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섭리와 성도의 순종
아벨은 친 형인 가인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아는 다윗에 의해 전쟁터에서 죽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아래의 어린이들은 헤롯에 의해 몰살당했습니다. 당사자들에게는 까닭 없는 죽음이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이었습니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믿는 사람들의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이성으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분명한 것은 우리는 몰라도 전지전능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록한 책이기에 성경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약속(영생)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한 사건임을 믿어야 합니다.
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을 섭리로 다스리시며 자기 뜻에 따르지 않고는 아무 일도 발생하지 못하도록 만사를 조정하신다. 따라서 우연이나 운명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만사가 우연 또는 운명적으로 발생한다는 불신자들의 견해는 부패한 견해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상권 제16장)
길을 가다가 돌 뿌리를 차는 것도 인연이라고 하듯, 모든 인간사는 우연히 발생하는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어떤 뜻과 목적이 있는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주만물의 운행 속에 내재(內在)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길을 가다가 돌 뿌리에 채어 넘어졌을 때, 이를 하나님의 섭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하나님의 섭리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신앙적 과제로 떠오릅니다. 그 때 다시 일어나 생각하기를 다리가 부러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면서 그대로 계속 발길을 옮긴다면 이는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섭리란, 하나님의 일방적 결정이나 제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성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밝혀 주시려는 자비의식이며(히 12:5-6) 허물과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달려가는 성도들의 발길을 제어하시려고 밟아 주시는 긍휼의 ‘브레이크’입니다. 어거스틴도 그의 ‘참회록’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하시어 적당히 우리에게 유익한 시련과 고통을 주시어 다시 주님에게 돌아오도록 부르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왜? 넘어졌는가, 왜? 브레이크가 걸렸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성경)에 비추어 내가 지금 가는 길이 합당한 길인가? 아니면 내가 이제 행하려는 일이 옳은 일인가? 여러모로 심사숙고해 보고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과는 상관없이 꿈이나 환상으로 말미암는 심리적 확신만으로 결정하는 것은 마귀의 유혹일 수도 있으므로 조심하고 삼가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을 섭리하시는 오묘한 능력을 다윗은 시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를 얼마만큼 알고 계시는가 하면,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며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고, 나를 얼마만큼 살피시는가 하면,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안수하시고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며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고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지라도 흑암이 나를 숨기지 못하고, 나를 어떻게 지으셨는가 하면,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고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며 내가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았다”(시 139:1-15)
이와 같이 지으시고 감찰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다윗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라고 순종하는 합당한 의사를 표명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시 139:23-24)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와 같은 내용의 기도를 늘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인 성도들을 영생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성도들에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는가? 살피시며 그를 시험하여 그의 뜻을 헤아려 하나님의 선하신 뜻대로 섭리하고 계심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히 12:5-6)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 3:19)
그러므로 우리에게 어떤 선하지 못한 악한 행위가 발견되면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고 살피신 대로 시험하시는 것이 곧 우리의 삶의 길에 나타나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인 것입니다. 만일 믿는 자에게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전혀 없고 매사가 형통하다면 이는 그가 온전한 의인이 아닌 이상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섭리의 대상에서 제외된 불행한 경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떤 성도가 예기치 못한 사건에서, 예를 들어 교통사고, 화재, 강도 등에 의한 사건의 위기에서 살아났을 때 그는 어떻게 그 일에 대처해야 할 것인가? 그저"지난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입술로 회개하면 마무리가 되는 것일까? 그래도 무방하다면 하나님의 섭리는 공의롭지 못한, 한낱 짓궂은 장난이며 무자비한 섭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는 청년시절 어느 해 여름휴가를 미치고 대학으로 돌아가던 중에 돌연한 우뢰로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하므로 가문의 명예와 출세의 미래를 꿈꾸던 법학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의롭게 사는 길을 찾아 수도사가 되기를 서약했습니다. 이렇게 예기치 못한 하나님의 섭리에 서슴지 않고 순종한 그가 그로부터 12년 후 일류역사의 중요한 한 장을 장식한 불멸의 공헌을 남기는 종교 개혁자가 되리라는 것을 그 누가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의 신묘막측하신 오묘한 섭리에 대한 루터의 겸손한 순종이 16세기 종교 암흑시대에 여명이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필자가 아는 목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은 눈물겨운 상황 속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때의 그에게는 오직 소명감에 투철한 목회의 삶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교인들과 희노애락을 같이 하면서 지역 주민을 보살피고 전도에만 전심전력했습니다. 교회는 서서히 성장했습니다. 개척한지 10여년 만에 예배당도 신축했습니다. 그러자, 개척시절의 헌신적 삶이 점차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지순례, 초청부흥회 등 외국 여행이 빈번해 지면서 학위취득을 위한 해외 유학이 계획되고 있었습니다.
유학을 위한 수속으로 분주하던 어느 날, 정오 무렵이었습니다. 목사님 내외분이 집을 비운 사이 여섯 살 난 외아들이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밖에 나가 놀다가 후진하던 트럭에 치어 병원으로 옮겨진 수 시간 후에 소생하지 못하고 숨졌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교인들의 구구한 의견이 난무했습니다. 그러나 필자는 하나님께서 그 목사님을 사랑하시고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내심으로 목사님의 변했던 모습이 다시 돌아오리라 믿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도 자신의 변화를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세월이 가면서 목사님의 마음은 다시 바뀌고 있었습니다. 그를 권면하고 경책할 교인들은 없었습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의 생각은 반전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다가 사랑하는 아들까지 잃은 내가 무엇을 못하겠는가? 드디어 그는 외국 유학을 떠났고,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해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더욱 성장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인들의 발을 씻겨주던 개척교회 시절의 그 분의 모습은 이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내’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내’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사라지고 ‘나의 능력’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그 분의 삶은, 그것이 바른 순종이었을까? 아니면 잘못된 순종이었을까? 기독교인의 세상적 성공과 출세는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한 결과의 축복일까? 인간으로 태어나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 본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인간에게 주어진 때를 슬기롭게 선택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전3:1-8) 그 중에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다는 말씀을 우리는 우리의 삶에 적절하게 적용한다면 주 안에서 성공적인 삶이 될 것입니다.
구약성경 요나서에 보면, 선지자 요나가 타고 가든 배가 예기치 못했던 폭풍을 만나 침몰 직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폭풍의 원인은 니느웨로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려던 요나에게 있었습니다. 이러한 원인이 명백하게 드러나자 요나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기를 바다에 던져 폭풍이 멎게 하기를 선원들에게 자청했던 것입니다. 그때 선원들은 곧 요나를 바다에 던지려 하지 않고 어떻게 하든 그를 살려보려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에 대려고 시도해 보았으나 점점 더 흉용해지는 파도로, 할 수 없이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매 바다의 뛰노는 것이 곧 그쳤다고 했습니다.(욘 1:10-15)
우리의 미천한 생각대로라면, 요나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로 작정했으니 폭풍이 멎고 그로 하여금 발길을 돌려 니느웨로 가게 했었다면 좋았으련만 끝내 바다에 던져져야 했고 큰 물고기 뱃속에서 삼일 삼야 부르짖게 되었음은 너무 심한 징계가 아니었을까?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공의로우신 반면, 자비하셔서 요나로 인하여 모든 선원들과 선객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고(욘 1:16) 결국은 큰 물고기 뱃속의 요나를 살리시어 당초의 뜻대로 니느웨성을 구원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요나서는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섭리에 순종할 것을 가르쳐주고 있음은 물론이고 삶의 길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에 죽음도 각오하는 헌신적 자세로 회개하고 순종한 요나의 행위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다시 시작하는 열심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본받아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삶의 중요한 부분 뿐 아니라 사소하고 미미한 부분까지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철저하게 ‘나’라는 존재를 무시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힌 자로서 사소한 일이라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록 보잘것없는 엑스트라의 삶일지라도 매사에 소홀한 삶이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의 정신적, 육체적인 모든 예기치 못한 사건에는 그 곳에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가 역사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 성도라면 그 예기치 못한 사건의 원인이 되는 자신의 행위를 말씀에 견주어 발견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어떤 사회적 명예나 자존심이 손상을 입는다 할지라도, 경제적 손실이나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서슴지 말고 회개의 열매는 신속하고 과감하게 맺어야 합니다. 즉 포기하거나 취소하거나 양보하거나 하는 따위의 구체적 행위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했거나, 뇌물을 받은 것이 있으면 돌려주어야 하고 이웃을 속였으면 용서를 빌어야 하고 책임을 완수하지 못했으면 미련 없이 물러나야 하고 허물이나 거짓이 발견되는 즉시 사실을 밝히고 잘못을 고백하고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시작하는 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는 특히 지도자나 선생들에게 요구되는 것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약 3:1) 하나님의 자비로운 징계를 받고도 구태의연하거나 어물쩍 넘기려 한다면 이는 큰 오산입니다.
클린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용서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언제나 내가 용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사실은 내가 전 세계 앞에 서서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내가 철저히 무너지지 않았다면 결코 100% 진지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겪은 일이 다른 사람보다 특히 나 자신에게 얼마나 섬뜩하고 창피한가를 깨달았습니다. 내가 저지른 엄청난 실수로부터 내 삶은 이제 새롭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지난날 하원의 탄핵에 대해 너무한다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잘 된 일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은 욕심에 미혹되어 진리를 외면하고 착각에 빠짐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어쩔 수 없는 죄인의 삶이었다고 할지라도 다음 순간에 찾아오는 하나님의 섭리에도 불구하고 그 섭리에 순종치 못한다면 성도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를 스스로 거부하는 우매한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잘못을 깨닫기에 난해하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들어야 하는 말씀(성경)과 성도들과의 교제(교회)를 통해서 우리에게 쉽게 전달됩니다. 다만 우리가 진리를 추구하는 열심이 없고 세인의 이목을 두려워하고 체면의 손상을 두려워하여, 마음을 여는 회개가 없는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의 섭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뿐입니다. 다윗은 나단이나 갓 같은 선지자뿐 아니라 시므이 같은 비류가 저주하는 것 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들였습니다. (삼하 16:10-11)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섭리는 오묘할 뿐만 아니라 최선임을 알게 됩니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습니다. 성도들과의 교제(교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오래 동안 참아 주십니다. 회개하면 용서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섭리를 모른척하면 불행한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다양하게 그리고 그림자와 같이 늘 성도들과 동행합니다.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사랑의 매를 맞는 섭리보다는, 성도들의 권면이나 경책의 섭리가 더욱 은혜로울 것이며, 권면과 경책의 섭리보다는, 항상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말씀(성경)의 섭리에 순종하는 것이 아름다운 성도들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믿음이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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