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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묵상/오늘의 말씀

091116-은밀히 행하자! (출 14:20, 마 6:2-4, 고전 14:20)

by JORC구원열차 2009. 11. 16.

091116(월)

은밀히 행하자! (출 14:20, 마 6:2-4, 고전 14:20)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마 6:4)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다 알아야만 잘나고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인 줄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도적질만 배우지 말고 다 배워라'는 속담까지도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불 때에는 아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편이 더 유익하고 은혜로울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은밀히 행하자'라는 제목을 가지고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벌써 11월하고도 중순에 접어들고 있는데 우리는 올 한해에 얼마나 이웃이나 교회나, 나 자신에 대하여 은밀히 행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는지요? 아니면 이제 점점 추운 겨울이 오는데 이 겨울을 대비하여 무슨 은밀한 계획이라도 세우셨는지요? 그럼 우리는 어떤 것을 은밀히 행해야 할까요?

 

1. 선행을 은밀히 해야 합니다

 

먼저 읽어드린 마태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의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불쌍한 사람들 을 구제한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자기의 선행을 지나치게 드러내며 자랑하여 영광과 창찬만을 받으려고 하는 가증한 모습을 보시고 책망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교훈을 곧 내가 남을 구제하거나 어떤 선을 행하였을 때에 그것을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가 선을 행하였을 때에는 그것을 아는 것보다 모르고 지내는 것이 훨씬 나에게도 유익이요, 은혜와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생활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내가 행한 선에 대해서 너무 지나치게 기억하려는 태도는 오히려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행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선행에 대해서 지나치게 의식하는 사람은 어떤 때에는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평이나 공치사를 하게 되고 나아가서는 위선자가 되어서 남이 보는 데서만 선한 척하기 쉬운 것입니다. 남에게 자기의 선행을 보이기 위해서 생활하는 사람은 마치 돌작밭에 떨어진 씨와 같이 쉽게 싹은 났자만 햇빛이 비치면 곧 시들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튼튼한 식물은 보이는 잎사귀도 무성해야 하겠지만 그보다도 보이지 않는 뿌리가 더 튼튼하고 많아야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비결과 원리를 모르고서 자신의 뿌리까지 드러내어서 보이려고 하면 그 식물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사야 39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걸려서 이사야 선지를 통해 사형선고를 받은 뒤 그는 누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애통하며 회개하고 간절히 부르짖어 생명을 15년이나 더 연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감사하기도 하였지만 기분이 좋고 신이 났습니다. 그 때에 이웃 바벨론에서 이소식을 전해 듣고 사절단들이 축하 예물을 가지고 문안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 히스기야 왕은 너무 너무 기분이 좋고 의기양양해서 그 사절단들에게 보여서는 아니 될 금고와 무기 창고까지 다 보여 주고 말았습니다. 이 광경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노하셔서 "네 집에 있는 모든 소유와 보물은 다 바벨론으로 옮겨질 것이다"고 하셨는데 그 후에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은혜를 많이 받고 체험이 많을수록 또 자기의 선행이 많을수록 자중하고 조심하면서 은밀하게 지내야 하는데, 이 히스기야 왕은 너무나 지기 도취에 빠져서 이방인에게까지 다 드러내 놓은 '노출죄'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선행이나 장점을 너무 의식하거나 기억하는 사람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옛말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을 다르게 표현한다면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내가 은혜받은 것은 물에 새기고 남에게 은혜를 끼친 것은 돌에 새기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진정한 생활 자세는 남의 은혜와 선행은 깊이 새겨두고 알아주도록 노력해야 하지만 나 자신의 선행은 알지 않도록 힘써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들은 극히 적은 선행을 행하고도 보다 크고 풍성한 가치를 인정받으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께 받을 상급을 앓는 슬픔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2. 자신의 가치 평가를 은밀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가치 평가에 대해서 지나치게 과소평가를 해도 괴로울 때가 있지만 지나치게 과대평가를 하다가 실패하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의 어떤 가치라던가 미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너무 과대평가하거나 과시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구약 성경 출 34:29이하에 보면 모세가 두 번째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모세의 훌륭한 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두 번째 시내 산에 올라가 40일간 금식하며 하나님과 대면하여 말씀을 듣다가 십계명을 받아들고 내려오는데 너무나도 그 얼굴에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반사되어 비치므로 광채가 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도 감히 모세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까지 되었지만 모세 자신은 알지 못했다고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간에 자신이 받은 많은 은혜는 모르고 자신이 행한 적은 선행이 있기만 하면 굉장한 것처럼 과시할 적이 많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히 성도 여러분에게 분명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아 귀한 그릇이 되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가치를 부인하고 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은 언제나 보배를 담은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의식 속에서 살아야 하나님께서는 그런 자를 더욱 귀한 그릇으로 들어 쓰시나든 진리를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사도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기독교가 바울의 종교가 아니냐? 할 정도로 위대한 사도요 또 갖가지 신비한 체험과 능력을 소유한 그였지만 그는 언제나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고 '나는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다'고도 했고 또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면서 철저히 자기의 가치를 부인하고 조금도 자기를 의식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린 사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과시는 실패의 조요 원인이 된다는 시실을 분명히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가치와 인격을 너무 의식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기 쉽고 교만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과 같은 자세를 가지고서 하나님의 일을 하거나 누구에게 선을 행할 때에 자기를 부인하고 언제나 '나는 깨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 이요 ' 죄인 중의 괴수'요 '만삭되지 못한 자'라는 의식 속에 살기를 바랍니다. 혹시 칭찬을 받든지 영광을 받게 될 때에는 모든 영광을 다 하나님께 돌리는 귀한 신앙생활의 자세를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겸손을 은밀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의 마음속에는 '물을 떠난 고기는 혹시 살는지 몰라도 주님을 떠난 이 생명은 도저히 살 수가 없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중심의 울부짖음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아시기 바랍니다.

 

잠 16:18에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했습니다. 또 잠 11:2에도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께 칭찬 받을 만한 어떤 훌륭한 일을 하더라도 사람에게 욕을 듣게 되고 멸시와 수치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또 아무리 똑똑하고 훌륭한 것 같아도 교만하고 거만한 살림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임택진 목사님의 '멀고도 어려운 길'이라는 수상집에서 이런 내용의 글을 읽었습니다. 어떤 교양있는 신사 한 분이 젊은 목사님 댁에 전화를 걸었는데 마침 목사님은 안계시고 젊은 사모님이 전화를 받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신자는 사모님에게 부탁을 하면서 '혹시 전화 받으시는 분이 목사님 부인이시면 이 말씀을 전해 주십시오'라고 했더니 대뜸 앙칼진 음성으로 '예? 목사님 부인이냐구요? 부인이 뭐예요? 말씀을 좀 바로 하세요!' 하면서 소리를 지르더라는 것입니다. 이 신사는 계속해서 '여보세요! 목사님 부인을 부인이라고 하지 뭐라고 불러야 합니까?'하고 되물으니 '사모님이라고 부르세요. 그것도 모르세요?'하는 말에 이 신사는 너무 어이없어서 전화를 끊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이 목사님의 사모님은 부인이라는 말이 아주 낮춤말인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혹 그 이하의 어떤 낮춤말로 '당신이 목사 여편네요?'하더라도 '예! 제가 목사 여편네입니다'할 수 있어야 진정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실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또 유명한 홀돈 나다니엘(Nathaniel Hawthorne)의 큰 바위 얼굴 (The Great Stone Face)이라는 작품에 보면 어느 시골 한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 뒷산에는 멀리서 보면 산봉우리와 바위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꼭 인자하고 위대한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보여지곤 해서 그 마을에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언젠가는 우리 마을에 저 큰 바위 얼굴 같이 인자하고도 위엄이 있는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으며 그 마을 사람들은 많은 세월을 두고 기다려 왔습니다. 그 마을에 어네스트(Ernest)라는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어릴 적부터 매일같이 석양에 노을이 질 무렵이면 물끄러미 그 큰 바위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면서 이 마을에 언제나 저런 위대한 인물이 나타날까 기다리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게더골드라는 백만장자가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저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를 환영하고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의 인색하고 못된 성격이 나타나게 되자 모두가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갔으나 다 똑같이 실망을 주고 말았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 소년 어네스트오 나이가 들어 머리가 희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는 전도자가 되어 그 마을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어네스트가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설교를 하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야! 이 어네스트야말로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 온 저 큰 바위 얼굴과 똑같지 않느냐?' 고 외치자 수많은 사람들은 석양 노을에 비친 큰 바위 얼굴의 모습과 어네스트의 그 인자하고 위엄있는 모습을 비교하며 그제서야 그 마을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의 전설이 이루어졌다고 환호성을 치면서 이 어네스트를 존경하며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어제스트는 아직도 자기보다 어 현명하고 인자하고 착한 사람이 저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용모를 가지고 나타나기를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다는 야기의 내용인 것입니다.

 

우리는 남이 나를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크게 자신을 생각하려는 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예수님의 생애를 한 번 보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 된 분이시지만 동등된 것을 취하지 않으시고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며 낮아지셨습니다. 또 스승의 신분으로서 제자득의 발을 씻겨 주시기까지 겸손하셨는데 그러한 주님을 믿노라고 하는 우리는 너무 지나치게 자신을 과시 혹은 과대평가하려고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 고후 3:5에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앞으로 여러분 모두는 자기의 가치를 내세우거나 과장하지 마시고 겸손하여 언제나 자신을 부인하고 선을 행하되 은밀히 행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아 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