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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림줄 - 책내용 전체공개-변승우 목사

JORC구원열차 2009. 1. 8. 09:46
다 림 줄 / 변승우 지음 / 큰믿음출판사
 
본 내용은  큰믿음교회(변승우 목사)에서 카페(http://cafe.daum.net/Bigchurch)를 통하여 공개한
변승우 목사님의 저서 “다림줄”의 전체 내용입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은혜 나누시길 원합니다.
 


 
서 문
 
저는 이 책으로 인해 아주 흥분해있습니다. 저는 이 책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예언한 예언의 첫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해 말 릭 조이너의 동역자 스티브 탐슨이 우리 교회에 집회 인도 차 와서 이런 예언을 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제가 호텔 방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변 목사님을 위한 말씀을 제게 주셨습니다. 목사님이 쓰실 책에 대한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것이지요... 주님이 목사님께 전략적으로 중요한 책들을 주실 것입니다. 책이 나오기 한참 전에 쓰실 것입니다. 목사님은 십년 후에 필요한 책들을 미리 쓰시게 되는 것입니다... 목사님께 현재의 교회를 미래에 갖추어야 될 모습으로 인내하며 인도해나갈 수 있는 전략적인 지혜들이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불과 한 달 뒤인 2007년 초 샨 볼츠가 우리 교회에 집회를 인도하러 왔습니다. 그 후 영동제일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다가 매우 중요한 예언을 했습니다.
 
“이 시간 기록을 담당하고 있는 천사 중 직위가 높고 강력한 한 천사가 변승우 목사님 곁에 와 있습니다. 바울이 서신서들을 저술할 때에 바울과 함께 서 있었던 역할을 감당하기에 합당했던 바로 그 천사입니다.
 
교회들에게 전하실 말씀을 기록하는 천사가 이곳에 와있습니다. 변 목사님의 입을 통하여, 변 목사님의 서적들을 통하여 이 천사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밝히 보이실 것입니다. 그 천사가 올해, 2007년에 보내지고 있습니다.
 
변 목사님, 바로 이 천사가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서신서를 썼을 때에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보여서 이 서신서들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변 목사님, 이제 이 천사가 하나님의 마음을 변 목사님에게 밝히 보여서 그러한 종류의 것들—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밝히는 책들—을 쓰도록 할 것입니다.”
 
저는 본서를 써야한다는 감동을 받고 그 내용들이 저에게 주어질 때 샨이 예언한 그 천사가 저와 함께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천사가 저와 함께 하면서 책을 잘 쓰도록 돕고 있음을 영으로 분명하게 느꼈습니다.
 
제가 이런 것을 공개하는 이유는 이 책이 아주 중요한 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책은 저희 교회에서 새로 시작하는 큰믿음출판사의 첫 번째 책이 될 것입니다. 이 책은 앞으로 저희 큰믿음출판사에서 출판할 책들의 특성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욱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할렐루야! 모든 영광은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영광 받으소서!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부족한 종을 사용하여 주옵소서! 아멘
 
2007년 2월 28일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리며... 변승우 씀
 
 
 
목 차
 
서 문
 
1. 하나님의 은혜로 제 손에는 다림줄이 들려져 있습니다.........................
(1) 계시를 통한 확증
(2) 열매를 통한 확증
(3) 핍박을 통한 확증
 
2. 저는 다림줄을 이런 과정을 통해 얻었습니다.......................................
(1) 주님은 저의‘지식’을 부정하는 낮은 곳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2) 주님은 저의‘지성’을 부정하는 낮은 곳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3) 주님은 저의‘영성’을 부정하는 낮은 곳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4) 특별한 노하우 -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십시오!
 
3. 지금은 다림줄의 중요성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1) 부흥의 1단계 : “말씀”
(2) 부흥의 2단계 : “회개”
(3) 부흥의 3단계 : “성령”
(4) 부흥의 4단계 : “은사”
(5) 부흥의 5단계 : “대 부흥”
 
 
 
다 림 줄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스가랴 4:6-10)
 
어린 시절 우리 집은 매우 가난했습니다. 제가 성인이 되고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저희는 가난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가난 자체를 불평해본 일이 거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릴 적부터 목사가 되는 게 꿈이었고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하는 것보다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하는 것이 목회자가 갖추어야 할 심성을 갖추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고교시절 예언의 은사가 아주 강한 여전도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이 저에게 “축복권이 강하여 축복하면 사람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며, 앞으로 엄청난 부요를 가지고 많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어주는 자가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가난한 자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돕게 하기 위해서 이런 과정이 필요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꿈의 사람이었고 그 말을 의심 없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비록 가난하게 성장했지만 마음은 누구보다도 부자였습니다. 심지어 저는 가난을 은근히 즐기기까지 했습니다.
 
또 한 가지 제가 어린 시절 기분이 좋았던 것은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과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직업이 목수였다는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는 목수들 중에서도 실력이 좋은 상목수이셨습니다. 그래서 노임도 셌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아버지처럼 저희 아버지가 목수라는 것이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목사가 되기 원하는 저의 미래에 대한 좋은 징조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다림줄”이 나옵니다. 다림줄은 목수들이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지금은 교회를 새로 옮기거나 할 때 제가 직접 일하지는 않지만 개척교회 시절 저는 목수인 아버지와 함께 칸막이를 세울 벽에 먹줄을 쳐가면서 며칠씩 함께 일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다림줄이 무엇인지 잘 압니다. 다림줄이란 목수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다림을 볼 때 사용하는 줄입니다.
 
왕하 21:13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이 말씀에 보면 “다림을 본다”는 말이 나오는데, 다림이란 ‘수평으로 반반한가? 수직으로는 바로 섰는가?’를 살펴보는 일을 가리킵니다. 건축할 때 벽돌을 무작정 쌓는 것이 아니라 실 하나에 추를 매달아서 띄워 놓습니다. 이것이 다림줄입니다. 인간의 눈대중으로 쌓으면 한참 쌓다보면 휘게 마련입니다. 오른쪽으로든 왼쪽으로는 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똑바로 쌓기 위해서 다림줄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림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기본적이고 중요한 진리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의 눈이 바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 눈에 바르게 보인다고 꼭 바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바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이나 시각이나 견해가 반드시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림줄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속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야 정말 지혜 있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다림줄의 도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바르게 보고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사역하는데 꼭 필요한 이 다림줄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헨리 블랙가비는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이라는 책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다림줄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성경이 곧 영적인 다림줄입니다. 진정한 다림줄은 어떤 교단의 교리나 신조가 아니라 성경입니다. 왜냐하면 성경만이 유일하게 완전히 바르고 참되고 때문입니다(딤후 3:15-17).
 
어쩌면 성경이 다림줄이라는 말이 너무나 당연해서 진부하게 느껴질 지도 모릅니다. 그럴 정도로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시 되고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잘 모르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이 다림줄이라는 사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중요하고, 그것이 미래의 대 부흥을 좌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제가 서울과 부산과 울산 큰믿음교회에서 다림줄에 관해 설교할 때 다림줄에 대한 책을 써야한다는 강한 부담감을 주시고, 그리고 책을 쓸 수 있는 강력한 기름을 저에게 부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서를 읽을 때에 긴장하시고 주의 깊게 읽으시기 바랍니다.
 
 
1. 하나님의 은혜로 제 손에는 다림줄이 들려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저는 압니다. 주님이 저에게 가지고 계신 목적은,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철저하게 성경적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주님은 저를 지난 수십 년간 준비시켜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극적인 확증들을 주셨습니다.
 
(1) 계시를 통한 확증
 
최근에 박창렬 목사님과 김경수 목사님 부부를 만나서 식사를 같이하며 대화할 때 저는 특이한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전날 저는 박 목사님 댁에서 새벽 2시가 넘도록 다림줄에 관한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시각 박 목사님의 자녀들과 교회의 아이들에게 갑자기 성령이 역사하셔서 아이들이 입신을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불신자 가정에서 나오는 한 아이가 처음으로 입신을 했는데, 그 아이의 영이 몸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박 목사님의 아들 시온이가 볼 수 있었습니다.
 
입신에서 깨어났을 때 그 아이는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이 불에 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갑자기 시온이가 일어나더니 책장에서 한 권의 책을 집어 들고 캐나다로 가게 될 전도사님에게 주면서 “전도사님 이 책을 읽어보세요. 그러면 말씀을 이해하는 눈이 열릴 것입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참고로 시온이는 영안이 열려 예배 중 천사나 환상을 자주 보며, 교회에서 드럼을 칠 때 마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간증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구름이 자기에게 밀려와 덮는 것을 여러 차례 본 한 아이입니다. 그러나 올해 중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책을 잘 아는 것도 아니고 절대로 그렇게 말할 아이가 아닙니다.
 
시온이가 전도사님께 권한 책은 제가 쓴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전도사님이 제 책을 이미 여러 권 읽었고 또 책장에 있는 책을 거의 다 보았는데 이 책만 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것을 소개하는 이유는 본서를 시온이가 집어들고 권했던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간증으로 시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수님을 믿게 된 계기는 이렇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골의 초가집에서 펌프질을 하고 있을 때 이웃집에 심방 온 한 장로교회의 목사님이 저를 전도하셨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줄곧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신학교 시절 하루를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학교 앞에 있었던 성문순복음교회의 부흥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왜 하나님은 나에게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지 않으시는 걸까?’하는 의문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강사 목사님께 손을 들고 질문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오랫동안 방언 통변의 은사를 구해왔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받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나에게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랬더니 강사님이 설교를 중단하고 잠시 기도를 하신 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강사 목사님에게 성경책을 한 권 보여주셨답니다. 그 성경책은 제가 신학생 시절 읽던 것으로 성경 겉장 가죽을 세 번 갈았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적게 줄쳐진 곳이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의 줄이 쳐져 있고 여기저기 많이 낡고 해어져서 스카치테이프로 보수공사를 해놓은 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경책을 보여주셨는데 강사님의 말을 듣고 있는 저의 눈에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저의 성경책인데 성경 겉장과 속장이 모두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책이 덮여있는 데도 성경 내부가 보이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말씀이 한 눈에 다 보였습니다. 또한 제 성경책의 여백에 그 성경구절과 관계있는 다른 성경구절들과 읽으면서 깨달은 것을 빽빽하게 적어 놓았는데 그 책에도 여백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양이 큰 도서관을 하나 가득 채울 수 있는 분량이었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에 대한 완벽하고 총체적인 해석이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많은 분량의 내용이 책이 덮여있는 데도 한 눈에 다 보였습니다. 어떻게 그 많은 내용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는지 저는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이것을 보여주시며 성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통하다. 이것을 어찌 방언 통변이나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내가 이 은사를 누구에게 줄까? 미국, 영국, 독일...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사람을 찾다가 너를 발견하고 너에게 이 은사를 주었는데 너는 이 은사로 인해 내게 한 번이라도 감사한 일이 있느냐? 늘 방언 통변이나 신유의 은사를 주지 않는다고 불평만 하지 않았느냐? 내가 다른 작은 은사들을 주고도 감사기도를 받는데 이런 엄청난 은사를 주고도 감사하다는 말은 못 듣고 불평만 들으니 이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이 꿈에서 깨어난 후 저는 즉각 저의 잘못을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착념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방학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울산에 있는 집에 내려가서 기도를 많이 하고 성령의 은사를 두루 체험했으며 영분별의 은사가 아주 강한 나이 지긋한 한 여 전도사님과 어머니와 함께 기도원에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함께 열심히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또다시 왜 하나님이 나에게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지 않으시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중단시키고 그것을 위해 함께 기도해주실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시작되었는데, 한참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그 여 전도사님이 큰 소리로 배를 잡고 웃었습니다. 그냥 웃는 게 아니라 배를 잡고 자지러지게 웃으면서 아예 뒤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속으로 ‘아이고, 기도하다가 잘못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이 분이 잘못되었는가 보다! 악령이 들어갔는가 보다!’ 하고 놀라서 ‘전도사님 왜 그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도 한참을 웃다가 겨우 진정을 하고 다음과 같은 얘기를 제게 들려주었습니다.
 
기도 부탁을 받고 그 전도사님이 ‘하나님, 변 전도사님에게 방언 통변의 은사를 주세요. 저렇게 사모하는데 저는 예언의 은사도 있고 방언 통변의 은사가 없어도 괜찮으니 안 되겠으면 저에게 있는 방언 통변의 은사를 거두어가시고 대신 변 전도사님에게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셨답니다. 얼마나 고마운 기도입니까? 그런데 그 기도를 하자마자 제가 옆에서 방언으로 한 마디 톡 쏘더랍니다.
 
‘네가 가진 은사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그깟 것을 나에게 주라고 그러느냐?’
참 황당한 노릇 아닙니까? 만약 이 말을 제가 한국어로 했다면 실례도 보통 실례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으로 한 말입니다. 그것도 저는 방언 통변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을 뿐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전도사님에게는 통변의 은사가 있었기 때문에 알아들은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그분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이렇게 여쭈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도대체 변 전도사님에게 무슨 은사를 주셨습니까? 무슨 은사를 주셨기에 아홉 가지 은사를 두루 체험한 저에게 저렇게 당돌한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성경을 누가 기록했느냐?’
‘성경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기록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것이므로 성경의 저자는 성령님이십니다.’
 
‘네 말이 옳다. 나는 이 시대의 많은 나의 종들에게 말씀의 은사를 주었다. 그러나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에 임했던 그런 영감을 준 사람은 이 종 하나뿐이다. 나는 그에게 단순히 말씀의 은사가 아니라 성경 저자들이 성경을 쓸 때 가지고 있었던 그런 영감을 주었다.
 
오해하지 말아라. 이것은 그가 다시 성경을 기록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성경은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정확하게 해석할 것이다. 그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틀린 것이 없을 것이며, 내가 직접 하는 말과 같을 것이다. 그러니 이 은사를 어찌 다른 은사들과 비교할 수 있겠느냐?’”
 
어떤 분은 이 간증을 읽으면서 피식 웃을 것입니다. 그리고 못미더워할 것입니다. 이해합니다. 왜냐하면 저 자신도 오래 동안 이 간증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냥 나에게 말씀의 은사를 강하게 주셨구나.’ 하는 정도로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제가 하는 성경 해석이 100% 맞다거나, 성경 저자에게 임했던 영감을 준 사람은 저 하나뿐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하나님은 제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기대하지도 못한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다시 한 번 제게 말씀의 은사에 대한 확증을 주셨습니다. 책의 서문에서도 소개했습니다만 우리나라 영성 운동의 대모격인 김혜자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영동제일교회 집회 때 저의 친구이며 세계적인 선지자인 샨 볼츠가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들을 보고 다음과 같은 놀라운 예언을 했습니다.
 
“이 시간 기록을 담당하고 있는 천사 중 직위가 높고 강력한 한 천사가 변승우 목사님 곁에 와 있습니다. 바울이 서신서들을 저술할 때에 바울과 함께 있었던 바로 그 천사입니다.
 
교회들에게 전하실 말씀을 기록하는 천사가 이곳에 와있습니다. 변 목사님의 입을 통하여, 변 목사님의 서적들을 통하여 이 천사가 한국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밝히 보이실 것입니다. 그 천사가 올해, 2007년에 보내지고 있습니다.
 
변 목사님, 바로 이 천사가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과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서신서를 썼을 때에 바울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가 바울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보여서 이 서신서들을 쓰도록 하였습니다. 변 목사님, 이제 이 천사가 하나님의 마음을 변 목사님에게 밝히 보여서 그러한 종류의 것들—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밝히는 책들—을 쓰도록 할 것입니다.
 
변 목사님에게 나타난 그 천사는 지금까지 제가 천사의 나타남을 본 것 중 가장 강력한 것입니다.”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이것은 신학생 때 성경 저자들에게 주셨던 영감을 제게도 주셨다는 그 여전도사님이 받은 응답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해서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다림줄을 주셨다는 증거입니다.
 
(2) 열매를 통한 확증
 
제가 주의 은혜로 다림줄(성경의 바른 이해)을 손에 들고 있다는 또 다른 증거는 제 사역에 맺혀지고 있는 열매입니다. 저는 주의 은혜로 지금 12번째 책을 쓰고 있으며 그리고 회원 14,200명이 넘는 대형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Bigchurch)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여러 편의 제 설교들이 올려져 있으며 회원들이 매일 4,000회 이상 들어와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전역과 세계 여러 나라에서 저의 책과 설교를 접한 목회자들과 성도님들로부터 자신의 삶이 저의 책과 설교들을 통해서 극적으로 변화되었다고 간증하는 이메일들이 수시로 들어오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고 저의 책을 읽을 때에 눈이 떠져서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보고 회개하고 변화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금까지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 이 순간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일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게 다림줄을 주신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떻게 성경의 바른 이해라는 다림줄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까요?
 
딤후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이처럼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는 책입니다. 성경은 상아탑을 위해 존재하는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학문적인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학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모든 사람들을 위한 책입니다. 따라서 성경은 학자들이나 지식층들만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며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되어야 할 책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 있고 슬기 있는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라고 감사 기도를 올리신 것입니다.
 
성경의 목적은 이해가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그 증거로 방금 전 인용한 성경 구절에 나오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의 대상은 우리의 지성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입니다. 즉 이것은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교훈도, 책망도, 바르게 하는 것도, 의로 교육하는 것도 다 성경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입니다. 즉 나를 변화시키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 즉 바른 진리의 특성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 그대로 제대로 깨닫고 이해하게 되면 그 설교가 단순한 설명이나 해석이 아니라 찌르는 검이 됩니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여기서 살아 있다, 운동력이 있다, 찔러 쪼갠다는 것은 흔히 “말씀을 잘 쪼갠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지적인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머리가 아니라 우리의 심령 속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우리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따라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성경 그대로 전하게 되면 히브리서 기자가 이 구절에서 말한 대로 말씀이 단순히 빛이 아니라 검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마태복음 5장을 보십시오. 거기서 예수님은 거듭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21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27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마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그런데 이것은 예수님께 들은 것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서기관들과 율법사들(혹은 회당장과 랍비들)에게서 들은 것입니다. 이런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십계명을 외울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배웠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사람의 심령을 찌르는 검이 되지 못합니다. 이런 말씀을 듣고도 회개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나는 율법을 지켰다, 나는 의인이다’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회심하기 전에 자신을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생각했고,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다음과 같이 기도했던 것입니다.
 
눅 18:10-11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여기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바로 서기관들의 잘못된 설교의 산물입니다. 서기관과 율법사들의 수박 겉핥기식의 성경 이해와 설교가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을 양산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성경의 문자만 이해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설교하면 똑 같은 결과가 나타납니다. 지옥의 자식들인 현대판 바리새인들을 다수 양산하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조심해야 합니다.
 
한편, 우리 주 예수님의 설교는 백성들이 들어왔던 서기관들의 설교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뿐 아니라 정신(근본 취지: 하나님이 각 계명들을 통해 실제로 요구하고 계신 것)을 이해했습니다. 예수님의 설교를 한번 살펴볼까요?
 
마 5:22-26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자 이것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요 설교였습니다.
마 5:28-33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것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요 설교였습니다.
마 5:34-37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이것이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이요 설교였습니다. 더 예를 들 수 있지만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묻겠습니다.
서기관의 가르침에 비해 율법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계셨던 예수님의 가르침과 설교는 무엇이 다릅니까?
 
서기관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거짓된 안정감과 평화를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성경을 배우지만 사람들이 변화되지는 않습니다. 그 결과 그들 중 다수가 지옥의 자식들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찌르는 검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각성하여 회개하고 변화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을 바로 이해하고 가르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율법 뿐 아니라 복음도 회개, 믿음, 거듭남, 은혜, 거룩, 견인의 의미를 성경 그대로 이해하고 가르치면 그것은 단순히 거짓된 평화나 안정감이 아니라 사람을 각성시키고 회개시키고 변화시키는 검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믿음교회에서는 실제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정직하게 여러분께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큰믿음교회에서는 말씀을 듣고 회중이 울고 회개하는 것이 일상적인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교회에서 수십 년간 신앙생활해도 변화되지 않던 자들이 남편이 놀라고 아내가 놀랄 정도로 극적으로 변화되는 일이 이제는 더 이상 간증이 될 수 없을 정도로 일상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러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저의 설교의 능력이나 기름부음이 대단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을 성경의 의도대로 바르게 깨닫고 그대로 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자신이 씨 뿌리는 비유에 나오는 것 같이 말씀을 심었지만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자라게 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라나게 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우리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고 교회 역시 계속 부흥하고 있지만 성도들이나 교회를 자라게 하는 것은 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왜 모든 교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 것일까요? 간단합니다. 바울이 자라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신약 성경의 3분의 2를 저술한 사람으로 그의 메시지는 철저하게 성경적이었습니다. 즉 그는 손에 다림줄을 들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열쇠입니다. 설교가 성경적으로 바른 설교라야 합니다. 거기에 사역의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밀이고 사람의 계명은 겨입니다. 그런데 많은 설교자들이 겨와 밀을 섞어서 사람의 마음 밭에 뿌립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형식적인 신자와 외식자들이 그토록 많이 일어나고 알곡 신자는 적은 것입니다. 그러나 목회자들이 말씀을 제대로 분별하고 성경적인 순전한 메시지를 전하게 되면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큰믿음교회입니다. 큰믿음교회는 다른 교회에 비해 알곡 신자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무엇이 이런 결과를 창출했습니까? 그것은 바로 성경적인 바른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책과 설교를 통해 회개하고 변화되는 많은 사람들이 곧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르게 증거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3) 핍박을 통한 확증
 
최근 이전과는 달리 일부 대형교회까지 개입된 저희 교회에 대한 박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은혜로 잘 해결되었습니다. 제게 있어서 오해받고 핍박받는 일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저는 오해와 핍박 속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그것은 저의 삶의 일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지켜보면서 우리 교회가 각종 시비와 구설수에 오르는 것을 보니 잘못된 교회임에 틀림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반대로 저희 교회가 끊임없이 모함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그것이야말로 우리 교회가 바른 교회이며, 주의 은혜로 다림줄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우리는 서기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비교했었습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문자만 알고 정신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 뿐 아니라 정신을 이해하셨습니다.
 
그럼 이중 누가 바른 설교자입니까? 당연히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십니까? 건전하다는 평을 받은 것은 서기관들이었고 핍박을 받은 것은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그러면 아무도 서기관들을 핍박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도! 그러나 예수님은 끊임없이 오해를 받았고 핍박을 받았으며 사람들이 죽이려 했습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눅 6:22-23, 26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이 말씀을 진정으로 믿습니까? 농담입니다만 교회사에서 이 말씀을 그대로 믿은 사람은 존 웨슬리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익히 들은 대로 그는 말을 타고 가다가 최근 수일간 아무도 자기에게 욕을 하거나 돌을 던지지 않은 것을 문득 깨닫고 말에서 내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려달라고 회개하며 기도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누가 던진 벽돌이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고 그제서야 그는 “아니었군요. 괜찮았군요. 감사합니다. 주님.”하고 기쁨으로 가던 길을 계속 갔다고 전해집니다.
 
저는 여러분을 추궁하려고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저도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을 믿기는 하였으되 전적으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주셨고 그래서 저는 이제 이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습니다.
 
우리가 참 선지자의 뒤를 따르면 핍박은 따 놓은 당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참된 선지자들은 성경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상태를 정확하게 진단했고 회개하라고 외쳤습니다. 이미 말씀한대로 말씀은 그 자체로 검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가감함이 없이 전하게 되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베드로의 심령을 찌르는 설교를 듣고 3,000명이 “형제들아 어찌할꼬?” 하며 일시에 회개한 것처럼, 마음이 겸손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변화됩니다.
 
둘째로, 스데반의 심령을 찌르는 설교를 듣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를 갈며 돌로 쳐 죽인 것처럼 마음이 교만하고 완악한 자들은 반항하고 도전하고 핍박합니다.
 
이 두 가지는 바른 메시지를 전할 때 항상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어느 시대나 사람의 마음 밭은 길가, 돌, 가시, 옥토 등 네 가지 밭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말씀을 듣는 자 중에는 양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개와 돼지들이 있습니다.
 
요 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마 7:6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따릅니다. 즉 회개하고 고치고 변화됩니다. 그러나 개와 돼지들은 다르게 반응합니다. 그들의 관심은 더러운 것과 세상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들은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습니다.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이며 땅의 것을 찾는 자입니다. 그런데 자꾸 회개하라, 정결케 되라, 주님만을 사랑하라고 설교해보십시오. 더러운 것과 구정물은 그만 좋아하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귀찮다는 듯이 그것을 발로 밟아버립니다. 그리고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 설교가 잘못되었느니 이단이니 하면서 찢어 상하게 하려고 달려듭니다.
 
이것은 어쩌다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거의 항상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정말 진리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성도들뿐 아니라 주의 종들까지도 진리를 팔아먹고 사랑 타령만 하고 참된 진리를 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엄위는 무시하고 하나님의 인자만 강조하면서 그것이 사랑이라고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랑이 없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그들만 한 사랑이 없어서 산상수훈에서 그렇게 단호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까? 그리고 선지자들에게는 그들만 한 사랑이 없어서 심판을 외치고 회개를 외쳤다는 것입니까? 그러므로 이것은 그저 자기 합리화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리는 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한 검과 같은 것이고, 사람은 항상 두 종류입니다. 즉 겸손히 받아들이고 회개할 사람과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찢어 상하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바른 진리를 전할 때 핍박은 불가피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입니다.
 
갈 1: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바울이 왜 이런 질문을 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영혼들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기를 원하시므로 회개를 외쳐주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설교자가 바른 진리를 말해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사람의 종이 되지 않고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하나님의 종이 되려면 핍박과 조롱을 각오해야 합니다.
 
핍박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도 오해받고 핍박받는 것이 싫습니다. 그럴 때마다 실제로 칼에 찔린 것처럼 가슴이 아파 옵니다. 그러나 핍박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을 묘사하면서 팔복을 말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핍박이 들어있습니다.
 
무릇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참된 신자들은 핍박을 받을 것입니다(딤후 3:12). 그렇다면 단순히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수많은 사람들을 거룩하게 만들려는 자는 어떠하겠습니까? 과연 그런 사람들이 핍박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핍박을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핍박 받는 모든 사람이 다 옳은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그러면 큰믿음교회가 받는 크고 작은 핍박들이 잘못되어서 받는 핍박이 아니고 도리어 바르기 때문에 받는 핍박이라는 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마 5:3-12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은 분명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핍박이 문제가 있거나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역으로 구약의 선지자들의 뒤를 따르고 있으며 바르다는 증거일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더라도 영분별은 핍박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핍박받는다고 옳은 것이 아닙니다. 영분별은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는 말씀대로 열매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팔복에서도 일곱 개의 복이 먼저 나오고 마지막 여덟 번째 복에 핍박이 나오는 것입니다.
 
만일 앞의 일곱 가지가 없다면 핍박은 바르다는 증거가 아니라 진짜로 잘못되었다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나 앞의 일곱 가지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열매이고, 그 자체로 이미 옳다는 것이 입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뒤에 핍박이라는 복이 나오는 것은 바르더라도 얼마든지 오해를 받고 핍박을 받는 일이 가능하다는 보여주는 것입니다. 동시에 팔복의 해당하는 여덟 번째 복에 해당하는 핍박은 앞의 일곱 가지 복이 전제된 핍박, 즉 핍박만 받는 것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맺으면서 받는 핍박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큰믿음교회가 받는 핍박은 바로 팔복에 나오는 핍박입니다. 그 증거로 저는 이미 (3) “핍박을 통한 확증”을 다루기 전에 (2) “열매를 통한 확증”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큰믿음교회가 받는 핍박은 열매 없는 핍박이 아니라 열매를 풍성히 맺으면서 받는 핍박입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팔복 전에 나오는 일곱 개의 복이 곧 주님이 찾으시는 열매라고 했는데, 큰믿음교회를 방문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큰믿음교회 성도들만큼 “심령이 가난한 자”들은 어디가도 찾아보기 힘듭니다. 또 큰믿음교회 성도들은 진실로 “애통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은 날마다 그리고 예배 때마다 울음소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이 그 증거입니다. 큰믿음교회 안내 위원들이나 사역자들이 보여주듯이 큰믿음교회 성도들은 “온유”합니다. 그리고 큰믿음교회 성도들은 정말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예 우리 교회에 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믿음교회 성도들은 해마다 사랑의 헌금을 거두어 집 없는 가난한 성도들의 가정에 서울은 가정당 2,000만원씩, 지방은 가정당 1,000만원씩 나누어주는 것에 드러나는 것처럼 “긍휼히 여기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신부운동을 펼치며 무엇보다도 거룩을 주님을 향한 사랑을 추구하는 자들이므로 “마음이 청결”합니다. 그리고 “화평케 하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큰믿음교회가 받는 오해와 핍박은 교회가 잘못되어서 받는 핍박이 아니라 올바른 진리를 전하고 바른 길을 가기 때문에 부득이 받는 핍박입니다. 따라서 저는 핍박이 오히려 저와 큰믿음교회가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다림줄을 가지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할렐루야! 주님을 찬양합니다.
 
 
2. 저는 다림줄을 이런 과정을 통해 얻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장로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장로교는 ‘말씀’을 특히 강조합니다. 그 덕에 저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사랑했고 말씀의 은사를 간절히 사모했습니다. 그러다가 신학교에 진학했고, 공부를 열심히 할 것이라고 마음먹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세상 학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막상 그토록 소원하던 신학교에 들어가 보니 불필요한 과목이 너무 많았습니다. 많은 과목들이 그저 학점 이수를 위한 과목이었을 뿐 진짜로 성경을 이해하거나 목회에 도움이 되는 과목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각 권에 대한 가르침도 일부 있기는 했지만 너무 깊이가 없고 피상적인데다가 시늉만 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이 “유명한 자들이 내게 더해 준 것이 없다”고 말한 것이 나오는데 저도 신학교에 대해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교는 나에게 더해준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가끔 제가 어느 신학교를 나왔나 굉장히 궁금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저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신학교는 나에게 더해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교육으로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저는 스스로 우물을 파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도한 일이 학교 도서관에 들어가서 성경을 스스로 연구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로마서 1장을 펼쳐놓고 도서관에 있는 모든 로마서 주석 책을 가져다가 쌓아두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 1장 1절부터 거기에 관한 모든 설명을 다 읽고 중요한 것을 메모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로마서를 떼고 신구약의 전권을 공부해나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곧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회의감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여러 주석 책을 읽어본 결과 단순히 풍성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모순되는 해석과 주장이 너무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 이 책이 맞는 것 같고 저 책을 읽으면 저 책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어떤 설명을 들으면 그것이 맞는 것 같은데 다른 책의 그보다 더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 그것이 틀린 것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저는 성경의 해석이 지식과 정보의 분량, 또는 개인의 취향과 시각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주석과 책을 읽고 그 중에서 한 가지를 자기의 견해로 취사선택하는 것은 결코 참된 분별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런 방식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또 말씀을 분별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방식으로 성경을 연구하는 것을 그만 두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당시 저는 어떻게 해야 성경을 바르게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몰랐습니다. 어느 책을 읽어도 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치 어두움 속에서 장님의 손을 잡고 길을 인도하는 사람처럼 주님이 제 손을 잡고 인도하셨습니다. 이렇게 인도를 받는 장님은 길이 어디인지를 모릅니다. 그냥 따라가는 것뿐입니다. 마치 제가 그랬습니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길을 제가 알았던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 것도 모르고 주님의 손에 잡혀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보니 장님이 자기가 원하던 목적지에 도달해있듯이 저도 제가 원하던 성경의 바른 이해라는 장소에 도착해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나 된 것은 진실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성경의 올바로 이해하게 하기 위해 저를 어디로 인도하셨을까요? 주님은 저를 어떤 위대한 신학자나 혹은 지혜가 가득 찬 책으로 인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놀랍게도 주님은 저를 겸손의 골짜기로 인도하셨습니다.
 
잠 11:2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 14:6 “거만한 자는 지혜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거니와...”
 
인간이 한계의 벽에 부딪쳤을 때 그것을 뛰어넘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바울이 고백한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고전 15:10). 그런데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벧전 5:5).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돌파를 경험하려면 낮아져야 합니다. 철저하게 낮아져서 주님의 은혜의 보좌로 기어가야 합니다. 그것이 비결입니다.
 
(1) 주님은 저의‘지식’을 부정하는 낮은 곳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소경과도 같았던 저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제가 그동안 배우고 알고 있는 것이 절대적으로 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먼저 그것을 깨닫고 인정하게 하시고 집중적인 성경 읽기를 통해 사고의 전체적인 틀을 다시 짜게 하셨습니다.
 
딤후 2: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것은 목회자의 가장 으뜸가는 책무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목사님들에 관하여 함부로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놀라실 지도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목사님들이 말씀을 진지하게 분별해본 일이 없습니다.
 
물론 목사님들은 기본적으로 정통교리와 이단사설에 관한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통교리 안에도 많은 상이한 주장과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대개 목사님들은 자기가 목사가 되기 전에 다녔던 교회, 혹은 자기가 다닌 신학교나 소속 교단의 교리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 다음에 그것을 잣대로 다른 교단의 신학이나 가르침을 판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님들이 사용하는 잣대 자체가 신뢰할 만한 것이 못됩니다. 그 잣대 자체가 온전히 곧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이고 쉽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예로, 장로교 목사님들은 거의 다 칼빈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리교와 성결교 목사님은 거의 다 알미니안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침례교나 순복음, 그리고 그리스도의 교회나 구세군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자기 교단과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고수하는 신학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 교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목사님들이 각자 냉철하게 말씀을 분별해보았는데 모두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언제나 자기 교단의 교리로 통일성을 보일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현상이 현실로 나타나는 이유는 목회자들이 거의 무비판적이거나 편파적으로 자기 교단의 교리를 받아들이고 성경을 사용하여 자기 교단의 교리를 냉정하게 분별하는 일이 아주 드물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자기 교단의 교리를 분별하는 것, 이것은 꼭 필요한 일이고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신학생들에게 이 일의 중요성을 지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학자들과 교수들 자신이 그런 근원적인 분별 작업을 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그 필요성을 제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신학자와 목회자들은 그런 필요성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런 사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외적으로 그 필요성을 예리하게 지적한 신학자가 있는데 잭 디어입니다. 잭 디어는 “놀라운 성령의 능력”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신학 교수들이 그들의 경험이 아니라 성경이 그들의 교리를 좌우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달라스신학교의 어느 교수에게 천년왕국에 대한 그의 견해를 물어본다면, 그는 자신은 전천년주의자 라고 말할 것이다... 당신이 그에게 왜 그것을 믿는지를 물어보면, 그는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출신의 어느 교수에게 동일한 질문을 한다면, 그는 아마도 자신이 무천년주의자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왜 그가 그것을 믿는지를 묻는다면, 그는 그것이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것이다.”
 
잭 디어는 이처럼 교수들이 자기의 견해가 성경의 명백한 가르침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나는 이것이 전적인 사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그들이 정말 진정한 성경연구의 결과로 자기들의 견해에 도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중요한 논증을 했습니다.
 
“만일 당신이 천년왕국에 대한 견해를 갖지 않은 한 학생을 선택해서 그를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보낸다면 그는 아마도 무천년주의적 견해를 갖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동일한 학생을 달라스신학교에 보낸다면 그는 거의 틀림없이 전천년주의자가 될 것이다. 이러한 법칙에는 예외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신학적 전통과 우리의 스승들은 우리가 깨닫는 것보다도 훨씬 더 우리가 믿는 것과 관계가 있다. 어떤 경우에 그들은 성경 그 자체보다도 우리가 믿는 것에 훨씬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여러 해 동안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것의 대다수가 그들 자신들의 끈기 있고 면밀한 성경 공부에서 유래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스도인들의 대다수는 경건하고 존경받을 선생들이 그들에게 그것이 옳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믿고 있는 것을 믿는다. 나는 이것이 수백 가지의 방법으로 예증되는 것을 보아왔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아닙니까? 충격적이지만 진실을 말씀드리자면 대부분의 주석과 신학서적, 대부분의 강해설교집과 성경공부 교재, 그리고 대부분의 설교자들의 설교와 심지어는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에 이르기까지 이런 불완전한 과정을 통해서 탄생되었습니다. 즉 거의 대부분의 주석과 강해집과 설교들이 사실상은 다림줄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실 눈대중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보기에는 바르게 보여도 다림줄처럼 절대 바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완전 무오합니다.
 
성경은 다림줄입니다. 그래서 저는 다른 책들을 읽고 연구하기보다 거의 성경 한 권만을 읽으며 성경 자체를 파고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을 때 전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읽었습니다. 전에는 성경을 읽을 때 깨닫기 위해서 읽었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리고 자동적으로 그 동안 배우고 들은 것을 통해 형성된 나의 사상들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이런 색안경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그것이 분별된 것이 아니며 옳지 않다는 것을 저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 옳지 않은 것처럼 너 역시 옳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버리고 오직 성경으로 채우기 위해 성경을 읽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을 읽다가 ‘어 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데. 왜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하는 생각이 들면 그 순간 무조건 내 생각을 버렸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으로 내 머리를 채웠습니다. 이것은 아직 성경을 깨달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아무리 깊이 들어가도 성경의 문자와 문맥의 의미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여러 단계의 깊은 사고를 통해 도달한 고차원적인 깨달음이라도 항상 그 결론이 성경의 문자적인 내용과 일치해야 합니다. 그래야 바른 해석입니다. 따라서 아직 해석을 못하더라도 이렇게 성경 자체로 머릿속을 도배하고 바꾸어놓는 것은 성경해석을 위한 올바른 틀을 만드는 것이며 꼭 필요한 일입니다.
 
(2) 주님은 저의 ‘지성’을 부정하는 낮은 곳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소경과도 같았던 저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기 위해 다음으로 하신 일은 성경 해석에 대해서 온전히 성령님만을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바른 것은 성경뿐입니다. 그리고 바르게 알고 있는 분은 오직 성령님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하고 성령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원어에 정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신학교마다 원어를 가르칩니다. 그러나 썬다 싱이 지은 “그 발 앞에 엎디어”라는 책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전심으로 나를 구하는 자에게는 내 말을 통하여 내 자신을 나타내지만 마치 그것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내가 인간의 육체를 입은 것과 같다. 영이요 생명인 내 말(요 6:63)도 사람의 언어 중에 쓰여져 있으므로 그 중에는 영감으로 된 것과 인간적인 것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을 이해하는 데는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필요한 것이 아니요, 그것을 쓴 선지자와 사도들 중에 임하였던 성령과 친히 교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의심할 것 없이 성경의 의미는 영적이다. 학자든지 아니든지 유식 무식을 물론하고 다만 영으로 거듭난 자만이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국어인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지혜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인 줄 알라. 그들은 성령과 전혀 교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가 모국어였고,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주제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원어나 다른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성령님께 달려 있습니다.
 
요일 2: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고등학교 시절 성경을 읽을 때 이 말씀이 저에게 레마로 다가왔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이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았습니다. 저는 성령님이 참되고 거짓이 없는 모든 것을 저에게 가르쳐주실 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저의 개인적인 성경교사로 모셔 들였습니다. 저는 실제로 성령님을 “가장 위대한 나의 스승이신 성령님”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저의 지식과 지능 그리고 사고력과 분별력의 한계를 처절하게 인식하고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것처럼 철저하게 성령님께 달라붙었습니다. 마치 요셉이나 다니엘이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고 실제로 하나님을 의지한 것처럼 저는 성경에 대한 참된 해석은 오직 성령님께 달려 있다는 것을 믿었고 성령님을 전심으로 의지했습니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것은 능력을 얻는 비결일 뿐 아니라 지혜를 얻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을 얻으려하면 우리는 전심으로 주를 향해야 합니다. 즉 전심으로 주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신학생 시절 저는 저의 한계와 부족 때문에 물 녹듯이 녹아내리는 마음을 가지고 성령님께 가르침과 조명과 분별을 전심으로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여러 해 동안 저는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진짜 저의 스승이 되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저의 스승이 되어 주시자 성경을 읽는데 그야말로 정신없이 깨달아졌습니다. 저는 자주 성경 반 페이지를 읽는데 2시간 혹은 4시간이 걸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이에 깨달아지는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한 구절과 읽으면 그와 관련된 성경 구절 7개가 떠올랐습니다. 그중 한 가지를 찾아보면 또 다시 즉각 7개가 떠올랐습니다. 다시 그중 한 가지를 찾아보면 다시 7개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볼펜을 다 끼우고 손가락을 따 끼워도 떠오르는 것을 다 찾아보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내게 말씀을 주사...”(엡 6:19)라는 기도 요청을 한 적이 있는데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 저에게 임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히 성경 한 구절의 의미가 아니라 요약 설교의 형태로 설교가 한 편씩 수시로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성경을 읽거나 기도할 때 뿐 아니라 길 가다가, 버스에 앉아 있을 때, 밥 먹을 때, 화장실에 가서 앉아있을 때, 사람들과 대화할 때, 잠을 자려고 누웠을 때 불시에 설교가 한편씩 깨달아졌습니다. 그렇게 임하는 설교가 1년이면 수백 편씩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 신기한 것은 잠을 자면 자주 꿈속에서 밤새도록 성경을 읽었습니다. 저는 이런 경험을 매우 자주 했습니다. 또 때로는 밤에 자고 있을 때 제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밤새도록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데도 아침이 되면 전혀 피곤하지 않고 너무나도 상쾌하고 개운했습니다.
 
자주 저는 제가 말씀이라는 바다의 한 가운데, 가장 깊은 곳에 빠져 있다고 느꼈습니다. 태평양 바다 한 가운데 깊이 빠져 있으면 손이고 발이고 만져지는 곳마다 다 물인 것처럼 마치 말씀이 그렇게 쉽게 그리고 풍성하게 깨달아졌습니다. 이것은 제가 머리가 좋거나 뛰어나서 생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제가 제 ‘지식’ 뿐 아니라 ‘지성’의 한계를 철저하게 인식하고 마음이 깨어지고 낮아져서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철두철미하게 의지했기 때문에 은혜로 제가 일어난 일입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3) 주님은 저의 ‘영성’을 부정하는 낮은 곳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소경과도 같았던 저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올바로 이해하게 하기 위해 그 다음으로 하신 일은 제가 성령님께 성경을 배우는 성령학교의 제자 중 뛰어난 제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얻기 전에 이미 지혜 있는 아들이었습니다(왕상 2:9). 그러나 그는 지혜의 부족을 깊이 느꼈고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때 전무후무한 지혜가 그에게 임했습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갑절의 능력을 받기 전에 이미 영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선생을 하나님께서 머리 위로 취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선지자 생도들에게 “나도 아니 너희는 잠잠하라”고 말한 것에 잘 나타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감의 부족을 심각하게 느꼈고 갑절의 영감을 구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의 갑절의 영감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저를 같은 길로 이끄셨습니다. 앞에서 간증한 대로 말씀이 저에게 임하고 늘 말씀이 깨달아졌지만 저는 신학교 뒤에 있는 큰 산인 수리산을 보며 항상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저 큰 산이 말씀이라면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 산의 나무 중 낙옆 하나가 떨어져서 썩어서 생겨나게 된 먼지보다 더 작은 입자 하나에 불과하다. 그러니 말씀의 세계가 얼마나 무한하고 넓은가? 내가 아는 것은 얼마나 적은 것이며 내가 모르는 것은 얼마나 많은가? 아,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이런 생각이 들면 저는 말씀의 더 깊은 이해를 사모하는 사모함 때문에 마음이 마치 타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시 119:96-97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으니이다. 내가 주의 법을 어찌 그리 사랑하는지요. 내가 그것을 종일 묵상하나이다.”
 
저는 신학생 시절 성경을 읽으면서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은 심히 넓다”는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절감했습니다. 그래서 그칠 줄 모르는 배고픔을 가지고 성경을 읽고 성령의 조명과 가르치심을 구하고 또 구했습니다. 그러자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들이 실제로 제게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시 119:98-100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할렐루야!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은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제가 자신의 지식뿐 아니라 지성을 부정하고 성령님께 온전히 매달리자 성령님이 실제로 저의 스승이 되어 주셨습니다. 날마다 말씀이 풍성하게 깨달아졌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히 5: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보십시오. 히브리서 기자가 멜기세덱에 대한 주제가 어려워서 해석이나 설명을 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독자들이었습니다. 아무리 제대로 설명을 해도, 마치 대학교수가 대학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제대로 설명을 해도 초등학생들이 알아들을 수는 없는 것처럼 제가 바로 그랬습니다. 성령님은 완전하셨지만 제가 너무나도 불완전했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 배우는데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러자, 성령님께서 내가 성령학교의 가장 뛰어난 제자가 아니며 저보다 뛰어난 많은 제자들이 역사상 그리고 지금도 존재함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보다 더 깊이 성령의 가르침을 받았던 기독교 위인들의 책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해주셨고 그 책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부터 성경 뿐 아니라 그런 책들을 걸신들린 듯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은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의 저의 설교와 책들이 있게 된 것입니다.
 
한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며 그런 믿음으로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지혜로는 해결할 수 없는 구원론에 대한 몇 가지 의문과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답을 찾기 위해 여러 책을 읽었으나, 그 어느 책에서도 제 마음의 의문을 해결해주는 시원한 답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그런 실망이 되풀이되자 이제는 책이나 설교를 통해 나의 의문을 푸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어지지가 않았고 체념 상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찰스 피니의 자서전을 읽다가 저는 매우 흥분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습관은 항상 복음과 그 최선의 적용을 연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시간과 날짜를 잡아서 설교를 준비하지는 않는다. 나는 항상 복음의 진리와 그것의 적용을 위한 최선의 길을 묵상하고 있다. 나는 사람들 속에 들어가서 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찾아낸다. 그런 다음 성령의 조명 밑에서 그들의 당면한 필요를 채울 수 있으리라 생각되는 주제를 택한다. 그것에 대해 집중적으로 묵상하고 일요일 아침에는 그 주제를 놓고 많은 기도를 한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내 마음을 가득 채운 다음, 가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쏟아놓는다...
 
나는 엄숙히 말할 수 있다. 설교 원고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훨씬 더 많이 연구했다고 말이다. 나는 설교하고자 하는 주제에 익숙해지도록 노력해야만 했으며, 나의 마음을 그것으로 채워야만 했고, 그런 다음에는 가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말해야만 했었다. 나는 가장 간략한 방법으로 그리고 설교 중에는 사용하지 않을 말로, 주된 요점을 기록했다.
 
내가 처음 설교를 시작했을 때에는 이것조차하지 않았다. 내 사역의 초기 12년 동안 나는 단 한 단어도 기록해두지 않았으며, 기도 중에 얻은 것 외에는 어떤 준비도 하지 않고서 설교하는 것이 예사였다. 그때그때 경우에 따라 설교했으며 성령께서 본문을 주시고 그 주제를 내 마음에 전개시켜 주시는 대로 설교했다. 내가 영감에 의해 설교한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설교한 것인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내가 말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직관적인 확신을 가지고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과 단어와 예증의 덩어리는, 전달될 수 있는 만큼 빠른 속도로 나에게 몰려왔다. 처음으로 설교의 요약을 기록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나는 그것을 설교 전이 아니라 설교 후에 기록했다. 그것은 내가 받은 사상의 대략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설교할 때에는 그 요약들을 재구성하고 또 성령께서 주시는 신선하고도 새로운 사상을 덧붙여야만 그것을 다시 사용할 수 있었다.
 
나는 항상 무릎 꿇고 기도하는 중에 설교 주제를 얻는다. 그리고 성령으로부터 설교 주제를 받을 때는 마음에 너무나 큰 자극이 오기 때문에 떨면서 겨우 그것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은 나에게 흔한 일이었다. 몸과 영혼을 꿰뚫고 지나가는 것 같은 주제가 나에게 주어지면 수분 안에, 성령께서 제시하신 관점을 뒷받침할 수 있는 요약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한 설교는 항상 강력한 힘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었다.”
 
저는 찰스 피니의 이러한 고백을 읽으면서 감동으로 몸을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임할 때의 저의 체험과 너무나도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피니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제껏 구원론에 대한 참 진리를 알기 위해 책을 읽었지만 실망만 하였다. 대부분의 설교자들과 저자들은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하여 해답을 주기는커녕 그것을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여기 내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말씀을 받는 사람이 있구나. 더구나 그는 한 시대에 대표적으로 하나님께 쓰임을 받은 인물로 나와 비교할 수도 없는 영적 고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는 내가 궁금해 하는 것에 대한 해답을 틀림없이 갖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독교서점에 가서 제목도 보지 않고 찰스 피니의 책을 닥치는 대로 사서 읽었습니다. 저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저는 찰스 피니의 책을 읽으면서 제가 궁금해 하던 것에 대한 만족할만한 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제 눈은 밝아지고 저의 이해력이 증진되었고, 성경의 의미들을 보다 명백하게 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도 저는, 어거스틴, 존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토마스 맨톤, 조셉 얼라인, 토마스 왓슨, 썬다 싱, 찰스 하지, 에이든 토저, 케네스 해긴,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의 책에 이르기까지 여러 종류의 책을 분별하면서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말씀을 체계적으로 깨달아갔습니다.
 
신학을 하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한 권의 책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 한 권만 읽고 의존한다.’ 이것은 참 멋있게 들립니다. 실제로 유명한 스미스 위글스워스 목사님도 책 한 권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성경 한 권만 읽으면 성경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완전하지만 우리의 이해력이 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서간 하나님의 사람들의 책을 겸손한 마음으로 읽어야 합니다. 읽고 그들이 성령님께 깊이 가르침 받은 것을 배우고 흡수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을 바르고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찰스 피니와 비교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닙니다. 제가 성경을 공부하는데 1학년 신입생이라면 그는 6학년이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저의 영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성경만 읽던 데서 돌이켜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성령학교의 탁월한 선배님들의 책을 열심히 읽고 거기에 들어있는 진짜 엑기스인 성령의 정확하고 깊은 가르침과 계시들을 계속적으로 흡수하자 나중에는 말씀에 대한 이해력과 분별력이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정도로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은 찰스 피니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이해할 수도 있고 그가 분별하지 못했던 것을 분별하고 균형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믿기로는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사랑하는 독자 여러분, 지금까지 제가 한 말들을 잘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제가 했던 것처럼 성경을 교과서로 삼고 성령님을 스승으로 삼으십시오. 먼저 성경을 열심히 읽으십시오. 그리고 교만하여 성령님의 직접적인 가르침만 고집하지 말고 역사 속에서나 혹은 현재 성령님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고 정확한 가르침을 받은 성령학교의 선배님들의 책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읽으십시오. 그러면 서서히 성경을 성경 저자들이 의도한대로 제대로 이해하게 될 것이며, 말씀에 관한 통념이 아닌 진정한 분별력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참된 말씀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4) 특별한 노하우-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십시오!
 
소경과도 같았던 저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서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하기 위해 끝으로 하신 일은 저를 포함한 모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의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검증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성령님께서 부분 부분 내려주신 정확한 계시들에 주목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먼저, 유대인들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성경을 알았지만 그러나 많은 오해와 착각 그리고 무지가 그들 속에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율법에 대해서 문자만 알고 정신을 알지 못했으며, 메시야에 대해서 정치적인 인물로 오해했고, 성경과 무관한 많은 장로의 유전과 사람의 계명들을 진리로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누가 사람의 눈대중으로 보기에는 바른 이런 삐뚤어진 것을 바로 잡았습니까? 누가 영적인 다림줄을 그 손에 가지고 있었습니까? 놀랍게도 그들은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가르치는 가말리엘 같은 뛰어난 랍비나 율법사들이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이었습니다. 이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단순히 전통적이거나 학문적이지 않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받은 계시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랍비들이나 율법사들이 아닌 바로 이런 분들이 바른 다림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른 데로 인도했습니다.
 
또, 교회사를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교회 역시 장로의 유전과 사람의 계명에 비할 수 있는 각종 교리와 신조 그리고 잘못된 해석에 영향을 받아왔습니다. 그런데 교회사에서 다림줄을 가지고 있었던 분들은 누구일까요? 그들은 머리 좋은 학자들이 아닙니다. 단순히 지성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의 음성을 정확하게 듣거나 성령의 깊은 계시를 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자면 존 웨슬리, 찰스 피니, 썬다 싱... 케네스 해긴 같은 분들이었습니다. 이런 분들은 교리를 추종하는 것을 뛰어넘어 다림줄을 그 손에 들고 당대의 교회들을 바로 잡고 옳은 데로 인도하는 일에 하나님께 놀랍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진리가 불투명한데 특히 구원론이 그러합니다. 이에 대해 유명한 성경교사인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가 구원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선포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구원의 메시지를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선포되는 구원의 메시지에는 극히 일부의 진리만이 내포되어 있을 뿐, 그 핵심적인 내용은 배제되어 있습니다.”
 
릭 조이너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교회가 시작된 첫 세기부터 복음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쉽고 사람들과의 언쟁을 피하기 위해 조금씩 변질되어 왔다. 이러한 경향은 그들의 귀에 거슬리지 않고 좋게 들릴 수 있으나 경감된 믿음을 전해 줌으로 인해 교회와 신실한 하나님의 진리에 많은 문제점을 가져왔다. 이것은 진리가 심히 왜곡되기에 이르렀으며 그로 인해 많은 외식들이 자리 잡게 됨으로 말미암아 현재 교회는 역사상 가장 어두움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제프리 윌슨은 조금 과격합니다만 “뒤틀려진 복음”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전 세계 기독교의 현재 상태를 면밀히 분석해보면 방심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의 '기독교'는 어지럽고 썩은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현대 기독교의 부패성은 해마다 더 썩어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는 절대 다수의 교회 참석자들에게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공통분모를 만들기 위해 타협되고 희석되었습니다. 그 결과는 잡종 기독교의 탄생입니다... 이 같은 현대 기독교의 타락은 대체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많이 유포되고 있는 거짓된 복음에 기인된 것입니다.
 
여러 세기 동안 퍼져 온 이 엉터리 복음은 예수님과 그의 사도들이 제시했던 메시지와 근본적으로 모순됩니다. 이것은 '싸구려' 복음이며 '편의주의' 복음으로서 ‘안일한 신앙’(easy believism)이라고 불려집니다. 유감스럽게도 이 거짓된 복음이 오늘날 많은 복음주의 교회들에 진입하였고, 라디오, TV, 기독교 잡지, 부흥회, 기독교출판물 등에서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나 단순히 예수님을 자기 '개인의 구주'로서 '믿거나' 혹은 '영접'하면 된다고 말합니다. 이 복음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님이 자신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것을 믿거나 또는 영생의 ‘거저 주는 선물'을 받기만 하면 구원 됩니다.
 
이 '안일한' 복음에는 회개에 대한 요구가 빠져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자는 자신의 죄들로부터 떠나고 자기를 부인해야 한다는 가르침이 이 복음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던지고, 그분을 온전히 따르며 복종하려는 진지한 소원으로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겨야 한다는 가르침도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저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보장을 받으려고 예수님을 '한 분의 구주'로서 기꺼이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주님 자신이 내거는 조건으로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삶의 모든 부분을 지배하는 것을 원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회개나 그리스도의 전적인 통치를 요구하지 않는 이 안일한 복음은 다수에게 호응을 받으면서 점점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이와 같이 변질된 기독교의 복음을 성경 그대로 바로 잡을 수 있을까요? 과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오랜 세월을 통해 변질 되고 왜곡된 진리들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사람은 성령 충만하고 계시적인 사람들입니다. 즉 단순히 지적이지 않고 계시적인 현대의 사도들과 선지자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이해하는 것과 계시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계시는 성경을 가장 바르게 이해하는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성도의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교리를 예로 삼아 이 문제를 설명해보겠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 이것은 굉장히 오래된 논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차이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장로교와 감리교라는 교단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가 아니라, 복음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차이입니다. 일예로, 저는 장로교단에 소속되어 있으나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많은 목사님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은 대부분 성령 충만하고 은사주의적인 분들입니다.
 
데이비드 포슨은 그의 탁월한 책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인가?” 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복음주의자들은 특별히 제3세계의 오순절의 급격한 증가세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19세기의 성결 운동을 거쳐 18세기의 웨슬리 부흥운동까지 그 계보가 이어지기 때문에 알미니안주의적인 경향이 있다. 소수의 사람들은 ‘개혁’신학을 받아들이지만 의사 표명을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은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21세기가 되면 아마도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을 포기하는 흐름을 더 잘 볼 수 있을 것이며, 이 일에 이 책도 작게나마 기여할 것이다.”
 
일예로, 오순절적인 부흥운동으로 유명한 아주사 가의 부흥을 일으켰던 윌리암 세이모 목사는 “구원받아도 육적 행동을 하면 구원을 잃는다”고 믿었습니다. 인도의 성자 썬다 싱과 드와이트 무디도 알미니안이었습니다. 제가 존경하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과 유명한 치유전도자 베니 힌, 그리고 아이합(IHOP)의 마이클 비클 역시 알미니안입니다. 그리고,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후임자인 이영훈 목사님, 주안장로교회의 나겸일 목사님, 장경동 목사님, 전광훈 목사님 그리고 전태식 목사님 등 많은 분들이 구원 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오순절적인 사람들 중에 구원받은 사람이 버림받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일까요?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히 성경을 텍스트로 두뇌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계시에 대하여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경우처럼 때로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자기들의 잘못된 교리들을 극적으로 교정 받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성경에 나오는 바울이나 인도의 성자 썬다 싱의 경우처럼 입신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영으로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면 예수님이 칼빈주의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항상 모든 사람이 구원받길 원하시며 그들 모두에게 호소하고 계시고, 그리고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경고하십니다. 그래서 지식의 많고 적음을 떠나서 오순절적인 사람들은 성경 그대로의 견해를 가질 수 있는 잇점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아도 ‘성령께로부터 오는 계시가 성경에 대한 가장 믿을만한 빛을 던져줄 수 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연한 것입니다. 가끔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성경 해석에 있어서 합리성을 믿지 않습니다.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정보의 종류, 혹은 분량에 의해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전지하지 않으며 부분적으로만 압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성경을 잘못 해석할 수 있고 잘못된 견해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성령님은 전지하십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주시는 환상이나 입신 경험에는 그것이 성령께로부터 온 것임이 정확하게 분별된 경우, 그 안에 완전한 지식을 가지신 성령님의 관점이 담겨져 있습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시며 성경의 진정한 저자이십니다. 따라서 참된 계시는 성경에 대한 가장 순수하고 완전한 이해력과 분별력을 얻을 수 있는 영적인 보고(寶庫)요 원천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마치 안식일교회처럼 환상이나 계시에 기초해서 교리를 만들자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교리의 근원은 성경이지 절대로 계시가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초청 받아 가기 전에 본 환상처럼 계시들은 때때로 성경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편견 때문에 잘못 알고 있는 교리나 어떤 진리를 바르게 규명하여 주며 성경적인 교리를 드러내거나 확증해줍니다. 이 때문에 저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의 검증된 환상이나 입신 경험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저는 모든 환상이나 계시를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심스런 분별을 통과하고 성경적으로 정확한 것인 경우,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제목처럼 “나는 환상을 믿습니다.”(욜 2:28) 왜냐하면 그냥 계시가 아니라 분별된 계시는 성경은 아니지만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일종의 그리고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고 했습니다. 음성은 단순히 성경이 아니라 계시입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르느니라” 라고 했는데 이것은 주님의 음성이 그릇된 것이 아니라 바르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너무 말씀 말씀 하지 말고 분별된 계시를 존중해야 하며 성령의 계시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는 계시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지 않고 앵무새처럼 늘 말씀 말씀 하는 설교자 중에 정말로 말씀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을 한 사람도 알지 못합니다. 실제로 많은 목회자들이 계시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지 않고 단순히 자신의 지성과 신학적인 지식과 정보, 그리고 자신의 판단력만 의지하기 때문에 진리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리고 배우는데 놀랄 정도로 둔하고 더딥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그리고 다반사로 수많은 목회자들과 심지어 대형교회 목회자들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부인할 수 없는 이 시대 교회들의 현실입니다.
 
바울은 가끔 성경에서 “내가 비밀을 말하노니”라고 말했습니다. 저도 여러분에게 비밀을 하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올바른 주의 종들이 받는 계시라 할지라도 그 계시의 차원이 서로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의 계시는 은혜를 받는 데는 좋으나 성경 이해의 뼈대를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 있고, 어떤 사람들의 계시는 단순히 은혜가 되는 것을 넘어서서 성경 이해의 중요한 골격이 되어주는 계시가 있습니다. 저는 편의상 그것을 ‘간접적인 차원의 계시’와 ‘직접적인 차원의 계시’라고 부르는데 이 둘 사이의 차이를 알고 분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두 분 다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전혀 악의 없이 여러분에게 분별력을 제공하기 위해 베니 힌과 케네스 해긴 목사님을 예를 들어 설명해보겠습니다.
 
베니 힌은 세계적인 치유복음전도자입니다. 반면에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선지자요, 교사이십니다. 따라서 계시적인 분야에서 두 분을 비교하여 보는 것이 베니 힌 목사님께 큰 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케네스 해긴에게 전공인 그 분야가 베니 힌에게는 부전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베니 힌의 명성이 하늘을 찌를 때 한 번도 이름을 들어본 일이 없는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을 서점에서 사서 읽었습니다. 그리고 대번에 이분은 단순히 세계적인 종이 아니라 구약의 이사야나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비견할 수 있는 그런 선지자라는 것을 제 영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책을 심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아서 읽었고 예상대로 그분의 책은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두 분이 받는 계시가 어떻게 다른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단적인 예로, 베니 힌 목사님의 책에는 신학적인 혹은 교리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이 없습니다. 그냥 본인이 알았던 것을 더 깊이 아는 그런 유형의 계시입니다. 물론 전혀 새로운 것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성경 이해에 대한 확장은 있어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계시를 받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유형의 계시들을 받습니다.
 
반면에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에 보면 패러다임의 전환의 경험이 있습니다. “나는 환상을 믿는다”라는 그분의 책을 예로 들면, 거기에는 “지금도 사도들이 존재한다”, 그리고 “구원 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패러다임의 극적인 전환이 있습니다. 케네스 해긴 목사님은 본래 지금은 사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사람은 절대로 버림받을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직접 그에게 나타나셨고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과 성경적인 가르침을 통해 지금도 사도가 존재하고 구원받은 사람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견해가 영원히 바뀌었습니다.
 
이렇게 이 두 분이 받는 계시는 서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베니 힌 목사님의 책과 같은 범주의 책을 읽을 때는 사모하는 마음으로 은혜를 받기 위해서 읽습니다. 그러나 그런 책을 읽고 쉽게 제 견해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케네스 해긴 목사님의 책을 읽을 때는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분별력을 얻기 위해서 읽습니다. 그리고 상당 부분에서 저의 견해를 바꿉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다 직접적이고 정확한 계시라는 것을 제 영이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어떤 사람의 계시에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고 다른 사람의 계시에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없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간접적인 차원의 계시는 계시의 주체가 성령님과 자기 자신 두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계시의 주체가 성령님 한분이어야 하는데 자기 생각이 살아 있어서 자꾸 성령님과 자기 자신으로 주체가 바뀝니다. 다시 말해서 계시가 순전히 성령님이 내주하고 계신 영에서 나와야 하는데 혼에서 나왔다 영에서 나왔다합니다. 특히 가르침인 경우 어떤 때는 영이 말하고 어떤 때는 혼이 말합니다. 이렇게 계시의 주체가 바뀝니다. 이때 사람들은 혼으로 받는 계시를 성령께로부터 온 계시로 착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성령의 감동이 있고 성령으로부터 계시가 임할 때 거의 동시에 자기 생각이 섞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임한 성령의 감동 때문에 혼이 말하는 것까지 전부 참된 계시로 착각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런 현상은 꿈, 환상, 예언, 말씀에 관한 조명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입신까지도 예외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입신을 할 때 혼은 세상에 두고 영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같이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유형의 계시이든 무분별하게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철두철미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간접적인 차원의 계시도 그 출발은 성령님입니다. 그러나 고정관념과 편견 때문에 자기 머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계시가 오더라도 머리 안에서 맴돕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것을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더 잘 알게 합니다. 희한한 것은 이런 계시는 잘못 아는 것조차 더 자세하게 잘못 알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설교자들이 잘못된 교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그 교리적인 내용을 더 잘 설명하게 되는 웃지못할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반면에 직접적인 계시는 자기 머리를 넘어서서 온전히 영의 영역으로, 혹은 영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영으로 하는 기도인 방언기도가 머리가 모르는 것을 알고 기도하듯이 자기 머리가 모르는 것을 알게 하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을 바르게 알게 하여 패러다임의 전환을 일으킬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간접적인 차원의 계시는 혼과 영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즉 어떤 때는 혼이 말하고 어떤 때는 영이 성령을 통해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직접적인 계시는 혼은 배제되고 영이 활동하면서 계시는 받는 것입니다. 순전하게 영에 거하시는 성령을 통하여 계시를 받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만큼 정확하고 권위가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확대시켜볼까요? 계시의 이와 같은 두 가지의 구분은 설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설교는 혼과 영이 뒤죽박죽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설교자들은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자기 머리를 뛰어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런 것은 영적인 다림줄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보기에는 바르게 보여도 주님이 보시기에 정확하게 바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어떤 설교는 혼은 배제되고 그 설교가 영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설교를 하셨습니다.
 
요 7: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이와 같이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과 설교는 예수님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로부터 즉 아버지의 영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곧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저 역시 저의 책과 설교에 대해서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고 또 말할 때 권세 있는 자와 같이 말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것은 제가 교만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제 혼이 아니라 영,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내 영 속에 거하시는 성령께로부터 나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것이 제 혼에서 나온 것이라면 저는 그것을 낮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하나님의 것을 제가 낮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즉 제가 저를 낮출 수는 있지만 저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을 낮출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러므로 우리가 쉬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만약 인간 중에 자기의 지성과 연구를 통해 성경을 바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다름 아닌 바울이었을 것입니다. 어떤 신학자도 감히 자기의 지성이나 이해력이 바울보다 뛰어나다고 말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바울은 바리새인이고 유대교의 율법에 정통한 사람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는 당대 최고의 랍비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과연 성경을 제대로 깨달았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을 이단이라고 생각했고,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비로소 인간의 학문과 지성으로는 성경을 제대로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3년간 아라비아 광야에 들어가서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오직 성령님만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해했습니다. 그 후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전 2:6-14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취었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공사 현장에서 사람이 다림줄을 사용하지 않고 눈대중으로 담을 쌓으면 아무리 바르게 쌓아도 높이 올라가다 보면 좌로나 우로 기울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 지성의 한계입니다. 이것은 어거스틴이나 조나단 에드워즈나 로이드 존즈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조건 높이 쌓아올려 갈 것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시며 성경의 저자이신 성령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때때로 극적으로 분명하게 계시해주시는 그런 조명과 계시에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잘만 이용하면 그것들은 성경과 마찬가지로 일정부분에 대한 다림줄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들을 사용하여 과연 우리가 제대로 알아왔으며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를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는 마지막 비결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하나의 이론이 아닙니다. 그것은 제가 체험한 실재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중 특별히 신학생이나 목사님들은 제가 소개해드린 이 4가지 원리를 꼭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십시오. 눈대중으로 설교하고 목회하는 자가 아니라 스룹바벨처럼 다림줄을 그 손에 든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뒤틀린 복음과 현대 교회를 바로 잡고 부흥시키는 일에 크게 쓰임 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3. 지금은 다림줄의 중요성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할 때입니다.
 
저는 과거에는 다림줄의 가치를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최근 다림줄의 가치에 대해 새롭게 눈을 떴습니다. 그것은 아주 중요하고 그리고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내용입니다. 그래서 제가 최근에 알게 된 것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슥 1:7-17 “다리오왕 이년 십일월 곧 스밧월 이십 사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 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지 칠십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이 말씀에 나타나는 것처럼 먹줄을 쳐야 무너졌던 예루살렘이 다시 건축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다림줄인 말씀이 성경 그대로의 의미대로 회복이 되어야 교회가 주님이 의도하신 대로 반듯하게 다시 건축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바로 회복과 부흥입니다. 그때 부흥이 오는 것입니다.
 
슥 4:6-10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 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찌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여기서도 다시 예루살렘의 건축과 회복을 말하고 있는데 그 일에 쓰임 받을 사람은 스룹바벨입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다림줄이 있었고 그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만약 손에 다림줄이 없으면 성전을 잘못 지을 것입니다. 다림줄이 있어야 하나님 마음에 들게 바르게 지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를 세우고 회복하는 일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제대로 회복시키려면 영적인 다림줄인 말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를 바르게 하나님의 뜻대로 회복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손에 다림줄을 가지고 있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며칠 전 제가 부산 큰믿음교회에 “다림줄”에 대해서 설교하러 내려갔을 때 PD 한 사람과 카메라맨이 찾아와서 저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작비’(JACB)라는 곳에서 나왔다며 저에게 자신들을 소개를 했는데 저는 처음 듣는 이름이어서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후 2007년 2월 26일자 국민일보에 “‘작비’ 한 마음 부산 부흥 불길 타올랐다”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크게 난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곳에 보니까 ‘작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해놓았습니다.
 
“'작비(JACB) 2007'
'Jump Busan 2007', 'Awakening 2007', 'CM 2007', 'Busan 그래함 페스티벌’의 앞글자로 올해 부산에서 열리는 대형 집회 4개를 지칭한다. 부흥의 첫 신호탄 ‘점프 부산’(5,000명 참석)이 성공적으로 끝났고 ‘부산 대부흥(Awakening) 2007’은 5월 27일 해운대 해수욕장에서 10만 명이 모여 부흥을 위해 기도한다. 7월 2일에는 CCC가 주관하는 ‘CM 2007’이 벡스코에서 시작된다. 세계 150개국에서 2만 2000명의 대학생들이 모인다. 10월 18일부터 열리는 ‘부산 프랭클린 그래함 페스티벌’(빌리 그래함의 아들)은 ‘작비 2007’의 하이라이트. 부산 전 지역 모든 세대를 향한 총력전도 집회인 이 행사는 비기독교인을 초청하여 복음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들이 와서 저에게 하는 말이 부흥에 대해서 앞으로 있을 대형 집회들의 홍보 동영상과 CTS에서 방영될 작품을 하나 찍어야 하는데 어떻게 방향을 잡아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부흥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부흥이 어떻게 일어나야 하는지를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떻게 저를 찾아왔느냐고 했더니 어떤 분이 부흥에 대해서 알려면 변승우 목사를 반드시 찾아가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디오로 찍으면서 인터뷰를 했는데 부흥의 비결에 대해서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부흥의 비결은 세 가지로 요약 정리해서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흥이 일어나게 하려면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부흥은 새 술에 비할 수 있고 옛 부대에는 담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것에서 벗어나야 하며 성령께로부터 오는 새로운 차원의 메시지와 현상과 역사들을 수용할 수 있는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종교성에서 벗어나 새 부대가 되지 않으면 부흥이 오면 부흥을 환영하는 자가 아니라 부흥의 대적이 될 것입니다.
 
일예로,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렸지만 막상 메시아가 왔을 때 그들이 생각한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도 부흥을 원한다고 하지만 정말 부흥이 오면 부흥을 향해 돌을 던지게 되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생각한 부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을 원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하므로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부흥이 일어나게 하려면 말씀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종교성에서 벗어나서 새 부대가 되어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합니다. 성령세례를 받고 성령의 기름부음과 은사를 받고 예언을 하고 병이 치료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부흥이 일어날까요?
 
아닙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는 복음전도가 일어날 뿐입니다(막 16:15-18). 부흥은 단순히 많은 사람이 모이거나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집단적으로 보일 만큼 많은 사람들이 빠르고 급격하게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말씀으로 거듭납니다(벧전 1:23). 말씀으로 거룩해집니다(요 17:17). 그리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엡 5:26-27) 그리스도의 신부로 준비됩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성경적인 회복을 통해, 말씀이 단순히 가르침이 아니라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는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부흥이 일어납니다.
 
셋째로, 부흥이 일어나게 하려면 주님께 초점을 맞추고 주님의 얼굴을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부흥은 하나님의 방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할 때 시편 24편에 나오는 대로 우리는 주님이 들어오시는 문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의 영광스러운 임재와 영적 심방인 부흥이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 가지를 잊지 말고 지속하며, 특히 세 번째 초점을 끝까지 고수하면 그 부흥은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게 되며 점점 더 강해질 것입니다.”
 
제 기억에 의하면 그 외에도 많은 말을 했지만 대강 이런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저를 전혀 모르고 온 사람들이고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들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목사님을 찾아뵙지 않았으면 우리가 쓸모없는 것을 만들 뻔 했습니다. 이제 어디서부터 무엇을 찍어야 할지 알겠습니다. 어느 정도 찍고 나면 다시 조언을 구하고 검증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맨과 함께 서울로 목사님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돌아갔습니다.
 
제가 간단하게 설명했지만 이것이 바로 진정한 부흥의 비결입니다. 이 중 “부흥을 일어나게 하려면 종교성에서 벗어나서 새 부대가 되어야 한다.”는 첫 번째 원리는 전통적인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입니다. 만약 그들이 계속 옛 부대로 남아 있으면 부흥이 일어날 때 부흥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대적이 되기 쉽습니다. 심지어 부흥이 일어나면 종교적인 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사모하는 마음이 극에 달해 부흥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교회로 대거 이동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두 번째 원리인 “부흥이 일어나게 하려면 말씀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입니다. 오늘날 영성 운동을 하는 많은 분들이 부흥이 성령의 기름부음과 은사와 권능을 통해 일어날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외는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부흥은 그것만으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단순히 성령의 기름부음과 은사와 권능이 아니라 성경적인 말씀의 회복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그래야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 증거로, 죄송한 말씀이지만 영성운동을 하는 대다수의 교회와 큰믿음교회를 비교해보십시오. 한국에 영성 운동을 하는 많은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일부를 제외하곤 교회가 부흥이 안 됩니다. 오히려 전통적인 교회보다도 더 부흥이 안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말씀이 교회 내에서 회복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믿음교회에는 말씀이 있고 성경적인 말씀의 회복이 있습니다. 그래서 영성운동을 하는 교회 중 가장 힘있고 빠르게 부흥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헨리 블랙가비는 부흥의 원리를 다룬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이라는 책에서 “부흥은 하나님의 말씀의 다림줄을 그 백성 한가운데 두시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윙키 프래트니는 “기독교 부흥운동사”라는 책에서 월리스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부흥의 시기에는 많은 영혼들이 설교와 상관없이 구원받는 경우도 있지만 부흥의 시기에 거의 항상 나타나는 특징은 강력한 진리의 설파이다.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행 2:14).
어떤 때는 성령의 부으심이 설교를 통해서 왔고, 어떤 때는 설교가 성령의 부으심에 의해서 왔다.
 
‘사도적인 설교자에게는 구약 시대의 저 대담무쌍했던 선지자를 연상케 하는 꾸밈없는 위엄이 있다.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와 동일한 능력으로 덧입혀졌으며 동일한 용기에 이끌림을 받는다. 왜냐하면 그들의 횃불 역시 동일한 성화(聖火)로부터 불붙여졌기 때문이다... 그들의 선결과제는 영혼들로 하여금 회개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믿는 것과 영접하는 것과 결단을 내리는 것 등에 관해서는 너무도 많이 강조한다. 그 반면에 회개케 하는 이 가장 핵심적인 단계에 관해서는 너무나도 적게 강조한다... 죄의 문제를 충실하게 다루는 설교자만이 영혼들을 소생시킬 수 있다.’”
 
그리고, 존 부트는 “다가오고 있는 하나님의 움직임”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예언적인 말을 했습니다(이 글은 박희권 형제가 저희 교회의 인터넷 카페에 올린 것입니다.)
 
“때는 새벽이었고 태양이 막 어두움을 깨뜨리고 나왔습니다. ‘이것은 엘리야의 영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새 날이다. 과거 10년에 걸쳐 내가 교회 안에 예언의 기름부음을 회복시켜왔다. 하지만 이 기름 부으심은 엘리야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이제 엘리야가 나타나서 회복과 해방을 가져올 것이다.
 
엘리야는 해방자였다. 오늘날 나는 이 세상의 기본 원리로부터 자유롭게 될 한 세대를 일으키고 있다. 엘리야의 영 안에 있을 때 교회는 이세벨의 영, 바알의 힘으로부터 자유롭게 놓임을 받게 될 것이다.
 
십자가의 메시지를 통해서만이 이런 자유함이 생겨날 것이다. 엘리야는 자신의 생명을 사랑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그를 사용하여 사망에서 생명을 가져올 수 있었다. 너희가 십자가의 능력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망을 정복하는 능력을 갖지 못할 것이다.’
 
‘북쪽을 보아라.’ 라고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북쪽을 바라보자, 하늘에서 구름 하나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구름이 커지더니, 맹렬한 폭풍이 되었습니다. 그때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말씀의 비이다. 많은 자들이 나의 영의 비를 기다리며, 기도해왔다. 하지만 이 시간 내가 나의 말씀의 비를 풀어놓고 있다. 그 말씀의 물이 나의 백성을 씻길 것이고,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킬 것이다. 새롭게 하는 때이다. 하지만 나의 말씀으로 새롭게 하는 때이다.
 
나는 나의 몸 된 교회가 이 비를 맞도록 준비시켜왔다. 하지만 많은 자들이 내 말씀의 씻어냄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 땅에 새로운 말씀을 풀어놓고 있다. 그 말씀이 이 땅에서 새로운 칼로서 솟아나올 것이다. 많은 자들이 물을 것이다. 이 새로운 말씀과 흐름이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말씀이 가져올 정결함으로 인해! 하지만 이것을 알라. 내가 점 없는 신부를 예비하고 있으며, 내가 그녀를 갈망하고 다는 것을!
 
내가 교회 내의 미지근함이 더 오래 지속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교회 내의 그 말씀의 무게를 달기 시작해왔으며, 그것이 너무 가볍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곳에서 모든 것이 해체되는 듯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알라. 내가 내 말씀의 수준을 높여왔다는 것을!
 
말씀으로 씻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들은 정결케 되어 엘리야의 영 안에서 놓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하여 그들의 귀를 그들 자신의 메시지와 복음에 기울이는 자들은 더욱 더 미혹을 받게 될 것이다. 많은 자들이 떨어져나갈 것이다. 다른 이들이 다가오는 지각변동을 통해 구원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제가 보기에 이것은 매우 통찰력이 있고 매우 중요한 글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예언의 세 가지 부분에 대한 부연설명을 여러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 “이것은 엘리야의 영이 솟아오르는 것이다. 새 날이다. 과거 10년에 걸쳐 내가 교회 안에 예언의 기름부음을 회복시켜왔다. 하지만 이 기름 부으심은 엘리야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었다. 이제 엘리야가 나타나서 회복과 해방을 가져올 것이다.”
 
피터 와그너와 빌 해몬 박사는 1980년대에 10년간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회복시키셨고, 1990년대에 10년간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회복시키셨다고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사이 많은 선지자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언사역이 활성화 되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고무적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엘리야의 영안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많은 저명한 선지자들이 있지만 나는 그들 중에 엘리야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너무 소수입니다.
 
엘리야는 단순히 계시를 받고 예언한 선지자가 아닙니다.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이킨 사람입니다. 엘리야의 사명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 증거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온 세례요한을 보십시오. 그는 개인 예언을 하거나 국가나 교회를 상대로 예언을 선포하는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이것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이것이 선지자 사역의 전부가 되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무엇보다도 회개하라고 외쳤고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래서 주를 위해 많은 백성들을 준비시켰습니다.
 
오늘날 바로 이런 엘리야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들이야말로 말라기 선지자가 말라기서에서 예언한 주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세례요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될 사람들을 준비시켰듯이 앞으로 올 대 부흥과 대 추수 때 쓰임 받을 일꾼들을 준비시키는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 대 부흥이 일어나고, 사람들이 알곡이 되고, 예수님의 재림이 준비되게 될 것입니다.
 
* “북쪽을 바라보자, 하늘에서 구름 하나가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구름이 커지더니, 맹렬한 폭풍이 되었습니다. 그때 비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나의 말씀의 비이다. 많은 자들이 나의 영의 비를 기다리며, 기도해왔다. 하지만 이 시간 내가 나의 말씀의 비를 풀어놓고 있다. 그 말씀의 물이 나의 백성을 씻길 것이고,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킬 것이다.’”
 
스캇 브레너가 잘 부르는 찬양 중에 “성령의 비가 내리네”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비’ 하면 떠올리는 것이 성령입니다. 그러나 비는 말씀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신 32:1-2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나의 교훈은 내리는 비요, 나의 말은 맺히는 이슬이요, 연한 풀 위에 가는 비요, 채소 위에 단비로다.”
 
부흥은 성령의 부어내림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대 부흥을 사모하고 기다리면서 성령의 비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단순히 성령의 비가 아니라 말씀의 비를 퍼붓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의 비는 강해설교나 제자훈련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증거로 한국에 강해설교와 제자훈련의 강한 바람이 불었지만 그 결과 몇몇 개교회들은 성장했어도 이 땅에 부흥을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위의 글에도 보면 사람들이 말씀의 비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항할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정결케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그러나 강해설교는 저항을 받지도 않았고, 그리고 사람들을 정결케 하지도 못했습니다.). 즉 그들은 마태복음 13장 15절에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대로 변화될 마음이 없기 때문에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에 언급된 말씀의 비는 듣기 쉽고 받아들이기 좋게 변질된 복음을 성경대로 다시 전파하고 회개와 거룩을 강조하는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말씀 즉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이 비가 내려야 합니다. 그래야 부흥이 일어납니다. 영국에서 일어난 부흥 중에 가장 강력한 부흥은 존 웨슬리를 통해서 일어난 부흥이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일어난 부흥 중에 가장 강력한 부흥은 찰스 피니를 통해서 일어난 부흥이었습니다. 그런데 둘 다 타협하거나 변질되지 않은 순수하고 강렬한 말씀을 통해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앞으로 이 부흥을 능가하는 대 부흥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추측하고 기대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요? 즉 웨슬리나 피니를 통해 일어난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대 부흥이 오게 된다면 마땅히 그런 부흥이 일어날 수 있도록, 그때보다 더 순수하고 강력한 말씀의 회복이 있게 될 것이라고! 저는 정말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고 실제 이것이 부흥의 도화선이 될 것이고 부흥의 비결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 “내가 교회 내의 미지근함이 더 오래 지속되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교회 내의 그 말씀의 무게를 달기 시작해왔으며, 그것이 너무 가볍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많은 곳에서 모든 것이 해체되는 듯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알라. 내가 내 말씀의 수준을 높여왔다는 것을! 말씀으로 씻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들은 정결케 되어 엘리야의 영 안에서 놓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하여 그들의 귀를 그들 자신의 메시지와 복음에 기울이는 자들은 더욱 더 미혹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저울에 달아보실 뿐 아니라 말씀도 저울에 달아보십니다. 그런데 너무 가볍습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많은 것을 타협하고 희석시켰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에서 바울은 목회자들의 사역에 대한 비유로서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짓는 자가 있는가 하면 나무와 풀과 짚으로 집을 짓는 자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은 성경적인 참된 가르침과 설교입니다. 반면에 나무나 풀이나 짚은 교리적이거나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는 설교를 가리킵니다.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지은 자에게 주님은 큰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나무나 풀이나 짚과 같은 것으로 설교하여 영혼들을 오도한 설교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종들은 반드시 말씀을 잘 분별해야 하며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위의 글 중 특별히 “말씀으로 씻음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자들은 정결케 되어 엘리야의 영 안에서 놓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굳게 하여 그들의 귀를 그들 자신의 메시지와 복음에 기울이는 자들은 더욱 더 미혹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부분은 의미심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적인 정확한 복음을 설명하는 책과 설교를 들으면서도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과 관점을 버리지 않습니다. 거기에 연연합니다. 실제로 그런 자들은 앞으로 더 큰 미혹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가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선택했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미혹이 더 심해질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절대로 그런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 그럼 다시 하던 얘기를 계속 하겠습니다. 저는 지금 책으로 만들고 있는 이 설교를 서울과 부산과 울산의 큰믿음교회에서 각각 했습니다. 부산에 내려가 설교하고 숙소에서 쉴 때 저는 이 설교를 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성령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울산에서 설교하고 친지들과 몇몇 목사님들과 만나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서울 큰믿음교회에 출석하는 고등학교 영어교사인 이주현 자매님이 번역해서 저희 교회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Bigchurch)에 올린 게시물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밥 존스가 2007년도에 관해 받은 21가지 계시 중 18번째 계시인데 저는 그것을 읽고 너무 놀라고 감격했습니다.
 
“18. 오늘날은 성령에 감동받은 위대한 교사들이 진리의 영인 성령에 의해 성경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고, 전례 없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자유케 할 때입니다.
 
‘성령에 크게 감동받은 교사’란 말은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취해진 단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갈 1:12)로 말미암아 말씀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지도자들이나 제사장들을 지칭하는데 널리 쓰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진리를 발견한 것은 사람의 가르침이나 독서를 통해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신적 계시를 통해서라고 진술합니다. 초자연적으로 은사를 받은 교사들은 요한복음 17장 17절 말씀과 같이 성도들을 거룩하게 갖출 진리의 말씀을 제시할 것입니다.
 
‘성령에 크게 감동된 교사’는 교회가 하나님의 영이 충만히 거하는 온전한 처소가 되도록 교회 안에서 거룩함을 촉진시켜 나갈 것입니다. 주님의 명백한 임재하심은 믿는 자들이 그 분의 신성과 거룩한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 될 수 있게 할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받은 제사장과 교사와 관련된 위의 목적들은 성경이 정의하는 제자도와 동일한 것입니다. 즉, 믿는 자들이 주님의 ‘친구’가 되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의 제자도는 교회를 갈라디아서 5장 22~23절 말씀에 대한 완벽한 계시와 깨달음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받은 교사들’의 주된 사명은 주님께서 마지막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선하신 말씀을 맛보아 알며, 하나님 나라의 능력 안에서 동행해 나가도록 준비하기 위해 필요한 사항들이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계시하는 것입니다(히 6:5). 하나님의 지도자들이 그 분의 거룩한 성품의 참예자가 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이루어질 때,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이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면 마지막 시대 사역에 필요한 하나님의 가장 높은 부르심과, 하나님의 능력의 은사가 풀어지고 전이됩니다.
 
기록된 말씀에 대한 성령의 계시를 통해, 이 21세기에 모델이 되는 지도자—성령에 감동받은 교사—는 하나님의 마지막 시대를 향한 계획에 참여하는데 요구되는 성별과, 필요한 준비 과정들에 대해 교회가 잘 깨닫도록 할 것입니다.
 
성령에 감동받은 교사의 사역은 에스겔의 예언과 그가 자신을 의로운 사독 제사장과 동일시한 것을 통해 잘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에스겔은 이 충성된 무리가 그들의 헌신으로 인해 주님을 섬기는 특권을 받았다고 기록합니다.
 
에스겔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그릇하여 나를 떠날 때에 사독의 자손 레위 사람 제사장들은 내 성소의 직분을 지켰은즉 그들은 내게 가까이 나아와 수종을 들되 내 앞에 서서 기름과 피를 내게 드릴찌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들이 내 성소에 들어오며 또 내 상에 가까이 나아와 내게 수종 들어 나의 맡긴 직분을 지키되...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겔 44:15~16, 23)
 
교사 중의 교사인 주님과의 만남이 있는 성령에 감동된 교사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할 계시적 진리를 교회에 전해줄 것입니다. 주의 나라의 위대한 비밀들은 하나님의 마음속에 따로 예비 되어 있으며, 마지막 시대 교회에 의해 연구되고 탐색되어질 것입니다.”
 
이 글을 읽은 후 저는 한동안 평소에 제가 체험하는 것보다 훨씬 무겁고 강력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오래 동안 제게 머물렀는데 저는 그것이 지금 여러분이 손에 들고 있는 이 책을 쓰기 위한 기름 부으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샨 볼츠가 본 그 천사가 제 곁에서 저를 돕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그 기름 부으심 속에서 아주 편안하게 이 책을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밥 존스의 이 글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글은 무엇에 대한 확증입니까? 그것은 부흥은 말씀의 회복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으며, 타협함이 없는 성경적인 메시지가 회복되어야 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부흥의 도화선이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성령께서는 제게 부흥이 일어나게 하는 싸이클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말씀-회개-성령-은사-부흥”
 
이것이 부흥의 싸이클입니다. 함께 이것에 대해 살펴봅시다.
 
(1) 부흥의 1단계 : “말씀”
- 먼저 교회 안에 말씀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강해설교나 제자훈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이지 않고 성경적이고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충만한 좌우에 날선 검과 같은 영이요 생명인 말씀의 회복이 있어야 합니다.
 
히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2) 부흥의 2단계 : “회개”
- 다음으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성경대로 회복되면 그 말씀이 살았고 운동력이 있게 역사하면서 사람들의 심령을 찌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상한 마음이 되어 울며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런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행 2:37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3) 부흥의 3단계 : “성령”
- 다음으로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말씀의 날선 검이 사람들의 심령을 찔러대면 그게 바로 회개의 영입니다. 회개는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며 그때 회개가 터집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4) 부흥의 4단계 : “은사”
- 다음으로 은사가 임해야 합니다. 말씀에 찔림을 받아 회개가 터지고 성령이 임하시면 이제 성령께서 선물을 나누어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각양 은사입니다.
 
욜 2:28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5) 부흥의 5단계 : “부흥”
- 말씀의 찔림을 받아 회개하고 성령이 임하시고 은사가 임하면 이제 뭐가 남았습니까? 부흥이 일어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변하고 그리고 은사와 능력까지 임했는데 부흥이 안 일어나겠습니까? 일어납니다. 이것이 곧 부흥의 비결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의 첫 단추가 뭐냐? 바로 말씀의 회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말씀의 다림줄이 중요한 이유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께서 제게 말씀의 은사를 주시며 다른 모든 은사보다 이것이 더 귀중하다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죽은 자를 14명이나 살린 전설적인 하나님의 사람인 스미스 위글스워스는 마지막 때에 있게 될 대 부흥은 말씀과 성령이 하나 되는 부흥이라고 예언했습니다.
 
“1922년 뉴질랜드에 있을 때 한 젊은 설교자가 위글스워스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이 이루신 큰 성공 때문에 사람들이 부러워할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젊은이 그 반대일세. 나야말로 자네를 부러워할 것 같네. 나는 세 개의 비전을 가졌는데 처음 두 개의 비전은 이미 이루어졌고 이제 마지막 비전만 남아있네. 나는 나의 상급을 받으러 갈 일만 남았지만 젊은이 자네는 내가 본 것을 이루게 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서 그는 잠시 조용히 있더니 큰소리를 말했습니다.
‘오 놀라운 일이었어. 놀랍다니까!’
‘무엇이 놀랍다는 말이지요?’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오 하나님의 비밀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렇지만 자네는 내가 보았던 것을 기억하게 될 거야. 우리가 경험했던 이런 부흥은(오순절 부흥) 하나님께서 앞으로 일으키시려는 부흥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야.’
 
이때 일을 회상하면서 그 젊은 설교자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큰 능력으로 말해진 분명한 예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이 오셔서 교회를 데리고 가시려고 오시기 직전에 다가올 성령의 부어주심이 과거에는 없었던 넘쳐남으로 임할 것이란 것을 이 전도자는 특별한 확신을 통해 주님으로부터 받게 된 것이 분명하였습니다.’
 
위글스워스가 고 데이빗 듀 프레시스에 관해서 예언한 말은 자주 언급되었습니다. 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있는 데이빗의 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일찍이 그는 데이빗의 사무실로 걸어 들어가서 인사도 하지 않고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마지막 날에 이전의 모든 것을 초월하는 성령님의 운동이 있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역사는 분리하는 어떤 경계선들이나 나라들이나 교단을 초월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도록 하는데 하나님이 사용하실 으뜸가는 도구가 바로 데이빗 듀 플레시스라고 그는 선언하였습니다. 1942년 위글스워스는 내게 이 예언에 관해 말하면서 자신은 이 영광스런 부흥을 볼 때까지 살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1947년에 죽었는데 그해는 바로 스위스의 쮜리히에서 열린 세계 오순절 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데이빗 듀 플레시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부터 도착했던 해였습니다. 그때부터 그의 사역과 영향력은 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데이빗 듀 플레시스는 온전한 오순절의 메시지를 가지고 아무도 가리라고 생각도 못했던 곳으로까지 들어갔으며 이것은 결국 1960년대와 1970년대에 놀라운 방법으로 발전하게 된 은사주의 갱신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길을 준비하였습니다. 그는 ‘미스터 오순절’이라고 알려지게 되었으며 후에 다른 점에서는 자유주의적인 교단의 대표들과 로마의 교황을 만났습니다.
 
죽기 한 주 전에 위글스워스는 한 주간 계속되는 집회에서 다시 예언을 했습니다. 이번에 그는 두 번째 성령의 역사에 대해서 예언했습니다. 첫 번째 성령의 역사는 성령의 은사의 회복을 가져올 것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강조하는 부흥을 가져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개의 성령의 역사가 합하여지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전에 본적이 없었던 가장 위대한 역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흥을 원하면 말씀을 제대로 분별하고 제대로 이해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재건한 스룹바벨처럼 손에 다림줄을 들고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말씀의 다림줄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미 두 번째 대지에서 저는 제가 밟아온 여정을 통해 그 비결을 4가지로 정리해서 제시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대로 따르면 됩니다. 그런데 누구라도 그 과정을 밟기만 하면 말씀을 제대로 분별하고 이해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누구나 공을 찬다고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나 노래를 부른다고 가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닌 것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설사 된다 하더라도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립니다. 제 경우만 하더라도 적어도 20년 이상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보다 쉽고 빠른 길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먼저, 제가 쓴 모든 책들을 말씀의 뼈대를 세우기 위해 열린 마음으로 그리고 주의 깊게 읽으십시오. 가능하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으십시오. 그래서 모두 소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드십시오.
 
다음으로, 저의 책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 부록과 인터넷 카페의 “추천도서 목록”과 “새로 나온 책 소개”라는 게시판에 소개한 책들을 사서 읽으십시오. 그 책들은 저희 교회의 구내서점이나 저희 교회의 인터넷 카페(http://cafe.daum.net/Bigchurch)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 주의할 것은 두 가지인데, 먼저 사도와 선지자들의 책을 주로 읽으십시오. 요즘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보면 목사와 교사들의 책을 주로 읽습니다. 거기에다가 복음전하는 자들의 책을 곁들여 읽습니다. 그리곤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책은 피해갑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저자는 대부분 사도와 선지자들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가장 중요한 책들을 복음전하는 자나 목사나 교사가 아닌 사도들과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로 쓰십니다. 그러므로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책을 우선적으로 읽으십시오.
 
그리고 책을 읽을 때 반드시 읽은 책을 자료화하십시오. 즉 책을 읽으면서 창세기 1장 1절에 필요한 내용들은 책의 그 부분에 창 1:1이라고 써넣고 그리고 여백성경이나 인터넷 성경의 창세기 1장 1절에 무슨 책 몇 페이지라고 써놓으십시오. 이렇게 해서 읽은 책을 자료화 하십시오. 저는 오래 동안 이 작업을 해왔고, 그래서 제 설교나 책의 내용이 진부하지 않고 자료가 풍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지금부터라도 꼭 그렇게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성령님께 말씀을 주십사고 구하고 성경을 읽을 때나 기도 중 말씀에 관한 깨달음이 오면 반드시 그것을 메모하는 습관을 기르십시오. 자꾸 말씀을 받다보면 그것이 단편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요약설교의 형태로 임하게 됩니다. 그것을 잘 기록해두었다가 설교의 뼈대로 삼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최 단 시간 내에 말씀의 다림줄을 갖출 수 있으며, 대 부흥을 일으키는 주역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여러분께 영적인 다림줄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다림줄은 단순히 벽돌을 쌓고 집을 세우는 기준이 아니라 심판의 기준이 되기도 됩니다.
 
암 7:7-8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다림줄을 띄우고 쌓은 담 곁에 주께서 손에 다림줄을 잡고 서셨더니 내게 이르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다림줄이니이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림줄을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 베풀고 다시는 용서치 아니하리니...”
 
보십시오. 여기서 예수님은 담을 쌓기 전이 아니라 쌓은 담 곁에 다림줄을 잡고 서 계십니다. 이러한 환상은 불길한 전조를 알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일종의 건물조사관 노릇을 합니다. 주님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한 담벽 곁에 서서 다림줄로 측량을 하려고 하십니다. 다림줄은 담벽이 내려앉고 있는지 혹은 수평으로 똑바로 서 있는지를 밝혀줍니다. 다림줄은 또 검사관에게 그 담벽이 튼튼한지 아니면 공공의 안전에 위험이 되므로 헐어버려야 할런지를 가르쳐줍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다림줄을 손에 들고 담 곁에 서셨다는 것은 주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이스라엘에게 행해질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본문 뿐 아니라 다음 성경 구절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왕하 21:10-13 “여호와께서 그 종 모든 선지자들로 말씀하여 가라사대 유다 왕 므낫세가 이 가증한 일과 악을 행함이 그 전에 있던 아모리 사람의 행위보다 더욱 심하였고 또 그 우상으로 유다를 범죄케 하였도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에 재앙을 내리리니 듣는 자마다 두 귀가 울리리라. 내가 사마리아를 잰 줄과 아합의 집을 다림 보던 추로 예루살렘에 베풀고 또 사람이 그릇을 씻어 엎음 같이 예루살렘을 씻어 버릴찌라.”
 
이처럼 다림줄은 단순히 건물을 지을 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심판의 기준입니다. 여러분, 잘 들으십시오. 우리는 결코 우리가 잘못 이해하고 있는 성경이나 교리에 의해 심판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로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요 12:46-50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우리가 회개를 배제하고 믿기만 하면 다 천국에 가고, 그리고 구원 받은 사람은 버림받을 수 없다고 믿는다고 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관대한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마 7:21), ‘여자를 보고 음욕은 품은 자마다 간음했고 그런 일을 행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7-30), 그리고 ‘성령을 좇아 육체의 현저한 일을 행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갈 5:16-23)는 성경 말씀 자체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조나 교리가 아니라 성경 자체를 우리의 다림줄로 삼아야 하며, 성경을 성경의 저자들이 의도한 대로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나아가서, 성경이 다림줄이라는 것은 깊이 보면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요 5: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시며(요 1:1-3) 진리 자체(요 14:6)이신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성경이 다림줄이라면 예수님 자신이 다림줄이 된다는 사실 또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다림줄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다림줄이 되시는 이유는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무엇이 우리의 다림줄입니까?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레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여기서 하나님은 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라고 말씀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바로 우리의 다림줄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 48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 역시 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형상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 영혼의 다림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잘 알고, 기도를 얼마나 많이 하고, 얼마나 대단한 은사를 받았고, 얼마나 열심히 봉사하는가? 이게 다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닮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우리의 영혼이 바른가 아닌가에 대한 참된 다림줄입니다. 다른 것으로 재보면 혼돈이 오고 스스로 속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석에서 당황하게 됩니다. 릭 조이너의 “마지막 추구”라는 책에도 나오듯이 천국의 보좌에는 겸손하고 주님을 닮은 이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진 사람들이 앉습니다. 결국 주님을 닮는 것이 천국에서도 다림줄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 자신으로 우리 자신을 테스트해야 하며 자신을 재어 보아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영적인 신랑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친구로 삼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국 관계로 모든 것을 달아보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샨 볼츠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책에 보면 그의 친구의 간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친구가 천국의 환상을 보았다. 바깥뜰과 안뜰 그리고 예수님이 계신 지성소를 보았다. 친구는 먼저 바깥뜰로 갔다. 거기서 지난 세기에 치유, 가르침, 예언 분야에 놀라운 사역을 한 잘 알려진 사역자들을 만났다. 그들을 바깥뜰에서 만난 것이 의아하여 이십 세기의 유명한 기독교인에게 다가가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왜 예수님과 함께 안에 계시지 않아요?'
 
그 분은 웃음을 머금고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예수님보다도 내 사역을 더 사랑했어요.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보다 내 사역과 시간을 더 많이 보냈지요.' 그분은 수치스러워하지 않고 천국의 무리에 속한 것을 너무 감사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 친구는 자신의 삶을 생각하고 슬퍼했다.
 
친구는 안뜰로 옮겨져 갔는데 거기에는 믿음의 영웅으로 여겨지는 사람이 있었다. '왜 지성소에 안 계신 거지요?' 친구가 물었다. 그는 질문에 언짢은 표정 없이 진지하게 답했다. '나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보다도 이해와 지혜를 더 중시했어요. 내 삶이 그분과의 관계보다는 지적인 이해에 치중했어요.' 내 친구는 다시 마음에 찔림이 있었고 들은 말로 슬퍼했다.
 
친구는 마침내 지성소의 놀라운 임재가 있는 곳으로 인도되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이 비추어졌다. 그 방의 환한 빛 때문에 잘 볼 수가 없었다.
 
보좌 밑에 아주 연약한 여인이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이 여인을 기독교의 지도자 가운데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서서히 다가가서 보니 그 여인의 시선은 주님에게 닿아있었다.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다가가서 물었다.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예수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분이 대답했다. '나는 그분의 것이에요.' '하지만 어떻게 지성소에 있게 되셨지요?' 다시 친구가 물었다.
 
그녀는 잠시 시선을 예수님에게서 떼어 친구를 바라보며 질문을 이해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그분의 기쁨의 능력으로 가득 빛나고 있었다. 그녀가 대답했다. '나는 그저 그분을 사랑할 따름입니다. 세상에서의 모든 삶을 통해 나는 그분만을 사랑했습니다.' ‘와-, 굉장한 삶을 사셨겠네요. 주님이 당신을 통해서 어떤 기적을 행하셨나요?’ 내 친구가 또 물었다.
 
마음이 상했다는 듯이 그녀가 엄숙하게 말했다. '사실 내 삶에서 가치가 될 만한 거라고는 주님 밖에 없었어요. 별로 그럴 듯한 일을 이룬 것이 없어요. 그저 다른 할 일이 없어서 주님과 나날을 보냈어요. 하지만 그분은 저를 사랑했어요. 그분이 저의 기적이에요.'
 
내 친구는 의아해하며 더 물었다. '무슨 사역을 하지 않으셨어요? 지금 이렇게 된 데에는 무슨 은사가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저는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제 목소리는 그저 그분을 경배하는 데 족했어요. 별로 말도 잘 못해서 가르친 적도 없어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예언 사역을 한 적도 없고요. 그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이 내 삶에 허락한 사람들을 사랑했어요.'
 
내 친구는 그렇게 사역 면으로 아무 것도 없었던 사람이 예수님과 가까이 지성소에 있다는 것에 놀랐다.
 
이 비유와 같은 환상은 어떻게 하나님이 천국의 시각에서 성공을 보는가를 나타낸다. 또한 사역에 대한 실적 성취위주인 태도가 하나님께 중요한 부분이 되는 데는 얼마나 부족한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그 사람의 사역이 아니라 그 사람과 주님과의 관계를 달아보십니다. 나아가서 주님은 우리의 사역 자체를 달아보실 때에도 이 잣대를 사용하십니다. 현재 수많은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사역의 목적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설교자는 성경을 잘 가르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고, 예언자는 정확한 예언을 하는 것이 사역의 목적이고, 신유사역자는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는 것이 사역의 목적인 것처럼 착각합니다. 물론 이것도 우리의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모든 사역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수님을 잘 증거하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가까이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그리고 중매쟁이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아무리 바르고, 계시가 아무리 정확하고, 치유가 아무리 확실하게 일어나도 사람들을 예수님에 관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에게로 이끌지 않으면 바른 것이 아닙니다.
 
제가 자주 강조하지만, 모든 진정한 사역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에서 탄생합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닙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모든 진정한 사역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으로 사람들을 인도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친구가 되게 하고 예수님의 신부가 되게 합니다. 이것이 여자가 낳은 자 중의 가장 큰 자인 세례 요한의 사역에 나타나는 특징이었습니다. 나아가서 이것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모든 참된 사역의 공통적인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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