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구약

민수기5 - 민 20~21장(놋뱀)

JORC구원열차 2009. 6. 11. 20:31

4. 민 20-21장 / 놋뱀

 

이 두 장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놀라운 두 가지의 모형을 보게 된다.

 

1. 얻어맞은 반석이신 그리스도 (민 20:1-13)

 

출애굽기 17장 1-7절에서 이미 모형에 대해 소개를 받았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은 반석으로 상징되고 있으며, 고린도전서 10장 4절은 출애굽기와 민수기에 나오는 반석이 그리스도의 모형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백성은 물 없이는 살 수가 없었으며 오늘날 우리는 생명수 없이 살 수 없다(요 4:13-14/요 7:37-39). 성경에서 하실 물은 성령의 모형인데 이는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의 영적인 갈증을 만족시켜 주신다. 씻는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며, 이 말씀은 깨끗케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요 15:3/엡 5:26).

두 장면을 대조해서 보는 것이 유익이 될 것이다.

 

출애굽기 17장                 민수기20장

반석을 치라고 하셨다            반석에게 말하라고 하셨다

모세의 지팡이로 폈다            아론의 지팡이로 폈다(9절)

물이 나왔다                          물이 나왔으나, 모세가 심판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한 번만 죽으실 수 있으시다. 모세가 반석을 두번째 쳤을 때 그는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이었고 모형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모세가 첫번째 쳤을 때는 하나님의 권위를 상징하는 자신의 지팡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율법의 저주로써 얻어맞은 그리스도를 상징했다. 그러나 모세는 아론의 지팡이를 사용하라는 말씀을 들었으며(17장) 이 지팡이는 제사장의 손에 들린 생명의 지팡이였다. 바위를 치지 말고 말로 하라고 하신 데에도 이유가 있다.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살아계신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다. 그는 우리가 필요해서 간구하는 바 영적인 축복들을 주신다. 한 사람이 구원을 여러 번 받는 것이 아닌 것처럼 성령의 은사도 반복해서 받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믿고 신뢰할 때 성령을 한 번에 받는다. 그리스도께 나아와 간구할 때 성령의 충만함은 여러 차례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세를 심판하시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신 주된 이유는 그가 자신을 높였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은 것이다. 백성을 “패역한 너희여”라고 부르며 “우리(아론과 모세)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라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교만과 불신앙의 증거이기도 했다(12절). 모세의 온유함은 최강의 장점이었지만(12:3) 바로 이 점이 죄의 공격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베드로가 용감한 사람이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으나, 그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바로 이 점에서 실패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하나님은 우리를 처리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가 우리를 위해 계획하신 축복들을 잃을 것이다.

 

2. 들려진 놋뱀이신 그리스도 (민 21:1-9)

 

놋뱀이 그리스도의 모형임은 요한복음 3장 14절에서 분명히 나타나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을 어떻게 상징하는지 주목해서 보자.

 

1) 필요성-

백성이 두 가지 방법으로 죄를 범했다. 하나님께 대항하는 말을 했으며 모세에 대항하는 말을 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들은 죽어가고 있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법의 이중성을 발견한다. 인간은 하나님께 죄를 범했으며 서로간에도 죄를 범하였다. 인간의 이러한 죄들로 인해 죽음이 세상에 왔으며 모든 사람이 정죄를 받는다(요 3:16-18).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죄의 불뱀에게 물린 상태에 있는 것이며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2)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은 그들의 재앙을 모르는 체 할 수도 있으셨다. 그들은 죽을 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과 은혜로 하나의 해결책을 제공하셨다. 7절에 나오는 모세의 중재는 그리스도께서 하신 기도를 생각나게 한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3) 다른 뱀-

모세가 또다른 뱀을 만들어야 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기도 하다! 전에 있던 뱀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데 놋뱀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며, 그는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입으신 분이다(고후 5:21). 놋은 심판을 의미하는 금속이며,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다. 모세의 손에 들린 뱀이나 선반 위에 둔 뱀은 효력이 없었다. 그 뱀은 들어 올려져야 했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려야 했다(요 3:14/요 8:28 /요 12:30-33).

 

4) 믿음으로-

백성들은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죽음의 쏘는 것을 이기는 것이었다. “쳐다본즉 살리라.” 이것이 기도의 응답이었다. 고통을 받는 백성이 구원을 받은 것은 물린 것을 모르는 체 해서나, 뱀을 때려서나, 약을 바르거나, 도망했기 때문은 아니다. 진 중앙에 높이 세워진 뱀을 믿음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사 45:22).

 

놋뱀은 어떤 형식으로든지 성막과 관련되지는 않았음을 눈여겨 보자. 제사를 아무리 많이 드려도 사람들을 죽음에서 건질 수는 없었을 것이다.

 

5) 유용성-

뱀은 구석에 숨겨져 있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보고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진영 한복판에 세워졌다. 그리스도는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오늘날 가까이 계시며, 그를 통하여 치료함을 얻는다(롬 10:6-13). 이 치료법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오게 하자.”

 

6) 무료-

쳐다봄으로써 살게 되므로 죽어가는 사람이 값을 치를 일은 없었다. 그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왜 생기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구원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믿음으로 살 수는 있었다.

 

7) 충분함-

그 하나의 들려진 뱀은 온 진을 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 뱀을 쳐다보고 그 다음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제물을 가져오거나 더 잘 하겠다고 약속을 하여 구원받은 것도 아니다. 믿음으로써만 구원을 받았다! 그리스도는 현 세대와 그리고 영원에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시기에 넉넉하신 분이시다.

 

8) 즉각적인 치료-

구원이란 발전의 과정이 아니다. 구원은 죄인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일어나는 즉각적인 기적이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한 번에 조금씩“ 우리를 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미루지 않고 즉시로 구원하신다.

 

9) 모두를 위한 한 가지 해결책-

“천국 가는 길은 많아 구원받는 길은 여러 가지야!”라는 말을 우리는 흔히 듣는다. 이스라엘 진 중에는 한 가지 방법이 있었으며 오늘날도 한 가지 방법만이 있다(요 14:6/행 4:12 참조).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으면 죄 중에서 버림을 당한다.

 

10) 이중(二重)의 확신-

그 치료법이 효과가 있으리라는 것을 죽어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한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진 것이다. 쳐다보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다. 둘째로는 다른 사람의 생애에 일어난 일을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무슨 특별한 계시가 내렸거나 특별한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의지해야만 했다.

 

이 모든 일이 세상 사람에게는 어리석게 보일런지도 모른다(고전 1:18-31). 죽음에서 구원받기 위해 들리운 뱀을 쳐다보는 것을 상상해 보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를 비웃는 반면에 뱀을 죽이거나, 뱀이 아닌 다른 새로운 처방을 만든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모든 치료법, 즉 개혁, 교육, 보다 훌륭한 주택, 휴식 등은 실패해왔다.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전성시대를 가치지만, 그래도 인간들은 여전히 죄 중에서 죽어간다. 유일한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열왕기하 18장 4절을 읽으면 유대인들이 이 놋뱀을 보존했다가 우상으로 바꾸어 만든 기록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물질적인 것을 바라보고 우리가 마땅히 신뢰해야 할 하나님은 무시한다. 그 백성을 고쳐준 것은 뱀이 아니라 뱀을 만들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이시다. 뱀을 보는 것, 곧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예배하고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이다(롬 1:25). 히스기야는 뱀을 조각 조각 깨뜨리고 “느후스단-구리 조각”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세상에 흩어져 있는 수백만의 우상들을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 궁금하다. 이들은 신뢰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그 신뢰와 찬양을 훔쳐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