세속화 되어 가고 있고 또한 이 세속화를 막아 보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지만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교회가 이처럼 세속화 되어 가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원인을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새로운 방법만을 사용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이제 몇 가지 원인을 찾아보면 가장 첫 번째로 교회에서 성경을 충분히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름대로 성경을 배우고 있지만 부분적인 가르침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전체적인 내용을 성도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들이 성경의 전체적인 중심과 그 내용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이 바로 서지 않고 또한 바로 섰다 가도 금세 이단에 빠져 버린다는 것이다. 
 
장로교의 유명한 핫지 목사님은 다음과 같이 성경을 부분적으로 가르치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이단들이 모든 기회에 나타나서, 성경을 곡해하며, 말씀의 어떤 부분을 과장하고 다른 중요한 부분을 버리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켜 거짓으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성도를 보호하기 위해서 성경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정확히 정리해서 잘못된 것을 밝히고, 모든 거짓된 것을 제거하기 위해 성경 전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했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의 전체 내용을 그 중요성에 따라서 잘 정리함으로써 말씀의 어떤 부분이 부당하게 축소되거나 또는 제거되거나, 과장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했던 것이다. 
 
위의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교회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성도들이 성경 말씀 전체를 바르게 배울 수 있도록 항상 노력해 왔던 것이다. 
 
교회는 이 방법만이 이단자들을 막고 성도가 바르게 자라 갈 수 있는 방법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분량의 성경을 어떻게 하면 빠르게 익힐 수 있고 또한 성경의 전체 내용 중에 매우 중요한 부분이 어떤 것인지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로 나타났다. 
 
그래서 교회는 성도가 성경의 전체 내용 중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이 무엇이며 또한 성경 전체를 알기 위해서 기본적으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요약하거나 또는 정리해서 성도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목적으로 초기 교회에서 만들어진 것이 "신앙고백서"(사도신경)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교회는 신앙고백서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후의 교회 역사 속에서는 끊임없이 이 신앙고백서를 가르치고 배웠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한국장로교회가 세속화되어 가는 두 번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목숨처럼 중요하게 여겼던 신앙고백서를 가르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든 장로교회의 스승과 같은 칼빈 목사님은 "이 교리문답은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어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전통적인 것이다"라고 까지 말씀하실 정도로 장로교회에서는 성경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해서 신앙고백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이처럼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을 오늘날 장로교회가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교회의 세속화를 막을 수 없으며 또한 회복할 힘도 잃어버린 것이다. 
 
그 결과 오늘날 성도들에게 "신앙고백서"를 배워야 한다고 하면 뭐하러 머리 아프게 딱딱한 교리를 배우냐고 하면서 교리를 배우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래서 성도들은 단지 신앙이란 신비한 체험이나 은사를 받아서 능력과 권능으로 신앙생활 잘 하면 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것으로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또한 교회가 세속화 되어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에도 보았던 것처럼 아무리 능력 있다고 해도 성도가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는 여전히 부패하고 세속화되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과연 오늘날 "신앙고백서"를 왜 배워야 할 것인가?  이것이 정말 중요한가? 또한 신비한 은사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이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성경을 배우고 그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본론
 
1. 신앙고백서의 근거
신앙고백이란 보통 그리스도의 질문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수락이며 또한 신앙에 대한 실제적인 표현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선택의 사항이 아니라 신앙을 고백하는 자는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미 성경에서부터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제시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제 우리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답변 즉 "신앙고백"이 얼마나 중요하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서 이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구약이나 신약에서는 아직 지금처럼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처럼 기록이나 문서의 형태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당시에는 주로 고백적 형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 특징임을 알 수 있다. 

 
1) 성경적 근거
(1)구약
① (출19:7-8)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위의 사건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시내산에서의 십계명을 받던 사건이다.
이것은 매우 장엄한 분위기를 우리에게 소개해 준다. 이렇게 매우 신중하고 엄중한 사건 속에 "신앙고백"에 대한 형태가 제시되고 있다.
 
위의 내용은 (출19: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이었다.
 
이러한 신앙에 대한 고백의 결과 하나님의 다음과 같은 은혜가 주어졌다. (출19:11) "예비하여 제 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 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신26:5-9)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유리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소수의 사람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가서 거기 우거하여 필경은 거기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더니,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게 하며 우리에게 중역을 시키므로,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하감하시고,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위의 말씀은 시내산에서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던 모세가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중요성을 언급하는 동일한 내용인 것이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고 반드시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를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신 은혜임을 신앙적으로 고백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백의 내용으로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알아야 했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내용들임을 알 수 있다.
 
③ (수24장 전체) 여기서는 모세의 방식을 그대로 이어 받은 여호수아의 동일한 행동이 소개되고 있다. 즉 가나안 땅을 얻고 이제 임종을 앞두고 있는 그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모으고 하나의 언약을 맺고 있다. 즉 2절부터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전 역사를 소개하고 이렇게 묻는다.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그 대답으로 백성은 대답한다.  "(수24:16) 백성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 섬기는 일을 우리가 결단코 하지 아니하오리니".  이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문서적인 최초의 신앙고백적 형태가 그 다음절에 여호수아가 이것을 분명히 증거로 남기기 위해서 "돌"을 증거물로 소개하고 있다.1)
 
(2)신약
① (마16:15-16)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서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신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지를 묻고 계시며, 또한 그 대답으로서 제자들의 신앙고백이 제시되고 있다. 이 고백은 세례의식을 행할 때 묻는 전형적인 고백이 되었으며 이것이 후에는 삼위일체의 형태로 자리를 갖추게 된 아주 중요한 구절이다.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신앙고백의 기초로서 이 말씀을 핵심적인 말씀을 인정하고 있을 정도로 매우 중요한 말씀이다.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결국 신조의 근거는 여기 야고보서의 말씀처럼 신앙(믿음)은 반드시 신앙고백(행함)을 필요로 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고 성경 자체가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2) 역사적 근거
위의 성경적 근거 위에서 초기 교부시대부터 중세시대, 종교개혁시대, 그리고 지금까지 참된 신앙을 간직해 온 자들은 늘 신앙고백을 바르게 고백하고 또한 후대에는 이것의 변질을 막기 위해서 기록과 문서적인 형태로도 만들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16-17세기는 신앙고백과 교리문답 등을 통해서 성경의 교리를 교회 안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치려고 했던 중요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장로교회에서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은 칼빈목사의 영향에 힘입어 더욱 분명하고 정확한 표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칼빈은 교리를 가르치는 것을 교회교육의 중심 과제로 보기도 하였으며 그 중요성에 대한 표현은 영국의 한 성주에게 보낸 편지에 잘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교리교육이 없이 유지될 수 없다. 이것은 선한 씨앗이 죽지 않고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는 것처럼 왕성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오랫동안 붕괴되지 아니하고 튼튼히 서 있는 집을 짓기를 원한다면 아이들이 아주 인상깊게 이 신앙교육서를 통하여 믿음에로 이끌어지도록 염려하고 돌보시오"

또한 칼빈이 제네바에서 국회에 제출한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관한 제의서」에서 이 부분을 강력하게 세우고자 했던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성찬식과 시편을 찬양할 것과 그리고 어린이들의 교육에 관한 교리문답서를 사용할 것을 요구하면서 교리문답의 중요성을 언급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2차 제네바 교리문답서 서문의 말도 유명한 말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성경의 순수함을 보존케하기 위하여서는 어린 시절의 아이들에게 신앙고백을 가르치어 저들로 하여금 믿는 내용을 깨닫게 함이 극히 필요하니, 이와 같이 함으로서 참된 성경적 내용이 변질되지 아니하고 보존될 것이며 또한 각 사람에게 혹은 대대로 전파 될 것이다.  ----  우리가 제안하려고 하는 제도는 다음과 같다.  기독교 신앙의 간결하고도 단순한 한 요약을 작성하여 모든 어린이들에게 가르치고 일년의 일정한 날에 목사 앞에 나와 문답을 하고 시험을 받고 또한 각자의 능력을 따라 저들이 충분히 가르침을 받았다고 인정될 때까지 이르는 것이다"
 
"교회는 언제나 어린 아이들을 기독교 신앙교리 안에서 양육하라는 특별한 권면을 받아 왔다. ---- 이를 규모 있게 수행하기 위해 교회는 「교리문답」이라고 불리는 어떤 특정한 규칙을 사용하였다.  사탄은 자신이 교회를 흩어서 가공할 만한 폐허로 만들어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있는 대부분의 교회 안에 아직 어떤 징표들이 남아 있는 것을 보자 사탄은 이런 거룩한 질서를(교리문답) 붕괴시켰다. 따라서 사탄이 남겨 놓은 것은 변화 능력이 전혀 없고 단지 미신만을 산출해 낼 수 있는 몇 가지 유물들에 불과하다.2) 이것이 바로 왜 현재 우리 교회 안에 내적인 힘은 없고 외적인 종교적 모습만이 존재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확실한 원인이다.  우리가 여기서 제시하는 이 요리문답은 옛적부터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준수되어 왔고, 교회가 완전히 부패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포기된 적이 없는 전통적인 것이다".
 
이처럼 칼빈에게 있어서 신앙고백서나 교리교육서는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중요성은 칼빈뿐만 아니라 초대교회때부터 종교개혁때 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즉 장로교회에서 신조(신경), 신앙고백서, 교리문답 등은 교회에 대한 사랑의 고백 그리고 하나님께 드려진 찬양과 헌신의 의미가 깊이 배어 있는 표현인 것이었다.
 
이처럼 기독교는 교리문답 교육 없이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다고 많은 장로교 목사들은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리문답 교육 없이는 신앙과 생활의 순결을 도저히 지켜 나갈 수가 없고, 역사적으로도 가장 훌륭하다는 교회도 이것을 소흘이 했을 때 교회는 곧 쇠퇴하고 부패해져 가기 시작했다고 증거하고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장로교회주의자들이 아닌 다른 분파들은 늘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를 부정하고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장로교회주의자와 장로교회의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나누는 큰 특징 중에 하나일 수도 있다. 어떻게 누가 정하지도 않았는데 늘 동일하게 바른 장로교회주의 자가 아닌 자들은 역사적으로 동일하게 신앙고백서의 필요성을 부인해 왔던 것이다.
즉 영지주의, 펠라기우스파, 알미니우스주의(웨슬레적 감리교, 성결교), 경건주의자들, 신비주의자, 오순절주의자(순복음 교회), 현대 자유주의자들 등등은 신앙고백서의 권위와 용도를 전적으로 배격하거나 반대하려고 한다.
 
그것은 신앙고백서들이 성경의 자유로운 해석과 신학의 발전을 방해하며, 양심의 자유와 개인의 판단권을 방해하고, 위선과 독선과 완고함을 조장시켜 주며, 분란과 혼란을 야기시키고, 종교적인 증오심과 분파들간의 험담을 낳게 하며, 역작용을 일으켜 교리적 무차별주의나 회의주의 또는 불신앙을 조장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극단적 이단들은 대개가 신앙고백서들을 전적으로 배격하는 입장을 취했으며, 그들은 신앙고백서를 마치 인간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멍에인 것처럼 여기거나 새로운 형태의 교황주의로 간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모순적인 모습은 그렇게 신앙고백서를 반대해 왔던 많은 자들이 점점 자신들의 신앙고백서를 자기들의 형편에 맞게 어떤 전통적인 체계나 자기들이 추앙하는 인물들의 권위에 자기들의 입장을 호소하고 있으며, 그들 역시 기록이나 문서화된 신앙고백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신앙고백의 형태는 어쩔 수 없이 본성적으로 필요함을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은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형태보다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나타나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단들도 전통적인 신앙고백서들을 인정한다고 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더욱 주의를 요구하는 것은 전통적인 장로교라고 하면서도 즉 신앙고백서를 갖고 있으면서도 명목상으로만 갖고 있고 전혀 가르쳐지지 않는 것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형태나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또한 요즘은 장로교 내에서도 "성경신학" 이란 운동을 중심으로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 형태의 장로교회 성경공부를 장로교 스스로 거부하는 모습도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참된 신앙을 지켜가고자 하는 자는 이런 여러 가지 입장 속에서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를 가장 바르게 배우는 정신을 더욱 분명하게 정립하지 못하면 금세 또다시 신앙고백서나 교리문답서를 배우기 싫어하는 정신으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이다.
 
2. 신조의 필요성
위의 성경적 근거와 역사적 근거를 통해서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전통적인 교회에서 신앙고백서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은 먼저 기본적으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셨던 예수님의 질문에 대한 인간의 반응과 답변으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의 신앙적인 고백을 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후에 기록과 문서로 만들어 져서 후손들을 바른 신앙으로 가르치기 위함과 또는 이단을 막기 위해서 더욱 구체적인 형태를 띠게 된 것을 알 수 있다. 

1)  첫 번째로 초대교회에서 신앙고백서는 기독교 신앙으로 새롭게 개종한 사람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다.3)
특별히 자녀들의 교육에 널리 이용되고 있는 교리문답 형식의 신앙고백서들은 즉흥적이고 피상적인 충동에 의하지 않고 확고하고 분명한 성경 교육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처럼 신앙고백서는 성경의 교훈을 요약해 주고, 또한 성경의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며,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을 하나로 묶어 주어 교회의 일치에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해 왔던 것이다.
 
2)  두 번째로는 교회의 거룩성과 순수성을 이단들로부터 지키기 위한 목적이 있다. 
교회의 역사를 보게 되면 끊임없이 참된 신앙과 참된 교회를 어지럽히고 또한 변질시키는 거짓된 목사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들로 인해서 바르지 못한 성경 의미가 만들어 졌고, 또한 성경해석에 있어서도 잘못되고, 그리고 개인적인 가르침들이 난무함에 따라 초대교회는 서로 만나서 대다수의 견해에 따른 성경 말씀의 내용을 최종적으로 확정하고 선언할 필요를 느꼈다. 즉 초대교회에서는 교회를 세상이나 유대교나 이단 사상과 구분하는 것이었으며, 후에는 이런 성경적인 참된 말씀과 잘못된 말씀을 가르치는 이단을 구분하는 것으로, 그리고 마침내는 신앙고백서를 인정하는 장로교회와 신앙고백서를 인정하지 않는 교회를 구분하는 목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결론
 
우리는 지금까지 왜 우리는 신앙고백서를 바르게 알고 또한 그것을 소유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이처럼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는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가장 정확하고 바르게 해석되어 가르쳐 져야 함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최근에는 이단들도 초대 신앙고백서들(사도신경 등)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같은 것을 자신들도 인정한다고 하면서 전혀 다른 것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신앙고백서를 어떻게 해석해서 그 참된 내용을 소유하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참된 교회의 선조들이 신앙고백서의 중요한 가치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그들의 자녀들에게 성경 말씀의 교훈을 위한 안전하고 효과적인 방도가 되게 했으며, 성경의 진리 내용을 완벽하고 견고하게 진술함으로써, 오류를 막는 방파제가 되게 함으로 이단자들을 막고 성도의 교제와 협력의 기초가 되게 했던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가 협력하는 것에 있어서도 무조건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경 말씀을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바르게 동의 하는 교회와만 일치를 이루는 것이 바람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장로교회에서는 아직도 목사와 장로와 권사 및 집사 직분을 임명 할 때 반드시 손을 들어 하나님 앞에서 "나는 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을 부지런히 배우고 또한 교회 안에서 가르치치며 변질되지 않도록 지켜 갈 것을 맹세합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만큼 이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를 배우는 일은 성경을 바르게 배울 수 있는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가? 에 대한 중요한 문제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역사적으로 참된 신앙과 참된 교회의 입장에 서기 위해서는 우리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맡겨 주신 하나님의 거룩한 임무임을 잊지 말자. 또한 결코 신앙고백서와 교리문답서를 인정하고 배우는데 있어서 어중간한 입장에 서지 않도록 하자.
 
이 신앙고백서를 배우고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던졌던 우리의 수많은 선조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이 신앙고백서를 부지런히 배워서 성경을 잘 해석하고 또한 성경 말씀을 정확하게 마음 속에 간직하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의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4:6)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익히고 배우지 못했을 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를 기억하고 오늘날 우리에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배우는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해설집을 쓰신 한 목사님의 고백도 기억하면 좋을 것이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외치기를 하나님이여 무식장이인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성경 공부였던 소교리문답이 오늘날에는 목사를 길러 내는 신학교의 최고 과정에서 가르쳐 지고 있으니 부끄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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