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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의 공중정원

JORC구원열차 2009. 7. 27. 18:23

바벨론의 공중정원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

 

공중정원은 실제로 공중에 떠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솟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속된 계단식 테라스로 된 노대에 풀과 꽃, 수목을 심었기 때문에 멀리서 보면 마치 삼림으로 뒤덮인 작은 산과 같다.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계단식 아파트의 발코니에 꽃과 커다란 나무들을 심은 것과 유사하다. 공중정원이 있었다는 바빌론은 고대 바빌로니아의 수도다. 바빌론은 수많은 정복자들에 의해 정복을 당했는데 그것은 이 지역을 차지하는 민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지나간 유명한 왕들은 수없이 많으며, 그 중에서도 바빌론을 재건하고 공중정원을 직접 건설했다는 아시리아의 정복자 세미라미스가 매우 유명하다.

놀랍게도 세미라미스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다. 세미라미스에 대한 전설은 오래전부터 알려져 있었다. 학자들은 세미라미스를 기원전 8백23년에서 8백10년까지 바빌론을 통치했던 삼시 아다드 5세의 왕비인 ‘사무-라마’로 여긴다. 삼시 아다드 5세는 유명한 아슈르나시르팔왕(기원전 883-859)의 손자다. 세미라미스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 중 한명으로 거론되는 것은 바빌론을 재건축했기 때문이다. 당시까지는 님루드가 수도였는데 그녀는 수도를 바빌론으로 옮겼다. 수도를 옮기기 위해 재건한 바빌론은 고대의 바빌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성곽을 가진 도시였다.

고대에서 가장 넓은 성곽이라고 해도 폭이 8m에 지나지 않았으나 바빌론의 성곽은 무려 17.7m가 됐다는 것이 근래의 발굴에 의해 알려졌다. 외부 성곽은 11.3km이며, 내부 성곽은 6km다. 성곽 옆으로 흐르는 유프라테스강을 건널 수 있는 커다란 기둥으로 된 다리가 놓여졌는데, 기둥들의 간격은 3.6m, 다리의 폭은 9m였으며 4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가 다닐 수 있을 만큼 폭이 넓었다. 이 성채는 1백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성벽이 어찌나 거대하고 방문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는지 현재의 세계 7대 불가사의가 확정되기 전부터 세계의 불가사의에 단골로 들어간 기념물이었다. 사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명명자라고도 볼 수 있는 필론도 자신이 선정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파로스섬의 등대 대신 바빌론의 성벽을 선정했다. 바빌론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거대한 성벽과 공중정원 등 두개가 포함됐다는 뜻이다.
  

설계자는 누구인가?

 

한편 공중정원은 기원전 5백년경 신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왕비 아미타스를 위해 수도인 바빌론에 건설한 정원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네부카드네자르 2세(성경에서는 느브갓셀 2세라고도 함)는 바빌론의 왕이 되자 메디아왕국 키약사레스왕의 딸 아미티스를 왕비로 맞았다. 산이 많아 과일과 꽃이 풍성한 메디아에서 자란 왕비는 평탄하고 비가 잘 오지 않는 바빌론에 마음을 두지 못한 채 항상 아름다운 고향의 푸른 언덕을 그리워했다. 이 모습을 보고 안타깝게 여긴 왕은 왕비를 위해 메디아에 있는 어떤 정원보다도 아름다운 정원을 바빌론에 만들라고 명령했다. 왕의 명령을 받은 건축가는 곧장 작업에 들어가 왕궁의 광장 중앙에 가로·세로 4백m, 폭 15m의 토대를 세우고 그 위에 계단식 건물을 세웠다. 한층이 만들어지면 그 위에 기름진 흙을 옮겨 놓고 넓은 발코니에 잘 다듬은 화단을 일궜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진짜 공중정원을 건설한 사람은 누구일지 궁금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경우 공식적인 이름은 ‘세미라미스의 공중정원’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공중정원을 건설한 장본인으로는 네부카드네자르 2세도 거론되기 때문이다. 결국 두사람 모두 공중정원을 건설했다고 보면 의문점이 해결된다. 사실 테라스에 나무나 풀을 심는 것은 메소포타미아의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매우 보편적인 것이었다. 즉 도시 주위를 흐르는 강물을 이용해 식물을 재배하는 정원은 매우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니니브의 소위 ‘나무로 꽉 채워진 장소 아래에서의 향연’으로 유명한 아수르바니팔왕과 왕비가 나무 그늘 아래에서 향연을 베푸는 그림으로도 알 수 있다.

디디오르가 기록한 공중정원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인공정원은 한변이 거의 1백20m의 사각형으로 마치 극장과 같이 계단으로 한단씩 올라가게 설계됐다. 테라스 또는 플랫폼에 재배되는 모든 식물의 무게는 높낮이가 있는 기둥으로 지지되도록 했다. 가장 높은 기둥은 약 25m로, 정원 최상부를 지지하며 벽체의 두께는 6.6m나 된다. 테라스는 돌출부분을 포함해 16×4피에(1 피에 = 0.3m)의 크기로 아스팔트로 많이 칠해진 벽돌(갈대를 포함)로 주의를 구분한 후 다시 구운 벽돌로 치장했다. 이곳에 얇은 납판을 붙여 물이 기초 부분으로 흘러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테라스에서 거대한 나무들의 뿌리가 충분히 자랄 수 있도록 해 준 장치인 것이다. 테라스에는 각종 종류의 크고 작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그 규모나 아름다움이 빼어나다. 기둥의 높낮이도 다르게 만들어 강도가 다른 빛이 들어오도록 유도함으로써 호화롭게 장식된 궁전의 내부 공간에 신비감을 주도록 했다. 단 하나의 기둥이 천장부터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데, 이 안에 다량의 강물을 테라스까지 올릴 수 있도록 만드는 수력기계가 들어 있다. 그러나 이 기계는 밖에서 볼 수 없다.”
  
  

물을 공급하는 두가지 방법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사막과 같은 기후를 갖고 있는 바빌론에서 약 4천3백64평이라는 큰 정원에 물을 대는 것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수력기계에 대해서는 두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 방법은 정원의 맨 위에 커다란 물탱크를 만들어 유프라테스강의 물을 펌프로 길어 올렸다는 것. 체인에 물통을 연속적으로 매달아 상부로 물을 올린 다음 물탱크에 저장했다가 필요한 곳에 물을 흘려주거나 물뿌리개를 이용해 물을 공급했다는 매우 단순한 방법이다. 두번째 방법은 디오도르와 스트라본이 기록한 것으로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수력기계 방식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올리는 구조다. 특히 이 방식의 장점은 물레방아가 도는 힘으로 아르키메데스 나사가 돌면 물이 달팽이식 나선형 홈을 타고 올라간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중세시대의 기술자들이 실현시키려고 했던 기술이기도 하며, 광산의 지하에서 물을 퍼올리거나 고층 건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사용됐다.

첫번째 방식의 경우 물을 상부로 올리는 체인이 밖에서 보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일설에는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 물레방아를 각 층마다 설치했다고 함)을 갖고 있다. 두번째 방식은 디디오르가 지붕에서 기초까지 내려져 있는 기둥으로 물이 올라갔다는 설명에 부합된다. 하지만 이 경우 각층에 수많은 아르키메데스의 나사, 즉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상층부까지 물을 길어 올리는 방법은 이 두가지 방식을 병용하거나, 방문자들이 잘 볼 수 없는 곳에서 사람들이 직접 물을 상부로 길어 올렸다고 가정할 수밖에 없다.
  
   

공중정원 발굴

 

학자들은 아직 공중정원의 위치를 확정한 상태는 아니지만, 비교적 예전부터 공중정원의 위치로 알려진 아무란의 언덕으로 추정한다. 바빌론은 내외 이중성벽에 둘러싸여 있었는데 공중정원은 내성에 위치하며, ‘텔 아무란 이븐 알리’(Tel-Amuran-ibn-Ali, 추장의 언덕)라고도 불렸다.

바빌론의 폐허는 오늘날까지도 그 모습이 남아 있는데, 이라크 정부는 특히 공중정원을 집중적으로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이 다른 불가사의보다 더 유명해진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 일으켰던 바벨탑과 로맨틱한 분위기를 갖고 있는 공중정원의 신화가 혼합됐기 때문이다. 또한 공중정원은 다른 불가사의처럼 인간을 압도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이뤄진 건물이라는데 더욱 매력이 있다. 천하의 영웅 알렉산더가 자신이 죽을 장소로 바빌론을 지목한 것도 이해가 될 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