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로마서4 - 롬 4장(믿음으로 의롭게 됨)

JORC구원열차 2009. 7. 17. 07:39

4. 로마서 4장 / 믿음으로 의롭게 됨

 

어떻게 하든 이 장을 완전히 습득하라!

본 장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하여 어떻게 불경건한 사람들을 의롭다고 하시는가(의를 선언함)를 설명한다.

 

“구원”은 넓은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로,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들을 포함한다. “칭의”는 법적인 용어로, 그리스도의 의를 입고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게 되는 것을 말한다. 본 장에서 바울은 칭의에 대한 세 가지 위대한 사실들을 입증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다.

 

1. 칭의는 행위로써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롬 4:1-8)

 

모든 유대인은 “조상 아브라함”을 존경하였으며 창세기 15장 6절을 통하여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았음을 알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영접을 받은 것은 너무도 분명하여, 그들은 하늘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말했다. 이것을 아는 바울은 아브라함을 지적하며 묻는다! 우리 육신의 조상 아브라함은 어떻게 의롭다하심을 받았는가?”

 

행위로써였는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그가 성취한 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을 것이지만, 구약에는 그러한 기록은 없다. 구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창 15:1-6)라고 말한다. 의의 선물은 행위를 통하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을 믿음으로써 왔다.

 

바울은 그의 논급에서 “여기다(reckon), 전가하다(impute), 간주하다(co-unt)”라는 단어들을 사용한다(3-6, 8-11, 22-24절). 이러한 단어들은 모두 “어떤 사람의 구좌에 넣는다”는 같은 뜻을 가지고 있다. 칭의란 나에게로 의가 전가되어(내 구좌에 넣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위치를 얻는 것을 뜻한다. 성화란 의를 나누어 받아(내 생활의 일부가 됨) 사람들 앞에서 올바른 위치를 얻고,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그들이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야고보서 2장 14-26절에서 언급하듯이 둘 다 구원의 일부이다. 만일 나의 생활이 하나님께 대해 신실함(faithfulness)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믿는다(fa-ith in God)고 말하는 것이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구원이란 행위로 인하여 얻는 상급이거나, 아니면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거나 둘 중의 하나이다. 둘 다일 수는 없다. 5절은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사람들을(의로운 사람들이 아님) 의롭다고 하시는데, 이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서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종교적인 사람들을 그들의 행위에 근거하여 의롭다고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조상 아브라함”이 단순히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임을 입증하였다.

 

다음으로 바울은 다윗을 언급하며 시편 32편 1-2절을 인용하여,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행위와는 별도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워진다는 사실을 가르쳤음을 입증하였다. 하나님은 죄를 우리에게로 돌리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로 위임되었기 때문이다(고후 5:21). 오히려 하나님은 순전히 은혜의 기초에 입각하여 우리에게로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하신다.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구원을 가진 것인가!

 

2. 칭의는 율법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는다 (롬 4:9-17)

 

이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만일 구원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면 율법은 대체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은 어떻게 되는가?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구원이 그가 할례를 받기 14년 전에 생긴 일임을 지적함으로써 이 질문에 답한다. 할례는 언약의 징표였으며 유대인 자녀가 율법 체제의 일부가 되게 하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유대인의 “조상”으로서 아브라함은 그가 구원을 받았을 때에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이었다.

 

할례는 세례(침례)와 같이 단순히 내적인 변화에 대한 외적인 표시일 뿐이다. 육체의 의식이 영적인 변화를 산출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오늘날의 많은 “종교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외적인 표식인 의식을 믿었으며, 그들에게 요구되는 구원받게 하는 믿음을 모르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사실상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며 “믿음의 집”에 속한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다(갈 3:7/갈 3:29). 바울이 2장 27-29절에서 지적하였듯이 모든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이스라엘인 것은 아니다.

 

13-17절에서 바울은 1-8절에서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킨 것처럼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킨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약속이다(13, 14, 16절).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여기서 “세상”이란 약속된 씨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치를 받는 영광된 왕국을 가리킴) 율법이나 할례에 연관된 것이 아니라 순전한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15장을 다시 읽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개입하셔서 그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주셨을 때는 “그 자신은 끝났을 때”였음에 유의하자.

 

아브라함이 해야 할 모든 것은 믿는 일 뿐이었다. 율법은 누구를 구원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율법은 진노를 가져오며 죄를 드러낼 뿐이다. 율법이 은혜를 완전히 무효화함과 마찬가지로, 행위는 믿음을 무효화시킨다. 두 가지가 나란히 존재할 수는 없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을 때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었겠는가?

 

바울은 16절에서, 칭의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하여 오는 것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 곧 유대인과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결론을 지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육신적인 조상일 뿐 아니라, 믿음의 발자취를 따르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이다(은혜와 율법에 대해서는 갈 3장 참조).

 

3. 칭의는 인간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부활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 (롬 4:18-25)

 

첫 부분에서는 믿음과 행위를 대조시켰고(1-8절), 둘째 부분에서는 율법과 은혜를 대조시켰는데(9-17절), 이제 세번째로, 생명과 죽음을 대조시킨다(18-25절).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으로 밝히고 있음에 유의하자. 실제로 아브라함과 사라는 죽은 사람들로서, 그들의 몸은 아이를 낳을 연령에서 많이 지나 있었다(히 11:11-12). 어떻게 90세와 100세인 사람 둘이서 아들을 가질 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육체가 죽어 있을 때, 성령의 부활의 능력은 일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자신이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뿐이었으나, 그가 이 약속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축복을 받았다. 참으로 구원의 기적을 보여 주는 완전한 예증이라 하겠다.

 

사람이 육신을 의존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게 할 힘을 아직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느끼고 있는 한, 그는 의롭다 하심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고, 자기가 죽은 것을 인정하여 투쟁하기를 멈추면, 그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켜 새 생명을 주시며 하나님 앞에 완전히 서게 하신다. “믿음에 견고한 것”(20절)이 인간을 구원하지만, “육신에 강한 것”은 구원하지 못한다. 아브라함을 의롭게 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단순한 믿음이었으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람이 의롭게 되는 방법이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특별한 사람이었는가? 24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이 진술을 아브라함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을 위하여 그의 말씀에 기록하셨다. 우리는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는다. 곧, “우리가 믿는 것”이다! 믿는다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로마서에서 알아보라(1:16/3:22/3:26/4:3/4:24/5:1/10:4/10:9-10 등).

 

죄인이 말씀 가운데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때, 똑같은 부활의 능력이 그의 생애에 들어와 그리스도인이 되고, 믿음의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죄인은 자신이 죽은 사람임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심을 믿어야 한다.

 

마지막 구절(25절)은 칭의의 기초,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한다. 바울은 5장에서 이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읽어야 마땅할 것이다. “우리의 범죄 함을 인하여 내어 준 바 되었으며 우리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하여 다시 살아나셨다.”

 

그가 죽으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죄인들임을 입증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일으키신 사실은 우리가 그의 피로써 의로워졌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것은 칭의가 부활의 능력에 관한 문제이며 육신의 연약한 노력의 문제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증거한다.

 

본 장의 전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행위                                       믿음

보상               가(이) 아니라       선물             (으)로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는다 : 칭의

율법                                       은혜

인간의 노력                             부활의 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