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석위에기쁨/신약성경 자료

아시아 일곱교회-변종길 교수

JORC구원열차 2010. 7. 19. 21:07

아시아 일곱 교회                               변  종  길(고려신학대학원, 신약학)

             

아시아 일곱 교회란 주후 1세기말에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서부 지역에 존재했었던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교회를 말한다. 이 교회들을 탐방하기 위해서는 여행사를 통해 현지에 직접 가보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러나 굳이 많은 돈을 들여서 그렇게 할 필요는 없다. 사실 지금은 가봐야 옛날 교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고 그저 돌무더기와 약간 남은 파편들뿐이다. 차라리 앉아서 성경 말씀과 고대의 기록들을 통해 과거의 세계로 여행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 이 글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교육위원회 발간 「교회와 교육」 1997년 5월호(pp.45-48), 6월호(pp.47-50), 7/8월호(pp.43-46), 9월호(pp.49-52), 10월호(pp.47-50), 11월호(pp.39-42), 12월호(pp.51-54)에 게재되었던 <초대교회 탐방> 시리즈 원고를 묶은 것임.

 

 

I. 처음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계 2:1-7)

 

1. 바울과 요한이 목회했던 교회

 

 그러면 먼저 에베소 교회부터 가보기로 하자. 에베소는 소아시아의 서해안에 자리잡고 있는 항구 도시이다. 서쪽으로는 에게해가 펼쳐져 있고 동쪽으로는 카이스터(Cayster) 강이 흘러 들어오는 교통 요로에 자리잡고 있어 일찍부터 중요한 상업, 무역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래서 주후 1세기에는 인구 25만 명을 가진 아시아에서 가장 큰 도시로 번창하게 되었다. 이 에베소에는 큰 운동 경기장(스타디움)이 있었으며,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과 2만 5천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극장이 있었다(행 19:29). 또한 에베소에는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네 배나 큰 아데미 신전이 있었다(행 19:27).

 

기독교 역사적으로 볼 때에 에베소는 사도 바울이 목회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2차 전도여행 때 잠깐 들러 복음을 전했으며(행 18:19), 3차 전도여행 때 와서 약 2년반 동안 이곳에서 목회하였다(행 19장). 그 당시 에베소의 인구와 전략적 중요성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이 이렇게 에베소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복음 전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이 떠난 후에는 디모데가 와서 목회하였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목회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이후에 이곳에서 오랫동안 목회한 중요한 지도자는 사도 요한이었다. 그가 언제부터 이 교회를 담임하였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90년대 말, 백발이 성성할 때까지 이 교회를 맡아서 복음을 전한 마지막 사도였다. 그러다가 도미티안 황제 때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93-94년) 그는 밧모(Patmos)라는 섬에 유배되었는데, 그때 그가 환상 가운데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기록한 것이 곧 요한계시록이다(계 1:9-11).

 

2. 이단을 막아낸 교회

 

 우리 주님께서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가 요한계시록 2-3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이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의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먼저 에베소 교회를 칭찬하셨다. 칭찬의 핵심은 에베소 교회가 이단을 잘 막아냈다는 것이다(계 2:2-3).

 

정확히 언제 어떤 이단들이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1세기말에 많은 이단들이 일어나서 교회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 이단들은 주로 영지주의(靈知主義)적 색채를 띠는 것으로서, 교묘하게 기독교 신앙과 혼합하여 성도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우리는 이것을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요한일서에서도 읽을 수 있다. 거기에 보면 그때에 이단들이 에베소(또는 에베소 주변)의 교회에 들어왔으나 교회가 그들의 정체를 간파하고 그들을 물리쳤다고 말하고 있다(요일 2:19). 이들은 영지주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와 그리스도는 서로 다르다고 하며 예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였다고 한다(요일 2:22, 4:2,3).

 

그런데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 당시 에베소에 들어왔던 이단은 ‘니골라 당’이라고 한다(계 2:6). 이 니골라 당이란 이름은 이레네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하나였던,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행 6:5)에서 온 것이라고 하나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하여튼 이들은 그 당시 교회를 미혹하던 이단임에는 틀림없다. 이들은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버가모 교회에도 들어와서 성도들을 미혹하였다. 이 니골라 당은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 발람처럼, 성도들을 꾀어서 우상제물을 먹게 하고 행음하게 하였다(계 2:14,15). 그런데 에베소 교회는 이런 이단들의 미혹과 시험을 잘 뿌리치고 막아내었다. 그들의 거짓된 것을 잘 드러내고 물리쳤다. 이것은 그 당시 교회를 위협하던 이단 세력들에 대한 중요한 승리요 크게 칭찬받을 일이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아마 사도 바울에게서 3년간 성경을 잘 배워서 뿌리가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떠나면서 당부한 말씀을 잘 기억하고 흉악한 이리들을 잘 분별하고 막아내었을 것이다(행 20:29,30). 무엇보다도 사도 요한이 목회자로서 강단을 지키고 있는 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이다.

 

3.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

 

 그러나 에베소 교회는 이러한 칭찬과 함께 책망을 받았다. 그것은 에베소 교회가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4절).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바울의 전도를 받았을 때는 은혜와 사랑이 충만했을 것이다.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 죄인들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넓으신 사랑을 깨닫고는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을까? 그래서 주님의 계명을 따라 형제를 사랑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혹 누구에게 허물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감싸주고 덮어주고 등등 ··· 참으로 사랑이 풍성한 교회였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이단들의 도전을 받아 그들과 싸우다 보니 그만 사랑이 식어져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걸핏하면 형제를 의심하고 조금만 이상해도 따지고 들고, 여차하면 잘라내고 하다보니 그만 차고 냉랭한 교회가 되고 말았다. 복음의 진리는 지켰지만 사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책망받게 된 것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하려고 애쓰다 보면 이래저래 충돌이 있게 되고 갈등과 긴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와는 반대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사랑이 최고다”라고 하면 혹 교회는 평안하고 사랑이 있을지 모르나, 교회의 순수성은 없어지고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고 바르게 운영하려고 애를 쓰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다 보면 자칫 사랑이 약해지기 쉽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아무리 교회를 순수하게 올바르게 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는 쌀쌀한 교회가 된다면 이것은 결코 좋은 교회라고 할 수 없다. 에베소 교회가 바로 그러하였고, 이 때문에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주님으로부터 준엄한 책망을 받게 되었다. 

 

4. 처음 사랑의 회복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래도 에베소 교회를 사랑하셔서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셨다.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시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져라.”(5절) 첫 사랑을 잃어버린 성도들을 향한 주님의 해결책이 여기 있다.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가 먼저 할 일은 자기가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이다. 어디서,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떨어졌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그 원인을 찾아내어야 한다. 우리 나라 성도들은 무엇을 회개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막 회개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다. 병의 원인도 모르고 약을 아무리 투여해 봐야 소용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발견한 다음에는 회개하여야 한다. 그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 회개란 자기의 잘못을 자백하는 것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을 실제로 바로잡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처음 행위를 가지는 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그런데 여기에 주의할 것이 있다. 우리 나라 성도들은 사랑을 너무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 가졌던 그 기쁨, 가슴 뿌듯함, 물밀듯이 밀려오는 하나님의 사랑, 그 첫사랑의 기쁨을 다시금 회복하려고 몸부림치는 성도들이 많은데, 이것은 잘못이다. 그러한 감정적인 사랑은 대개 처음 믿을 때에 주어지는 것이지 그후에 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첫 사랑이란 젊었을 때 처음 사랑할 때에 있는 것이지, 결혼하고 나서 10년, 20년이 지나서도 그런 애틋한 감정이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지속된다면 오히려 이상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처음 사랑을 회복한다고 할 때 그런 감정이 회복되도록 기도하고 가만히 기다려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도 그러한 ‘감정’의 회복이 아니다. 주님께서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열심을 내라는 의미이며, 또한 교회 안에 형제들을 사랑하며 돌보라는 뜻이다. 대수롭지 않은 것이면 형제의 잘못을 꼬치꼬치 캐묻고 따지지 말고,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감싸주며,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도와주고 위로해 주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참 사랑의 성숙이다. 아름다웠던 옛 시절은 추억 속에 고이 묻어두고 지금은 옆에 있는 남편(아내)과 자녀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어려운 형제들을 돌아보고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 이것이 참된 사랑의 회복이며 성숙한 사랑의 실천이다. 그리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고 예전보다 더 큰 은혜를 내려 주실 것이다.

 

 

II. 죽도록 충성한 서머나 교회(계 2:8-11)

 

1. 로마에 충성한 서머나

 

서머나는 에베소에서 북쪽으로 약 50여 km쯤 떨어져 있는 곳에 있는 항구도시이다. 마치 우리 나라의 태안반도처럼 길쭉하게 튀어나온 반도의 남쪽에는 에베소가 자리잡고 북쪽에는 서머나가 자리잡고 있었다. 서머나는 옛날 루디아(Lydia) 왕국 때부터 중요한 무역도시로 발전하여 큰 부를 축적하였다. 이 도시에는 스타디움과 도서관이 있었으며 아시아에서 제일 큰 공공극장이 있었다. 대서사 시인 호머(Homer)가 바로 이 도시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서머나는 로마의 충실한 동맹이었다. 수차의 카르타고와의 전쟁 때 서머나는 로마 편에 서서 지원하였으며, 로마 황제를 위한 신상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서머나는 무엇보다도 그 아름다움을 자랑하였다. 이 도시는 바다를 바라보는 경사진 곳에 세워져 있었으며, 아름다운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파구스(Pagus) 언덕의 거리는 ‘황금의 거리’라고 불리웠다. 그 거리의 양쪽 끝에는 신전이 있었다. 그리고 바다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은 사시사철 신선하고 시원한 기후를 마련해 주었다. 그래서 오늘날 이 도시는 ‘이즈미르(Izmir)’라고 불리는데, 소아시아 일곱 도시 중 현존하는 유일한 도시이며 오늘날 터키의 유명한 관광휴양지로서 구라파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2. 유대인들의 훼방

 

 이 서머나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아마 서머나가 상업도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 당시의 유대인들은 어디서든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으며, 로마의 관청에 열심히 고소하였다. 그러니 동족이 동족을 고소하는 그런 꼴이 되었다. 로마 사람이 볼 때에는 같은 유대교끼리 서로 싸우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글라우디오 황제는 주후 49년경에 유대인들을 향하여 로마를 떠나라고 명하기도 했었다(행 18:2 참조). 서머나에서도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몹시 괴롭게 하였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리켜 모세의 율법을 폐하는 자들이라고 비방하기도 하고, 사회 경제적으로도 압력을 예수를 믿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특히 핍박 때에는 로마의 앞잡이가 되어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관리들에게 넘겨주었다.

 

이런 어려움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를 주님께서는 먼저 위로하셨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9절) 여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 5:3)라고 하신 ‘팔복’의 말씀이 메아리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서머나의 성도들은 진정 복 있는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이름 때문에 고난받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주님 때문에 ‘찌들리고 박해받는’ 가난한 자들이었다. 곤고한 자들이었다. 이들을 가리켜 ‘부요한 자’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천국이 바로 이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바로 이들을 위해 천국을 예비해 두셨고 또한 현세에서도 그들과 함께 하시고 위로해 주신다.

 

그리고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정체를 말씀해 주신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내가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단의 회라.” 그들은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며 그 증거로 할례 받은 것은 자랑스럽게 내세우고 있었지만, 실상은 ‘사단의 회’라고 하신다. 무서운 말씀이다.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성도들을 훼방하고 핍박하는 자들은 아무리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지라도 실상은 ‘사단의 회’인 것이다. 아무리 육신적으로 할례를 받고 유월절을 지키고 해봐야 소용이 없다. 하나님의 보내신 자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참 유대인이요 하나님의 백성이지,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에게서 났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이스라엘 나라에 있는 저 유대인들이 참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참 유대인이요 참 이스라엘이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고 중심을 보시며, 이 세상 어디서든지 주의 뜻을 행하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다.

    

3. 10일 동안의 환난

 

주님께서는 이러한 서머나 교회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 교회가 앞으로 당할 환난을 미리 가르쳐 주셨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10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10절). 여기서 ‘10일 동안’이란 꼭 문자적으로 10일을 가리킨다고 보아서는 안 된다. ‘10일’이란 ‘끝이 있는 한정된 기간’을 뜻한다(Greijdanus). 길지 않은 짧은 기간을 뜻한다. 실제로 서머나 교회를 포함한 소아시아는 93-94년 도미티안 황제 때에 큰 핍박을 받았고 또한 113년-114년 트라얀 황제 때에도 큰 핍박이 있었다. 그 당시 핍박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로마제국의 ‘결사 금지법 위반’이었고, 둘째는 ‘국가 제의 불참’이었다. 이 ‘국가 제의’는 황제를 ‘주(主)’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받았으며 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

4. 죽도록 충성하라

 

 

이 모든 어려운 사정을 잘 아시는 주님께서는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 나라 교회의 장로 장립식이나 권사 취임식 때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다. 그래서 대개 “죽도록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라” 또는 “죽는 날까지 쉬지 말고 열심히 봉사하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열심히 교회 예배와 모임, 회의 등에 참석하고, 기도 많이 하고 교회 일 열심히 하고, 또한 물질적으로도 있는 힘을 다해 섬기라는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사실적으로는 옳은 일이고 좋은 일이지만, 본문의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원어의 문장을 그대로 직역하면 “죽음까지 충성스러워라”가 된다. 이 말은 곧 죽음에 이르는 한이 있더라도 충성스러워야 한다는 뜻이다. 옛날에 신하가 한 왕에게 끝까지 충성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곧 변절치 말고 끝까지 절개를 지키라는 뜻이다.

 

우리는 예수라는 임금을 섬기는 신하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한다.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심지어 죽음이 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의 주님을 배반하지 않는 충신(忠臣)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신앙이며 곧 순교신앙이다. 예수 우리 주님을 부인하지 않고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참된 믿음이고 참된 충성이다.

 

5. 생명의 면류관

 

 주님께서는 이렇게 끝까지 충성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다(10하). 이 세상에서의 생명은 잠깐이지만 저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생명은 영원하다. 영원히 빼앗기지 않는 생명을 주신다. 이것을 그 다음절에서 다시 확인해 주고 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11절). 이 세상에서 비굴하게 생명을 조금 연장받은 사람은 죽어서 영원한 불못에 던지우지만(계 20:15), ‘죽도록 충성한 자’ 곧 믿음의 절개를 굳게 지킨 자에게는 이러한 둘째 사망의 고통이 없으며 우리 주님과 더불어 영원복락을 누리는 것이다.

 

서머나 교회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지킨 교회였다. 2세기에 이 교회를 맡아서 목회했던 지도자는 폴리갑(Polycarp)이었는데, 사도 요한의 제자였다. 충성스럽게 주님의 교회를 맡아 섬기던 폴리갑은 155년경에 핍박을 받아 순교하였다. 화형장에 끌려갈 때에 로마의 총독이 그에게 다시 말하였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그리스도를 비난하고 그를 모른다고 하라. 그러면 내가 너를 놓아주리라.” 그러나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하였다고 한다. “내가 86년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섬겨 왔는데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나의 주이시며 왕이시요 구주이신 그분을 어떻게 배반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 그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신하였기 때문에 그의 주, 그의 왕을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떠한 위협과 어떠한 협박도 그의 충성을 바꿀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화형대의 불은 한 시간 정도 타다가 꺼지고 말지만, 주 예수를 배반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불이 예비되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섬기는 신하들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있다. 이런 왕이 우리에게 계심을 기뻐하고 이 왕을 믿고 섬길 수 있게 된 것을 우리 모두 감사드리자. 그리고 어떤 환난이나 핍박이 와도 이 주님을 배반하지 않으며 죽도록 충성하여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쓰는 성도들이 다 되도록 하자.

 

 

III. 발람의 교훈을 지킨 버가모 교회(계 2:12-17)

 

1. 양피지의 생산지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약 65 km쯤 올라가다가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계곡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아시아’ 주의 행정 수도인 버가모가 나온다. 서쪽의 에게해에서 약 15 km쯤 떨어진 내륙 지방에 위치한 버가모는 해발 약 300 m의 뿔 모양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였다. 로마의 문필가였던 플리니(Pliny)는 이 도시를 가리켜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도시’라고 불렀다. 버가모는 주전 3세기에 많이 발전하였으며, 주전 2세기에는 ‘헬레니즘 문화의 꽃’으로 불리었다. 이 도시에는 20만 권이 넘는 책을 가진 도서관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버가모는 양피(羊皮) 종이의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예전에는 나일강 유역의 갈대 껍질로 만든 파피루스 종이가 많이 사용되었는데, 주전 2세기에 양의 가죽으로 만든 종이가 발명되었다. 이것은 고급 종이로서 인기가 있었으며, 주후 4세기 이후에 성경을 필사할 때에 많이 사용되었다. 오늘날 이런 양피지(羊皮紙)를 독일어로는 ‘페르카멘트(Perkament)’라고 하는데, 이는 곧 ‘버가모(Pergamum)’라는 지명에서 나온 말이다.

 

2. 사단의 위(位)가 있는 곳

 

이 도시의 윗 부분에는 여러 종교적 건물들이 있었다. 제우스 신의 제단이 있었고, 치료의 신이라고 하는 뱀 모양의 아스클레피오스(Asklepios) 신당이 있었으며, 그 외에도 여러 신들의 제단이 있었다. 그래서 본문 13절에 보면,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고 했다. 곧 ‘사단의 보좌’가 있는 곳이라는 말씀이다. 뿐만 아니라 버가모는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주전 29년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이곳에 자기를 위한 신전을 세우도록 허락하였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이 신전에 끌려가 “가이사는 주이시다”라고 고백하도록 강요받았으며, 이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고난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사실을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좌우에 날 선 검을 가지신 이’라고 한다(12절). 이것은 버가모의 로마 총독이 사람들을 마음대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 소위 ‘칼의 권한(ius gladii)’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비교된다. 육신의 목숨을 주관하는 이가 로마 총독이라면 사람의 생명을 참으로 주관하시는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나타낸다.

 

3. 충성된 증인 안디바

 

 이런 주님께서 먼저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을 칭찬하신다. 어려움 가운데서 신앙 생활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먼저 위로와 칭찬의 말씀을 보내시는 것이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13절) 여기서 말하는 안디바(Antipas)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 후대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안디바는 1세기 말 도미티안 황제 때 놋쇠로 만든 황소 모양의 솥에 집어넣어져서 서서히 구워서 죽임 당했다고 한다. 참으로 잔인한 죽임이었다. 이런 끔찍한 광경을 보고서도 버가모 교회의 성도들은 주님을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참으로 귀한 신앙이었고 진짜 신앙이었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였던 것이다.

 

4.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

 

이렇게 굳건한 믿음을 가진 버가모 교회였건만 잘못하는 것이 또한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믿음이 좋으면 잘못하는 게 어디 있겠는가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믿음이 아주 좋은 교회도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하는 게 있을 수 있다. 버가모 교회도 순교할 만큼 믿음이 좋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버가모 교회를 향하여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다고 하셨다(14절). 그것은 곧 그들 가운데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다”는 것이었다(14절). 발람은 원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살던 거짓 선지자였다. 그는 모압 왕 발락의 부름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기 위해 멀리서 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가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막으시고 도리어 축복하도록 하셨다.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후에 발람 선지자가 꾀를 내어 모압 여자들이 그들의 신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우상의 제물을 함께 먹게 하고 모압 여자들과 행음하게 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 회중에 하나님의 큰 진노가 임하게 되었다(민 22-25장).

 

주후 1세기에 버가모 교회에도 이와 비슷한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니골라 당’이라고 불리었는데(15절), 에베소 교회에도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켰던 이단들이다. 이 니골라는 이레네우스의 증언에 의하면 초대 교회 ‘일곱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였다고 한다. 그는 원래 이방인이었는데 나중에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었으며 후에 기독교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 타락하여 문제를 일으켰다고 한다.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에다 우상 숭배와 음행을 합한 타협주의 노선이었다. 기독교인도 얼마든지 우상에게 제사 드릴 수 있고 음행해도 괜찮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자 버가모 교회의 믿음이 옅은 자와 어리석은 자들이 이 가르침에 미혹되었다.

 

5. 감추었던 만나와 흰 돌

 

 이런 자들, 곧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은 무엇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회개하라”는 것이다(16절). 긴 말이 필요 없다. 오직 잘못된 가르침과 행동을 떠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회개치 않는 자에게 엄중한 경고를 내리셨다.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16절) 자기의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님의 무서운 심판이 속히 임할 것을 경고하신 것이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끝까지 자기를 더럽히지 않고 이기는 자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흰 돌’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17절). 여기서 ‘감추었던 만나’란 것에 대해 너무 신비적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생하도록 내려 주시는 하늘 양식을 뜻한다. 곧 주님을 끝까지 잘 믿고 따르는 자에게는 영생을 주시겠다는 말이다. 그리고 ‘흰 돌’이란 것에 대해서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면 안 된다. ‘희다’는 것은 깨끗하다는 것 또는 승리를 의미한다. 무엇보다도 “그 돌 위에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새 이름’은 믿음으로 승리한 자의 이름을 뜻한다. 야곱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이 주어졌듯이 주님을 끝까지 믿어 이긴 자들에게는 승리의 새 이름이 주어지는 것이다.

 

6. 이기는 자들

 

버가모 교회는 한편으로는 주님을 믿는 믿음을 잘 지켰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잘못된 교훈을 따르는 자들을 용납하고 말았다. 이들을 쫓아내지 않고서 용납한 것은 아마 ‘사랑’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해야지, 그들을 용납해 줘야지 하다 보니 교회 안에서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이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교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 주님께서 도무지 참으실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버가모 교회 성도들의 이중성을 보게 된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잘 믿고 싶고, 그래서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순교도 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음행하는 자들을 용납하였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도 버가모 교회 성도들과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한편으로는 주님을 잘 믿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세상과 타협하여 적당히 죄와 더불어 살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을 가진 성도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좋은 게 좋다”, “편하게 살자”는 식의 신앙이 만연해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한국 교회 성도들은 ‘진리’에 관심이 없다. 평신도들뿐만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도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서는 너무 관심이 없다. 그저 좋은 대로 생각하고 그저 편한 대로 움직인다. 이런 식의 주관적, 인본주의적 신앙으로는 결코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죄악을 과감하게 버리고, 살아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기는 순수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 이런 자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감추었던 만나’와 ‘새 이름이 기록된 흰 돌’을 준비하고 계신다.

 

 

IV. 이세벨을 용납한 두아디라 교회(계 2:18-29)

 

1. 동업조합의 도시

 

 두아디라(Thyatira)는 버가모에서 동쪽으로 약 60여 km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도시였다. 두아디라는 셀류커스(Seleucus) 1세에 의해 군사 요새로 건설되었으며, 주전 190년에 로마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로마 치하에서 이 도시는 공업 및 상업 도시로 번창하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자주색 천이 유명하였는데, 사도 바울이 빌립보에서 만난 자주 장사 루디아가 바로 이 두아디라 성 출신이었다(행 16:14). 이 도시에는 또한 각종 동업조합(同業組合, guild)이 발달하였다. 그 곳에는 모직 조합, 직조 조합, 염색 조합, 제혁 조합, 도기 조합, 제빵 조합, 대장장이 조합, 노예매매 조합 등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동업조합은 각 조합마다 수호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각 회원들은 그 조합에서 가지는 제사 의식에 참여해야 했으며, 또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이어서 음란한 행사가 이어졌다. 그 당시 두아디라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이 동업조합에 가입해야만 했고, 그러면 우상제물을 먹고 음행에 가담해야만 했다. 이런 상황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두아디라 성도들은 참으로 어려운 입장에 있었다. 먹고살자니 조합에 가입해서 죄를 지어야 하고, 죄를 짓지 아니하자니 먹고살기가 힘들고 ··· 그래서 많은 성도들이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갈등하고 있었다. 마치 우리 나라 성도들이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생활 하기 힘들다고 호소하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2. 거짓 선지자 이세벨

 

 이럴 때 사람들은 수를 찾게 된다. “무슨 좋은 수가 없나?” “신앙도 지키면서 장사도 잘 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을까?” 이런 비법을 찾고 있을 때 해결사로 나타난 사람이 바로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이었다. 이 사람이 누구인지, 본명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세벨’은 원래 옛날 이스라엘 아합 왕의 아내였다. 그는 원래 시돈 왕의 딸로서 아합 왕에게 시집 와서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바알 숭배를 크게 퍼뜨린 자였다(왕상 16:30-33, 왕하 9:30-37). 그래서 ‘이세벨’은 우상 숭배를 퍼뜨린 사악한 여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두아디라에 있던 거짓 선지자 이세벨도 이처럼 성도들을 꾀어서 우상을 섬기게 하고 죄를 짓게 하였다.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20하). ‘가르침’이 미혹의 수단이었다. 요즘의 이단들도 가르침을 주요한 미혹의 수단으로 삼는다. 무슨 재미있는 성경 공부나 무료 신학교 운영 등을 통해 솔깃한 가르침을 퍼뜨려 사람들을 미혹한다. 성경 공부도 좋고, 무슨 과정도 좋지만 우리는 거기서 그들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표로 하는 것인지를 먼저 살펴보고 판단하여야 한다.

 

아마 이 여자 이세벨은 영지주의(靈知主義)에 속하는 이단이었던 것 같다. 영지주의란 영혼과 물질의 이원론을 주장하는 가르침으로 그 당시 소아시아 일대와 지중해 연안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사상이었다. 이 영지주의에는 크게 두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육체는 악하다 하여 금욕하고 절제하는 고행주의 계통이고, 다른 하나는 육체는 원래부터 악하니 어쩔 수 없고 영혼만 깨끗하면 된다고 가르치는 반(反)율법주의 계통이었다. 아마 이 이세벨은 이 두 번째의 것으로 영혼과 육체는 서로 관계가 없기 때문에 몸으로 무슨 죄를 짓든 영혼의 구원에는 상관없다고 가르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러한 이세벨의 가르침에 두아디라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미혹되었다. “그럼 그렇지, 구원이란 영혼의 문제인데 부득불 육체를 좀 더럽혔다고 해서 구원에야 지장이 있겠나? 게다가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니까 할 수 없이 세상과 좀 타협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이렇게 스스로 반문하며 위로하였을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가 일제 때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고 국가의례라고 변명하면서 신사 앞에 절하던 모습과 비슷하다. 이 세상에서 말씀 그대로 다 지키는 것은 너무나 힘들고 어렵지 않은가? 적당히 조금만 타협하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것을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느냐?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우상 앞에 절하고 죄를 지었을 것이다.

 

3.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

 

 그러나 예수님은 이 모든 간계를 다 아신다. 예수님은 이런 자들을 그냥 가만히 두시지 않으신다. “···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리라.”(23절) 여기서 ‘뜻’이란 말은 원어상으로는 ‘신장’ 즉 ‘콩팥’을 가리킨다. 이것은 또한 사람의 ‘기질’ 또는 ‘성질’을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사람의 가장 깊은 욕구와 감각의 근원’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박윤선).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깊은 곳에 들어 있는 생각과 마음을 다 아신다. 그들이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속이고 변명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속마음을 다 아신다는 뜻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 여자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벌하시기 전에 먼저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렇지만 그 여자는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지 않았다(21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여자를 침상에 던지시겠다고 하신다(22절). 곧 병들어 눕게 하시겠다는 뜻이다. 소아시아에서 발견된 여러 비문 조각들에 보면 그 당시에 음행을 인하여 벌받아 병든 사실이 적지 않다고 한다(Moffat). 그리고 그 여자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회개치 않으면 다 큰 환난 가운데 던지시겠다고 한다(22절). 이것은 곧 시행될 임박한 심판을 말한다. 간음과 같은 큰 죄에 대해서는 현세에서 즉각적으로 심판하실 때가 많다. 뿐만 아니라 그 여자의 자녀들을 죽이시겠다고 하신다(23절).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악행을 하고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때때로 무서운 벌을 내리신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시며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심을 깨닫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4. 믿음의 정절을 지킨 성도들

 

 그러나 두아디라 교회에는 여자 이세벨의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믿음의 정절을 지킨 성도들도 있었다. 이들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하고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너희’라고 말한다(24절). 여기서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은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아니한”으로 번역해야 더 정확하다. 이들은 소위 ‘사단의 깊은 것’에 관계하지 않았다. 그들의 죄에 동참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 거짓 선지자는 자기의 가르침을 ‘깊은 것’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즉 그의 가르침은 ‘깊은 진리’요 ‘심오한 깨우침’이라는 주장이다. 오늘날도 이단들과 타종교들, 또는 철학자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깊고 심오하다고 주장한다. 감히 범인들은 이해할 수 없는 깊고도 심오한 진리를 가지고 있는 양 자랑한다. 이에 비해 기독교의 가르침은 너무나 단순하고 쉽다고 비웃는다. 세속적인 지식인들은 경건한 성도들을 비웃고, 세상의 철학자들은 성경을 따르는 신학자들을 비웃는다. 이런 것들은 다 옛날부터 있어 온 사단의 기만이요 조롱이다.

 

5. 너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

 

그러나 소위 ‘사단의 깊은 것’을 알지 아니하고 그 죄에 동참하지 않은 성도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다른 짐을 지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소위 ‘깊은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무슨 깊고 오묘한 이상한 것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지 않으신다. 대신에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게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25절). 그렇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잡으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신앙이란 자꾸만 새로운 것을 좇아가는 것이 아니다. 올바른 신앙이란 옛날부터 내려오는 신앙, 이미 있는 신앙을 굳게 붙드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무작정 새로운 것을 좇아가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무슨 ‘새로운 성경 공부’니 또는 ‘기성 교회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새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너무 현혹되면 안 된다. 우리는 ‘새롭다’, ‘앞서간다’, ‘깨었다’, ‘탁 트였다’는 말을 들을 때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참된 신앙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주님을 믿는 믿음을 끝까지 붙들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무슨 새로운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다만 우리에게 있는 것을 굳게 잡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지금 세상의 유혹과 이단의 미혹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 아주 그럴 듯한 말과 가르침으로 우리를 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을 끝까지 의지하는 자,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굳게 붙드는 자는 거기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참된 믿음은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소박한 것이다.

 

 

V. 영적으로 죽은 사데 교회(계 3:1-6)

 

1. 부유했던 사데

 

 사데(Sardis)는 소아시아 반도의 서쪽에 있는 항구 도시 서머나에서 동쪽으로 약 70 km 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옛날 루디아(Lydia) 왕국의 수도였던 사데는 주전 1,200년경에 건설되었는데, 3면이 가파른 벽을 이루고 있어 적이 쉽게 침입할 수 없는 천연의 요새였다. 이런 자연적 조건으로 사데는 크게 번창하였다. 주전 7세기에 루디아 왕국에 알리아테스라고 하는 유명한 왕이 있었는데, 그가 57년간 통치하는 동안 루디아는 아주 부강한 나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어서 그의 아들 크로에수스(Croesus)가 왕이 되었을 때에 루디아는 전설적인 부를 축적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에 ‘크로에수스처럼 부유한(as rich as Croesus)’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부귀와 영화 때문에 그들의 생활은 사치하고 방종하게 되었으며, 국력도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자연적 지형만 믿고 경계를 게을리 하다가 주전 549년과 218년에 두 번이나 기습을 받아 점령당하기도 했다(3절 참조).

 

2.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소아시아 일곱 교회 중에서 사데 교회처럼 혹독한 비판을 받은 교회도 없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1절). 뿐만 아니라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라”고 하셨다(2절). 칭찬은 없고 책망만 받은 교회였다. 왜냐하면 영적으로 죽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병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어떤 부위에 병이 있다면 그 부위만 치료하든지 도려내면 되지만, 영적으로 죽는 것은 마치 온 몸이 병들어 전체로 죽어 가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사데 교회는 외적으로는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모임과 각종 행사도 활발하고 많은 신앙의 모양들이 있었다. 외적인 신앙의 형태들은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적으로는 ‘죽은 상태’였다. 내적 생명력, 참된 사랑, 성령의 능력에 있어서는 죽은 상태나 다름없었다.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서는 부분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데 교회에서는 거의 전반적인 문제가 되고 말았다. 차라리 무슨 문제로 서로 싸운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살아 있다면 그래도 가망은 있다. 과거에 한국 교회가 많은 싸움과 분열을 겪었지만, 그래도 영적 능력과 내적 생명력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적으로 죽은 교회는 다시 회복하기가 어렵다. 비록 분쟁은 없다 할지라도 조용히 죽어 가는 교회는 살리기가 힘든 것이다.

 

오늘날 우리 한국 교회가 지금 이런 위기를 겪고 있지 않은지 염려된다. 외형적으로는 그 어느 때 못지 않게 풍부하고 활발하다. 주일의 공적 예배 외에 각종 성경 공부와 지회 모임, 새벽 기도회와 수요 기도회 및 금요 철야 기도회, 찬양과 율동 등 정신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바쁘게 돌아간다. 그러나 각 개개인에게 구원의 기쁨과 즐거움, 하나님의 사랑의 확신, 내적 생명력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는 의심스럽다.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 갈급해하며, 메마른 영혼을 달래지 못해 방황하다가 지친지도 이미 오래 되었다. 더 이상 교회에서 무엇을 기대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잠자는 교회는 흔들어 깨우면 되지만, 아무리 부르고 외쳐도 일어나지 않는 교회라면 이미 죽은 교회가 아닌가 하는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래도 아직 살아 움직이는 성도들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3. 남은 바 죽게 된 것

 

이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데 교회를 향하여 교회를 주관하시는 예수님은 어떤 처방을 내리시는가?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하신다(2절). 아직 죽지 않고 남은 것이 조금은 있다는 말씀이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여기에 해결의 실마리가 있다. 그것은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있는 것,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것, 그것을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해결의 길이 있고, 침체에 빠진 우리 한국 교회의 나아갈 길이 있다. 교회가 침체에 빠졌다고 해서 예배 형태를 완전히 바꿔 버리든지 또는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하든지 하는 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요즘 교회를 활성화시킨다고 해서 교회에 온갖 전자 악기와 드럼까지 동원하고 있지만 그런 외적인 것들이 교회에 참된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는 없다. 또는 강대상을 치워 버리고 멀티미디어 영상 매체를 동원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열린 예배’라는 이름 하에 전통적인 설교 대신에 연극과 쇼를 전개하는 경향까지 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해결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을 굳게 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4. 처음 신앙의 회복

 

이어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3절). 처음에 기쁨으로 주님을 믿고 따르며 감격하던 그때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라는 의미이다. 복음성가가 없어도, 찬양과 율동이 없어도 얼마나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며 감격했었던지, 별스런 성경 공부나 프로그램이 없어도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재미있고 은혜가 되었던지, 그리고 좋은 예배당 건물이 아니어도 마루 바닥에 꿇어 엎드려 얼마나 눈물 흘리며 기도했던지, 그 옛날의 순수한 신앙을 다시금 회복하고 굳게 하라는 말씀이다. 무엇이 우리의 그 뜨거웠던 열정을 빼앗아 갔으며, 무엇이 그 순수했던 믿음을 흐리게 만들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온 세계가 놀라고 온 세계에 자랑하던 한국 교회의 믿음과 열심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무엇이 그것을 빼앗아 갔단 말인가? 우리는 각자 그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밝혀 내어야 한다. 한국 교회는 온갖 요란한 대회나 행사에 앞서 한국 교회의 현 상태를 진지하게 진단하고 그 참된 원인을 밝혀 내어야 한다. 그래서 그 원인을 발견하고 나면 그것을 회개하고 고쳐서 원래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여야 한다. 혹시 물질의 풍요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덜하게 된 것은 아닌지, 또는 텔레비전에 마음이 빼앗겨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된 것은 아닌지, 아니면 교만해져서 어지간한 은혜에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각자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고치도록 하여야 한다. 이것만이 참된 해결의 길이요,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는 길이다.

 

5.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그러나 사데 교회에 남은 자들이 몇 명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사데 교회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4절). 아무리 죽은 교회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남은 자’를 남겨 두시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 실망스런 모습들이 많지만 그래도 절망치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남겨 두신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한 자는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이다. 곧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믿음의 정절을 굳게 지키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자이다. 그저 열심히 봉사하고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 성도들은 그저 시간과 물질을 바쳐 교회에 충성하고 열심히 움직이면 믿음이 좋다고 하고, 세상의 죄와 타협하는 것은 문제삼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이다. 주님께서 보실 때에 합당한 자는 그 사람이 얼마나 물량적으로 많이 움직이는가에 달려 있지 않고,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죄악에 물들지 않느냐에 있다. 드러나지 않을지라도 조용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여 죄와 타협하지 아니하는 자, 이런 사람이 주님께 합당한 자이다.

  

사데 교회도 우리 한국 교회처럼 외적으로는 활발하게 움직였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대부분 죄와 타협하고 말았다. 마치 그들의 많은 활동이 그들의 죄를 보상해 줄 수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서.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죽은 자’라고 책망하셨다. 그들의 많은 활동은 돌아보지 않으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자기의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성도들이 있었으니, 주님께서는 이들을 축복하시고 “흰옷을 입고 자기와 함께 다닐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깨끗하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다. 이런 자들의 이름은 하늘의 생명책에서 결코 흐려지지 아니하며, 또한 주님께서도 그 이름을 하나님 아버지 앞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겠다고 하신다(6절). 왜냐하면 천국은 ‘깨끗한 자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VI. 말씀을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계 3:7-13)

 

1. 형제를 사랑한 빌라델비아

 

 빌라델비아는 사데를 지나 서쪽의 에게해로 이르는 긴 계곡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라서 주요 무역로의 요충이 되었으며 상업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또한 로마의 우편 도로가 이곳을 지나 페르시아로 통했기 때문에 ‘동으로 향하는 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 도시의 이름이 빌라델비아(형제 사랑)로 붙여진 데에는 그럴 만한 역사적 이유가 있었다. 주전 2 세기에 아탈루스(Attalus) 2세는 자기 형이 암살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 소문이 거짓임이 판명되고 형이 그리스에서 돌아왔을 때에 그는 곧 왕위를 내어 주었다. 또 한 번은 로마 당국이 그에게 형을 무너뜨리고 대신 왕이 되라고 권고하였지만, 그는 이것도 거절하였다. 그래서 그는 ‘형제를 사랑하는 자(Philadelphus)’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고, 여기서 ‘빌라델비아(Philadelphia)’라는 이름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2. 말씀을 지킨 교회

  

이런 형제 사랑의 미덕을 가진 빌라델비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주님께 칭찬받은 아름다운 교회였다. 이 교회가 칭찬받은 이유는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8하). 빌라델비아 교회는 능력이 적은 교회였다. 성도들 수도 적고 부요치 못했을 것이다. 학식도 많지 않고 사회적으로도 권세가 별로 없는 미약한 교회였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칭찬하셨다. 왜냐하면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그들은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말씀을 따랐다. 곧 극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이것을 주님께서는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다”고 하신다(10절). 우리 주님의 말씀은 ‘인내의 말씀’이다. 인내가 없이는 결실하지 못하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을 믿고 그 결실을 보려면 인내해야 한다. 끝까지 주님을 잘 믿어야지, 좀 어렵고 환난이 닥친다고 중간에서 포기해 버리면 허사가 되고 만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 끝까지 주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고 잘 지켰다. 이 때문에 주님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칭찬하신 것이다.

 

3. 계명을 지키는 신앙

 

 요즘 우리나라 교회는 이 점이 소홀히 되고 있는 것 같다. 요즘 어떤 교회는 아주 뜨겁다고 한다. 손뼉을 치며 찬송을 힘차게 부르고 또 온갖 전자 악기와 드럼을 동원해서 떠들썩하게 예배 드린다. 이런 소란스런 분위기 가운데서 예배를 드리다가 바깥에 나오니 갑자기 기분이 썰렁해진다. 그래서 “에라 모르겠다. 한 잔 하고 가자”면서 술집으로 향하거나 또는 나쁜 곳으로 향하면 그 뜨거웠던 예배가 다 허사가 되고 만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얼마나 뜨거운 예배를 드렸느냐, 얼마나 찬송을 힘차게 불렀느냐를 보시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를 보시기 때문이다.

  

“내 마음이 뜨겁다” 또는 “은혜 받았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이다. 이것은 ‘내 마음’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내 혼자 가지는 기분이다. 그러나 주님의 관심은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얼마나 지키느냐 하는 데 있다. 주님께서는 “내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셨다(요 14:21). 사도 바울도 다음과 말하였다.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고전 7:19) 계명을 지키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이 올바른 신앙이요 주님이 칭찬하시는 신앙이다. 그저 ‘뜨겁다’든지 ‘은혜롭다’든지 하는 것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주님 앞에 칭찬받을 것이 못된다. 그것은 내가 느끼는 것이요 내 마음이 기뻐하는 것이지, 아직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주님의 사랑을 실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4. 열린 문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을 잘 지킨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상급을 약속하셨다. 우선 8절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복음 전파의 문을 활짝 열어놓겠다는 뜻이다. 곧 구원받는 성도들을 계속 보내주시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지킨 대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이다. 어떤 목회자는 이렇게 말한다. 먼저 교인들을 끌어 모아 놓고 나중에 교육시키겠다고. 그러나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먼저 나의 말을 지켜라. 그러면 네 앞에 열린 문을 두겠다고.

  

다음에 9절에 보면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나타내 주겠다고 하신다.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이 말씀은 빌라델비아의 성도들을 핍박하던 유대인들 중에서 몇 명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는 뜻이다. 온갖 욕과 비방을 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법정에 고소하고 죽이는데 앞장섰던 유대인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사단의 회’라고 낙인찍혔던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온다는 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일이 빌라델비아에 일어났다. 이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이다. 이것은 곧 주님께서 빌라델비아 교회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시기 위해 특별히 행하신 것이다.

  

그리고 10절에 보면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시험의 때’란 아마도 주후 113-114년의 트라얀(Trajan) 황제 때의 핍박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해 주겠다”는 것은 원어상 “시험의 때에 지켜 주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시험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시험을 당할 때에도 지켜 주시겠다는 뜻이다.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을 지켰으므로 주님께서도 그 교회를 지켜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키면, 주님께서도 우리를 지켜 주신다. 특히 환난 날에, 시험 당할 때에 우리를 지켜 주신다.

 

5. 권면과 약속

 

 이러한 빌라델비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면은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었다(11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는 말씀은 두아디라 교회와 사데 교회에 이어 세 번째 나오는 말씀이다. 그것은 이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을 굳게 잡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없는 것을 잡으라고 하시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굳게 잡아야 한다. 우리에게 계시는 예수님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굳게 잡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할 때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다.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과 그 위에 하나님의 이름을 기록하시겠다는 것이다(12절).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귀한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과 그의 구원이 확실함을 말한다. 그러한 자를 주님께서 확실하게 구원하시고 높은 자리에 앉히시겠다는 뜻이다.

 

6. 참된 성도

 

 빌라델비아 교회가 이렇게 과분한 칭찬과 복을 받은 이유는 무엇인가? 교회 성도들의 수가 많아서인가? 재정이 넉넉한 교회라서 그런가? 아니면 권세 있는 성도들이 많아서인가? 아니다. 오직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극한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기 때문”이다. 곧 순교신앙을 가지고 끝까지 말씀을 지켰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를 사랑하시고 복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비록 적은 능력이지만 주님의 말씀을 지켜 나갈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며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것이다. 오늘날 외적인 모양은 요란하지만 참된 신앙이 희박해져 가는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참된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VII.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계 3:14-22)

 

1. 부유한 라오디게아

 

 라오디게아는 빌라델비아에서 남동쪽으로 약 70 km 쯤 떨어진 내륙에 위치한 도시로 요즈음은 에스키 히사르(Eski-hisar)라고 불린다. 라오디게아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가는 무역로와 버가모에서 남쪽으로 가는 무역로가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래서 라오디게아는 로마 시대에 매우 부유한 도시로 성장했다. 주후 60년에 지진이 나서 도시가 파괴되었을 때, 라오디게아가 로마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재건한 것을 보면 이 도시가 얼마나 부유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도시에는 은행이 발달하였으며 유명한 의학 학교도 있었다. 특히 귀에 바르는 약과 눈에 바르는 안약은 이 도시에서 생산하는 유명한 의약품이었다고 한다.

  

이 라오디게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졌다.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중 바울이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아마 에바브라가 전도하여 설립한 것으로 추정된다(골 4:12 참조). 그런데 이 교회에 주신 주님의 말씀은 별로 긍정적이지 않다. 심한 책망과 징계의 말씀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권면과 아울러 약속의 말씀도 주셨다.

 

2. 차지도 덥지도 아니한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의 문제는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다”는 것이었다(15절).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데는 재미있는 지리적인 배경이 있다. 라오디게아 북쪽으로 10 km 쯤 떨어진 곳에 히에라볼리(Hierapolis)라는 도시가 있었다. 여기에는 지금도 유명한 야외 온천이 있는데, 이 온천수는 평평한 고원 지대를 흘러서 라오디게아 맞은 편에 떨어졌다. 그런데 처음 히에라볼리에서는 뜨겁고 미네랄 성분이 많던 물이 흐르는 사이에 식어서 라오디게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미지근한 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라오디게아의 성도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었을 때에 이 사실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면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어떤 사람들은 ‘차다’는 것은 영적으로 지치고 피곤한 자들에게 신선한 힘을 공급해 주는 것을 뜻하며, ‘덥다’는 것은 열심을 내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뜻한다고 본다. 그래서 교회가 신선하게 되든지 뜨겁게 되든지 둘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것은 곤란하다. 왜냐하면 희랍어의 ‘차다(프쉬크로스)’는 것은 긍정적인 의미로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분히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바람은 19절에 있는 대로 “열심을 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진심은 덥게 되는 것이다. “차든지 더웁든지 하라”는 것은 수사학적인 표현으로 결단을 촉구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에게 “공부를 하려면 열심히 하든지 아니면 치우든지 하라”고 했을 때 부모의 본심은 ‘열심히 하는 것’이며 ‘치우는 것’은 본심이 아니다. 그러나 이런 말은 결단을 촉구하기 위해 하는 말이다.

 

3.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교회

  

그러면 라오디게아 교회는 왜 이렇게 미지근한 교회가 되고 말았을까? 그것은 자기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하여졌기 때문이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17절에 있는 대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자기 만족에 빠진 교만한 교회였다. 그러나 실상은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자기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교회였다(17하).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 교회를 향하여 권면의 말씀을 주셨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절) 사실 이 말씀은 권면이라기보다 책망에 가까운 말씀이다.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라고 하신 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무역을 통해 부요하여 교만해졌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불로 연단한 진짜 금을 사서 진짜 부자가 되라는 말이다. 그리고 “흰 옷을 사서 입어라”는 말은 라오디게아에서 생산되는 까운 같은 겉옷(trimita)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우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는 말은 라오디게아에서 만든 안약이 아니라 주님으로부터 진짜 안약을 사서 발라 자신의 참 모습을 보라는 의미이다.

 

4. 사랑하는 자를 책망함

 

  그 다음에 또다시 주님의 권면이 나온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절). 여기에 보면 주님께서는 그래도 라오디게아 교회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여기에 희망이 있다.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한다고 하신다(히 12:6 참조). 따라서 책망과 징계도 사랑의 행동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징계가 없으면 죄의식이 없어지고 예사로 죄를 짓게 된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점점 나쁜 길로 접어들게 된다. 이것을 방치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따라서 참 사랑은 책망과 징계를 포함한다. 그리고 또한 어떻게 할 것을 가르쳐 준다. 그것은 곧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것이다. 별다른 수가 없다. 열심을 내고 회개하는 것만이 문제 해결의 길이다.

 

5. 문밖에 서서 두드림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라오디게아 교회 성도들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절) 이 구절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구절이다. 사영리 책자의 제일 끝에 나오는 ‘영접’ 촉구의 말씀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원래 본 구절의 의미는 ‘불신자’에게 영접을 권유한 것이 아니라 이미 믿는 ‘신자들’에게 주는 권면의 말씀이다. 그렇지만 조금 원용해서 불신자에게 예수님 영접을 촉구하는 말씀으로 사용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생각된다.

  

우리 주님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신다. 원문에 의하면 한 번, 두 번이 아니라 ‘계속’ 두드리신다고 되어 있다. 우리 주님은 끈질기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우리에게 전파되고 있다. 그러므로 문제는 우리의 마음 문을 여는 것이다.

 

6. 축복된 교제

 

  그러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와 더불어 먹겠다고 말씀하신다(20하). ‘더불어 먹는다’는 것은 축복된 교제를 말한다. 주님과 함께 가지는 친밀한 교제를 말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친밀한 교제가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며 즐겁다. 그러나 주님이 떠나가시면 우리는 허전하고 외로우며 불행해진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것이다. 자기의 아집과 교만한 마음과 강팍한 마음을 버리고 주님께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주님께서는 다시금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복된 삶을 허락해 주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기는 자에 대한 약속이 나와 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절) 우리 주님을 잘 믿고 승리하는 자는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복을 누리게 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

 

  우리 주님은 우리의 행위를 아신다. 마음의 숨은 생각도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피할 수도 없고 거짓으로 속일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을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차지도 아니하고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사람이 아닌지? 스스로 부자라고 생각하나 실상은 가난하고 벌거벗은 자가 아닌지? 착각 가운데 살아온 나의 인생은 아니었는지? 우리 모두 주님 앞에 문을 열자. 우리의 마음 문을 활짝 열자. 다른 사람의 문이 열렸는지 닫혔는지 거기에는 신경 쓰지 말고 나 자신의 문을 활짝 열도록 하자. 그러면 주님께서는 또다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실 것이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축복스런 주님의 교제가 함께 하시기를 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예비하신 큰 권세와 영광에 함께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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