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로마서14 - 롬 13장(권세자에 대한 의무)

JORC구원열차 2009. 7. 17. 08:01

14. 로마서 13장 / 권세자에 대한 의무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불러냄을 받은 사람들이지만(요 15:18/요 17:14), 그는 여전히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최선의 시민은 그리스도인 시민이다. 비록 교회가 정치에 개입되어서는 안 되지만 개개의 신자들은 시민으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특권들을 당연히 사용해야 한다. 이방의 정부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사역을 행사할 수 있었던 요셉과 다니엘 같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헌신한 신자를 통하여 할 수 있는 일들을 볼 수 있다. 본 장에서 바울은 인간의 정부에 순종해야 하는 네 가지 동기를 말해 준다.

 

1. 진노하심을 위하여 (롬 13:1-4)

 

“높은 권력자들”은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고 해도 정부의 치리자들이다. 우리는 복음이 도시의 재무관리였던 에라스도와(롬 16:23) 네로의 몇몇 관리들과 같은 이들에게도 미칠 수 있는 것을 감사한다(빌 4:22). 그러나 우리가 깨달아야 할 사실은 구원받지 못한 정부의 관리들조차 하나님의 사역자라는 점이다. 비록 그 사람을 존경할 수 없다 해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직분은 존중해야 한다.

 

치리자들은 선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사람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한다면 그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물론 정부가 공식적으로 그리스도께 반대하는 곳에서는 사도행전 5장 29절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 후에(창 8:20-9:7) 중요 형벌을 포함하여 인간의 정부를 제정하셨음을 명심하자. 검을 지니는 편은 교회가 아니라 정부이다. 하나님은 세상에 세 가지 기관만을 세우셨다. 곧, 가정(창 2장)과 교회(행 2장)와 인간의 정부(창 9장)이다. 이들의 기능은 중복되어져서는 안 되며, 그렇게 되면 반드시 혼란과 문제가 생긴다.

 

2. 양심을 위하여 (롬 13:5-7)

 

그리스도인이 순종하는 동기가 두려움이라면 그것은 저급한 동기이다.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양심은 우리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그의 양심에 증거하심을 경험하는 것이 당연하다(롬 9:1). 만일 그가 주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양심을 감화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알게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악한 양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믿을 만하지 못한 양심이다.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선한 양심을 갖는다(딤전 1:5). 양심에 말씀하시는 성령의 증거에 계속적으로 불순종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더럽혀진 양심, 화인맞은 또는 굳어진 양심(딤전 4:2)이 되게 하고, 마침내는 거부당한 양심(딤전 1:19)이 되게 한다.

 

바울은 세금(또는 조공)을 바치고 물질적인 것에 대한 관세를 지불하며 모든 관리들에게 존경을 표할 것을 권고한다(벧전 2:17 참조).

 

3. 사랑을 위하여 (롬 13:8-10)

 

이제 바울은 정부 관리들뿐 아니라 우리 이웃의 모든 사람들을 포함시키도록 범위를 넓힌다. 이웃에 대한 신약의 정의는 거리의 주소나 지리적인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음을 명심하자. 누가복음 10장 29절에서 관원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물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6)에서, 예수께서는 “이 셋 중에서 누가 그의 이웃이냐?”고 질문하신다.

 

문제점은 “누가 내 이웃이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하여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것은 율법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이며, 바울이 여기서 다루는 것도 사랑에 대한 것이다.

 

신자는 그 나라의 법 아래 살고 있으며, 또한 천국의 시민으로서 훨씬 높은 법, 곧 사랑의 법 아래에 살고 있다. 사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왜냐하면 마음으로부터의 사랑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순종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남편이 하루 종일 수고를 하는 것은 가족을 부양하라고 법으로 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살인과 탐욕과 부정직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바울이 안식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에 유의하자. 안식일은 사실상 유대인의 의식법의 일부이며, 이방인이나 교회에는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0계명 중에서 아홉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순종해야 할 것으로 신약에 반복되고 있으나, 안식일에 대한 계명은 반복되고 있지 않다.

 

물론, 복음을 거절하고 우리 그리스도인의 간증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란 종종 어려운 일이지만, 이러한 사랑은 성령으로부터 와서 그들에게 이를 수 있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논쟁을 통해서보다는 사랑을 통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인도를 받는다. 사랑 안에서 행하는 그리스도인은 가능한 최선의 시민이다.

 

4. 구세주를 위하여 (롬 13:11-14)

 

우리는 이제 동기들 중의 정상에 이르렀다. 양심의 두려움에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께 헌신하기를 갈구하는 양심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구원”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리스도의 재림에 더 가깝다는 의미에서 볼 때, 매우 가깝다. 바울이 말하는 “구원”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새로운 몸, 새로운 가정 등 우리가 소유할 총괄적인 축복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빛에 속하였으며 낮에 속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복음의 빛을 본 사람들로서, 깨어 있어 경계해야만 한다(고후 4장). 더구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죄 가운데 있는 모습을 보이기를 원하는 신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낮이 가까워왔다”(히 10:25- 참조)

 

바울은 여기서 많은 지독한 죄들을 열거한다. 성도들 가운데서는 이름도 꺼낼 수 없는 죄들이다. 술 취함과 부도덕은 늘 수반되며, 싸움과 분열을 초래한다는 것을 눈여겨보자. 얼마나 많은 가정이 술 취함으로 인하여 파괴되었는가!

 

14절은 신자들의 이중적인 책임을 말해 준다. 즉, 적극적으로는 “그리스도를 옷 입어” 그리스도를 자기 생활의 일부로 여기고, 소극적으로는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을 죄 가운데로 빠지게 하는 것들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반스 하브너(Vance Havner)가 말하듯 “죄를 계획한다.” 다윗이 그에 대한 대표적인 실례이다. 그리스도가 곧 오실 빛 가운데서, 영적으로 깨끗한 근신하며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책임이다.

 

마지막 때는 무법한 시대일 것이므로(딤후 3:1-/요일 3:4 참조), 헌신한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간증을 유지하는 일은 더욱 더 어렵게 될 것이다. 정부들은 점점 더 성경과 그리스도를 적대할 것이며, 결국은 죄의 사람(The Man of-Sin)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사단의 제도로 연합시켜 진리를 반대할 것이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4장 5절을 읽고,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주님께 충성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