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성령세례와 성령충만
성령 충만을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서도 그것이 성령 충만인지 성령 세례인지를 구분하지 못하고 계속 그것을 사모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오순절 계통의 학자들은 중생한 이후에 성령세례를 다시 받아야 하는 것으로 주장하는데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기 위해서는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필요하다.
1.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에 관한 견해
개핀(R.B.Gaffin)의 견해
성령 충만이 회심할 때의 성령세례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주는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며 개인에 따라 다르게 계속 역사한다고 말함으로서 성령 충만이 성령세례와 다르다 하였고 성령세례와 중생을 동일하게 보았다.
로이드 죤스의 견해
성령의 세례를 받을 때 성령으로 충만해진다. 그러나 성령에 의하여 세례를 받지 않고도 성령으로 충만해 질수 있다는 것을 말하면서 에베소서5;18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사도행전2장에서 성령의 세례가 성령의 충만함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라고 말하면서 성령세례는 성령님의 뜻대로 주어지는 수동적인 것이고 사람의 선택권이 없으며 성령충만은 전적으로 주님의 역사에 속한 것이나 성령충만은 받을 것인지 아닌지 술에 취할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사람이다 라고 말하였다. 행2장에서 성령의 세례를 어떻게 받았는가를 보여주는 것인데도 실제로는 그들이 성령에 충만하여(be filled)라고 되어있다. 또 에베소서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라고 말하면서 성령의 충만을 받지 않고는 성령의 세례를 받지 못하며 그러나 성령세례는 받지 않고도 성령충만은 받을 수는 있다 라고 하여 성령충만이 성령세례보다 먼저 일어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세례는 단회적이며 성령의 충만은 끊겨졌다가 다시 계속된다. 로이드 죤스도 성령의 세례와 성령의 충만은 다르다 라고 견해를 밝혔다.
로이드 죤스는 성령세례와 중생과의 관계에서도 다른 견해를 보였다. 성령 세례를 무의식적으로 중생할 때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중생 할 때에 성령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데 이 주장은 롬8장16절을 합당하게 설명 할 수 없다 라고 견해를 밝히고 있다. 양자의 영 즉 하나님의 자식으로서의 느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어 그 확신 속에서 부르짖는 것이 중생할 때에 일어난다고 하는 견해는 공정하지 못하다. 또한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말씀에 대해서도 무리를 가하는 것이다. 사도들이 오순절 날이 이르기까지 중생치 않았다고 말하는 결론이 나온다. 요한복음은 그들이 이미 중생했음을 매우 명백하게 진술하고 있다.(요15;2,17;9). 요한복음 20장에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을 찾아와 성령을 받으라하시며 숨을 내쉬셨다. 그때 믿는 마음에 인을 치신 것이다. 분명히 그들은 신자들이었고 오순절 날이 이르기 전에 이미 중생한 제자들이었다. 사도행전1장8절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때는 오순절 날에 이르러서였다. 성령세례를 또한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상은 오순절 날에 사도들에게 일어났던 일이 비체험적인 것임을 시사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만일 모든 그리스도인이 믿어 중생하는 순간에 성령의 세례와 인침을 받았다고 말한다면 사도들은 오순절 날이 이르기 까지 중생치 않았었다고 말해야한다고 주장함으로서 성령세례와 중생을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두 분의 견해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다르다는 것이고 성령세례와 중생은 동일하다는 것과 동일하지 않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2.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의 차이점
박형룡 박사의 견해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고(요7:37-39) 약속대로 성령을 주셨다(요20:22). 그러나 성령을 받은 것이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은 오순절 성령강림 때였다. 그때에 제자들은 성령의 세례와 충만과 은사를 체험하였다. 여기서 그들이 성령세례를 받을 때 성령 충만함이 임하였으나 성령세례가 시간적으로 앞서고 있음을 주지해야 한다고 함으로서 성령세례가 먼저 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성령 충만은 성령세례 후에 오는 것으로서 가변적이기도 하다. 고린도전서12:13에서 사도바울은 성도가 예수의 몸과 연합할 때 성령의 세례를 통하여 연합한다고 해석하였다. 그때가 바로 구원의 단회적인 경험이며 예수를 처음 믿을 때 발생하는 경험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성령세례가 최초의 경험이라고 한다면 성령 충만은 더욱 발전된 단계로 이해해야하므로 성령 충만이 성령세례보다 이후의 경험이라고 해야 한다.
로이드죤스 박사의 견해
오순절 날에 사도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일어난 사건, 사마리아에 있는 신자들에게, 고넬료와 그 가족들에게, 바울이 안수한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일어난 사건이 성령의 세례에 대한 두 국면을 보여준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특별한 확신과 하나님 자녀인 것에 대한 특별한 확신이다. 오순절이전에 사도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령세례를 받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일 수도 있다. 성령세례는 복음의 증인 되게 하기위해 주어지는 큰 확신이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중 하나는 과거 수세기에 걸친 성도들의 위대한 영적 체험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하면서 믿음으로 그렇게 많은 것을 취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조지 휫필드의 일기들을 읽어 보자. 그와 우리는 너무나 대조적이고 피상적이지 안는가. 믿음으로 우리도 그것을 취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충만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이미 성령의 인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체험과 성령의 인치심은 하나의 요지부동한 체험이다. 주로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확실성 문제와 관련된다. 성령의 인침을 알지 못하고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수 없다 라고 설명하면서 성령의 목적을 설명했다.
성령세례의 목적은 권능과 담대함을 가지고 증거 토록 하는데 있다. 오순절이후에 사도들에게 그처럼 분명하게 나타났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증인이 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게 되고 권능과 능력이 따르게 되었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행4;20)고 하면서 사도들은 매우 담대하고 능력 있게 그 일을 했다.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이 감동을 받았고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제자들도 자기들의 위치를 확신하기까지 증거 할 수 없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어떠한 사람이든지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받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께서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한다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지게 된다라고 성령세례를 설명하고 있다.
복음주의자 로이드 죤스는 성령충만을 성령으로 가득 찬 상태, 성령의 기운으로 사는 것이며, 성령께서 우리를 통제하심으로, 성령을 근심케 하지 않는 것으로, 성령이 내재함을 인식하는 것으로, 갈망하고 교제하고 교통하기를 간절히 바람으로, 성령의 지시에 예민함으로, 성령의 감동과 성경에 귀를 기울이므로, 영광스럽고 반가운 손님으로 거하시기를 계속 원하므로 충만해질 수 있는 것이다 라고 성령충만을 설명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D.M.Lloyd Johns)박사는 성령세례는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해준다고 말한다(요일5:13). 또한 성령세례는 은사를 동반하기도 한다. 반면에 성령 충만은 다양한 열매를 맺게 해준다. 그 열매들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전3:1-4). 또한 성도들간의 지적이면서도 절제된 건전한 관계를 유지하게 해주며, 성령의 내주를 인식하게 한다(고전6:19).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의 결과는 바로 두 단어의 의미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성령세례와 성령 충만을 동일한 경험으로 인정하려는 시도가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이 그들의 삶 속에서 맺어 가고 있는 열매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성령세례를 받을 때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지만, 성령 충만함은 영속적이 아닌 가변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세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세례는 중생한 모든 성도에게 주어지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견해가 많으며, 충만함은 그것을 갈급하게 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개별성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하면서 성령의 세례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첫째로 성령세례는 분명히 체험적이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시작 시 세례 받으셨고, 오순절 날에 사도들이 세례를 받았다. 이는 제자들에게 자기들의 구원과 소명에 관한 절대적 확실성과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함과 주님의 증인으로 나갈 수 있도록 능력으로 충만케 하기 위함이었다. 둘째로 그것은 큰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체험이다.( 벧전1;8). 셋째 성령의 증거는 은사나 현상을 동반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 도 있다.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 급하고 강한 바람, 눈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 현상들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넷째 매우 중요한 요점은 이 체험의 정도에 관계된다.
체험을 평준화 시키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한번 받으면 언제나 그것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는데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다. 로이드죤스 박사는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을 다르다고 설명하면서 성령세례와 중생과도 다르다고 깊이있게 길게 설명하고 있다.
3. 오순절의 성령 강림과 교회시작의 견해 차이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중생하므로(요 15:3, 17:9, 25, 마 16:16 등등) 성령이 저들과 함께 거하고 계셨는데(요 14:27), 오순절에 특별하게 강림하신 목적이 무엇인가?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움" 받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을 누가 복음 24:49이 말해준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하시니라" -권능을 받아 온 세상에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사도행전 1:8이 말해 준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래서 로이드 죤스 박사는 그의 책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의 목적은 교회를 형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형성된 교회에 능력을 부여하기 위해서 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성령 강림의 외적 표시는 급하고 강한 바람이었으며 이는 놀라운 힘을 상징하는 것이다.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였다.
(불의 혀는 스웨트(H.B.Swete)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이 "불의 혀"는 구약의 여러 사건들, 예를 들면 불타는 가시덤불, 갈멜 산상의 불타던 제물, 호렙 산 동굴 속에 숨어 있던 엘리야에게 임한 계시, 그발 강가의 에스겔 등을 생각나게 한다). 불의 혀가 분배된 것으로 보아 즉 성령의 불이 거기 모인 각 개인 위에 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의 견해를 빌려 신약 교회가 언제 탄생했는가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소개한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한 금세기의 잘못된 견해가 성경 해석에 얼마나 지대한 혼란을 야기시켰으며 교회 부흥을 저해하고 있는가를 우리 모두가 바로 알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오순절에 신약교회가 탄생했다는 견해가 금세기에 있어 가장 일반적인 가르침이다. 그 내용은 사도행전 2장에 주로 근거하여 신약교회, 곧 그리스도의 교회가 오순절 날 성령 강림으로 인해 탄생되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가르침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오순절 날 불과 같은 강력한 성령 세례에 의해서 분리되어 있던 사람들이 한 결합체가 되었고 각자가 그리스도에게 결합되어 공동 생활을 나눔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실 수 있는 한 조직체가 되었다.
오순절 날 성령은 신자들에게 개인적으로 거하기 위하여 왔다. 성령이 거하시는 각 개인은 자연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있어서 그들을 연합하는 협동사역의 결과를 낳았다. 그 날 이후로 죄인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마다 그는 이 세례에 동참하여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한 몸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들이 금세기의 전형적인 주장인데 그 주장을 요약하면 그리스도 교회가 오순절 날에 시작되었으며 그 이전에는 교회가 없었고 성령세례(성령강림)의 모든 목적은 교회를 한 기관(형태)으로 형성하여 기능을 수행케 하며 우리는 거듭난 순간에 성령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견해를 가진 사람은 우리가 이 성령 세례를 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편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중생하여 믿게 되었을 때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다만 순종할 것이며 성령 세례를 간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바로 금세기에 있어서 우리가 종교적 부흥에 대하여 거의 들을 수 없는 이유이다....이것은 매우 치명적인 문제이다."라고 말할 수 있고 만일 이러한 현대적 가르침이 옳다면 주님께서 제자들 사이에 나타났던 부활의 날 저녁에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과 함께 어떤 일이 발생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로이드 존스 목사는 요한복음 20:19-23에 근거하여 부활의 날 저녁에 신약교회가 탄생한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성령을 받으라"는 명령이 부정과거명령형으로 되어 있어 결코 미래의 뜻이 없으므로 그 명령이 떨어졌을 때 제자들은 실제로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임무와 함께 선포의 권능이 즉시 주어지고 있는 것을 보아 그렇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이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이제 형성된 교회에 임무를 주시고 사역을 위하여 그들을 내보시며 그들에게 선포할 권능을 주시고 있다. 마 28:18-20에 제자들에 주신 주님의 지상 명령이 나온다. 오순절 전에 이런 분부를 주신 것은 이미 교회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오순절 날이 이르기 전에 120명의 신도들은 행 1:14과 같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고", 행 2:1처럼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고 표현한다. 그들은 분명히 한 마음, 한 성령으로 동화된 교회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반대 견해는 다음과 같다. 오순절은 추수의 시작을 기념하는 절기이니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바로 새로운 신약 교회가 이 날에 시작된 것을 보여 준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실제로 오순절은 추수의 시작을 기념하는 절기가 아니고 추수를 끝내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하는 추수 절기인 것이다. 추수의 시작을 기념하는 것은 단을 흔들 때에 50일 전에 시작되었다. 오순절 전에 혹은 부활의 날 저녁에 교회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는 요한복음 7:37-39에 근거해서 주장된다.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더라)" 그러나 이 견해는 사실을 바로 이해하지 못한 중대한 과오이다. 주님의 영광 받으심은 결코 그의 승천에만 한정시킬 수 없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영광을 받으셨고 (요 12:23), 또 그의 부활하심으로도 그러했고 승천하심으로도 역시 그러했다고 보아야 한다.
여러가지 견해를 종합해 보고 오순절 성령 강림은 교회를 구성하기 위해서냐? 아니면 이미 구성된 교회에 능력을 부여하기 위해서냐? 어떤 입장을 취함이 성경적인지 독자 여러분이 결론을 내리기 바란다.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전자의 입장을 취할 때에는 성령 세례를 중생으로 보아 우리 편에서 성령세례를 받기를 기도할 필요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고 반면 후자의 입장을 취할 때에는 성령 세례는 이미 중생하여 성령이 거하는 신자들에게 또는 교회에 능력을 부어 주기 위해 성령의 충만이 더욱 임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 능력을 힘입기 위해 우리는 간절히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4. 중생과 성령 세례를 동일시하는 견해
중생하여 믿게 될 때 물세례를 주는데 이것은 성령의 역사로 중생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니, 중생을 '성령 세례'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이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진다'고 보면 옳은 표현이지만 중생을 '성령 세례'로 표현한 분명한 성경적 근거는 없다.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 10장과 14장을 보면 효력있는 부르심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되어진다는 것과 믿음의 은사가 피택자들의 "심령안 에서 역사하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라고만 되어 있다.
중생을 성령세례로 보는 주요 근거는 고전 12:13의 말씀이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고전 12장은 은사 취급장이요, 은사 취급시에 한 말임을 알 수 있다. 고린도 교회 신자들은 이미 성령 세례(성령의 능력 세례)를 받은 사람들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보다 올바른 해석은 '우리는 모두 다 이미 성령의 세례를 받아 교회 지체의 일원으로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는데 나는 아볼로파니 나는 바울파니 하고 싸우는 것이 옳은 일인가?' 하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5. 성령세례와 중생이 다르다는 견해
만일 중생과 성령 세례를 동일시한다면 오순절에 와서야 성령의 세례를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중생하지 못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오순절날 성령의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제자들이 중생하였음을 명시한다. 요 15:3/ 요 17:9/ 요 17:25/ 요 20:22/ 마 16:16/ 요 14:16-17.
그러나 저희가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은 분명히 오순절 날에 이르러서였다. 다음 구절들이 이 사실을 명시한다. 행 1:4-5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행 2:1-4 이 두 구절을 비교해 볼 때 오순절 날에 성령이 임한 사건은 분명히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는 예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날 확실히 "성령의 세례"를 받고 그 결과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밖에 볼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오순절 날에 이미 중생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 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중생과 성령 세례를 동일하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지만(행 10:43-37) 양자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명백한 교훈이다. 중생과 성령 세례가 구별됨은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에서도 분명히 입증된다. 빌립의 전도로 이미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마리아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와 요한의 기도와 안수로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는 성경말씀을 우리는 결코 예외적인 구절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사도행전 19:1-7 에베소 교회는 아볼로의 사역으로 설립되었다. 그 교세는 12명쯤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이 제일 먼저 던진 질문이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한 것이다.
만일 그들이 믿을 때에(혹은 믿은 이후에)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면 무엇 때문에 바울이 구태여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고 쓸데없는 질문을 했겠는가? 성령의 사역으로 이루어지는 중생이 비체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지만 성령의 세례는 분명히 체험적으로 알 수 있게 임하는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중생과 성령 세례는 목적에서도 구별된다. 중생(요 3:3-8)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의 영혼 속에 심도록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중생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이루어진다. 성령 세례는 중생과 동시에 발생할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시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며 "성령의 세례로써 능력이 전달되고 그 세례를 받은 사람은 봉사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입게 되었던 것이다.(눅 24:49/ 행 4:31-33/ 행 5:32)
개혁 신학자들 상당수가 중생과 성령 세례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예) Abraham Kuyper, J.Elder Cumming, Andrew Murray, R.A. Torrey, D.M. Loyd-Jones, James A. Stewart, H.Bavin
중생(요 3;3,5)은 새 생명의 원리를 인간의 영혼 속에 심고 영혼의 주도적 성향을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령의 기본세례(고전 12:3,13)는 거듭난 영혼을 주님의 몸된 교회에 연합시켜 (고전 12:13) 예수님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주'시라고 부르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런 의미에서 중생과 성령의 기본 세례는 동일한 사건을 각각 다른 차원에서 보는 것이다.
전통적 칼빈주의에서 중생한 자는 성령의 세례를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성령의 기본세례를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성령의 생활충만(엡5:18)은 중생되고 성령의 기본세례를 받은 자가 "성령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의 인도와 주장을 지속적으로 온전히 받는 것" 이다. 성령의 능력세례(눅 24:49, 행 1:5,8, 2:1-4)는 신자들이 성령의 생활 충만한 가운데서 살 때 그들에게 특별한 사역을 수행시키기 위하여 능력을 부어주시는 성령의 사역이다. 박영선 목사는 "성령이 주시는 세례로서의 성령 세례"(중생)와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로서의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중생과 성령 세례를 구분하고 있다.-H.Bavink 개혁신학자인 그도 구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6. 오순절 사건의 단회성에 대한 견해차이
단회성 주장의 내용
단회성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중생을 곧 성령 세례로 보는 신학 쳬계에 서 있기 때문에, 오순절 사건을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보아 세기적인 사건이요, 유일한 사건으로 반복될 수 없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가이사랴, 사마리아, 에베소 등지에서 성령이 임하신 사건들은 모두 오순절의 성령 세례의 범위의 확장이요, 성령의 통치의 확장으로, 혹은 독특한 반복 불가한 사건 복합체의 일부라고 보는 입장을 취한다.
존 스토트 박사의 견해가 그러하고 박형룡, 박윤선 박사 등이 그러한 입장을 취하며 이 견해가 한국 보수 교단 교회의 성령론이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성령의 편재하심과 무한하심에 강조점을 두는 학자들과 실제로 목회 현장에서 일하는 목회자들에게는 이 견해가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오순절 사건의 단회성을 예화를 들어 알기 쉽게 설명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화란의 신학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이다. 그의 설명은 이러하다. 그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수도시설의 예화를 들었다. 동일한 수원지에서 수도관을 통해 공급된 물이 옛 도시에서 새 도시로 유출되는 것과 같이 오순절에 단 한 번 교회에 임한 성령도 처음에는 교회의 이스라엘 부분에만 공급되었으나 결국 그 성령의 흐름이 교회의 다른 부분인 이방인 세계에도 쏟아 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교회 전체가 마시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을 '카이퍼의 유출설'이라고 부른다.)
카이퍼는 어제 성령의 세례를 지금도 다시 받고자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이 무모하고 정당치 않다고 말한다. 오순절의 교회와 더불어 또 성령의 강림이 우리 가운데 반복되도록 하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누구든지 그것을 위해 기도한다면 이는 오순절의 이적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가 정말 성경적인가?
단회성 주장의 문제점
총신대학교 교의학 교수인 차영배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문제점을 지적한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대표적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신학적으로 대표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 사건은 아담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의로우신 순종 뿐이다.(롬 5:12-20) 오순절 성령 강림이 아무리 구속의 사건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도들이나 그들과 함게 성령을 받은 사람들이 우리를 대표하여 받은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에 관한 성경적 증거가 전혀 없다는 것이고 대표의 원리가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오순절 이후에 나타난 사마리아(행 8장), 고넬료 가정(행 10장), 에베소(행 19장)에서 일어났던 사건들까지 포함시켜 독특하고 반복 불가한 사건복합체의 일부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개혁신학연구원 정원태 교수의 말을 빌리면 오순절 성령 강림은 역사적, 언약신학적, 교회론적, 기독론적, 성령론적 차원에서는 단회적이나 사역론적, 목적론적 차원에서는 계속적이라고 말한다. 즉 성령 강림을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단회적이기도 하고 계속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역사적 차원에서 볼 때에 구약 시대에는 교회가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하였다.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은 제단에서 성막(회막)으로 그리고 솔로몬 시대에는 성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성령님께서 주권적으로 임하여 신자의 심령을 영구적으로 성령의 전으로 삼았으니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이다.
언약신학적 차원에서 볼 때에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구속언약(창세전)->행위언약(창 2:16-17)->은혜 언약을 맺으시고 이 언약을 확인하셨다. 오순절 성령 강림은 하나님께서 이 언약의 메시야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그가 이 사역을 영광스럽게 마치고 승천하셨다는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 주신 날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사건은 단회적이다.
교회론적 차원에서 볼 때에 성전 중심의 예배드림에서 신자들의 기도 모임에 성령이 강림하신 것은 과거의 처소 중심에서 영혼 중심(고전 3:16)의 개념으로 바뀌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이다.
성령론적 차원에서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전부터 계시며 활동하셨지만 성탄절을 기점으로 그의 지상 사역을 수행하신 것 같이 성령님도 영원전부터 계시고 구약 시대 때도 활동하셨지만 오순절을 기점으로 그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우리의 보혜사가 되시고 우리의 능력의 원천이 되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생일이 반복될 수 없듯이 오순절도 반복될 수 없다. 그러나 사역론적 차원에서 볼 때에 오순절 성령 강림은 실패와 낙망 가운데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하신 사건이다.
신구약 성경에는 이런 능력적 강림이 수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들과 많은 성경 인물들이 위로부터 임하는 성령 충만을 체험하였다. 신약성경에도 이러한 성령의 능력적 강림이 예언되었으며(눅 24:49) 약속되고(행 1:8), 이 약속이 오순절에 이루어지고 이러한 사역이 계속되는 곳에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도 계속됨을 볼 수 있다(행 4:8,31). 그러므로 이런 사역론적 차원에서 볼 때 오순절 성령 강림은 단회적이 아니라 계속적, 반복적인 하나님의 사역이다. 목적론적 차원에서 볼 때에 성령 강림의 목적은 전도요, 선교다(행 1:8). 전도와 증거의 사역이 있을 때마다 성령님은 능력으로 임재하셨으며 행 1:8 처럼 이 증거 사역이 끝나기까지 성령님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주권대로 백성들의 기도에 따라 강림하실 것이다.
"우리는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비유처럼 '단회적이다. 계속적이다.'라고 논쟁만 할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 강림의 단회성을 확집하면서도 오순절 성령 강림의 능력적 강림은 오순절 이후에도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서 하나님의 교회의 제단에 번제의 불길과 부흥의 불길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고 이해된다. 고신처럼 단회성을 주장하게 되면 신앙 생활에 미치는 문제점도 발생할 수 있다. 기도생활을 약화시켜 교회의 침체를 가져오는 것이다. '성령이여 임하소서!' 라고 간구하지 못하도록 함으로 교회 침체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 강림의 단회성만을 주장하는 사람은 오순절 이후 보혜사 성령께서 믿는자 속에 항상 내주하고 계시는데 또다시 '성령이여 임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주장이 옳다면 찬송가 173장(불길같은 성신여), 177장(성령이여 강림하사) 등은 교회에서 불러서는 안될 것이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단 한번 교회에 임했으며 그 후 모든 사람은 믿어 교회의 지체가 될 때 교회의 영향권에 들어오며 이때부터 성령이 항상 그 믿는 자에게 내주하게 되는데 그 내주하는 성령님께 순종하며 살지 않기 때문에 교회가 침체되는 것이지 이미 성령께서 내 속에 내주하고 계시는데 또다시 '성령이여 임하소서' 하며 성령을 받으려고 간구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렇게 배워왔고 지금도 많은 교회들이 이렇게 가르치며 이것이 개혁주의 정통이라고 말한다. 내 속에 이미 성령이 내주하고 계시는데 또 어떻게 성령이 임할 수 있느냐? 는 생각은 성령님의 사역의 무한성을 바로 이해하지 못함에서 나오는 말이다. 성령님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내 안과 밖, 위아래, 온 우주에 충만하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이여 임하소서' 하며 언제나 성령의 능력적 임재를 간구할 수 있는 것이다. 중생 이후 성령이 우리 각자 속에 내주하셔서 우리를 깨우치시고 인도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주장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며 성경의 교훈에 부합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한 가지 놓친 진리가 있다. 그것은 왜 예수님께서 이미 중생하여 성령이 그들과 함께 거하고 있는 제자들에게(요 14:17)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는지? .....
7. 결론
이상에서 여러 견해를 살펴본 것 같이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성령세례가 먼저이고 성령충만이 나중이다는 견해와 성령충만이 먼저이고 성령세례가 나중이다는 견해 차이가 분명히 있다. 중생과 성령세례를 같다고 보는 견해와 다르다고 보는 견해, 오순절 성령강림은 단회적이다는 견해와 반복이다는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오순절에 교회가 시작되었다는 견해와 그 이전에 교회가 탄생하여 합심해서 기도했다는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다.
로이드 죤스 박사는 영국의 복음주의자이면서도 성령세례만큼은 오순절 교단과 같이 중생한 사람들이라도 성령세례는 다시 받아야한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당시 영국교회의 침체현상을 심각하게 바라보면서 성령의 역사를 기대하였던 목사로서 당연한 귀결이라고 생각된다. 중생과 성령세례와의 관계 설명에서 제자들은 이미 중생한 사람들이었고 성령세례는 약속대로 오순절 성령강림때 받았다고 하면서 중생과 성령세례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한다면 제자들은 오순절 때 까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라는 견해는 옳게 받아드려진다.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도록 연구해 주셨다.
차영배교수와 정원태 교수도 연구를 깊게 해주셔서 사역적, 목적론적 입장을 설명하면서 단회성을 다른 방법으로 설명해주셔서 충분히 이해 할 수 있었다.
필자의 생각은 구원의 서정을 설명할 때 선택--소명--중생--(회개--믿음)--칭의--양자--성화--견인--영화로 그 순서를 성경에서 찾아 정리한 것 같이 성령의 사역 순서를 정리 할 수 있다면 이해하기 좋겠지만, 성령의 사역이 구원의 서정과 같이 순서를 정리하기가 힘든다.
믿어지는 대로 나열해본다면 창세전에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을 기록(엡1;14, 계21;27)--그 이름에게 성령의 내재--성령의 중생사역--회개--믿음--칭의--인침--성령세례=첫번째 성령충만--성령의 보증--성령충만의 계속--성령의 열매. 은사는 중생하면 주어지지만 중생 없이도 은사가 나타났다(갸롯유다).
권능은 성령세례를 받으면 나타나기도 하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120문도 모두가 권능을 행했다는 기록이 없다. 언젠가는 누군가가 명확하게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필자는 성령의 사역 중 오순절 성령강림은 메시야의 언약성취 즉 창세기에서 언약하신 구원사역의 성취가 끝난 후 후속 조치로서 메시야의 마지막 사역인 재림하셔서 심판이 이루어질 때 까지 성령을 보내셔서 이방을 향한 성령의 시대로, 신약성경의 기록으로 예언을 마무리함과 우주적 구원시대로, 종말론적 교회시대를 열어 가시는 새 역사적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새 시대의 총회 행사이었다고 이해된다.
이미 메시야께서 승천하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시는 날 예언된 계시가 이루어지는 날--오순절날-- 중생한 자들이 모인 자리에 성령세례와 성령충만과 성령의 은사를 한꺼번에 물부듯이 성령을 부어주셨다는 접점에서는 단회적이면서 BEP(break even point:경영학)라고 이해된다. 그때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는 예수를 위해 살기로 마음을 정한 중생한 사람들이었고 신약의 교회이었다. 이 중생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합심해서 기도할 때에 성령세례와 충만과 성령의 은사가 주어졌다는 틀림없는 사실에서 교회는 오순절이전에 탄생하였다고 이해된다.
그 이후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오순절의 성령의 은사와 세례와 충만이 부분적으로 계속됨으로 사역적 목적론적으로는 단회적이 아니고 계속된다 라는 것을 지금도 보여주고 계시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완성을 위해서 성령의 기쁘신 뜻대로 사역하시는 것이지 수학공식 처럼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고 본다.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성령충만은 성령의 지배를 받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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