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그 가운데
생명의 좁은 길이 있습니다. - 변승우 지음
변승우 목사님의 저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그 가운데 생명의 좁은 길이 있습니다.”의 전체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은혜 나누시길 원합니다.
서 문
저는 미국과 멕시코에서 일련의 집회들을 인도하기 위해 미국에 와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있는 곳은 미국 로스엔젤레스 근처에 있는 한 호텔의 5층 객실입니다. 이 호텔은 작은 산 정상에 위치하고 있어서 밑을 내려다보면 경치가 제법 좋습니다. 아래로 풀장과 골프장이 내려다보이고 도시와 멀리 산과 나무들도 보입니다.
저는 오전에 창 쪽으로 나있는 호텔 객실의 문을 열고 경치를 내려다보면서 저녁 집회 때 설교할 원고들을 읽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성령님께서 오늘 저녁 때 설교할 내용을 소책자로 만들라는 감동을 주셨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목회나 책을 집필하는 일에 있어서 아무런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께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성령이 감동을 주시면 순종할 뿐입니다. 그것이 저의 사역 방식이요, 책을 쓰는 방식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저의 작은 성공의 비결입니다.
저는 무식한 사람이요, 글재주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미국에 오기 전 9번째 책이 출판사로 넘겨져 인쇄를 기다리고 있으므로 이것은 저의 10번째 책입니다. 돌이켜 보건대 이 모든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영광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받으셔야 합니다.
주님 천하고 무익한 종을 사용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주님 홀로 영광 받으시옵소서! 아멘.
2006년 10월 30일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절감하며 미국에서 변승우 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그 사이에 생명의 좁은 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롬 11:22)
오늘날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는 소수에 불과합니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이 세상은 정말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세상에는 회교, 불교, 조로아스터교, 유교를 위시해서 수많은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으로 인도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뿐입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넓은 길입니다.
기독교만이 좁은 길입니다.
그런데 전체 인구에 비교해볼 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적습니다.
따라서 정말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신자들이 이 말씀을 단지 기독교와 타종교에 대한 말씀으로만 이해하고 거기서 멈춥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말씀은 단지 기독교와 타종교에 대한 비유의 말씀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신앙 생활하는 성도들을 두 부류로 구분해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동일한 주제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눅 13:22-24 “예수께서 각 성 각 촌으로 다니사 가르치시며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시더니 혹이 여짜오되 주여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저희에게 이르시되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예수님은 구원을 얻는 자가 적으냐는 질문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은 적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구원 얻는 자가 왜 적습니까? 그것은 이중적인데 예수님을 믿는 자도 적지만 교회 안에서조차 천국에 들어갈 참 신자가 적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얻는 자가 적은 이유입니다. 이것은 그 다음 말씀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눅 13:25-28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저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예수님의 이 대답에는 교회 내에서도 지옥에 가는 자가 많다는 것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첫째로, 천국 문에서 거절당한 이들을 예수님에게 서슴없이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즉 이들은 불신자들이 아니라 주님의 유명한 경고에 나오는 “주여 주여하는 자들”(마 7:21)입니다.
둘째로, 그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이것을 오늘날에 적용하면 이들이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인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셋째로, 그들이 문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거절당한 이유는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행악을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다시 말해서 그들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넷째로, 예수님은 다음 성경구절에 분명하게 드러나는 대로 이 말씀을 불신자인 저희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너희’에게 하셨습니다.
“저가 너희에게 일러 가로되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 너희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따라서 좁은 길을 걷고 있는 자가 적고 천국 문에 들어갈 자가 적은 이유는 단지 기독교인들의 비율 때문이 아니라 교회 안에 참된 신자들이 적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과연 그 수가 얼마나 적을까요? 그것은 여러분이 상상하거나 제가 상상했던 수준을 훨씬 뛰어 넘습니다.
여러분께 충격적인 간증 두 가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하워드 피트만이라는 미국 목사님이 쓴 “플라시보(가짜 약)”이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책에 보면 이분이 35년간 미 남침례교 목사로 사역하던 중 1979년 8월 3일 주 동맥이 파열되어 사경을 헤매면서 경험한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간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천사들이 내가 지상 세계에서 활동하는 악령의 모습을 충분히 봤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차원의 벽을 통해서 다시 둘째 하늘로 돌아왔다 그 때, 나의 수호천사는 이제 삼층 천 방향으로 나를 인도하였으므로 나는 참으로 기뻤다. 내가 늘 가고 싶었던 곳은 삼층 천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에게는 육신의 생명이 가장 큰 관심사였던 것이다.
순식간에 우리는 지극히 아름다운 곳에 이르렀다. 이미 둘째하늘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인지 말했으니, 이 아름다운 곳에 온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지 상상이 갈 것이다. 하나님은 이곳이 왜 아름다운지의 기억을 갖고 가지 못하도록 하셨는데, 내가 기억하는 것이라면 그곳은 내가 본 곳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는 것이다. 터널이나 차도, 골짜기, 또는 고속도로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그곳에는 휘황찬란한 빛이 있었고 보이지 않는 보호막으로 둘러 쳐져 있었다. 나는 이 보호막이 곧 성령의 보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터널, 도로, 골짜기, 혹은 무슨 단어로 표현하던, 거기를 걸어가는 자들은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나의 수호천사에게 그들이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본향으로 가는 성도들’이라고 말을 해주었다. 그들은 바로 세상에서 죽어 이제 본향으로 돌아가는 크리스천들의 영혼이었다. 각 성도에게는 적어도 한 명의 수호천사가 동반하고 있었고, 어떤 이들에게는 한 무리의 천사가 함께 하고 있었다. 나는 왜 어떤 성도는 한 명의 수호천사만이 있고 어떤 이들은 여럿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나는 성도들이 본향으로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을 지켜보았다. 여기 지구에서 삼층 천으로 가는 길이 있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인정받은' 영혼들만이 그 터널에 들어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코 악령은 들어올 수 없다.
나의 수호천사가 본향으로 가는 성도들에 대한 이야기를 마쳤을 때, 내가 그 터널 안으로 들어서려 했지만 천사는 나를 막았다. 그는 우리가 터널 옆으로 지나가야 하며,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터널을 따라서 터널 바깥으로 여행하였다. 우리가 이렇게 터널 옆으로 여행할 때는 생각의 속도로 가지 않고, 마치 구름 위에 있는 것처럼 여행하였다. 다시 말해, 구름은 없었지만 우리가 여행하는 방식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터널 안쪽에서 언제나 움직이는 성도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은 모습이 모두 사람이었으나, 인종, 나이, 또는 성별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투피스 같은 옷을 걸치고 있었다. 블라우스나 셔츠 같은 것과 바지로 되어 있었다. 옷의색깔은 파스텔, 베이비 블루(엷은 푸른색)였고, 투피스 중에 하나는 다른 것보다 더 연했다. 파란색이 너무도 연해서 거의 흰색에 가까웠다. 내가 그때 깨달은 것은, 내가 보고 있던 성도들이 첫 번째 부활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아직은 영광스러운 몸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성도들과 함께 터널 속을 갈 수 없는 것이 매우 안타까웠으나, 우리의 목적지가 그들과 같다는 얘기를 듣고 조금 마음이 나아졌다. 무엇보다도 나의 육체의 생명이 연장되려면 내가 하나님 앞에 서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육신의 생명이 나에겐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여행을 계속하면서 나는 곧 악령들의 수가 적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커다란 문들이 눈에 들어왔고, 문에 다가갈수록 악령들의 모습은 점점 더 멀어졌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더 이상 악마는 보이지 않았다. 삼층 천의 입구는 이층 천 쪽으로 열려 있지만, 마귀는 가까이 올 수조차 없게 된 것이다.
천사는 나를 들여 보내주지 않고, 일단 입구 한쪽에 서있게 했다. 그는 나에게 그곳에 남아서 성도들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구경하라고 말했다. 성도들이 천국을 들어서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상한 것을 하나 느꼈다. 즉, 그들은 오로지 한 명씩만 문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둘이서 함께 들어가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나는 이것에 대해 궁금했지만 설명을 듣지 못했다. 세상에 돌아온 후 오랫동안 이에 대해 연구를 해보았는데, 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이것은 한 개인에 대한 존중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각 개인은 자유 의지로 선택을 했던 것이다. 기억하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우리는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운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을.
성도들이 한 명씩 들어가고 있을 때, 나는 왜 내가 묻고 싶은 일을 허락받지 못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여기고 있었다.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청원을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도 간절해서, 그때 지켜보고 있던 장면의 의미를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것은 너무나 중요해서 성령님이 직접 말씀해주셨다. 나는 50명의 성도가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지만, 내가 놓친 것은 그 시간대였다. 이 50명의 성도가 지구에서 죽을 때, 1950명의 다른 사람들도 같은 시간대에 죽었다. 즉, 2000명 중 50명만이 천국에 가게 된 것이다. 나머지 1950명은 그곳에 없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는가? 오직 2.5%만이 천국을 가는 것이다! 97.5%는 천국을 가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현 세상의 모습이란 말인가? 지금 세상사람 중 97.5%는 하나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것이 우리가 현재 처해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시대를 그대로 대변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은 입으로만 믿는 자들이고, 마음으로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나는 주님이 왜 라오디게아 교회에 구역질을 느끼셨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또한 마태복음 7:22-23에 많은 사람들이 심판 날에 주님 보좌 앞에 서서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라고 말하였을 때, 주님은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성경에서 때때로 주님께서 아주 중요한 진리를 밝히려 하실 때, 그는 “누구든지 귀 있는 자는 들을찌어다” 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읽다가 이 구절을 발견하게 되면, 그 뒤에 오는 말씀을 아주 조심스럽게 해석하기를 바란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절은 주님의 말씀에 중요한 통찰력을 주며, 마치 학생에게 강의를 하다가, 특별한 내용을 얘기할 때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내가 전하고 있는 이 메시지의 내용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강조하거니와 당신이 들을 수 있는 영적 귀가 정말 있다면, 제발, 들으라! 내가 오늘날의 교회에 대해 하는 말을 들으라! 주님이 직접 현대 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요한계시록 3:22)와 같다고 하셨다. 교회는 자신들이 건강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나, 실상 그들은 비참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벌거벗은 것이다! 내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라! 자신은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영원한 지옥의 떨어질 형벌의 문턱에 서있다!! 너무 많은 이들이 입으로만 하다님을 안다고 말하나 실제로는 눈이 멀어 있다! 마귀는 그들을 너무 완벽히 속였기 때문에, 그들은 무신론자와 다름이 없다. 이 입술로 다른 사람들을 속일지언정, 주님을 속일 수는 없다. 그들의 마음이 세상으로 향하고 있는 한 그들은 영원한 형벌의 위기에 처해 있다. 성경이 우리에게 밝히는 것은, 사람의 마음이 있는 곳에 그의 보물도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세상에 남아있는 자는 영혼을 보물로 간직할 수 없다. 이제 나는 저 세상의 목소리로 당신에게 부르짖고 싶다. ‘아, 귀가 있는 자여, 제발 들으라!!!’”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의 나의 반응은 이 간증의 내용을 그대로 믿는 것이 아니고 선반 위에 올려놓고 참고하는 정도였습니다. 저는 신앙 간증들을 섣불리 믿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쉽게 아니다 라고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아주 성경적이고 그 사람의 열매와 발자취에 의해 확증되는 것은 참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비 성경적이고 모호하고 신비적인 것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중간 지대에 있는 것이 많습니다. 그런 것을 저는 선반 위에 올려놓습니다. 그리고 부정도 인정도 하지 아니하고 참고하는 수준으로 사용합니다. 그런 간증들은 성경의 진리들을 설명하는데 가볍게 예화로만 사용하고 그 간증에 의해 내 생각이 영향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던 중 내가 이 간증을 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캐나다 밴쿠버에 사시는 어떤 목사님 사모님이 폴 키스 데이비드(Paul Keith Davis)가 지은 “목적의 책들”(Books of Destiny)에 소개한 전설적인 하나님의 사람 밥 존스의 간증을 번역하여 제게 보내 온 것입니다. 밥 존스는 살아 있는 선지자 중에 가장 성숙하고 가장 정확한 분입니다. 이미 87세가 넘은 고령인 분으로 다니엘처럼 릭 조이너가 전날 꾼 꿈을 종종 그에게 그대로 말해주며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며, 지금은 세계적인 사역자가 된 샨 볼츠에게 30살이 되기 전 천국에 들려올라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예언이 성취되던 날 그 자신도 천국에 들려올라갔습니다. 그래서 천국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났습니다. 그 후 나중에 확인해보니 실제로 다른 장소에 있던 두 사람이 같은 날 입신을 하여 천국에서 서로 보았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럴 정도로 그는 계시에 있어서 정확하고 깊게 들어가는 분입니다. 이제 그분의 간증을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셨나요?
- 사탄의 협박
1975년 8월 7일에 Bob Jones에게, 동성애의 급속한 증가와 함께 그로 인한 치명적인 병이 발생한다는 엄청난 환상이 주어졌습니다. 그 환상에는 또한 낙태가 얼마만큼이나 생명의 존귀함을 격하시키는지, 과학은 결과적으로 여자들이 아이를 낙태시키기 위해 한 알의 알약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경지까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계시들은 70년대 중반 당시로서는 몹시 획기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처럼 공포적인 영감을 받은 하루 후인 8월 8일에 악한 영이 Bob에게 나타났습니다. 마귀는 하나님께서 Bob에게 보여준 사탄의 계획들을 공개할 경우 그에게 죽음의 영을 풀어 놓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처음에 Bob은 이 사악한 메신저가 그의 생명을 가져갈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기에 즉시 그가 받은 계시들을 사람들에게 예언했습니다. 놀랍게도 사탄은 Bob의 몸에 손을 댐으로써 그의 사악한 약속에 충실했습니다. 의사들이 말하는 동맥 파열 증세를 일으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Bob은 입과 코로 솟아 흐르는 출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하체 부위가 굳어지기 시작했고 그는 형용할 수 없는 통증을 느꼈습니다. 의사들은 진통제를 투여했고, Bob은 병상에 누워 입으로 솟아나는 출혈을 잡아보려고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습니다.
문득 통증이 떠났습니다. 순간 Bob은 약이 효과를 발생하는가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과 의학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Bob Jones는 사망했던 것입니다.
- 천국을 방문하다
Bob은 자신의 오른 편에 주의 천사와 함께 빛의 터널에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옷을 관찰했고 반짝이게 빛나는 흰 가운을 입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악한 영이 그의 생명을 가져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각 그는 천국의 옷감에서 느낄 수 있는 순결함과 평안함에 기쁨을 얻었습니다. 그의 즐거움은, 그와 같은 시각에 죽은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이 허락되었을 때 곧 슬픔으로 옮겨졌습니다. 불행하게도 그들은 빛의 옷으로 입혀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97퍼센트의 사람들이 지옥의 수렁으로 떨어져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 각자는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우상들로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Bob은 그와 같은 광경에 절망스러웠습니다.
- 천국의 문
Bob과 함께 세 명의 사람들이 빛에 휩싸여 천국의 문을 향해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줄에 네 번째로 서 있었고, 한 사람씩 그들 위의 빛으로 나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보아 온 엄청난 빛은 바로 그들의 도착을 마중 나오신 예수님 자신의 빛이었습니다.
줄에 선 첫 번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찬 열한 살 된 소녀였습니다. 그녀의 운명은 병상에 누운 채 시한부 인생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기간을 다른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중보함으로 천국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했습니다. 그녀는 영광의 문으로 커다란 상급과 함께 입장했습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웠느냐?’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예!’ 그녀는 주님의 엄청난 축복 안에서 빛을 발하며 대답했습니다.
그 다음은 체격이 큰 흑인 여성이었는데, 매우 많은 수의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Bob은 그의 오른 편에 서있는 주의 천사에게 그녀에게 왜 그처럼 많은 천사들이 함께 있는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강력한 복음 전도자로서 천사들은 그녀와 동역하기 위하여 임명받은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녀가 다른 영혼의 구원을 위해 중보할 때, 섬기는 영들이 그녀가 기도하는 사람에게 사명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녀의 기도로써 풀어짐을 받은 천사들은 그들을 왕국으로 데려오기 위하여 천국의 귄세로써 능력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상급 또한 몹시 컸습니다. ‘사랑하는 법을 배웠느냐?’ 주님께서 그녀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예!’ 그녀는 대답했고 주님의 가슴에 안겼습니다.
Bob과 마주보는 편에는 아흔세 살의 할머니께서 서 있었습니다. 그녀는 관절염으로 불구의 몸이었던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녀의 삶 속의 환난과 고통들이 그녀에게 쓰라림을 주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사랑을 유지한 반면, 그와 동일한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는 보여줄 수 없었습니다. 쓴 뿌리가 그녀의 영혼을 상하게 했습니다. 그녀는 영원한 집인 천국에 들어왔으나 그녀의 상급이 되어 줄 승리의 열매들을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는 법을 배웠느냐?’ 라고 질문하셨을 때, 그녀는 주님을 사랑했지만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노라고 대답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는 속이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녀는 오직 진실만을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주께 드릴 열매 없이 천국의 문을 들어섰습니다.
- 신성한 임무
Bob은 그 다음으로 천국의 문을 들어서고 주님의 품으로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손가락으로 Bob을 가리키시면서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돌아가야 한다.’
Bob은 그가 그의 앞의 사람들처럼 문에 들어설 수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습니다. ‘너는 경주를 마치지 않았고, 원수는 천국이 너를 위해 창조한 목적들을 위배시켰다’ 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은 Bob의 생명을 단축시킴으로써 그의 삶을 방해했습니다. 그것은 Bob의 불순종이나 반항 때문이 아닌, 천국의 계획들과 전략들을 중도 하차시키기 위한 원수의 불법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세상에 실현하기 위한 의로운 세대를 준비시키고자 하는 예언적 의도를 묵살시키려하는 사악한 시도였습니다. 이와 같은 불법은 하나님의 공정한 법칙에 의하여 크나큰 축복을 부여케 하십니다(이 책에서 폴 키쓰는 하나님의 공정한 하늘의 법칙에 대한 계시를 말한 바 있습니다. 한 사람의 선지자가 스스로의 불순종이나 반항이 아닌 온전히 사탄에 의해 불법적으로 일찍 생명을 빼앗기게 될 경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공정한 법칙에 의해 그와 같은 선지자 일곱 사람을 지상에 풀어 놓으신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원수가 악으로 의도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존귀한 이유로 바꾸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원수의 손길에 의해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마주한 만남에서 Bob은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사명을 받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천국 위의 덕을 곧 일어설 세대를 통해 가늠할 수 없는 방법으로 나타내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너는 세상에 돌아가서 몇몇 나의 종들을 만져주고 마지막 때에 내가 가져올 추수를 위해 준비시켜야 한다. 나는 이 세상의 이전 시대에 있었던 그 어떤 것도 초월하는 것으로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 나는 나를 위해 천만 명의 영혼들을 준비시킬 것이고 이 천국의 계획은 2000년도부터 시작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의 성숙을 위한 사명의 시작을 알리는 마지막 시대의 종말적 임무들이 시작되고 가속화되는 것을 구체적으로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Bob에게 2000년도까지 수백만의 사람들이 예언되어 온 질병으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숫자는 죄로부터 쓸어버리는 회개가 있을 때까지 천문학적 숫자로 증가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 지구로 돌아오다
영적 각성과 영혼에 대한 추수의 약속과 함께 Bob은 그에게 맡겨진 계시적 목양을 계속하기 위하여 기꺼이 지구로 돌아왔습니다. 주님께서 Bob에게 그가 죽기 전에 하나님의 영광이 엄청난 영혼의 추수와 함께 세상에 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성경에서 읽는 기적과 표적과 이적들은 앞으로 오는 것들의 십의 일도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모든 초자연적인 사역과 계시적인 은사들과 그리고 천국의 재능과 자질들은 다가오는 시대 동안에 증폭되어 기능을 발휘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속이 실현되는 것에 신실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십니다.”
이 간증으로 인해 저는 하워드 피트만의 체험을 믿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이 말한 구원 받는 사람의 비율이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신자가 아니라 불신자까지 모두 포함한 비율입니다. 그러나 인류 중 적어도 믿는 자의 비율이 20-30%는 족히 될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비율은 2.5-3%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교회 안에서 우리가 상상하고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에 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간증들을 소개해도 대다수의 목회자와 신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눈 하나 꿈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들의 이런 오만이 참으로 두렵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 성령님께서 고린도후서 10:5절을 주셨습니다.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이 말씀을 주시면서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진정한 계시는 하나님을 아는 것 즉 친밀감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이런 믿을만한 계시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이 자기들이 교리와 개인적인 견해를 고수하는 것, 이것은 교만이요 종교적인 것이며 악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하나의 예가 떠오르게 해주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제사장과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은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주 이들의 관점과 생각은 서로 크게 달랐습니다. 그런데 둘 중 제사장이 아니라 선지자가 옳았습니다. 성령께서는 바로 이 같은 일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독자들이여,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 땅에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을 걸으며 살다가 훗날 천국에 들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과 그 길을 행할 때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하여 여러분께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무엇이 좁은 길인가?
우리는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면 좁은 길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좁은 길의 재료는 흙이나 아스팔트가 아닙니다. 진리입니다. 영적으로는 진리가 곧 길입니다. 진리를 따라가야 영생을 얻습니다. 아니면 멸망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라고 말씀한 그대로입니다.
진리가 곧 길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차도가 아니고 사람이 걷는 길(인도)이기 때문에 넓은 길이 아니고 좁은 길입니다. 좁은 길인 까닭에 길을 걸을 때 좌나 우로 치우치면 안 됩니다. 그러면 길을 벗어나게 되고 실족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에 다음과 같은 경고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신 5:32-33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수 1: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수 23:6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우리는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좁은 길은 진리입니다.
그런데 진리에도 좌가 있고 우가 있습니다.
그럼 무엇이 진리의 좌이고 무엇이 진리의 우일까요?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십자가에 함께 달린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회개하고 구원받은 강도가 실제로 어느 편에 달려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구원 받은 강도를 우편 강도라고 부르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우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양과 염소의 비유에도 잘 나타납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마 25:33) 두셨습니다. 그리고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반대로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처럼 오른 편은 하나님의 인자를, 왼편은 하나님의 엄위(엄격한 공의)를 뜻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래서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얼마 전 제가 서울 큰믿음교회에서 중보기도 모임을 인도하고 있는데 성령님께서 분명하게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그 정 중앙에 생명의 좁은 길이 있다.”
그러면 왜 성령께서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함께 보지 못하고 둘 중 하나만 보면 진리를 왜곡시키게 되며 좁은 길에서 탈선하여 멸망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둘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둘 다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둘 중 어느 한 편의 진리가 아니라 둘 다를 전해야 합니다. 이것은 기본이 되면서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인데 이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유명한 강해설교자인 로이드 존즈 박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용서할 것이다'라고 말씀만 하심으로 우리를 용서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실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 방법은 우리의 죄를 자신의 아들에게 전가시키시고 그 아들 안에서 우리의 죄를 처벌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에게 죄에 대한 진노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것이 인자와 함께 역사하는 하나님의 엄위입니다. 이 두 가지는 동행합니다... 인자와 엄위! 이 둘을 분리하지 마십시오. 이 두 가지 중 하나를 빼고 하나만 강조할 때 여러분은 스스로를 지옥에 넣고 있는 것입니다.”
또, 존 비비어는 “여호와를 경외하라” 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식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실수가 생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경외함이 하나님을 사랑함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같은 결과를 갖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롬 11:22)고 훈계 받는 이유이다. 양쪽 모두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불균형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릭 조이너는 “예언 사역”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로마서 11:22)라고 간청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그의 인자와 엄위를 모두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와 용서만을 보는 자들은 분명히 뻔뻔한 은혜와 거룩치 못한 자비의 노예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거룩치 못한 자비란 하나님께서 인정치 않는 것들에 자비를 베푸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엄위만을 보는 이들은 늘 우리를 중보하기 위해서 사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아니라(히브리서 7:25) ‘우리의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의 영으로(계시록 12:10) 사역하는 ‘양들을 때리는 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빛과 어두움의 영적 전쟁”이라는 책에 보면 릭 조이너가 예언적 경험 속에서 많은 진리의 문들을 본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문들 중 몇 개는 매우 매혹적인 문이고 어떤 것들은 수수하고 어떤 것들은 실제로 선뜻 내키지 않는 문이고 하나는 아주 끔찍한 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끔찍한 문에 가까워지면서 그는 두려움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문은 다른 문들과는 달리 문 주위가 매우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그 위에 쓰인 진리를 읽기 위해 매우 가까이 가야만 했는데 그 문 위에는 “그리스도의 심판대”라고 쓰여져 있었습니다. 그때 그의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것이 무서워 보이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두려움을 줍니다. 왜냐하면 창세에서 가장 큰 두려움이 바로 이 문에서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이생이나 내생에서 알 수 있는 가장 큰 지혜도 이 문을 통하여 얻어집니다. 그렇지만 극소수만 그것을 통과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릭 조이너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은 왜 이리 어둡습니까?”
“이 곳에 있는 문들의 빛은 각기 그들이 표방하는 진리에 대해서 교회가 현재 주고 있는 관심의 정도를 반사하고 있습니다. 이 문이 표방하는 진리는 이 시대에서 관심이 가장 소홀한 것들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중요한 진리 중 하나입니다. 당신이 들어가 보시면 아시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권위는 오직 이 문을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에게만 맡겨질 것입니다. 당신이 이 보좌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게 될 때에야 당신도 비로소 그분과 함께 그 위에 앉을 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진리에 좀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면 이 문이 이렇게 어둡고 무시무시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까?”
“그 말이 옳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그 문이 계시하는 영광을 안다면 그것은 가장 빛나는 문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통과하기 어려운 문입니다... 당신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어떤 것보다 더 큰 영광과 공포를 함께 보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어려운 길을 선택하였으므로 나중에는 훨씬 더 쉬워진다는 것을 아십시오. 당신이 이 어려운 진리를 기꺼이 지금 대면하고자 하므로, 나중에 손해를 입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분의 자비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만 그분의 위엄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두 가지를 다 품지 않으면 당신은 언제나 기만에 빠지거나 위대한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위험에 처하시게 됩니다.”
같은 책의 뒤에 보면 예수님께서 릭 조이너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너는 나의 자비와 엄격함 모두를 맛보았다. 네가 생명의 길에 머물기 위해서는 이 둘을 다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의 심판을 포함하고 있다. 너는 나의 자비와 엄정함 모두를 알지 않으면 기만에 빠지게 될 것이다.”
릭 조이너의 이 간증은 기만과 속임수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둘 중의 하나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대교회는 정확하게 이런 상태입니다. 즉 현대 교회의 설교자들의 다수가 하나님의 인자에 치중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현재와 같은 심각한 기만과 속임수가 편만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사랑을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죄와 허물은 사하나 형벌 받을 자의 죄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인자하실 뿐 아니라 엄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뿐 아니라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해서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 모델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요한이 바로 그랬습니다. 요한은 사랑의 사도입니다. 그가 쓴 요한일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책에서 요한은 사랑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일 3:14-15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이처럼 요한은 마치 예수님이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라고 말씀하신 대로 사랑이 구원받은 증거이며 사랑이 필수적인 것임을 강력하게 증거했습니다.
또,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누가 진정으로 거듭난 자인지 거듭남의 여러 증거들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요일 3:7-10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고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요일 5:4-5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 성구들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는 말은 거듭남을 뜻하는 것으로 이 말씀들은 모두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거듭난 자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요한일서를 보면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자인가?(요일 1:6-7),
누가 진정으로 주를 아는 자인가?(2:3-4),
누가 진정으로 주 안에 있는 자인가?(2:5-6),
누가 정말 빛 가운데 있는 자인가?(요일 2:9-11),
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가?(4:20-21)에 대한 시금석으로 가득합니다.
이처럼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과 엄위 둘 다를 보았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균형 잡힌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강단에 가장 필요한 일입니다.
한편, 앞에서 소개한 릭 조이너의 간증에 보면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권위는 오직 이 문을 들어가려고 하는 자들에게만 맡겨질 것입니다.”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제대로 알고 신앙생활하고 균형 잡힌 말씀을 전하는 것은 이렇게도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그런 개인과 교회에게 상상을 초월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 그렇게 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시혼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평화의 말로 “나를 네 땅으로 통과하게 하라. 내가 대로로만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라.”(신 2:27장)라고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중 어느 한편으로 쏠리지 말고 균형을 잘 잡고 정 중앙을 걸어가십시오. 그래서 하나님께 복을 받고 크게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좁은 길의 왼쪽 도랑
릭 조이너의 “하나님의 부르심”이라는 책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 날 동안 나는 몹시 우울해있었다. 모든 것이 삭막해보였다 사람들 소리마저 나를 짜증스럽게 했고, 하려던 일이 좌절될 때마다 화가 치밀었다. 나는 사람들의 가장 나쁜 점만 보았고, 그들에 대해 떠오르는 못된 생각들을 억누르려 몸부림쳤다. 나는 마치 지옥에 떨어진 듯 했고 갈수록 더 깊이 빠져가는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예수님께 부르짖었고, 곧바로 지혜와 함께 그 문 앞에 서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예수님, 용서하세요. 나는 예수님의 임재에서 지옥 같은 곳으로 빠졌었습니다.’
‘온 세상은 아직도 악한 자의 세력 아래 있다.’ 그는 대답했다. ‘그리고 너는 매일을 지옥의 가장자리를 걷고 있다. 그 한가운데로 생명의 길이 나있고 그 길 양편으로 깊은 도랑이 있으니 너는 좁은 생명의 길에서 결코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길 옆에는 도랑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좁은 길 양 옆에도 도랑이 있습니다.
겔 18:21-23, 27-28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좁은 길의 왼쪽 도랑과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좁은 길의 왼쪽 도랑은 균형을 잃고 하나님의 엄위 쪽으로 치우칠 때 빠지게 되는 도랑입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좁은 길은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도랑에 빠진다는 것은 비진리를 뜻합니다. 즉 속는 것입니다. 속아서 잘못 알고 잘못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좁은 길의 왼쪽 도랑에 빠지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생각들의 포로가 됩니다.
(1) ‘내 죄가 너무 커서 하나님이 나를 용서해주지 않으실 거야!’
사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엄위 쪽으로 치우쳤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작은 죄만 용서하시고 큰 죄는 용서하지 않으실까요? 물론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가셨고 따라서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으면 어떤 죄든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이 이 말을 한 이유는 전에 그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율법으로는 흠이 없다고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 아닌가? 그러나 나는 살인했고, 나는 간음했고, 나는 도적질을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바울보다 더 큰 죄인이다.’
그러나 이 생각이 과연 옳은 것일까요? 바울이 “죄인 중의 괴수” 라고 했을 때 “죄인”은 바로 살인자, 간음자, 도둑 등을 의미합니다. 즉 여타의 다른 죄들을 모두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는 여러 다른 죄들을 떠올리며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바울은 열성적인 박해자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고 고문하고 죽인 로마의 독재자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이나 일제 순사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최하의 사람이요, 가장 악한 죄인들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죄가 다른 죄들보다 더 큽니다.
제가 미국 LA 근처에서 집회를 인도할 때 하루는 설교를 하고 쉬기 위해 호텔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성령께서 제 영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간음죄가 더 크냐? 아니면 살인죄가 더 크냐?’
물론 살인이지요. 그런데 그 다음 이런 내적인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죽이는 죄가 더 크냐? 내 자녀들을 죽이는 죄가 더 크냐?’
여러분,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 다른 사람을 죽인 살인자보다 자기 자식을 죽인 살인자가 더 악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집중적으로 핍박하고 죽인 사람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실제로 죄인 중의 대 괴수였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용서받지 못할 죄인은 없습니다. 어떤 죄든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키기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그래야 좁은 길의 왼쪽 도랑에 빠지지 않습니다.
(2) ‘나는 죄를 너무 많이 지어서 하나님이 이제는 용서하지 않으실 거야!’
사람들이 ‘큰 죄’ 다음으로 고민하는 것은 ‘많은 죄’입니다. 자신이 너무 많은 죄를 지었고 여러 번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며 자신들에게는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역시 왼쪽 도랑에 빠진 결과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신간 “사랑 : 승리하는 길”에 보면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놀라운 간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긴 목사님이 어떤 큰 도시에서 집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집회 중 어떤 사람에게 손을 얹고 몇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그는 사업을 하는 사람이었고 집회를 하고 있는 교회의 교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미국에 유명한 부흥사는 거의 모두 이 사람에게 손을 얹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도 병중에 있었습니다. 주님이 해긴 목사님에게 그와 이야기를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다음 날 저녁 좀 일찍 오라고 했습니다.
다음 날 저녁 해긴 목사님은 면도를 하면서 교회에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너에게 하게 한다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공정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공정한 분이 아니십니다.”
해긴 목사님은 면도를 다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습니다. 그때 주님이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는 내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너에게 시키려고 한다고 생각하느냐?”
해긴 목사님은 준비를 다하고 교회로 운전을 해서 갔습니다. 차에서 주님은 또다시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다음 성경구절을 주셨습니다.
마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눅 17: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일흔 번에 일곱 번씩 용서하라고 하실 때 이것은 일생 동안에 걸쳐 그만큼 용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 그만큼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주님이 이 성경 구절을 주시고 말씀했을 때 해긴 목사님은 왜 주님이 이런 말을 하시는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때 주님이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하루에 490번의 죄를 지었더라도 형제를 용서하기를 원하면서 내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불공정한 것이다.”
해긴 목사님은 아직도 왜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그 사람과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왜 주님께서 그런 말들을 계속해서 하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나는 심장에 문제가 있고 나의 신장도 나빠지고 있습니다. 의사들은 내가 사업을 정리하고 집에서 누워 쉬며 약을 먹으면 한 2년 더 살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 같이 일을 계속하면 나는 언제 쓰러져 죽을지 모른다고 합니다.
나는 순복음교회에 35년이나 다녔습니다. 해긴 목사님, 나는 목사님께 정직하게 말하겠습니다. 나는 목사님이 믿음을 가르치는 것을 압니다. 그렇지만 내가 치유를 받으려고 앞으로 나갈 때마다 나는 하나님이 나를 치유하시지 않을 것을 압니다.”
“왜 하나님이 당신을 치유하지 않으실까요?”
“나는 여러 번 잘못을 하고 실수를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를 많이 지었습니다.”
하지만 해긴 목사님은 그가 하나님이 용서하지 못할 만한 큰 죄를 짓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 후에 해긴 목사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니 당신이 자신을 정죄하는 것을 이제 멈추십시오.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신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하루에 490번씩 잘못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상당히 용서받기 쉬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이 사람은 자신을 용서했고 그의 믿음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즉각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 간증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은 하루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용서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죄가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은 더 이상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더 이상 속지 말아야 합니다.
(3)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을 거야! 나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최근에 어떤 자매님이 제게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변승우 목사님, 저는 목사님의 '진짜 구원 받은 사람도 진짜 버림받을 수 있다!'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그 책을 읽고, 제가 버림 받았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바로 어제, 제가 또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너무 두렵습니다... 혹시 버림받은 것이 아닌가...
제가 너무 큰 범죄를 저질렀기에... 버림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기도했는데, 성령도 제 마음속에서 전혀 느껴지지 않고... 회개도 안 되고...
그래서 변승우 목사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지금은 버림받았는지, 아니면 아직 기회가 있는지,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답을 보냈습니다. “자매님은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그냥 회개만 하시면 됩니다.”
그랬더니 금방 또 이런 메일이 왔습니다.
“목사님... 그것이 목사님의 생각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의 생각인가요?
제가 어제 범했던 죄는, '버림받을 만한 죄'일 수도 있는 죄입니다... 그러니 목사님께서, 예수님께 물어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 직접 물어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ㅠ_ㅠ
저는 정말 괜찮으니, 진실을 말씀해주시길 바라면서... 답장 한 번만 더 꼭 좀... 부탁드릴게요... 귀찮게 해드려서 죄송해요...ㅠ_ㅠ 예수님께 직접 물어봐주세요!!!”
그래서 제가 “그것은 저의 생각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각입니다.”하고 답을 보냈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끝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이런 메일이 왔습니다.
“목사님, 저번에 메일 드렸던 사람인데요.. 그때 '혹시 버림 받은 게 아닌지' 하고 물어봤었던 그 사람이에요.
진짜 송구스럽지만, 예수님께 혹시 저 아직도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는지, 아니면 저의 죄 땜에 지워졌는지, 지금도 제 이름이 생명책에 있는지... 그거 다시 한 번만 물어봐주세요.”
그래서 제가 이번에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생명 길의 왼쪽 도랑에 빠진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음성은 듣지 않고 참소하는 자인 사탄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인 결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참소하는 말을 더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엄위하심에만 주목하게 될 때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지금 이 시간도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을 거야! 나는 이제 소망이 없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음 말씀에 반하는 생각입니다.
겔 18:21-23, 27-28 “그러나 악인이 만일 그 행한 모든 죄에서 돌이켜 떠나 내 모든 율례를 지키고 법과 의를 행하면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할 것이라.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 행한 의로 인하여 살리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만일 악인이 그 행한 악을 떠나 법과 의를 행하면 그 영혼을 보전하리라. 그가 스스로 헤아리고 그 행한 모든 죄악에서 돌이켜 떠났으니 정녕 살고 죽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아무리 과거에 악한 죄를 지었더라고 그가 돌이켜 회개하고 새 삶을 살면 과거의 죄로 인해 멸망하지 않는 것이 공평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공평한 것입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평은 사랑에서 나온 공평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사람이 아무리 달라졌어도 큰 죄를 지었으면 그 죄로 인해 죽습니다. 그래서 사형수들에 대하여 “가장 악할 때 사형 선고를 받고 가장 선할 때 죽는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에서는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돌이키면 용서받고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데이빗 윌커슨 목사님의 주옥과 같은 글 “하나님의 고통”에 나오듯이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죄인이라도 그들을 심판하시는 것을 고통스러워하십니다. 그분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리 극악한 죄인이라도 그들이 돌이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사랑을 믿고 마귀의 참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4)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셔서 나를 용서하셨지만 나를 사랑하시지는 않아. 나는 하나님의 눈밖에 벗어났고 크게 쓰임 받지는 못할 거야.’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용서를 받은 후에도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항상 과거에 속박을 당하고 결박당하여 큰 꿈을 꾸거나 이루지 못합니다. 분명 이것은 그 개인뿐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도 큰 손해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의 용서와 다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완전합니다.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사 38:17 “주께서 나의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나의 모든 죄는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미 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히 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주의 등 뒤로 던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죄를 보시고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 죄와 상관없는 우리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실 때 우리가 회개한 죄들을 보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를 싫어하시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고 죄를 용서하실 때 완전히 잊어버리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회개한 죄인들에 대하여 악감을 전혀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누구에게도 낙인을 찍지 않으십니다. 낙인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에게나 찍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회개할 수 있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우리를 용서하시는 분으로 계시되어 있습니다.
사 43:25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죄 사함이 죄를 지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를 사랑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를 용서한 후에 그 죄를 잊어버리지 않으면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서 우리의 죄를 도말하고 다시는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이런 분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분입니다. 할렐루야! 사랑이신 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으로 어느 누구를 따돌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회개한 과거의 죄로 사람을 이류와 삼류로 구분하지도 않으십니다. 이것을 가장 잘 증명해주는 것은 릭 조이너가 쓴 “추수”라는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글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낮은 계급으로 보였던 이들 중 얼마는 하나님의 최고위 장성들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상당수를 결코 알아보지 못할 것이지만 하늘나라와 음부, 전 영계의 군대에게 그들은 창세전부터 알려져 왔다...
그들 중 얼마는 깨어나기 전에 인간의 죄, 상처와 절망의 바닥을 기던 생활을 했을 것이다. 많이 사함을 받고 또 많은 것에서 해방을 받았기에 그들은 더 많이 사랑할 것이다. 원수가 그들 속에 깊이 파고든 만치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신 후 그들 속 깊이 채워주실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생명나무의 빛으로 빛나며 모든 나라들을 치료하게 될 것이다.”
같은 책에서 릭 조이너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가오고 있는 날에 가장 큰 생명을 교회에 가져올 사역자 중 얼마는 지난날 큰 과오를 저지른 이들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완전히 낭패하여 모든 인간의 노력과 힘의 막바지에 다다른 후에야 주님의 쓰임을 받게 됐다는 것은 성서 상으로 또 역사적으로 실재하는 일들이다. 높임을 받기 전 겸손이 오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부터 끝까지 성경은 한 가지 중요 주제를 다룬다. 구속. 어떤 면에서 하나님은 구속하시는 사업을 하는 것이다. 그분의 마음은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이것 때문에 극심한 영적 실패를 체험한 사람 중에 많은 수가 그 실패 때문에 주님께 더 쓸모 있는 사람이 된다. 주님은 그들을 회복시키시고 강하게 쓰실 것이다. 이런 실패로 인한 겸손함이 주님으로 하여금 그들에게 더 많은 영적 권세를 주시도록 한다. 주님을 부인한 후의 베드로에게 주님이 하셨듯이...!”
과거에 깊이 타락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하나님이 자기를 크게 사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일류는 지나갔고 주님을 위해서 2류나 3류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참소하는 자인 사탄이 만들어낸 또 하나의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사탄의 이 거짓말을 믿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렘 29:1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
3. 좁은 길의 오른쪽 도랑
좁은 길에는 왼쪽 도랑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에도 도랑이 있습니다. 만약 한 쪽 편에만 도랑이 있다면 그것은 좁은 길이 아니라 넓은 길일 것입니다. 왼쪽 도랑은 하나님의 엄위에 치우칠 때 빠지게 되고 오른쪽 도랑은 하나님의 인자에 치우칠 때 빠지게 됩니다.
겔 18:24-26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 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
이것은 좁은 길의 오른쪽 도랑과 관련이 있는 말씀입니다. 이 도랑은 우리가 균형을 잃고 하나님의 인자 쪽으로 치우칠 때 빠지게 되는 도랑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좁은 길의 왼쪽 도랑에 빠진 사람도 많지만 오른쪽 도랑에 빠진 사람이 7배나 더 많습니다. 교회 안에서 지옥에 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바로 좁은 길의 오른쪽 도랑에 빠져서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멸망을 받습니다. 누구든 좁은 길의 오른쪽 도랑에 빠지면 다음과 같은 잘못된 가르침에 미혹이 되게 됩니다.
(1)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고 심상히 여기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이 멸망 받은 이유 4가지를 지적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주를 시험하는 죄였습니다. 주를 시험하는 죄란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고 그 말씀의 중요성과 의미를 희석시켜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고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뿌리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에 대한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했던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약 2: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히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여기에 준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평신도는 물론이요 목사들 속에서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것이 마치 아담과 하와의 죄가 인류에게 사망을 가져왔듯이 교회 안의 많은 사람들에게 사망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과거에 "카리스 월드"(CHARIS WORLD)라는 영성 잡지에 데이비드 윌커슨 목사님의 설교가 연재된 적이 있습니다. 그 중 “지옥의 심연 - 불순종의 결과”라는 설교가 있는데, 그 설교는 우리가 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알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 중 일부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설교에서 데이비드 윌커슨 목사님은 “요나는 왜 도망을 쳤을까요? 왜 그는 하나님께서 명확히 계시해주신 말씀에 순종하기를 거부했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는 그런 대담한 불순종을 저질렀을까요?”라는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 후 스스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저는 요나가 하나님께 대한 의로운 두려움,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었기 때문에 순종하지 않았다고 믿습니다. 어떻게 그런 기도의 사람이 자신이 받은 사명을 떠나 불순종가운데 빠질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편협한, 부분적인 지식에서 시작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에 관한 엄청난 계시를 받았었습니다. 요나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4:2)
요나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 때문에 자신이 도망했노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4:2)
그의 행동은 다음과 같이 그의 주장을 항변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회개하는 자들을 너무도 쉽게 용서하십니다. 주께서 심판을 선포하실 때마다 주님은 자비하심이 넘치십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심판을 예언하자마자 그 백성들은 회개할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당신의 긍휼하심과 자비하심을 그들에게 쏟아 부으실 것입니다.’
요나의 항변에 어떤 오류가 있는지 보이십니까? 그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주 부분적으로만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죄에 대해 너무 관대하다고 주님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요나가 언급한 모든 성품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성품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로마서 1:18)
요나는 분명 하나님의 이러한 성품도 알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는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게 되었습니까? 저는 요나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을 단지 자비하신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내리는 경고를 가볍게 여기신다고 믿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행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요나를 불순종에 빠지게 한 원인이라고 믿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을 단지 자비하신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가 쉬워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내리는 경고를 가볍게 여기신다고 믿을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 행하시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게 될 것입니다.”라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자 밖에는 모릅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그 무엇보다도 교회 안에 만연되어 있는 것이 주를 시험하는 죄입니다.
잠 14:9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그런데 생명의 길의 오른쪽 도랑에 빠진 설교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심상히 여기도록 설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주를 시험하는 죄를 짓게 하며 멸망하도록 방치합니다.
오래전 미국에서 보내온 “우리 땅을 덮는 어두운 그림자”라는 간증을 카페에 소개한 일이 있습니다. 그 간증에 보면 천사가 이렇게 말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를 보라. 정치적 신학적 또는 다른 이유로 나누어지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성령을 따라 살기보다는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고 있다. 교회는 모든 죄들을 허용하며 안락하고 있다. 사람들은 죄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목회자들은 에스겔 44장 23절의 명령에 바로 불순종하고 있다.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
목회자는 죄를 언급하지도 그것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주지도 않는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마음은 거짓으로 가득하다(렘 17:9). 그들은 육체의 소욕을 좇으면서도 하나님과 걷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스스로의 죄 속의 욕망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생각한다.”
저는 이 간증이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간증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쨌든 천사의 이 말은 사실입니다. 오늘날 죄에 대한 가르침이 얼마나 무뎌졌는지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욥 31:1-3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의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에서 전능자의 주시는 산업이 무엇이겠느냐? 불의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재앙이 아니겠느냐?”
이와 같이 동방의 의인 욥은 처녀를 주목하는 것을 ‘불의’와 ‘행악’이라고 했으며 그 결과는 ‘환난’과 ‘재앙’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 두루 퍼져있는 일반적인 사상과 얼마나 큰 차이가 납니까? 그러나 현대교회가 아니라 욥이 옳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말씀을 통해 여지없이 증명되었습니다.
마 5:27-30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오늘날 인류는 날로 더해가는 노출이 심한 옷차림과 할리우드 영화의 선정성, 그리고 인터넷 유해정보로 인해 다른 어떤 죄보다도 이 죄에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에 대해서 경고의 나팔을 거의 전혀 불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믿는 사람은 모두 천국에 간다는 잠꼬대 같은 소리만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에 지나치게 치우친 결과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심각한 미혹입니다.
(2) 오직 믿음을 말하고 회개에 대해 침묵하게 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지요? 하고 물으면 십중팔구는 자신 있게 “오직 믿음으로!”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바른 대답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원의 조건으로 믿음뿐 아니라 회개에 대하여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막 1:15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행 20:21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
히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토마스 왓슨은 영국의 청교도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이며, 웨스트민스터 회의에서 소요리문답을 작성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는 “회개”라는 책 첫머리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이생에서 성도에게 절대 필요한 두 가지 은혜가 있다면 그것은 회개와 믿음이다. 이 둘은 성도가 하늘나라로 날아가는데 필요한 두 날개이다.”
한 날개를 가지고 새가 공중을 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회개나 믿음 둘 중의 하나만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므로, 천국에 가려면 반드시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야합니다.
그런데 불행히도 오늘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자들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예언한 대로 롯의 때와 노아의 때로 치닫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아, 요나 그리고 세례요한처럼 회개를 외치는 사람들은 너무나도 적습니다. 제프리 윌슨은 이에 대해 “뒤틀려진 복음”이라는 책에서 잘 지적했습니다. 그 책에서 그는 “거짓된 복음”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의 현재 상태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방심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절대 다수의 교회 참석자들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공통분모를 만들기 위해 타협되고 희석되었습니다...
여러 세기 동안 퍼져 온 이 엉터리 복음은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제시했던 메시지와 근본적으로 모순됩니다. 이것은 '싸구려' 복음이며 '편의주의' 복음으로서 ‘안일한 신앙’(easy believism)이라고 불려집니다...
이 복음은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단순히 예수님을 자기 '개인의 구주'로서 '믿거나' 혹은 '영접'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거나 또는 영생의 ‘거저 주는 선물'을 받기만 하면 구원 됩니다.
이 '안일한' 복음에는 회개에 대한 요구가 빠져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자는 자신의 죄들로부터 떠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이 복음에는 없습니다.”
이것은 영혼들에게 치명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멸망을 피하고 천국에 들어가는데 회개를 절대적인 조건으로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몇 가지 소개해드리지요.
먼저, 본문이 수록되어 있는 장에서 하나님은 회개에 대해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겔 18:30-32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국문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너희는 범한 모든 죄악을 버리고 마음과 영을 새롭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고자 하느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죽는 자의 죽는 것은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노니 너희는 스스로 돌이키고 살지니라.”
또,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외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 3:7-10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세례 베푸는데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마지막으로,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과 회개와의 관계에 대해 이렇게 증거했습니다.
벧후 3:8-9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제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설교가 영혼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이고 위험한지를 아시겠지요? 그런데 대다수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인자에 치우친 결과 설교에서 회개가 빠진 지 오래입니다.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도 너무나도 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인자에만 주목한 미혹이 교회 안에 가져온 불행입니다.
(3) 구원의 확신을 말하고 자기 점검을 등한시하게 됩니다.
구원의 확신은 사람들에게 평화와 안정감을 주지만 자기 점검에 대한 메시지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줍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는 설교를 모두 율법적인 것으로 매도합니다. 그렇다면 저 유명한 조나단 에드워즈도 율법적인 설교자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죄인들”이라는 설교를 할 때 청중들은 극심한 두려움을 느껴 울부짖었으며 당장이라도 지옥 불에 떨어질 것 같아 기둥을 잡고 대롱대롱 매달리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탁월한 강해설교자인 로이드 존즈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질문합니다. ‘사람들에게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라고 말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일부분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마 오늘날 유행하는 복음은 아닐지 모르지만 그것이 신약성경의 복음입니다. 두려워하십시오... 이 메시지는 영원한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신약성서의 가르침입니다.”
고후 5:11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을 권하노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 알리워졌고 또 너희의 양심에도 알리워졌기를 바라노라.”
이와 같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주의 두려우심을 알았고 그것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권했습니다. 즉 주의 두려우심에 근거하여 사람들에게 설교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설교자들은 주의 두려우심에 대하여 너무 무지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설교 역시 주의 두려우심의 근거 위에서 행해지지 않습니다. 그 결과 의도야 어떻든 실제로는 수많은 영혼들을 그릇 인도하고 멸망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여러분 중에 지금 죽어도 천국에 갈 자신이 있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곤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런 설교를 들을 때마다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다음 두 가지 성구가 생각납니다.
렘 6:12-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되리니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는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하리니 그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뿐 아니라 오늘날의 형편을 잘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형편이 이렇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한 가지 이유는 성도들 자신에게 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설교를 듣기는 하지만 고침을 받을 것을 두려워합니다. 즉 진실로 변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대강 대강 신앙생활하며 편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이것 때문에 죄라는 상처를 심상히 고침 받고 진짜로 고침 받지 못하고 그 죄로 인해 멸망하는 것입니다.
다른 한 가지 이유는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사람들이 고침 받아야 할 상처는 다름 아닌 죄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의사가 아니라 영혼을 다루는 사람들이었다는 것 자체에도 드러나지만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에도 드러납니다.
눅 55:31-32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이처럼 병은 죄이고 회개가 진정한 치료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설교자들은 회개시키는 일에 실패하고 있고 회개하지 않은 자에게 천국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참된 선지자로서 사람의 회개에 관심을 가졌고 그래서 가버나움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외형적으로는 대 성공이었지만 그들의 회개치 않음으로 인해 분노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고 성난 사자와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회개가 빠진 믿음으로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회개가 없는 상태에서의 구원의 확신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미혹이지 참된 확신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구원의 확신에 대한 피상적인 가르침들을 들을 때에 생각나는 예레미야에 나오는 또 하나의 성경구절은 이것입니다.
렘 8:4-12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며 경황 중에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전지를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말씀을 우리는 4파트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파트는 4-7절로 ‘현 상황’을 보여줍니다.
“너는 또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이 엎드러지면 어찌 일어나지 아니하겠으며 사람이 떠나갔으면 어찌 돌아오지 아니하겠느냐? 이 예루살렘 백성이 항상 나를 떠나 물러감은 어찜이뇨? 그들이 거짓을 고집하고 돌아오기를 거절하도다. 내가 귀를 기울여 들은즉 그들이 정직을 말하지 아니하며 그 악을 뉘우쳐서 나의 행한 것이 무엇인고 말하는 자가 없고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 같이 각각 그 길로 행하도다. 공중의 학은 그 정한 시기를 알고 반구와 제비와 두루미는 그 올 때를 지키거늘 내 백성은 여호와의 규례를 알지 못하도다 하셨다 하라.”
사람이 넘어지면 일어납니다. 또 집을 나갔으면 돌아옵니다. 철새들도 때가 되면 다시 날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루살렘 백성들이 마치 전장을 향하여 달리는 말같이 두려움 없이 돌이키지 않고 계속 악을 행한다고 탄식하셨습니다. 불행히도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의 상황이었고 오늘날 교회의 상태입니다.
두 번째 파트는 8-10절로 이렇게 된 ‘원인’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어찌 우리는 지혜가 있고 우리에게는 여호와의 율법이 있다 말하겠느뇨? 참으로 서기관의 거짓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 지혜롭다 하는 자들은 수욕을 받으며 경황 중에 잡히리라. 보라 그들이 나 여호와의 말을 버렸으니 그들에게 무슨 지혜가 있으랴? 그러므로 내가 그들의 아내를 타인에게 주겠고 그들의 전지를 그 차지할 자들에게 주리니 그들은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스스로 지혜가 있고 말씀으로 충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신학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자신은 독서를 많이 하고 강해설교를 하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고 책도 쓰지만 선지자가 “참으로 서기관의 붓이 거짓되게 하였나니”라고 지적한 대로 실제로 많은 설교와 책들이 사람을 참된 진리가 아니라 거짓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 주된 원인은 마치 예수님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장로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했듯이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이 교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고 저버리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에 나오는 진리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교리에 맞는 것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진리라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식은 많지만 참된 지혜는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파트는 11절로 그 결과 교회에 만연하게 된 ‘미혹’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거짓된 구원의 확신의 교리입니다.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이 로마서 10:9-10절 말씀을 근거하여 복음진리를 간단하게 설명해준 뒤 이것을 믿느냐? 고 물어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해보라고 합니다. 그런 뒤에 이 구절을 읽어주고 당신은 이제 구원 받았으니 구원의 확신을 가지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고 예레미야서에 나오는 거짓 선지자들의 똑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저 박사는 이런 가르침을 강하게 성토했고, 로이드 존즈 박사는 심지어 산데만주의라는 역사상 나타났던 이단들의 가르침을 상기시키며 이런 것은 이단 사설인데 오늘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다고 안타까워하며 그의 책에서 여러 번 지적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게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라고 말할 것입니다. 뭐가 잘못되었느냐고요? 먼저, 회개가 빠졌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습니다. 믿음은 기독교의 복음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요 1:12). 그런데 사람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을 하나님은 “주와 그리스도”(행 2:36) 또는 “임금과 구주”(행 5:31)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행 16:31)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래서 로마서 10:9절에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단순히 구주가 아니라 주님으로 시인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입술의 시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을 깨닫고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로 결단하고 마음의 보좌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셔들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믿음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필수적인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에 주목하면 왜 예수님이 “나더러 주여주여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말씀하셨으며, 왜 라오디게아교회가 분명히 현대교회처럼 복음진리에 동의하고 예수님을 입으로 주로 시인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예수님이 문밖에 서서 두드리고 계셨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네 번째 파트는 12절로 사람들의 마음의 ‘완악함과 강퍅함’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질 자와 함께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그들을 벌할 때에 그들이 거꾸러지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 죄를 짓고도 뻔뻔한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상 근심을 사망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잘못된 가르침의 결과로 거룩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 가운데 살면서도 고민할 줄 모릅니다. 세상 근심만 하고 영적으로는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는” 가짜 평안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기만 하면 다 천국에 가고 일단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 버림받을 수 없다는 거짓된 교리로 인해 죄를 심상히 여기는 풍조가 만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오랜 세월 동안 작은 교회를 섬겼었고 그 시간에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기독교의 고전을 거의 다 섭렵했습니다. 또한 현대의 유명한 신학자들과 강해설교자들의 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설교자들은 자기 점검에 대해서 많은 설교를 했는데 현대의 설교자들은 그것을 쏙 빼먹고 구원의 확신에 대해서 주로 설교한다는 것입니다. 이 둘은 서로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점검이란 자신이 구원을 받았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자신의 회개가 진짜인가? 믿음이 진짜 믿음인가? 정말로 거듭났는가? 를 성경의 시금석들을 통해 살펴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기독교의 고전적인 설교자들과 현대 설교자 둘 중 누가 더 옳을까요? 당연히 고전적인 설교자들입니다. 그 증거로 그들을 통해선 대각성 운동과 부흥이 일어났지만 현대의 설교자들을 통해서 교회가 타락하고 변질 되었다는 엄연한 현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고, 또한 밥 존스와 하워드 피트만의 간증에 나타난 것처럼 실제로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의 비율이 깜짝 놀랄 정도로 낮다는 내세에서의 현실이 이를 증명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엄위도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점검에 힘쓰고 진실한 신앙인이 되어 반드시 그 나라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4) 버림받음에 대한 두려움을 심어주지 않고 거짓된 안정감을 갖게 하는 설교가 난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 둘 중 하나만 보면 미혹이 옵니다. 자신은 진리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거짓에 속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인자만 알고 엄위를 알지 못할 때 오게 되는 가장 대표적인 미혹은 이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은 절대로 버림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자만 보면 구원받은 사람은 절대로 버림받을 수 없다는 미혹이 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런 거짓된 생각에 속지 말라고 이 말을 한 것입니다.
롬 11:22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보십시오. 바울은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의 인자만 생각하기 때문에 넘어져 멸망할 수 있는 위험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 뿐 아니라 엄위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자만 보기 때문에 “어느 부모가 자식을 버리겠는가? 그런데 하물며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시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감상적인 말로 진리를 가리울 수는 없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버림받았습니다. 또 에스겔서에 보면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겔 18:24-26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의에서 떠나서 범죄하고 악인의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 행한 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인하여 죽으리라.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 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치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치 않은 것이 아니냐? 만일 의인이 그 의를 떠나 죄악을 행하고 인하여 죽으면 그 행한 죄악으로 인하여 죽는 것이요.”
그런데 성경에 이렇게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러나 그것은 구약 아닙니까?”라는 말로 이 진리를 부정하려 듭니다. 그러나 구약과 신약이 무엇이 다릅니까? 하나님은 변역치 않는 분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입니다. 구약과 신약이 다르다면 구약은 예표이고 신약은 실체라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일예로 구약에도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4장에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예로 아브라함이 야고보서 2장에서는 행함있는 산 믿음의 예로 아브라함과 라합이 사용된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 모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 받았는데 구약시대엔 예표를 통해 오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신약시대엔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처럼 예표와 실체 그것이 다를 뿐 진리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바울은 광야에서 버림받고 엎드러져 죽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언급하면서 그들이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와 거울로 기록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에서 재림까지의 기간 즉 신약 시대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구약의 유대인들은 에스겔서에 나오는 것처럼 버림받을 수 있고 우리는 새 언약 아래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가정해보십시오. 그럴 경우 어떻게 그들이 우리의 거울과 경계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버림 받았다면 우리들 역시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한 진리인 것입니다.
이 진리는 유명한 바울의 고백 고린도전서 9:27절에도 잘 나타나지만 그 전에 로마서에 아주 명백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롬 11:20-23 “옳도다. 저희는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우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인자와 엄위를 보라. 넘어지는 자들에게는 엄위가 있으니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
이 중 특별히 “하나님이 원 가지들도 아끼지 아니하셨은즉 너도 아끼지 아니하시리라”(21)라는 말씀을 통해 바울은 ‘새 언약 아래 있는 신자들이 옛 언약 아래 있는 유대인들보다 결코 더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원 가지인 유대인들이 꺾여질 수 있는 것처럼 신약의 그리스도인들 역시 꺾여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에스겔서에 나오는 “의인이 악을 행하면 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구약이라 하여 우리와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도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구약의 사울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들도 얼마든지 버림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처럼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래서 버림 받지 않고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면 거짓 선지자는 어떤 사람들일까요? 거짓 선지자들에는 몇 가지 종류들이 있는데 가장 많은 류의 거짓 선지자는 존 웨슬리와 로이드 존즈가 지적한대로 설교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이 없는 설교자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로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끕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런 설교자들이 소수가 아니라 절대 다수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바른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요즘 제가 읽은 글 중에 제 마음을 계속 뒤흔들고 뜨겁게 하고 있는 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릭 조이너의 “진리의 회복”이라는 글입니다. 이 글은 미국에서 제가 집회를 하면 꼭 참석하는 한의사 부부가 올려놓은 글입니다. 주보에도 실어놓았지만 그 글을 여러분께 꼭 읽어드리고 싶습니다.
“교회가 시작된 첫 세기부터 복음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고 사람들과의 언쟁을 피하기 위해 조금씩 변질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그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고 좋게 들릴 수 있으나 경감된 믿음을 전해 줌으로 인해 교회와 신실한 하나님의 진리에 많은 문제점을 가져왔습니다. 이것은 진리가 심히 왜곡되기에 이르렀으며 그로 인해 많은 외식들이 자리 잡게 됨으로 말미암아 현재 교회는 역사상 가장 어두움 가운데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러한 점진적인 어두움에 대항하는 진리와 빛 또한 함께 존재해 왔습니다. 그 진리와 빛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진정한 제자와 리더들을 통해 발전되어 왔습니다. 복음을 타협하려는 유혹을 던져버리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던 하나님 앞에서 진리만을 보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 의해 진리의 빛은 유지되어져 왔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복음을 회복하려는 이들은 불가피하게 더 많은 논쟁과 갈등 가운데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 줄 안다면 이러한 댓가가 또한 얼마나 작은 것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영광과 빛이 진리를 추구하는 이들에게 풀려지고 있습니다. 진리의 회복이 자리 잡아 감에 따라 하나님보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사람들과 빛의 사람들 간의 혼란 또한 가중될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0절 말씀에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만약 그의 목적에 참여하려고 하며 그의 왕국을 위한 길을 예비하려 한다면 주님께서 요한복음 5장 44절에서 분명히 말씀하심 같이 우리는 반드시 사람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며 오로지 하나님 앞에 두려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영광’을 그리스어로 번역하면 원문은 ‘doxa’입니다.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하면 인정, 인식 혹은 명예입니다. 주님께서 이 질문을 하신 의미는 하나님 대신 사람을 인식하며 명예를 얻으려 살아간다면 믿음을 소유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사람을 두려워함은 진정한 믿음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진정한 사도와 지도자로 세움 받게 됨을 볼 것입니다.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들로 여겨질 것이며 실제로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자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 즉 사람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은 충돌로 치닫게 될 것이며 이들 간의 갈등을 계속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순종함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우리를 대항하던 전 세계를 얻게 될 것이며 우리 안에 완전한 평화를 갖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진정한 리더들과 사도들이 아직 많지 않지만 오로지 주님의 뜻에 의한 동기를 가진 자들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들은 천국의 효모입니다. 적은 효모가 온 덩이에 퍼지듯 그들은 온 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다니엘서 2:44-45을 보면 다니엘이 느브갓네살의 신상에 대한 꿈을 해석해주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상 이 땅의 왕국들을 대변해 주는 것입니다.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 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다니엘서 2:35에서 설명되었듯이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 땅위에 왕국들 중에 하나님의 왕국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 왕국은 깨뜨려진 우상의 돌들로부터 나와 자라가 온 세계를 덮을 때까지 자라갈 것입니다. 이 왕국은 왕을 헌신적으로 따르려는 사람들에 의해 구성될 것이며 여러분은 모든 회중 가운데 이 일들이 일어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은 마치 우리 큰믿음교회를 두고 하는 말씀 같습니다.
저는 굉장히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의 은혜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사고팔지 않고 희석시키지 않은 순전한 진리들을 담대하게 외쳐왔습니다.
또 이 글에 나타난 대로 그래서 수많은 저항에 부딪쳐왔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험한 사람들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위험한 자들이 아니며 사탄과 그리고 미혹된 목회자들에게 위험할 뿐입니다.
최근에 저는 미국과 멕시코에 성회인도 차 3주간을 다녀왔습니다. 모두 4곳에서 집회를 인도했는데 가는 곳마다 이 책의 내용을 설교했습니다. 멕시코에서는 엔세나다에 있는 벧엘신학교와 티화나에서 가장 큰 교회인 성도 수가 3,000명이 넘는 싼 빠블로교회에서 설교했는데 얼마나 방해가 심했는지 말 그대로 전쟁을 치르는 것 같았습니다.
일부 선교사들이 고정관념 때문에 제 설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다른 모든 선교사와 통역하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서 통역을 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했습니다. 정말 집요하고 끈질기게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겨우 통역을 구하여 싼 빠블로 교회에서 설교를 했는데 3부 예배 설교 전 그 교회의 처음 보는 중보기도자가 와서 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목사님은 아주 강력한 것을 이 멕시코에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고 목사님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악한 영들이 목사님의 생명과 사역을 노리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위해서 보호하는 기도를 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그리고 목사님이 들어오실 때 거대한 검이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검이 역사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악한 영들이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목사님의 사역이 성공할 수 있도록 기도하겠습니다.”
그 중보기도자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 말을 했지만 어제 밤 새벽 1시 30분까지 통역을 구하기 위해 씨름하고, 그리고 거듭 교통사고의 위험을 경험한 저희에게는 그 말이 얼마나 꼭 맞는 말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사역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하나의 확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얻고 더욱 담대히 설교 했고 하나님의 은혜로 멕시코 성회를 무사히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저는 위의 글을 읽다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릭 조이너는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제 마지막 시대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만을 기쁨으로 순종하는 자들이 진정한 사도와 지도자로 세움 받게 됨을 볼 것입니다. 이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들로 여겨질 것이며 실제로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위해 세워진 자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왕국들 즉 사람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은 충돌로 치닫게 될 것이며 이들 간의 갈등을 계속적으로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순종함으로 나아간다면 우리는 우리를 대항하던 전 세계를 얻게 될 것이며 우리 안에 완전한 평화를 갖게 될 것입니다. 비록 이러한 진정한 리더들과 사도들이 아직 많지 않지만 오로지 주님의 뜻에 의한 동기를 가진 자들이 우리 가운데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들은 천국의 효모입니다. 적은 효모가 온 덩이에 퍼지듯 그들은 온 교회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정말 큰믿음교회를 두고 하는 말씀 같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는 주의 은혜로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저는 릭 조이너의 글에 나타난 대로 정말로 저희 교회가 열방을 기업으로 얻게 될 것을 믿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교회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진리를 진리 그대로 담대하게 전하는 모든 목회자와 교회에 예외 없이 임할 복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여러분도 하나님의 인자나 엄위만 보지 말고 인자와 엄위를 함께 보고 바른 진리를 깨달아서 그 진리를 담대하게 전하고 외치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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