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와 설교자 - 로이드 존스 저 / 서문강 역
제 1 장 설교의 우월성
“그 모든 것보다도 이 강의를 할 용의를 가진 데 대한 나의 궁극적인 이유는 설교사역이란 내게 있어서 어떠한 소명보다도 가장 높고 위대하고 영광스런 소명이라는 점이다”(로이드 존스)
좀 더 부연해서 로이드 존스는 주저하지 않고 말하기를 “오늘날 기독교회의 가장 절실한 요구는 진정한 설교이며, 그것은 역시 명백하게도 세상이 가장 크게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가장 절실한 필요성에 대한 진술은 설교자가 함께 논의해야 하는 첫째 과제이다. 설교가 어떤 필요성이 있느냐? 현대교회와 세상에서 설교는 어떤 위치에 있는가? 아니면 설교란 시대에 아주 뒤떨어진 것이 되어버렸는가? 그런 질문을 던져야 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 현시점의 교회 상태가 어떻다는 것을 가장 잘 반영해 준다. 로이드 존스 바로 그 점이 현대교회의 위험한 상태와 무기력함을 가장 잘 설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설교의 필요성에 대한 전체 문제, 목회에 있어서 설교의 위치가 이 시간에 다룰 문제이므로 그것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이 설교에 대한 강의나 특강을 요청할 때, 얼른 설교방식, 설교방법, 설교수단, 설교기술을 생각한다. 로이드 존스는 그것이 아주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설교자는 먼저 전제조건, 배경, 보편적인 원리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왜냐하면 설교한다는 것이 참으로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지 못하는 데서 중요한 난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로이드 존스는 특정한 조항에 들어가기 전에 그 문제를 일반적으로 다룬다.
그러므로 다루려고 하는 중대한 문제는 이것이니 - 우리가 설교의 정당성을 증명할 수 있는가? 현대세계에 있어서 설교의 필요성은 과연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도 알겠지만 이것은 더 큰 문제의 일부분이다. 우리는 설교하는 문제 뿐 아니라 교회 자체까지도 의문시되는 세대에 살고 있다.
오늘날 설교에 대해 반동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인가? 왜 설교가 전에 교회생활에서 차지하였던 위치에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서 떨어져버렸는가? 基督 敎會史를 아무리 건성으로 읽는다 해도 설교가 교회생활, 특히 프로테스탄트의 경우에 가장 중추적이고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왜 이처럼 설교의 위치와 능력이 하향 길을 걷고 있으며 왜 이 설교가 도대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는 것입니까?
로이드 존스는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두 가지 객관적인 제목으로 나눈다.
첫째는 이 사실을 설명하는 일반적인 이유요, 둘째는 교회 자체 내의 특수한 이유이다.
“일반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 밖의 세상에 유행하는 어떤 보통의 사상들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대영제국에서 이 문제를 생각한다면 주로 볼드윈이즘을 들 수 있다. 영국 스탠리 볼두윈이라 이름하는 20대에 수상을 지낸 사람은 별 신통한 의미를 가지지 못합니다만 연설과 웅변의 가치에 관한 국민의 생각에 영향을 끼쳤던 사람이다. 그는 연설과 웅변의 소질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성공하려면 연설과 웅변의 가치와 중요성을 낮추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그는 단순하고 정직하고 평범한 영국인으로 등장했다. 자기는 위대한 연설가가 아니라고 말하며 어떤 위대한 웅변가라면 그는 국민들이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며 아주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시사했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대조법으로 표현했으며 그가 취하는 노선은 웅변이나 상상의 큰 재능에 깊이 심취될 수 없으면서 단순하고 평이하고 정직한 진술을 하는 평범한 영국인의 자세를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웅변과 말의 권능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아주 뚜렷하게 영국 정치가들 사이에서 유행 되었으나 그 영향은 교회에까지 파급되었다. 이렇게 해서 웅변과 설득력과 명목상의 가치를 말하는 것에 대해 새로운 태도가 존재하게 되었다. 세계에 알려진 몇몇 위대한 활동가들은 역시 위대한 연설가요 웅변가였다는 사실을 주목하는 것이 매우 유익하다. 금세기의 양차 대전 동안, 영국의 뛰어난 두 위대한 지도자는 공교롭게도 위대한 웅변가였다. 사람이 말하려면 그저 단순한 대화를 해야 한다는 인상을 주었던 다른 지도자들은 속일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인해 평가를 받았다. 가장 위대한 활동가는 역시 위대한 웅변가였다. 물론 그것은 민중을 감격시키고 일깨워 행동으로 옮기게 할 수 있는 지도자적 역량의 한 부분이며 그것은 지도자가 반드시 구비하고 있어야 하는 요점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설교의 위치가 하락된 이유를 설명하는 교회 자체 내의 이유와 태도에 대해 좀 더 많은 관심이 있다. 로이드 존스는 이 방향에서 주요 동인이 몇몇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저 없이 맨 첫 자리에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뢰심 상실, 진리에 대한 신앙의 감소 등을 놓는다. 이것을 첫째로 꼽는 것은 그것이 주요 동인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권위가 없으면 절 말할 수 없고 설교할 수 없다. 위대한 설교는 위대한 주제에 달려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위대한 주제는 언제고 어떤 차원에서든지 위대한 웅변을 산출하며 물론 이것은 특별히 교회의 경우에서도 진리이다. 사람들이 성경을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 권위에 입각해서 말하는 동안에는 위대한 설교를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거기서 떠나 사색하고 논리화하고 억측을 부리고부터는 웅변이나 구변의 위대성은 여지없이 하향 길을 걷게 되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두 번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시야가 넓어야 한다. 나는 “대설교꾼”이라 불려지는 자들에게 사람들은 반감을 가졌다고 믿는다. 그들은 설교 꾼의 주요 특성들을 완벽하게 나타내 준다. 그 말 자체가 매우 재미있고 또 매우 정확한 것이라 믿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설교자라기보다는 설교꾼들이었다. 내가 뜻하는 바는 그들은 강단을 점령해서 그것을 지배하고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는 위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직업적인 사람들이다
또 다른 요인은 참된 설교내용과 설교행위에 대한 그릇된 개념이다. 그것은 같은 형식에 관한 문제인데 내가 언급해 온 조잡한 방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설교집의 발행이 설교하는 일에 나쁜 영향을 끼쳤다고 믿는 것이다.
이상의 결과로 설교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 침투해 들어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가장 의미 있는 것은 사람들이 예배에서 설교를 “연설”이라고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설교가 퇴색해 감에 따라 예배에 의식적 요소가 증가하는 경향이 있다. 더욱 나쁜 것은 공적 예배에 흥미본위의 요소가 증가되었다는 것이다. 영사기를 사용한다든지 더욱더 많은 노래를 도입하여 말씀을 읽거나 기도하는 시간은 사정없이 짧아져 버리고 찬송하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여기에다가 간증이 또 주어진다. 이와 관련해서 또 다른 전체적인 추세는 “개인 대 개인 간의 사역”, 소위 “상담”이란 것을 점점 더 강조해왔다는 것이다. 교회나 기독교 목사의 제일 첫째 임무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택한 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맨 먼저 “ 내 증인”이 될 것을 말씀하셨다. 그 점은 그들에게 있어 제일 위대한 임무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다른 권능을 주려 하셨으나 그들의 주요 임무는 역시 주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오순절 날에 성령이 충만해지자 즉시 설교(전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일에 전무하리라.”우리는 말씀을 전하는 그것이 제일 되는 일이다. 이것이야말로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에서 권위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제일 첫째의 임무이다.
사도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들 가운데서와 마찬가지로 디모데에게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는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교회는 사회단체도 정치적, 문화적, 공회도 아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그러므로 말씀전하는 일이 교회의 제1차적인 임무라는 진술에 대한 해명과 정당성은 그처럼 성경의 증거와 나의 진술을 지지해 주며 일치하는 교회의 역사적 증거에 기초하고 있다.
제 2 장 대체할 수 없는 말씀 증거
로이드 존스는 1장에서 말씀 증거하는 것이 교회와 교회 목사의 최우선적 임무이며 그 외의 모든 일은 이것을 보좌하며 매일매일 이 일을 수행하는 외적 사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명제를 전제해 놓았다. 이제 나는 좀 더 나아가서 교회역사를 통해 지지받고 예증 받았던 신약의 이 증거가 우리들로 하여금 말씀 증거의 우위성을 역설함에 대한 궁극적인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이며 그것이 신학적이라는 결론을 얻게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성경 전체의 메시지는 이 점을 역설하며 이 결론에 이르게끔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 말을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의미하는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인간의 진정한 필요와 성경에 나타나고 공언된 구원의 본질을 생각해 볼 때 교회의 최우선적 임무는 말씀을 가르치며 선포하여 사람의 참된 필요와 그에 대한 유일한 처방을 보여주는 일임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말씀 증거의 중요성을 더 이상 알지 못하는 것은 이상의 문제들에 대해 오늘날의 거짓된 견해가 횡행하기 때문이라 본다.
인간의 참된 고통은 그가 하나님께 반역했고 그래서 부단히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인간에 대한 성경의 진술이며 본래적인 인간성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이다. 사람이 “죄와 허물로 죽었다”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영적 세계에 대하여, 사람 위에 임한 모든 은혜로운 세력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그리고 “사람은 눈이 멀었다”고 하는 사실이다(고후4:3-4).
사람의 고통이란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있도다”라고 바울은 엡4:18절에서 말하고 있다. 성경적 인간관에 따르면 불행이나 참상, 육체적인 질고까지도 그리고 우리들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모든 것들은 다 원죄와 아담의 타락의 결과이며 열매이다. 문제는 그것들이 원초적이고 궁극적인 질병의 결과요, 표증이요, 증거라는 데 있다.
인간의 가장 궁극적인 곤경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결과인 무지에서 발생한 것이라면, 사람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이것에 관해서 듣는 것이며, 자신의 처지가 어떻다는 것을 알고 이것이 처리될 수 있는 오직 유일한 길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 모든 것을 아는 것은 교회와 목사의 고유한 임무라고 주장한다. 설교자(강도자)만이 이것을 할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오직 그만이 세상의 가장 큰 요구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할 수 있는 곳은 교회뿐이며, 그것을 알게 하는 사람은 오직 설교자뿐이라는 것이다. 목사는 이 특별한 기능을 봉사하기 위해서 교회에서 별도로 세움을 입었다. 그리고 이 임무는 우선권이 주어지고 강조받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진정한 필요를 깨닫고 거기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아는 순간, 이러한 것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그것을 缺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나누어 줄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게 된다.
세상에는 인류의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기관이 있다. 내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의료기관, 정부, 다른 여러 교훈들과 정치기구, 심리학, 심지어는 타종교까지를 포함해서 말씀드리는 것이다. 이상의 것들은 모두 인간의 조건을 도와주어 일시적으로 생기 있게 하고, 또한 생활의 고통과 문제를 안전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좀 더 조화 있게 삶을 영위하도록 하고, 더 큰 규모로 삶을 누리도록 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다. 그것들은 그런 일을 위해 세워졌으며 우리들은 거기에 대해 그것들은 전혀 쓸모없다고 말할 아무런 이유를 갖고 있지 않다. 우리들은 사상들을 관찰해 보아야 하며 그것들이 선을 행할 수 있고 많은 유익을 준다는 것을 긍정해야 한다. 이런 문제들은 다소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원초적인 고통을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 뿐 아니라 그것들이 그들 나름의 모든 일을 해냈을 때 또는 교회까지도 그 차원으로 내려가서 그 차원에서만 활동하여 일을 완수하였을 때라도 원초적인 고통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므로 나는 교회의 최우선적인 임무가 사람을 교육하는 것도, 사람을 육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치료하는 것도 아니며, 그렇게 한다 해도 그것이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좀 더 나아가서 사람을 교육하고 육체적, 심리적 치료가 사람을 선하게 하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구원에 수반하는 것들이다. 교회가 그의 진정한 임무를 수행할 때 알게 모르게 사람들을 교육하고 지식과 정보를 주게 되며, 사람들을 행복으로 인도하고 또한 사람들을 본래 상태보다 훨씬 선하게 만들게 된다. 그러나 내가 주장하는 요지는 그런 것들이 교회의 제1차적인 목표는 아니다. 교회의 제1차적인 목적은 이런 것 중 어느 것도 아니고 오히려 사람을 하나님과 바른 관계로 이끌어주고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것이다. 교회가 1차적인 임무를 떠나서 다른 어떤 일을 할 때 동기야 아무리 순수하고 훌륭하다 할지라도 결과는 뻔하다.
현대의 사회 상태에 대한 대부분의 책임은 여러 방면으로 생각할 때 교회가 말씀 전파의 임무를 떠난 데 있다고 본다. 교회는 복음이 없는 도덕심과 윤리를 강론하려고 애써 왔다. 즉 경건 없는 도덕을 가르쳐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었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절대로 쓸모가 없다. 그 결과 교회는 자기의 진정한 임무를 포기해 버림으로 품위를 잃어버려 끝내 방임상태에 빠질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교회가 자기의 제1차적인 임무를 수행할 때 다른 것들은 자동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봉사적인 입장에서까지라도 말씀 전파를 우선적이고 중심적인 위치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 개인적인 문제의 영역으로 넘어가자. 사람들은 설교자가 강단에 서서 그들의 설교를 전하지만 그들 앞에는 개별적인 문제들과 고통을 안고 있는 개개인들이 앉아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주장은 설교는 좀 덜하고 대인적인 일과 상담, 대화를 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고 맹렬하게 주장한다. 이 주장에 대한 나의 태도는 여전히 설교를 최우선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참된 설교는 개인적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며 그럼으로써 그만큼 설교자의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설교는 언제나 우선순위 여야 하며 어떤 것에도 자리를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만은 강력히 주장한다.
이 시대는 복음전파에 문을 활짝 열어준 바로 그 시대가 아닌가?
교회는 선교단체이다. 그리고 우리는 전교회가 복음과 복음진리, 복음의 말씀에 대한 증인의 신분이라는 이 개념을 포착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함께 모여 교회 안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어야 함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바로 그것은 그 자체 내에 하나의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결국 말씀 전파자는 스스로를 위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씀 전도자는 교회가 무엇이며 교회에 모인 이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며 왜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
여러분들은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전서에서 이 점을 아주 분명히 했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이다. 현재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그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그들 교회는 자기의 전도를 크게 도와주었다고 말한다.
데살로니가전서1:6절에서 사람들이 한 몸이 되어 있다는 바로 그 자체가 전도하는 데 일익을 담당하며 이것은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즉각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다. 이런 영향들은 순수한 지적인 논증보다 영적 의미에서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교회에 들어와 사람들이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을 대할 때 그 사람은 정말 저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어떤 생각을 얻게 되고 저네들이야말로 수십 세기를 걸쳐 모든 세대와 모든 시대에 알려졌던 것의 현대적 모본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는다. 이 생각은 그 자체만으로 그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그저 새 이론이나 새 교훈, 또는 새 사상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그는 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가진 사상에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제 3 장 설교 내용과 전달행위
우리는 설교하는 일이 교회와 목회자의 최상의 임무라고 하는 전제를 확증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에 대한 증거를 성경 안에서와 더 나아가 기독교회 역사로부터 도출해 내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가 다루는 주제의 성격으로 보아서 우리 신학이 이 점을 어떻게 고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신학적인 논증을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그 다음에 이 모든 것에 대한 몇몇의 반론을 생각해 보기 시작한 것이다. 첫째는 “시대가 변하지 않았는가?” 둘째는 “독서나 텔레비전 시청, 라디오 청취로써 그 모든 일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이제 세 번째 반론으로서 “그 모든 것이 그룹토의에 의해서 더 훌륭하게 이루어질 수는 없는가? 구태여 설교하여야만 하는가? 이 설교가 대화, 소위 의견교환 등으로 대치될 수는 없는가? 설교가 끝날 무렵 더 많은 문제를 내놓고 교회 안에서 이제까지 그 설교를 들어온 모든 사람들과 설교한 목사가 대화를 나누어서는 안 될까?” 이 주장은 그 모든 것이 역시 텔레비전의 토론을 통해서 수행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주장은 몇몇의 그리스도인과 몇몇의 비그리스도인들이 한자리에 둘러앉아 토론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훌륭한 전도방법일 뿐 아니라 성경의 메시지를 인식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며, 그 방법이 현대에 있어서는 설교하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한다.
이 주장이 다른 세기보다 현대에 굉장히 큰 지지세력과 인기를 차지하고 있음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 숙고해 보도록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에 열거할 구체적인 이유들이다.
첫째는, 내가 보기에 그 자체로 충분한 이유가 되는 것으로 하나님은 토론되거나 논박될 분이 아니라는 점, 하나님은 토론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스스로 계신 분이며 자존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신자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것은 완벽한 진리이다.
둘째는, 이런 문제를 토론하는 데서 우리는 생의 가장 심각하고 가장 중대한 문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가 다루게 될 것은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우리와 관계되는 사람들의 생활에 영향을 줄 뿐 아니라 그들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서도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셋째로, 영적으로 무식한 자연인, 즉 비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러한 토론이나 논쟁, 또는 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이런 문제를 토론해 나갈 수 없다고 단언한다. 자연인이 영적인 일에 소경으로 어두운 상태에 있다는 이유이다. 사도 바울은 고전2:14에서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 했다. 그런 일들은 영적 진리의 영역에 속해 있으며, 영적 용어로 진술되었고 이미 영적이 된 마음으로라야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넷째는, 자연인이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겸손해지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비그리스도인과 무엇을 할 수 있기 전에 꼭 필요한 것이다.
진리는 성령만이 하실 수 있는 조명을 통해 성경 안에서 우리에게 보여진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문제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거나 토론, 논쟁하고자 하는 모든 견해는 바로 그 복음 자체의 성격과 본질에 반대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설교를 대신하려는 이 현대의 모든 대체물을 거절하며 오직 한 길만이 있을 뿐이라고 역설한다. 그 한 길은 사도 바울 자신이 아덴에서 채용한 길이다. 나는 이미 그 말씀을 인용한 적이 있다.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이 선언은 중요하다. 이것이 맨 처음으로 와야 한다. 이 선언이 행해지지 않고 또한 사람들이 일정한 정도의 정보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서는 유익한 대화란 있을 수 없다. 이 “선언”이야말로 우리 교회와 설교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며 설교자가 해야 하는 가장 우선하는 일이다.
그러면 설교란 무엇인가?
내가 설교라고 할 때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강단에 서서 말을 하는 사람과 청중석에 앉아서 그것을 듣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합시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
이것이 무엇인가?
왜 그 사람이 설교단에 서는가?
그 설교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이 사람은 그것을 통해 무엇을 하려고 의도하고 있는가?
그가 하려고 애쓰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내게 있어서 커다란 것이라고 본다. 우리는 기교와 방법 그리고 “의사전달의 문제”로 성급하게 나아가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모든 잡다한 것과 변론에 빠지는 것은 이들 원초적인 문제들을 생각지 않거나·그 문제들을 접해 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설교단에서 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는 것은 큰 문제이며 모든 것을 통괄하는 문제이다.
어떠한 정의이든지 그것이 진정한 설교의 정의가 되려면 반드시 설교단에 선 사람은 거기서 하나님의 메시지, 곧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 만일 바울의 말을 원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사신”이다. 바로 그 점이 그 사람의 신분이 무엇인가에 대한 저의이다. 그는 보냄을 받았으며 임명받은 사람이요, 그가 강단에 서 있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대변자로서 거기 참석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기 위함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거기 서 있는 것은 그들에게 그저 담화하거나 그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떤 종류의 결과를 산출하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함이다. 그저 그들의 한 부분, 즉 감정이나 마음이나 의지 중 한 부분에 감화를 끼치거나 어떤 하나의 행동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인을 다루는 것이다. 그의 설교는 바로 생명의 중심인 전인에 영향을 주는 데 목적이 있다.
설교에는 언제나 설교자와 청중 사이에서 생사문제와 삶의 문제에 대한 해결이 이루어져야 한다.
설교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무엇이다. 전인은 양측에다 관계된다. 만일 우리가 이 점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의 설교는 실패할 것이다.
설교란 전인을 다루는 것이고, 듣는 이가 감복하게 되어 이 설교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다루시고 계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다. 무엇인가가 그 설교를 듣는 자 안에서 일어나고 무엇인가가 체험되며 그렇게 되어 설교가 전 인생에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설교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는 이상과 같다.
그러나 이 설교자는 강단에서 정확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바로 그것이 우리가 바라는 표적이요 목표이다. 정확히 말해서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여기서 나는 설교의 두 가지 요소를 구분 지어야 한다.
첫째, 설교의 내용, 혹은 메시지 - 즉 말하고 있는 내용이다.
둘째, 설교행위이다. 즉 “전달, 혹은 흔히 말하는 “전파”라고 하겠다. 이 “전파”란 말이 메시지의 전달행위하고 표현할 수 있는 두 번째 측면에만 한정되어 쓰여지지 않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나는 메시지와, 메시지의 분배 혹은 메시지의 전달 사이에 진정한 구분을 강조하고 싶다.
로이드 존스는 한번 더 이 제목을 두 항목으로 나눈다. 설교 자체로서 맨 먼저 내용, 즉 메시지를 생각한다. 둘째, 그 내용이나 메시지에 주어진 형태이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구별이다. 설교내용, 곧 메시지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3:1-6). 이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말씀이 그 점을 극적으로 지적해 준다. 설교내용은 신약에서 “말씀”이라 칭한 것이다. “말씀을 강론하다”, “복음을 전하다” 또 그것을 해석하면 “성경의 메시지”를 의미한다.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받은 바요 가지고 있는 바다 -“내게 있는 것.” 나는 이것을 받았고 그것은 내게 맡긴 바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의 사상과 생각을 나타내지 않으며, 나는 사람들에게 내가 생각하고 추측하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받은 바를 전해준다. 나는 매개체요 도구요 대리자이다. 중요한 메시지는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두 가지 요소 항목으로 나뉜다.
첫째, 구원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케리그마로서 전도설교를 결정하는 것이다.
둘째, 교훈적인 면으로 이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정립시켜 주는 것인 디다케, 즉 성도의 덕성함양이다. 이것은 우리가 설교를 준비할 때 하나의 중요한 지배요인이 되어야 한다.
첫째, 구원의 메시지, 복음전도 설교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데살로니가전서의 단 두 절 말씀 속에서 이에 대한 완변한 요약이 있다.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살전1:9-10).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20:17-21)이다.
설교형식은 맨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선언한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이름 있는 전도설교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하여 그의 사심과 능력과 영원에 대한 선언으로 이어져 나간다. 여러분은 신약 어디에서나 그 점을 발견하실 것이다. 그것은 정확히 바울이 아덴에서 행한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알리리라.”누구를? “하나님을”우상과 대조하여 하나님에 대해 설파했고 우상의 허무함과 아무것도 아님을 파헤쳤다.
그 다음 율법을 말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은 하나님의 율법을 얘기하게끔 한다. 세상과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전체 관계, 이 모든 것은 사람들에게 죄를 깨닫게 하여 그들을 회개하도록 인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그 다음에 오직 유일하신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인도해 주어야 한다. 바로 그것이 구원의 메시지이다. 그것이 소위 전도설교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요한복음 3:16에 나와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나 또 다른 면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견고히 세워주는 교훈”이다. 이것을 두 항목으로 나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더욱 체험적인 면에 치중한 것과 순전히 교화적인 설교를 뜻하는 것이다.
모든 설교는 사실상 최소한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눠질 수 있다. 원초적으로 전도적인 설교는 일주일에 최소한 한 번은 있어야 한다. 주로 체험적인 것으로서 교훈을 주는 설교는 주로 주일 아침에 전했다. 그리고 보다 순수한 교훈적인 설교가 있는데, 나 개인적으로 볼 때 주간의 어느한 날 밤을 택하여 그 설교를 했다. 이 구분들이 너무 엄격하게 그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메시지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보편적인 안내역으로서는 그 세 가지 구분이 좋다고 생각한다. 불신자들에겐 전도설교를, 신자에 대해 체험적인 면을 심어줄 때는 그 다음을, 직접적으로 교화적이고 교훈적인 식으로는 세 번째 경우를 적용하면 좋으리라 본다.
제 4 장 설교의 형식
세 가지 유형들 간의 상호 관계성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얻는 길은 신학과 설교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로이드 존서는 설교란 언제나 신학적이어야 하며 신학적인 토대를 보편적인 명제로 함을 전재해 둔다. 어떤 본문을 따로 택하여 설교할 때라든지 본문들을 서로 분리한 채로 다룰 때는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물론 그 이유는 자신도 모르게 모순된 일을 범하기 쉽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 본문을 두고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다른 본문과 전체적인 진리에 관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또 다른 본문을 취급하게 될 때 첫 번째 설교에서 말한 바와 모순되는 것을 말할 수가 있다. 그것을 피하고 이 세 가지 유형의 설교 사이에 합당한 관계를 유지하는 길은 언제나 설교가 신학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신학적이어야 하는 따위의 설교는 없다.
때로는 아니 오늘날 가장 흔하게 비신학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설교유형은 전도설교이다. 나는 전도설교야말로 여러 방면에서 볼 때 덜 신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어느 것보다 더욱더 신학적이어야 함을 역설할 용의가 있다.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왜 여러분은 그들에게 복음을 믿으라고 부르짖는가? 인간의 교리, 타락과, 죄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교리를 다루지 않고서 회개를 정당하게 다룰 수가 없다. 그 다음 여러분이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자신들을 그에게 드리라고 명할 때 그리스도가 누구인줄도 모르고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무슨 근거로 그들이 그에게 올 것을 초청하는가? 말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모두 신학적이라는 것, 신학적이지 않은 복음전도는 결코 진정한 의미에 있어서 복음전도가 아니다. 그러한 신학이 없는 전도가 결심을 요청할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종교를 가지라고 요망할 수도 있다.
또한 하나의 보다 나은 생활을 할 것과 어떤 심리적인 유익을 끼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떻게 정의한다 할지라도 기독교적인 전도로 간주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러한 커다란 신학적 원리를 떠나서 전도할 참된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유형의 설교는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하며 전도설교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동시에 설교가 신학이나 신학의 어떤 국면을 강의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함은 매우 중대한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설교란 반드시 신학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 그것은 신학강의가 아니라고 말한다면 설교와 신학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로이드 존스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설교자란 전체적인 성경 메시지를 포착하고 있어야 하는데 그 메시지는 물론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설교자는 조직신학의 기초가 되는 성경신학에 매우 정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설교자에게 있어서 신학을 갖고 있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으며 또한 조직 신학을 알고 그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성경에서 추려낸 진리의 뼈대인 이 조직신학은 설교자의 설교배경을 이루고 설교의 영향을 조정하는 것으로 나타나야 한다. 어느 특정한 성경본문이나 말씀에서 나오는 각 메시지는 반드시 언제나 이 진리의 총체의 일부분이거나 한 국면이어야 한다. 설교란 결코 따로 떨어진 것이나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하는 어느 특정 본문 안에 있는 교리는 보다 큰 전체 진리나 전체 신앙의 일부분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성경으로 성경을 비추어 본다”는 말의 의미이다. 우리는 어느 한 본문을 따로 고립시켜 다루어서는 안 된다. 한 편의 설교를 위한 우리의 모든 준비는 바로 이 조직신학을 배경으로 통제를 받아야 한다.
나의 취지는 우리의 제1차적인 요구란 이 전체 메시지, 곧 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뜻”을 전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것은 특정한 메시지나 부분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설교해야지 복음에 관하여 설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임무란 복음을 학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설교자는 복음을 분석할 수 있고 복음의 부분들을 보여줄 수 있으며 그것이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를 보여줄 수 있다.
설교에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원리를 말하는 면과 그 원리를 상황에 적용시켜 주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항상 전체를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한다. 비록 그가 그 순간에 어떤 개별적인 문제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할지라도 그러하다.
이제 우리는 설교의 형식을 알아보자. 내 견해로는 이 문제가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문제 중에서 최고의 난제가 아닌가 한다. 이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이면서 동시에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설교란 수필이 아니다. 수필은 읽도록 쓰여진 것이고 설교는 맨 먼저 말로 전해질 것과 들을 것을 의도한 것이다. 수필에는 문학적인 격조와 독특한 형식이 있긴 하지만 설교에 있는 제일 되는 절실한 요구가 하나도 없다.
수필은 반복은 금물이다. 그러나 설교는 반복하는 것이 좋다. 반복은 가르침과 설교의 진수가 된다. 수필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사념들을 다루어야 하며 대체로 그것들을 밝게 취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은 우아하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수필은 관심과 흥미와 읽은 즐거움을 가지게 하는 문학의 한 장르이다. 그러나 설교는 그런 것이 아니다.
둘째로, 설교하는 것이 강의하는 것과 혼동되지 않아야 한다. 강의는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시작하여 이 특정 주제에 관련된 지식과 정보를 주게 된다. 설교의 호소는 거의 전부 마음을 향한 것이다. 강의의 목적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실들을 진술하는 것이다. 바로 그 점이 강의의 제일 되는 목적이요 기능이다.
설교는 교리와 테마를 내포하고 있는 성경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바로 그 교리는 본문의 특정한 배경 가운데서 다루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설교는 항상 해석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해 둔다. 설교란 주석을 해나가는 것이 아니요 단순히 한 절이나 문구나 문단의 의미를 파헤치는 것이 아니다. 나의 근본적인 취지는 설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란 규정된 형식을 가지는데 이 형식이 강해로 하여금 설교가 되게 한다.
설교는 강해를 기초하고 있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반드시 강해적이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과 그 메시지를 나타내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언제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성경에서 나오는 것이며 그것이 언제나 그렇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바로 그 성경이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의 원본이요 메시지를 받은 원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강해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설교자는 땀과 노동을 필요로 한다. 설교는 준비해야 한다. 그가 어떻게 설교를 행하든 그 설교는 완전한 것이 되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설교자가 맨 처음 생각해야 할 점이다. 이 문제는 오직 시작에 불과하며 반밖에는 되지 않는다.
제 5 장 설교행위
이제 우리는 “설교내용의 전달”, 혹은 “설교행위”, 또는 설교내용과 구별되어 설교 그 자체로 불리워지는 것으로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겠다. 이 문제가 본서의 두 번째로 큰 국면이다. 먼저 설교한다는 것이 정말 무엇인지에 대한 일반적인 윤곽을 말씀드리고, 다음에 좀더 세분화된 고찰로 나아가자. 구체적인 것을 논의하기 전에 명확한 개관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이제 전달하는 일, 때로는 설교로 불리워지는 일을 규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확실히 그것은 법칙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이 설교를 하나의 훈련이나 일종의 규제나 금지하는 일로 보아 버린다. 그렇지 않다. 난제는 그것에 대한 정의를 실제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설교행위란 들음으로써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것에 대해 어떤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이상 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참된 설교를 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점들이 있다.
첫째, 설교자의 전인적 품격이 반드시 수반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점은 필립 브룩스의 유명한 정의 가운데서 나타난 것이다. “설교는 설교자의 품격을 통해서 존재되는 진리이다.” 그 정의는 옳다. 설교자의 모든 기능이 설교하는 일에 관계되며 전인이 관계된다는 것이다. 나는 신체까지도 설교에 수반된다고 생각한다. 전인격이 동원되어야 한다. 제스처, 행동, 태도, 등등.
둘째, 권위로서 청중을 압도하고 진행해 나가는 지각력이다.
설교자는 결코 변명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마치 회중들의 양해를 얻어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결코 안 된다. 어떤 추측이나 생각을 실험삼아 말하는 것이 되어도 안 된다. 그것은 정말로 설교자가 취할 자세가 아니다. 설교자는 강단에서 확실한 일을 선언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사명을 띠고 권위로 서 있는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보냄을 받은 사자로서 회중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분명히 이것은 자기 확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설교자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이다.
셋째, 자연스러움의 요소이다.
로이드 존스는 이 점에 대해 매우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설교내용이 앞에서 말한 방식대로 주의 깊게 준비되었다 할지라도 설교자는 반드시 설교를 수행할 때 설교를 전하는 데 있어서 자유스러워야 한다. 자기가 준비한 것에 너무 매이지 않아야 한다. 이 점은 죽고 사는 문제처럼 중대한 문제이다. 이 점은 설교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진수가 되는 정곡이다. 나는 그저 설교단에 원고를 가지고 올라가는 문제만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원고를 가지고 있지 않고도 얽매일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설교자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유로움은 순간적인 영감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자유이다. 설교하는 일이란 성령의 감화와 능력을 뒷받침한 행위이고 설교준비란 것이 설교내용의 준비를 끝마쳤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 점을 강조해야 한다. 주목할 만한 일들 중의 하나는 설교자가 한 말 중에서 가장 훌륭한 말이 미리 생각하지도 않고 설교준비를 할 때까지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인데 실제로 설교를 하는 동안에 얻은 말이라는 것을 흔히 발견하게 된다.
넷째, 설교자가 말하는 동안 어느 의미에서는 회중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끌어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회중가운데는 영적인 사람들,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은 그 기회에 어떤 공헌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설교에는 상호교환의 요소가 있기 마련이다. 이 점은 수필과 강좌가 설교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길이다. 자기의 수필을 낭독하는 사람은 자기의 청중들로부터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그 사람 앞에 있는 것은 쓰여진 것이 전부이다. 거기에는 새롭거나 창조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어떤 주고받는 일도 없다. 그러나 설교자가 - 비록 아주 조심스럽게 준비를 하였다 할지라도 - 이 영적 자유의 요소 때문에 아직 회중으로부터 어떤 것을 받을 수 있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상호작용과 행동, 반응이 있게 되고, 종종 이것은 아주 중대한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이 자유로움의 요소는 아주 중요하다. 설교는 언제나 성령 - 그의 능력과 지배 - 아래에서 행해져야 한다. 또한 설교자는 무엇이 일어날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항상 자유로우시기를 바란다. 여러분이 설교를 준비할 때 도우셨던 성령께서 설교를 행하는 동안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도우시며 설교를 준비하는 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열어 보여 주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진지함”의 요소이다.
설교자는 반드시 진지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결코 설교한다는 것이 가볍거나 피상적인 또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란 항상 그가 강단에 나타나는 순간에도 거기서 행하는 일에 대한 심각함의 인상을 창조하고 풍겨야 한다. 설교자는 반듯이 생기에 넘쳐 있어야 한다. 박력이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결코 흐리멍텅하거나 지루해서는 안 된다.
여섯째, 열심, 열정감이다.
열심이라 말할 때 그 의미는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에 자기 스스로 붙잡힘을 당했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자기가 그것에 붙잡히지 못하였으면 아무도 그 진리에 붙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점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설교자는 반드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붙잡힘을 당하고 끌려있다는 사실로 사람들을 감동시켜야 한다. 그는 그 문제로 충만해져서 그것을 나눠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야 한다. 그는 스스로 그것으로 너무 감동되고 감격한 나머지 이것을 다른 사람들이 나눠갖기를 갈망해야 한다. 설교자는 회중들을 걱정하는 사람이다. 그들을 돕는 것을 간절히 소원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힘과 열심과 뚜렷한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을 위해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한다면 진리에서 이탈된 것처럼 보이면서 그 자체로는 아주 훌륭하며 진실하고 탁월할지도 모를 몇몇 일을 말하는 것만으로 족하는 설교자는 결단코 설교자가 아니다.
설교자는 결코 냉담해서는 안 된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거의 옳고 정말 거의 완벽하다. 그러나 그것이 인상적이지 않고 살아있지 못하며 차갑고 감동이 없는 것은 자기 스스로 감동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교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만일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는 틀림없이 그것으로 감동을 받기 마련이다. 그렇게 안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뜨거움을 유발한다. 사도 바울은 “눈물로써”말씀을 전파했노라고 말합니다.
끝으로 로이드 존스는 말씀의 능력에 대해 언급한다.
능력이 없으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다. 결국 참된 설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신다. 설교는 사람이 지껄여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이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다. 그는 성령의 세력 아래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하였다”고 한 말이 그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1:5에도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라고 되어 있다. 참된 설교에는 바로 그 진수가 되는 요소가 있다. 그것을 압축한다면 참된 설교는 이 두 요소, 즉 설교내용과 설교를 전하는 행위가 많은 비율로 결합되어 이루어진다. 이 행위는 설교내용에 첨가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른 설교이다. 두 가지 다 강조되어야 한다.
설교의 주요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그의 존전에 있다는 생각을 주는 것이다.
손웰 자신이 설교에 대해 무어라고 말했는지 설교자인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떻게 말했는지 들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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