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사무엘하 6장 / 본향으로 옮겨진 법궤
본 장을 연구하려면 역대상 13, 15, 16장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 이 장들이 다윗의 생애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에 대하여 추가로 자료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시편 132편 1-6절은 법궤가 제자리로 돌아옴으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찬양하고 싶은 강렬한 그의 소망을 대변해 준다. 약 80년 동안 법궤는 기럇여아림에 있었으며(유다의 바알/ 삼상 6:21-7:2), 다윗은 예루살렘에 법궤를 둘 특별한 장막을 준비하여(대상 15:1) 이 성스러운 궤를 본향으로 되돌려올 준비를 하였다. 그가 이 임무를 끝마치는 데는 3개월 이상이나 걸렸다(6:11).
1. 하나님을 노하게 한 다윗 (삼하 6:1-11)
물론 다윗의 편에서는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것이 온당한 욕심이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열성”을 가지거나 또는 선한 일을 행함에 있어 고의적으로 그릇된 형식을 취할 수도 있었다. 일을 시작함에 있어서 다윗은 여호와와 상의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정치적인 지도자들과 의논하였다(대상 13:1-4/삼하 5:19/삼하 5:23). 그의 주된 동기는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는 것보다는 그의 통치 하에 있는 민족을 단합시키려는 데에 있는 것 같다.
13장 3절에서 다윗은 사울이 법궤를 소홀히 하였던 것을 비난한다. 아마도 이러한 발언은 6장 20절 이하에 기록된 대로 사울의 딸, 미갈의 행동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모든 지도자들과 회중들은 다윗의 계획에 동의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 후의 일들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윗의 그 다음 실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한 것이다. 법궤를 레위인들이 그들의 어깨에 메도록 요청하는 대신(민 3:27-31/민 4:15/민 7:9/민 10:21), 블레셋이 하던 대로 세상의 본을 따라 법궤를 새 수레에 실었다(삼상 6장). 하나님이 블레셋이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허락하셨던 것은 그들이 말씀을 교육받은 언약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거룩한 명령을 무시하고 이방 민족을 흉내 낸다는 것은 재난을 초래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또는 교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주신 형식”을 따르는 대신 “세상“을 따르는가!(롬 12:2/출 25:40) 모든 백성들은 열정적으로 기뻐하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그들의 방법이 하나님의 눈에 합당하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언제나 “다른 나라들처럼” 되기를 원했다(삼상 8:5). 그리고 그 일은 언제나 그들을 비극으로 인도해 갔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 인간의 방법을 동원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다. 황소들은 비틀거렸고 법궤는 떨어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이로 인해 세번째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레위인이 아닌 사람이 법궤를 만졌다(민 4:15). 하나님은 그 사람을 즉각적으로 심판하실 수밖에 없었으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손상을 입고 주님의 말씀을 위반해도 된다고 허용하는 일이 된다. 이같이 갑작스런 심판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일을 처리함에 있어 그의 마음이 하나님과 완전히 바른 관계에 있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처음에 그는 화를 내었으며 다음에 그는 두려워하였다. 잠시 중단하고 심판에 대한 이유를 발견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는 않고 다윗은 대열을 정지시키고 재빨리 법궤를 배치하였다.
역대상 26장 1-4절은 오벧에돔의 가족이 레위지파에 속하였으며 법궤를 안전하게 돌볼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하나의 실수가 다른 실수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결심하는 일과 그 뜻을 성취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방법을 따르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2. 자기의 열성을 과시하는 다윗 (삼하 6:11-19)
석달이란 기간 동안에 다윗이 자기의 마음을 성찰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는 법궤를 운반하기 위하여, 또한 하나님의 지시를 발견하기 위하여 율법을 들추었을 것이 분명하다(대상 15:1-2/대상 12-13). 하나님은 오벧에돔의 집을 축복하고 계셨으며 다윗은 그 축복이 전체 민족에게 있기를 원했다. 이번에는 장막을 준비하였고 레위인들도 자신들의 임무를 적절히 준비했던 것을 볼 수 있었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여 스스로 정결케 할찌어다!”
시편 24편은 이 사건을 축하하기 위하여 지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대상 16장 7절 이하를 보면 시편 105편이 이 행복한 사건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자신의 마음의 기쁨을 표현하도록 하는 데 사용하셨으며 그의 노래는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였다. 왕은 자신의 용의를 제쳐놓고 제사장의 겸손한 옷을 입은 채 대열을 인도해 갔다. 레위인들은 여섯 발걸음을 내딛고 잠깐 멈추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시는지 보려고 기다렸다. 아무 심판이 없자 그들은 제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남은 길을 진행해 갔다.
여호와 앞에서 다윗이 “춤을 춘 것”은 하나님의 법궤가 백성들에게 회복된 것을 기뻐하여 자연발생적으로 그 기쁨을 표현한 것이 분명하다. 다윗이 이렇게 행동한 것은 위엄이 없는 일이었을까? 물론 그렇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으로 주어진 것은 아니지만, 정반대로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중에 기쁨과 찬양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모두 제어해서는 안 된다.
어떤 신자들은 이와 같은 행동들을 극단적인 육의 일로 규정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거짓된 근엄성으로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죄를 범한다. 끝으로, 다윗의 “춤”은 근대적인 “춤”을 찬성하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의 행동은 여호와 앞에서 그를 찬양하기 위하여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백성들을 축복하고 법궤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 위하여 선물을 주었다. 오래 전에 “영광이 떠났었다.” 이제 만군의 여호와(“군대들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다시 돌아오셨다. 다윗이 기뻐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3. 아내를 징계하는 다윗 (삼하 6:20-23)
우리는 앞서 사울의 딸 미갈이 다윗에게 적합한 아내가 결코 아니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녀는 사울의 가족에 속하였으며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진실로 나타내 본 일은 한 번도 없다. 사무엘상 19장 13절은 그녀가 우상을 섬겼음을 시사한다! 다윗은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인하여 그녀를 아내로 취하지 않았으며, 골리앗을 죽임으로, 또한 사울의 살인적인 요구를 성취함으로 “그녀를 얻었다.“(삼상 17:25/삼상 18:17-27). 사울의 가족과의 평생 동맹은 그 시작으로부터 문제거리였으며 모든 신성하지 못한 동맹들이 다 이러하다(고후 6:14-18). 다윗과 사울 사이의 대결은 육신과 영 사이의 전쟁을 예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이 미갈과 연합한 것은 육신에 양보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미갈이 왜 그의 남편을 경멸하였는지를 아는 데는 많은 상상력이 동원되는 일은 아니다. 물론 그녀의 죄악된 태도가 여러 해를 두고 내적으로 자라갔던 것이 분명하다. 그녀는 아버지의 무기 책임자에게 승리의 “상”으로 결혼을 하게 된 것을 원망하였다. 그녀는 다윗이 다른 아내들을 취한 것을 원망하였는데(5:13-16/3:2-5), 이들은 모두 그녀가 다윗과 결혼한 후에 선택된 여인들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부끄럽게 죽임을 당하였으며 그의 적이 이제는 승리 가운데 전 이스라엘을 다스린다. 물론 이러한 모든 이유들을 넘어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여호와의 일들에 대해서는 이해하지 못했던 불신자였다(고전 2:14-16). 그녀는 이런 화려한 의식을 통해서 다윗이 그의 왕권을 표현하기를 원하였으나, 다윗은 자기의 지위를 보통 사람들과 함께 하여 여호와를 영화롭게 하기를 더 좋아하였다.
찬양의 위대한 시간이 지난 후 미갈이 다윗에게 한 심한 말은 그에게 깊은 상처를 입힌 것이 틀림없다. 우리가 주 안에서 기뻐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를 추구할 때는 반드시 사단은 “미갈”을 우리에게 보낸다는 것은 대체로 맞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기적을 행하실 때마다 한 편 구석에는 바리새인들이 있어서 그를 비판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그녀의 사악한 말은 사악한 마음을 나타낸다. 다윗은 그녀가 처결되어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네 손이 너로 범죄케하거든 찍어 내어 버리라!” 그는 미갈이 여호와의 일에 있어서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그녀를 내어 쫓고 결혼의 특권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 유대 여인에게 있어서 자녀들이 없이 죽는다는 것은 그녀에게 큰 수치였다. 다윗은 그녀의 어리석음에 따라 그녀에게 응대하였다(잠 26:5).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할 때,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동기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 때, 낙심해서는 안 된다. 다윗이 다른 성도들 같았더라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좋아, 나는 더 이상 여호와를 섬기지 않겠어! 내 아내조차도 그 진가를 인정해 주지 않는군!”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다윗은 훨씬 많은 일들을 계획하였으며 여호와를 위하여 성전을 건설하려는 것을 본다. 사단이 길에 어떠한 장애를 두더라도 상관하지 않고 여호와를 높이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할 합당한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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