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926(토)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하나님 (요 8:1-11)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오늘의 본문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궁지에 몰아넣어 죽일 기회를 찾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끌고 와서 예수님 앞에 무릎 꿇어 놓고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는 돌로 치라고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렵니까?'하고 질문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이런 여자를 현장에서 붙들리면 돌로 쳐 죽이게 되어 있는데, 반면 로마법에는 그런 법이 없기 때문에 로마법에는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또한 사람을 가르치는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에도 어긋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니 죽이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자로 벌을 면치 못하고, 돌로 쳐 죽이라고 해도 걸려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험에 꼼짝없이 걸려들 줄 알고 돌들을 움켜쥐고 흥분해 있을 때에 우선 그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라도 몸을 굽히고 땅에다 무엇을 쓰셨습니다.
그랬더니 말문이 막혀서 그러는 줄 알고 빨리 대답하라고 신이 나서 다그쳐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하고 말씀하신 후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 땅에 쓰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이 무엇을 쓰셨는지 알 수 없습니다. 십계명을 썼을 것이라는 이도 있고, 그들의 죄를 하나하나 기록했을 것이라는 사라도 있으나 다 분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양심을 찌르는 말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때에 살기가 등등했던 그들은 어른부터 아이까지 하나하나 떠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돌아 맞아 죽을 순간만 기다리던 그 여자만 엎드린 채 남아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께서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주여 없나이다'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습니다. 이때에 다시 말씀하기를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크나큰 교훈의 메시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 중 세 가지를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라 치라(요 8:7).
예수님을 시험하여 올무에 넣으려는 그들에게 돌로 치라, 혹은 치지 말라고 하시지 않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중심을 다 꿰뚫어 보시고 모르시는 것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돌을 들고 치려고 하는 그 무리들도 겉으로는 의로운 체하고 남을 정죄하려고 하지만, 다 그 여자와 같은 죄를 지었거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죄인인 것을 아셨던 것입니다. 아마도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글을 쓰신 것도 실제적인 그들의 죄목을 쓰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 않고야 의기양양했던 그들이 돌을 버리고 다 가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여인을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하였느니라'한 말씀에 비추어 보면 범죄치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도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고 함부로 심판하고 남을 정죄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의 죄를 볼 때 심판하고 정죄하기 전에 자기를 반성하고 자가의 죄부터 회개해야 올바른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돌보는 깨닫지 못하느냐'하시면서 또 말씀하시기를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돌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들의 큰 죄는 뒤로 숨겨 놓고 남의 죄는 비판하고 가혹한 정죄를 할 때가 많습니다. 남에게 손가락을 하나 가리킬 때 자기에게는 손가락 세 개가 가리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땅에 쓴 글을 읽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돌을 버리고 가버렸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도 안 받고 그 여인에게 돌을 던졌을 가능성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대 사람들은 그들보다 더 악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함부로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지 맙시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는 엄격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는 관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요 8:11a).
돌리 치려던 무리들이 돌을 버리고 하나씩 하나씩 다 가버리고 측은한 모습으로 땅에 엎드려 있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부드럽게 말씀하실 때, 그 여자는 간신히 '주여 없나이다'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없다고 의기양양한 모습도 아닙니다. 겸손히 회개하는 태도로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이 가련한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타일러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자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육신의 생명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지옥 갈 그 영혼까지 구원해 주셨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정죄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회개시켜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요 3:17에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시려고 오셨습니다.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할 때 하나님은 다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십니다.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의 종교입니다. 우리는 생활에서 이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아브라함 링컨에 대해 에머슨씨가 말하기를 '그의 마음은 온 세상만큼 넓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남의 잘못을 기억 할 여백은 조금도 없다'고 했습니다. 참으로 위대한 인물입니다.
펜실베니아에 피터 밀러라는 나이 많은 목사님이 계셨는데, 온 교인들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이웃에는 교회를 핍박하고 밀러 목사님을 헐뜯고 모욕하는 나쁜 이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사람이 큰 죄를 짓고 사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밀러 목사님은 60마일이나 되는 먼 곳을 걸어가서 워싱턴장군에게 그를 살려 달라고 간청했더니 결코 요청을 받아줄 수 없다고 하면서 왜 꼭 살려달라느냐고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은 '저 사람이 나의 가장 큰 원수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할 때 감동을 받고 사면장을 써 주었습니다. 15마일이나 되는 곳을 걸어가 그 사형 집행장에 도착했습니다. 마침 그 이웃을 교수대로 끌어내고 있었습니다. 그 악질 죄수는 '저 늙은 목사가 내가 교수형 당하는 꼴을 보고 기뻐하려고 오는구나'하고 소리 치고 있을 때에 밀러 목사님은 사람들을 제치고 들어가 사면장을 건내 주면서 살려 내왔습니다. 참 멋있는 목사님이라고 생각됩니다.
6.25동란 때의 일입니다. 공산군이 예수 믿는 한 교원원장을 붙들어서 총살시키려다가 직업이 무엇이냐고 할 때에 고아들을 돌본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공산군은 말하길 '너는 어린것들을 돌봐줘야 하니까 대신 너의 열아홉살 난 아들을 죽이겠다'하며 그 원장이 보는 앞에서 쏴 죽였습니다. 다시 수복이 되면서 그 공산군이 유엔군에게 체포당해 그가 저지른 일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원장이 찾아가서 '이 사람을 죽인다고 죽은 아들이 살아오겠느냐'고 하면서 '나도 하나님으로부터 죄사함 받고 구원받은 몸인데 그를 용서해 주십시오'하고 간청하여 살려냈습니다. 후에 그 공산군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 원장의 용서가 한 영혼을 구하고, 그 목사를 통하여 더 많은 영혼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로드 벨포라는 사람이 최대의 선물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원수에게 줄 가장 좋은 선물은 용서이고, 반대자에게는 관용을, 친구에게는 마음을, 아이들에게는 좋은 모범을, 아버지에게는 존경을, 어머니에게는 자랑스럽게 생각할 행동을, 자신에게는 존경받을 일을, 모든 사람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원수에게 가장 좋은 선물은 용서밖에 없습니다. 중국 격언에 '가장 위대한 정복자는 때리지 않고 원수를 이기는 자이다'란 말이 있습니다.
선한 하나님께서는 엄한 율법으로 인간을 바로 잡을 수도 없고 구원할 수도 없었으므로, 당신의 독생자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까지 하셔서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심으로 구원하시지 않았습니까? 우리들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할 수 있는 대로 원수를 만들지 않도록 하십시오. 언젠가는 그 원수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때가 옵니다. 또 원수 맺었던 일이 있으면 속히 용서하고, 또 용서를 빌고 화목해야 합니다. 원수를 맺고 사는 것은 절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아닙니다. 빌립보서 4:5에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3.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요 8:11b).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이 여자에게 하신 말씀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한 이 말을 명심해야 합니다. 개가 자기가 토했던 것을 다시 먹는 것처럼,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가서 눕는 것처럼 죄를 반복해서 범하는 자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아무리 하나님 사랑이 크다고 하지만,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죄를 범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회개했다고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세 가지 요소가 있는데, 첫째는 지적으로 죄인임을 깨달아 아는 것이요, 둘째는 정적으로 죄에 대하여 애통하며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로는 의지적으로 죄를 용감히 꿇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사람들은 이 세 번째를 잘못합니다.
사 55:7에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오라 그가 널리 용서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잘못된 길로 가던 것을 싹 끊고 돌아서는 것이요. 말로는 "안 되요, 안 되요"하면서 생각으로는 '그 죄를 또 지어 봤으면, 또 해봤으면' 하는 것은 아직 회개가 덜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 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간음하다 붙잡혀 온 여자를 용서해 주셨지만 그 죄를 좋게 보신 것은 아닙니다. 죄는 가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고 엄히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예수님의 말씀처럼 여러분의 삶에 귀한 경고의 메시지가 되기 바랍니다.
-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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