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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골로새서3 - 골 3장(우리의 지위와 상태를 조화시킴)

by JORC구원열차 2009. 7. 26.

3. 골로새서 3장 / 우리의 지위와 상태를 조화시킴

 

본 장은 이 서신의 실천적인 부분을 시작하고 있으며, 여기서 바울은 그가 우리들에게 나타낸 진리의 빛에 비추어서 우리가 져야 할 책임들을 요약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탁월하신 것이 복음 안에서, 십자가에서, 창조에서, 그리고 교회에서만 탁월해서는 온전하지 못하며,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탁월하셔야 한다. 바울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을 실천해야 할” 몇몇 분야를 언급한다.

 

1. 인격의 순전함 (골 3:1-1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다른 말로 하면, 땅에서의 실천 생활이 하늘에서의 지위와 일치하게 되라는 것이다. 당신은 이전에는 죄 가운데서 죽었었지만(엡 2:1-3), 그러나 이제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리스도는 당신 안에 계시며 영광의 소망이시다(1:27). 머지않은 어느 날 그 영광이 나타날 것이다(4절).

 

간단히 말해서, 바울의 말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위하여 하신 일에 따라 행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이러한 단순한 원리는 인간이 궁리해 낼 수 있는 어떤 규칙이나 규율보다 더 힘이 있다. “너희는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다”(2:10). 이제 일상생활에서 그 충만함을 유지해가라.

 

동양의 종교나 그리이스(헬라), 로마의 종교는 인격의 거룩함에 대해서는 거의 또는 전혀 말하지 않았다. 사람은 자기의 희생 제물을 가져오고 기도를 하며, 제단을 떠나서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는 이러한 일들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렇지 않다. 내면의 새로운 생활은 외부의 새 생활을 요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우리를 죄로 인도해 가는 몸의 지체를(롬 6장) 죽음에 내주어야 한다(극복하다, 5절). 바울은 이렇게 주의를 준다. “너희가 살던 대로 살지 말라. 그것은 구원받지 못한 무리가 사는 방식이다. 그리스도가 너희의 생명이시다. 그리고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이제 주님의 생명이 너희를 통하여 매일매일 나타나도록 하라.”

 

8-11절에서 바울은 새로운 생활을 옷을 바꾸어 입는 것으로 비유한다. “옛죄, 곧 너희가 입은 불결한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고 거룩함의 새 생활을 옷 입으라.” 우리가 이러한 일을 하기는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미 옛 사람을 벗어버렸기 때문이다(9절). 즉, 그리스도 안에서 육신의 몸(죄악된 본성)을 십자가에서의 주님의 참된 할례를 통하여 벗어버렸다(2:11).

 

구약의 육체적인 할례는 유대인에게 있어 죄를 베어 버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로 들어간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영적인 할례는 옛 본성이 베어냄을 받았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생활 가운데서 행할 수 있다는 뜻이다.

 

2. 그리스도인의 교제에서 (골 3:12-17)

 

그리스도 안에는 장벽이 없다(11절).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이며 주님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신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활에서 탁월하시다면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화목할 수가 있을 것이며, 의견의 차이가 있더라도 우리가 말씀을 먹으며 그리스도를 예배할 때 우리의 마음 가운데서 하나님의 평화가 다스릴(심판할) 것이다.

 

지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헌법으로 규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내면에서, 신자들의 마음에서 와야 하는 것이다. 만일 어떤 신자가 다른 신자와의 교제에서 벗어난다면 이것은 둘 다, 또는 그 중 하나가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든 일을 하라!”고 권고한다. 야고보서 4장을 읽으면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이기적인 동기로 일들을 할 때 다툼과 싸움이 생기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3장 15-18절과 에베소서 5장 18-22절을 비교해 보면, 말씀으로 충만할 때는 성령으로 충만할 때와 같은 축복을 받게 됨을 알게 된다. 성령으로 충만하다는 것은 말씀으로 조절을 받는다는 뜻일 뿐이다.

 

3. 가정에서 (골 3:18-21)

 

우리 그리스도인이 믿음을 행사해야 할 첫번째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가정이다. 디모데전서 5장 4절에 보면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만일 아내가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부터 영적인 양분을 흡수한다면 순종적인 사람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순종하게 될 것이다(엡 5:22- / 벧전 3장 참조).

 

물론 남편 역시 아내와 가족에 대하여 사랑과 상냥함을 보여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 남편의 머리됨은 교회에서 그리스도가 머리되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에베소서 5장 23절 이하는 말하고 있다.

 

자녀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부모에게 순종해야 할 것이다.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 부모에게 대항하여 반역하고 그리스도와 교회에 항거하여 죄를 짓는다면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주의 몸의 지체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높은 지위에 합당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만일 가정의 각 지체들이 “나는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며 모든 것보다 탁월하신 분으로 삼겠다”고 말한다면 우리의 가정은 얼마나 축복될 것인가! 이기심이 줄어드는 반면 사랑은 많아질 것이고, 인내하지 못하는 마음은 줄고 상냥함이 늘어날 것이다. 어리석은 일들에 돈을 낭비하는 일은 줄어들 것이며 가장 중요한 일들을 위하여 살게 될 것이다. 원한들이 사라질 것이며 가족들은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우리 가정에 그리스도의 탁월하심이 얼마나 필요한가!

 

4. 일상생활에서 (골 3:22-4:1)

 

물론 바울 당시에 노예는 한 가속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와 똑같은 진리를 그리스도인 고용주들과 고용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바울은 종들에게 이 땅에서의 육신적인 주인과 하늘의 주인이신 그리스도로 두 주인이 있음을 상기시킨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다(마 6:24).

 

그리스도인 고용인은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며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일한다. “눈가림”이란 고용주가 지켜볼 때만 일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하늘의 주인은 언제나 지켜보고 계시다. 우리는 인간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다.

 

“단일한 마음”이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한 한 가지 목표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이다. 기계를 작동시키거나 도구를 사용하거나 트럭을 몰거나, 무슨 직업에 종사하든지 그리스도인 고용인들이 사실상 그리스도의 사역자임을 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일은 마음으로부터 진심으로 해야 한다.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마음을 반만 기울이는 일은 보잘 것 없는 간증을 남긴다. 이같은 태도의 불충성한 일꾼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위하여 우리의 최선을 다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이다.

 

고용주들 역시 그리스도인답게 일들을 운영해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인 고용주들이 그의 그리스도인 노동자들을 불리하게 만드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다. 이는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이다. 정당하고 동등하게 그들을 대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계약과 정부 차원의 규칙들과 혼란한 경제 조건하에서는 그리스도인 고용자들이 사업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첫자리에 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하는 신자를 높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만일 고용주가 그리스도를 첫자리에 두고 주님께 탁월성을 부여한다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대할 수 있을 것이다.

 

1-2장에 나오는 위대한 교리들을 즐거이 누리면서도 3-4장에 나오는 의무들에 항거하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많다. 얄팍하고 불순종하는 생활을 하는 신자는 그리스도의 모든 충만하심을 사실상 믿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일단 머리, 곧 부활하신 영광스러우신 구세주께서 영양을 공급하고 안내하시며 지혜를 주신다는 것을 의존할 때, 그는 충만함 가운데 있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발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