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216(수)
표면적 신자와 이면적 신자 (롬 2:28,29, 갈 1:11-16)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
날씨가 추워지고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날씨가 몹시 추워 저수지가 얼게 되면 그 위에서 아이들이 얼음을 지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때 조심할 것은 얼음이 완전히 얼지 않고 위에만 짝 얼음이 얼게 되는 일입니다. 그 속까지 깊게 얼음이 얼어야지 표면적으로 알음이 언 것처럼 보여서는 실로 위험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인들 중에도 이렇듯 그 중심까지 바른 신앙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겉으로만 신앙인인 체하는 표면적 신자가 있어 그 자신과 주위 사람들을 위험하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표면적(outward) 신자가 아니라 그 중심까지도 신앙이 확고한 이면적(inward) 신자가 되어야 참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표면적 신자(表面的 信者)란 겉으로만 믿는 체하고 의문적(儀文的)으로만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교리도, 의문도, 예법도 알지만 겉으로만 아는 것이지 참된 믿음이 없는 자입니다. 물론 학습도 받고 세례도 받고 주기도문이나 사도신경도 잘 외우지만 참으로 그 안에 주님의 생명을 가진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나 이면적 신자(裏面的 信者)는 속사람이 진정 변화를 받은 영적인 신자란 뜻입니다.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신자란 뜻이고 참으로 하나님에게서 난자의 의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이면적(裏面的,inward)인 종교요, 생명의 종교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바로 영적인 것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그 속에 주님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겉으로는 아무리 그럴듯해도 참 신자가 아니며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요 10:10의 말씀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는 생명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이며, 내면적인 것이지 의문(儀文)에만 그치는 표면적(表面的)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예배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면적 이면적 신자(裏面的 信者)가 되려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져야 합니다. 참으로 주님과 만나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요 1:12 말씀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으니 참으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한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그 속에 예수님의 생명이 거하는 것입니다. 또한 롬 10:9,10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시인한 사람은 그때부터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을 소유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표면적 신자와 이면적 신자는 어떤 면에서 어떤 차이를 나타낼까요?
1. 예수님을 아는 데 있어서 차이를 보입니다.
내면적 신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는데 이것은 배워서 안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계시로 영적으로 깨달아 알게 됩니다.
마 16:13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인자(人子)를 누구라 하느냐?"고 했을 때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에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재차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했을 때 베드로가 얼른 대답하기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라고 했습니다. 이때 예수께서는 "바요나 시몬아 네게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참된 이면적 신자는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게 됩니다. 막연하게 예수님을 존경하고 그의 교훈에 오감을 가진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참으로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예수를 만나며 예수님과 직접 영적 관계를 맺는 자가 참 그리스도인이요, 내면적 신자인 것입니다.
처음에 바울은 철저한 율법주의자이며 조상의 엄격한 종교 가르침을 받은 사람으로 교회를 심히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주님이 그에게 나타나 주님을 만났을 때 회개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학문적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주님을 안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에서 간증하기를 그가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요,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가 없는 사람, 참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고 말로만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기독교의 의식을 알고 성경을 잘 알아도 또 아무리 열심히 있어도 그 지식과 열심은 다 헛된 것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그가 조상의 유전을 잘 지켜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자기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영을 그 속에 계시해 주셨기 때문에 된 것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가진 이면적 신자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되심과 나의 구주가 되심을 그 중심에 분명히 알고 믿게 됩니다.
2. 시험을 대하는 데 있어서 차이를 보입니다.
이면적 신자도 시험을 당할 때가 있으나 그 시험을 끝내 이깁니다. 간혹 일시적으로 낙심할 때는 있어도 완전히 타락하지는 않습니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이 없는 표면적 신자는 아무리 잘 믿는 것 같고 열심히 있는 것 같다가도 시험을 당케 되면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타락하고 떨어져 나가고 맙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겉보다 속을 중요시하고 의문이나 의식보다 영적인 애용과 그 생명을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에 보면 니고데모가 "당신은 하나님께서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고 했을 때 예수님은 동문서답 격으로"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선생이라고 했는데, 선생이란 지식적인 가르침을 주는 자로서 그 선생을 통해 받고자 하는 것은 표면적인 것이지 이면적인 것이 아니며 생명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정 예수를 구주로 믿는 자는 그 안에 영이 거듭나고 영원한 생명을 소유해야 하기에 단지 지식적으로만 예수를 아는 니고데모에게 예수께서는 친히 보다 근본적인 진리를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아무리 잘 배우고 연습을 잘해도 육은 육이지 육이 영이 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설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요 3:5,6)고 하신 것입니다. 그 속에 생명이 없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렇나 자들은 시험을 당해 그것을 감당할 생명의 힘이 없기에 좌절하고 실족케 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분명한 생명의 힘이 있는 자는 어떤 시험도 능히 물리칩니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오병 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께로 구름떼처럼 모여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육신의 양식을 얻어먹으려고 온 사람들이지 영생의 양식을 먹으러 온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실 '생명의 떡, 영의 양식'이 되신 분이지 육신의 양식이나 주려고 오신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생명의 떡은 인자가 주리라"(요 6:26,27)하셨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니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 6:32-35)고 했습니다. 이때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이 영생의 양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요 6:28)하고 물었을 때 "하나님의 보내신 자(예수)를 믿는 것이 영생의 양식을 먹는 법이다"(요 6:29)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요 6:47에도 보면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이러한 예수님의 영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수군거리며 "이사람이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요 6:41,42)고도 하고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요 6:60)하기도 하면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렇듯 제자들이 많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 12제자에게 묻기를 "너희도 가려느냐?"고 했습니다. 이때 시몬 베드로가 역시 시원한 대답을 하기를 "주여, 생명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에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습니다"(요 6:68,69)고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오병 이어의 기적으로 육신의 빵을 배불리 먹었을 때 많은 무리들이 몰려 왔으나 막상 영생의 빵을 내놓았을 때 많은 사람이 물러가고 말았습니다. 이와 같이 표면적 신자는 아무리 열심히 믿고 의식을 잘 아는 것 같아도 언젠가는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지지만 그 속에 생명을 가진 이면적 신자는 어떤 시험도 이깁니다. 낙심할 때는 있어도 타락하지는 않습니다. 칼빈도 말하기를 '예수의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귀의 화살을 아무리 많이 맞아도 결코 치명적인 상처는 입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표면적인 신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말씀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중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진정 귀하게 여기지 않고 도리어 비판하고 의심합니다. 그러다가 끝내 시험을 당해 넘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진정 그 안에 하나님의 계시의 영이 있는 신자, 생명이 있는 이면적 그리스도인만이 그 어떤 시험도 능히 이길 수 있습니다.
3. 영적 예민함에 있어서 차이를 보입니다.
표면적 신자와 이면적 신자는 영적 예민함에 있어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특히 죄를 범했을 때 그것을 느끼는데 있어서 큰 차이를 보입니다. 즉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죄를 범했을 때 불안한 느낌을 가지고 괴로움을 느낍니다. 기쁨이 사라지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생김을 느끼게 됩니다. 생명은 사망의 원인이 되는 죄악을 미워하게 되므로 예수를 믿고 그 속에 생명을 가지면 죄에 대한 적대감과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면서도 괴로움이나 불안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안에 진리의 영, 생명의 영이 있는 거듭난 사람이 아닙니다. 표면적 신자일 뿐입니다.
또한 지체 의식에 있어 차이를 보입니다(고전 12:26). 즉 예수를 믿고 구원받으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한 지체가 되기 때문에 그러한 지체로서의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사랑하고 염려하게 되고 교회가 잘되고 부흥되면 기쁘고 또 고통과 시험이 있으면 내 집일처럼 괴로움을 느끼면서 염려합니다. 또한 다른 지체들인 주위 성도들에 대해서도 사랑과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표면적 신자는 형식적으로는 교회를 다녀도 그 안에 생명이 없으므로 그런 사랑과 괴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교회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됩니다. 마치 의족을 해 끼운 사람은 모양은 다리와 꼭 같아도 그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무감각한 것과 같습니다. 주님 안에서 하나된 다른 성도들에 대해 같은 지체로서의 연대감이나 사랑이 없습니다. 교회의 지체로서 교회의 한 부분이 됨을 느끼지 못합니다. 교사가 되든, 성가대가 되든 말든 무관심하고 여선교회, 남선교회 좀 같이 하지고 하면 귀찮게만 여깁니다. 교회 재정이 남든지 모자라든지 정성껏 헌금을 하는 법도 없고 기도하는 법도 없습니다. 교회일 좀 하라고 하면 '부담없이 믿으렵니다'하고 도망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지체 의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함에 있어 차이를 보입니다. 요일 3:14에 보면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라고 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속에 예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같은 생명을 가진 믿는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는 자연히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으로 인해 그 하나님으로부터 난 모든 자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요일 4:12에 보면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생명이 없는 표면적 신자는 사랑을 느끼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합니다. 요일 4:8에도 보면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모두는 부디 예수님을 그 중심에 바로 알고 믿음으로써 영원한 진리와 생명의 소유자들이 되셔서 모든 시험을 능히 이기며 영적으로 예민한 이면적 신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 아 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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