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205(토)
은혜의 왕 노릇을 아십니까? (롬 5:12-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롬 5:21)
하루라도 죄를 짓지 아니하고 살아 갈 수 없는 연약한 우리로소는 아무리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는 구원을 선포할지라도 구원받을 만한 자신의 의에 대해 자신 없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구원의 확신을 가졌다가도 죄의 유혹에 맥없이 넘어가는 자신을 볼 때 그 참담한 심경을 이루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이렇게 매일 흔들리는 연약한 우리에게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아주 기쁜 소식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은혜가 우리 위에서 왕 노릇한 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왕 노릇이라니 대체 이게 무슨 말입니까? 여러분은 이런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본문에 나타나는 말씀이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 말보다 더 은혜란 단어를 잘 설명해 주는 말도 없고, 또 이 말보다 더 우리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는 말씀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은혜의 왕노릇이란 표현 속에서 알 수 있는 그리스도의 은혜란 어떤 은혜입니까?
1.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생명을 가져다주는 은혜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은혜의 왕 노릇을 설명하기 위해 아담과 그리스도를 대비시켜 설명합니다. 즉 아담이 인류에게 끼친 영향과 예수께서 우리에게 끼친 영향을 비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아담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이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자신의 의지나 행위와 상관없이 우리를 죄인으로 만들었고 필연적으로 죽게 하였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바울은 그 증거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라고 했습니다. 왜입니까? 롬 6:23의 말씀과 같이 사망은 죄의 삯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태어나서 스스로 죄를 짓지 아니한 영아나 유아가 죽는 일이 왜 발생합니까? 바로 인류를 대표하는 아담의 범죄로 인해 그 아담과 혈통적으로 연합되는 전 인류 또한 죄인의 신분이 될 수밖에 없는 대표 연합의 원리에 따라 모두 죄인 된 상태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와 같은 대표 연합의 원리에 따라 예수께서도 우리의 모든 죄를 안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를 믿어 영적으로 연합된 모든 자들을 의인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 모두는 나의 행위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 속의 공로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2. 모든 사람의 죄를 일거에 덮어 버리는 은혜입니다.
본문의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 은혜는 그 범죄와 같지 않다고 말하면서"한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고 했습니다.
곧 이 은혜는 아담의 범죄가 끼친 영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크고 놀라운 영향을 가진 은혜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온 인류의 원죄와 우리 자신의 자범죄까지도 충분히 덮어 버릴 수 있는 흘러넘치는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은혜에 대한 바울의 표현들을 보십시오. 엡 1:6에서는 "그의 은혜의 영광"으로, 엡 1:7에서는 "그의 은혜의 풍성함"으로, 그리고 엡 2:4에서는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 으로, 또한 에베소서 2:7엡 2:7에서는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으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허물 많은 여러분 자신의 모습만 바라보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은혜를 또한 완전한 구원에 대한 의심과 불안 가운데 사시겠느냔 말입니다. 주의 크신 은혜를 축소시키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3. 영생에 이르게 하는 왕적 통치력을 지닌 은혜입니다.
본문의 21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자신의 논증에 대한 마지막 종지부를 이렇게 찍습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단적으로 말하면 은혜가 책임지고 성도를 영생에 이르게 한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바울이 왜 사망의 왕노릇, 은혜의 왕노릇이란 표현을 썼겠습니까? 율법 아래서는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위해 애쓰고 노력해도 사망의 왕노릇으로 인해 다 죽어 갔음을 상기시킴으로써, 은혜 아래서는 우리가 아무리 선에 대해 무력하고 연약하다 해도 그 은혜가 왕노릇하여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어 감을 드러내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구원에 관해 결코 두려워하거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은 우리 위에 왕 노릇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책임지고 이루어 줄 것입니다. 때로는 죄와 허물을 덮어 주기도 하고 때로는 징계로써 의의 기로 인도하면서 말입니다.(히 12:11)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 우리에게 끼치신 은혜는 우리 행위와는 상관없이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은혜요, 모든 사람의 죄를 일거에 덮어 버리는 넘치는 은혜요, 우리로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위에서 왕적 통치를 하는 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 은혜 아래 있음을 아십니까? 우리는 이 은혜 아래 있음을 항상 깨닫고 믿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구원의 확신에 이를 수 있고, 항상 편안한 가운데 감사하며 살 수 있습니다.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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