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요한복음 3장 / 거듭남(중생)
이 장은 아마도 요한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장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장이 거듭남을 주제로서 다루기 때문이다. 종교적인 제도들은 이 문제를 아주 혼란시켰기 때문에 거리의 평범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니고데모 같은 종교 지도자들조차 다시 태어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1. 중생의 필요성 (요 3:1-5)
1)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 위해서(3절)-
니고데모는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이었으며, 유대인 가운데 우수한 선생들(관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거듭남에 대한 진리를 알지 못했다.
오늘날 신학의 “학위”를 가지고 있는 수많은 “신학교 졸업생”들도 이와 똑같다. 영적 진리는 죄인의 육적인 마음으로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고전 2:10-14).
니고데모는 “밤에” 왔는데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의 상징이다. 그는 영적으로 어두운 가운데 있었다(엡 4:18/고후 4:3-6).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것으로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는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 즉, 위로부터 태어나야만 한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니고데모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혼동하고 있었다(4절). 그는 육적인 탄생의 개념으로 생각한 반면에, 그리스도는 영적인 탄생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우리 모두가 합당치 못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첫번째 태어남”은 우리를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가 진노의 자녀이며 불순종의 자녀인 것을 의미한다(엡 2:1-3). 어떤 정도의 교육이나 깨끗케 함이나, 훈련이나 종교적인 활동도 우리가 가진 옛 성품을 변화시킬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있기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성품을 받아야 한다.
2)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5절)-
예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 왕국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이 나라를 묘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사람이 다시 태어날 때 그는 즉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그리고 어느 날 낙원에 들어갈 것이며 영원한 나라에서 분깃을 나눌 것이다.
니고데모는 그의 동료들처럼 유대인으로 태어난 것과 율법대로 산 것이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드린 것으로 생각했다(마 3:7-12/요 8:33-39).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범죄한 이래, 많은 사람은 낙원 밖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오직 거듭남으로써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2. 중생의 특성 (요 3:6-13)
1) 영적인 탄생(6-7절)-
육신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옛 성품으로 정죄된 것이다. 영으로부터 태어나는 것은 새 성품이며(벧후 1:4), 영원한 것이다. 육체적인 수단들로써는 영적인 탄생을 얻을 수 없다.
5절에서의 “물로 태어남”은 문자적인 뜻으로의 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세례(침례)가 물이라는 하나의 물질이 육체에 적용되는 것이므로 결코 영적 탄생을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요 1:11-13/요 6:63 참조). “물로 태어나는 것”은 결코 물세례(침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근거가 있다.
-성경에서 “세례”(침례)란 탄생이 아니라 죽음을 뜻한다(롬 6:1-).
-구약에서는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수가 없게 된다. 구약 시대에는 세례(침례)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구원은 행위로 말미암는 것이 아닌데(엡 2:8-10), 세례(침례)는 인간적인 행위이다.
-그리스도는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에 세례(침례)를 주지 않으셨다(요 4:2).
중생은 다만 영적인 수단으로 이루어진다. 영적인 수단이란 곧 하나님의 성령(요 3:6/6:63)과 하나님의 말씀(벧전 1:23/약 1:18)이다. 5절에서의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낸다(엡 5:26/딛 3:5- “중생의 씻음”). 사람은 믿음을 산출하기 위해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할 때 거듭나며, 그 사람이 믿을 때에 새 성품이 부여된다. 성령께서는 말씀을 주시기 위해서 신자들을 사용하지만, 오직 성령만이 생명을 주실 수 있다(고전 4:15).
2) 신비로운 탄생(8-10절)-
어떤 사람도 바람을 설명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성령의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성령은 여기서 바람에 비유된다(행 2장). 니고데모가 구약의 가르침을 받았다면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일의 진리를 알았을 것이다. 에스겔 37장에서 바람은 이스라엘의 마른 뼈들에게 생명을 준다. 우리가 중생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는 이것을 다음에서 다루신다.
3) 참된 탄생(11-13절)-
많은 것이 신비롭지만 그러나 여전히 참되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은 학설이 아니라 실제라고 확언하신다. 만일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다만 믿고 그를 영접한다면 그는 중생이 얼마나 참되며 놀라운 것인지 발견하게 될 것이다.
3. 중생의 토대 (요 3:14-21)
1) 그리스도께서 죽으셔야만 했다(14-17절)-
그리스도는 다시 니고데모에게 구약을 참조하여 민수기 21장의 놋뱀 이야기를 언급하셨다. 그 뱀은 유대인을 죽이고 있었다. 그 문제의 기이한 해결은 모세가 놋뱀을 만드는 것이었다. 믿음으로 놋뱀을 바라본즉 치료가 되었다. 이처럼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서 죄가 되셨다. 왜냐하면 우리를 죽이고 있는 것은 바로 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보자마자 구원받았다.
놋뱀은 심판에 대해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 들리셨을 때 우리의 심판을 경험하셨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다시 태어나기 전에 죽으셔야만 했다. 그의 죽음은 생명을 가져온다.
2) 죄인은 그를 믿어야만 한다(18-21절)-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유일한 구원의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민수기 21장에서 모세에게 명하신 것은 그가 뱀을 죽이고 상처에 고약을 바르거나 유대인을 보호하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세가 뱀을 들어 올리고,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보지 않는 것이 정죄를 의미하나, 믿음은 구원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 4-13절의 빛과 생명, 어두움과 죽음의 상징을 여기서 다시 회고해 보자. 죄인들은 어두움 가운데서 살 뿐만 아니라 어두움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가 드러나고 용서될 그 빛으로 오기를 거절한다.
4. 중생에 대한 갈등 (요 3:22-26)
가장 좋은 번역판들은 25절을 “요한의 제자들과 한 유대인 사이에 의식적인 결례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고 번역한다. 우리는 이 유대인이 니고데모였을 것이며 여전히 진리를 추구하고 있었다고 믿는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처럼 니고데모는 세례(침례)와 종교의식에 대해 혼돈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는 물로 태어남이 세례(침례) 또는 유대의 결례의식이라고 생각했다. 세례(침례)요한이 유대인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한 방법을 눈여겨보자. 만일 세례(침례)가 구원에 필요하다면 이 부분이야말로 성경이 그렇게 말할 장소이다. 그러나, 아무 말도 없다! 그 대신, 믿는 것에 강조를 두고 있다(36절).
니고데모가 어둠으로부터 나와서 마침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명백하다. 여기 요한복음 3장에서 우리는 니고데모가 혼란의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을 보지만 7장 45-53절에서는 그가 확신의 새벽녘에 있는 것을 본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공평하게 들어 주려고 한다. 그리고 19장 38-42절에서는 니고데모가 공개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고백의 대낮에 있는 것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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