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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전신갑주

JORC구원열차 2010. 7. 19. 21:13

하나님의 전신갑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에베소서 6:13-17).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영적 전쟁에 개입되어 있다. 마치 학교의 불량배가 우리를 바깥으로 불러내어 싸움을 걸어오는 상황과도 같다. 그것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그러한 상황에 처해있음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말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는 물리적인 무기로 싸울 수 있는 실제 전쟁터에 개입된 것은 아닌, 새로운 무기가 필요한 초자연적인 영적인 전쟁 상황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싸울 수가 없다. 만약 우리의 힘으로 싸운다면 패배뿐일 것이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싸움을 시도한다는 것은 마치 물총으로 산불을 끄겠다는 것과 같다. 그것은 파리채로 사자를 잡겠다는 시도와 같다.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마귀를 공략한다는 것은 나비채로 코끼리를 잡겠다는 시도이다.

 

영적 전쟁에는 영적인 무기가 필요하다. 고린도후서 10:3-4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육체에 있어 행하나 육체대로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우리는 반드시 영적인 무기로 영적인 세력과 싸워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갑주를 입고 영적인 무기를 사용해야 한다. 이 갑주와 무기가 본문의 주제이다. 이 갑주를 사용하는 방법을 이해함으로써 우리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게된다.

 

이 편지의 저자인 바울은 그 당시 로마 세계를 정확하기 파악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로마 군대에 대해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군인들이 착용했던 무기를 기술할 수 있었다. 바울 또한 이러한 것들에 대해 거리감이 없었다. 사실 그는 로마 군인으로 몇 개월을 매였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친숙한 것들을 떠 올리기 위해서 그가 영적인 갑옷과 실제의 무기와 비교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믿음 안에서의 싸움에 필요한 영적인 무장을 설명하기 위해 로마 군인의 갑옷을 이루는 요소 하나 하나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이 갑옷의 중요성을 알아보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에게는 이 갑옷을 착용하고 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 갑옷 없다면 우리는 위험에 놓이게 되며 패배를 향해 달려가는 것이 된다. 반면 이 갑옷을 사용한다면 승리는 명백하게 된다.

 

진리의 허리띠

 

로마의 병사들은 갑옷의 필수적인 요소로 허리띠임을 알았다. 이 허리띠는 갑옷을 함께 묶고 검을 안전하게 지켜 준다. 또한 이 허리띠는 전투시에 긴 옷가지들이 서로 엉키지 않도록 붙잡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의 갑옷을 함께 묶어 주는 진리로 허리를 단단히 동여맬 것을 권고 받는다. 사탄과 그의 악한 부하들에 대한 우리의 전쟁 곧 유혹과 속임과의 전쟁에 있어서 그것은 우리가 싸울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며 방향을 조명하는 진리이다.

 

여기에서 진리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진리의 객관적 내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것이다. 진리를 알고 있는 것과 인정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진리는 내용을 담고 있다. 진리는 발견되고 나면, 받아들이고, 다시 적용될 수 있으며, 혹은 덮어두거나 거절하고 무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진리에 대해 어떻게 반응하든 진리임에는 변함이 없다.

 

바라건대, 우리는 진리를 발견하는 데만 그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 진리를 아는 것은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다.  사탄의 거짓은 우리를 단지 포로로 삼을 뿐이다. 진리는 무엇이 참된 것인지 밝혀 준다.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안전하게 걸을 수 있도록 빛을 비추어 준다.

 

두 번째는 삶 가운데의 진리이다. 여기에서는 우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리의 매일의 삶 가운데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진리의 허리띠는 정직하고 성실하고 위선이 없음을 의미한다. 진리는 소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로마 병사의 허리띠는 그의 허리를 붙들어 매기 전까지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따라서 우리의 진리의 허리띠는 우리가 의롭게 살아갈 때 단단하게 조이게 된다.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 정의롭게 살아갈 때 우리는 진리의 허리띠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허리띠가 없으면 다른 갑옷이 제 위치에 고정되지 않는다.

 

의의 흉패

 

로마 군인들에게 있어서 흉패는 생명 기관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심장, 허파, 신장, 위 그리고 여러 기관들이 바로 이 갑주의 한 부분에 의해서 가려졌기 때문이다. 바울이 지적한 바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의의 흉패는 도덕적 상처를 피할 수 있는 필수적 항목이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위협받지 않도록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영역을 보호해 주는 것이 의이다.

 

이 의는 무엇을 뜻하는가? 물론 우리 자신의 의가 아니다. 우리의 의로써는 우리를 구원하기에 불충분하며 우리의 의는 결코 우리를 지켜 주지 못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의를 "더러운 옷"에 비유하였다. 사실상 우리의 의는 보이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는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리스도는 진정 유일한 의이시며 우리에게 그의 의를 부여하셨다.

 

갈보리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그분의 의를 덧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그 곳에서 죽으시고 이제 우리와 함께 계신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그분의 의를 덧입게 된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주님이 이루신 일들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그분과 함께 하게 되었다. 갈보리에서 주님이 행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실제적인 의를 경험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의를 추구할 필요가 없으며 그분이 인도하시는 의의 길로 거닐게 되었다. 이 의는 우리로 하여금 죄로부터 돌이키게 하며 성령과의 교제를 경험하게 한다. 예전의 삶의 방식에서 우리는 자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불의한 생활에 대해 단호히 거절하며 하나님께 순종할 수가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성도들에 대한 부르심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적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승리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의의 흉패를 착용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의의 흉패를 입지 않으면 사탄의 시험이 있을 때마다 넘어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에게 베풀어져 온 이 은혜로 인해 우리가 그 은혜와 죄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이 아니라 죄를 끓고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자유롭게 된 상태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죄와 상관이 없는 우리의 모습대로 살기를 도전받게 된다. 로마서 6장 1-2절과 11-13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만약 우리가 우리의 모습대로 살게 된다면 우리는 의의 흉패를 입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에 의지하여 살며 매일의 삶 가운데에서 그분의 의 가운데로 걷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의의 흉패는 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평안의 신

 

로마의 군인들은 특별한 종류의 신을 신고 있었다. 그것은 발가락이 나오고 대못이 박힌 신발로 발목에는 끈으로 묶여있었다. 신발은 용도에 따라 정장 구두, 작업화, 운동화, 실내화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이러한 다양한 종류의 신발은 목적에 맞는 역활을 한다. 로마 군인들의 신발은 무장을 위해 중요한 요소였다. 축구 선수들에게 있어서 스파이크 신발 만큼이나 중요한 역활은 한다. 군인들이 땅위에 서서 진군하는데 도움을 주도록 만들었다. 당시 대부분의 전투는 군인들이 상대를 향해 진격하여 필사적으로 싸우는 육박전이었다. 군인은 뒤로 밀려서도 안되며 넘어져서도 안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반드시 평안의 신을 신어야 한다. 우리가 전쟁을 위해 예비하는것 중의 한 부분은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확고히 서도록 해주는 평안의 복음이다. 우리는 평안을 소유하였기 때문에 견고히 서 있을 수 있다.

 

우리가 경험하는 평안에는 두 가지 질적인 차이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안이다. 바울은 로마서 5:1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라고 하였다. 복음의 아름다운 소식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평안과 하나됨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과 우리의 다툼은 끝났으며 우리는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누릴 수가 있게된 것이다. 우리는 궁극적인 구원의 확신을 갖게될 때 확고할 수 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떠한 도전이라도 맞이할 준비를 확신가운데 할 수 있다.

 

두번째 평안의 측면은 하나님의 평안이다. 빌립보서 4:7을 읽어보자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안을 경험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평안도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평안의 의미는 그 분와 우리 사이의 다툼이 끝났음을 말한다. 하나님의 평안이라함은 심지어 극심한 시련 가운데에서도 그의 평안을 경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 평안은 우리를 안정시키고 그러한 상황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주는 하나님의 평안을 말한다.

 

모진 시련이 닥쳐올 때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하는 것은 예외적인 일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럴 때 분별력이 없어진다. 우리는 그러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마음을 다 잡으십시오" 그렇다면 붙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붙잡을 무엇인가를 주셨다는 점과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를 좌절로부터 지켜주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견고하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

 

평안의 복음으로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우리를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해주며 인생의 견인차 역활을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상황에서도 적을 향해서 진격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확고히 설 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갑주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관한 것을 의미한다. 갑주의 각 부분들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다니엘서의 예언을 보면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있을 어렴풋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종말에 "멸망케 할 미운 물건"의 세워지는 것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다니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다니엘 11:32).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항상 중요한 열쇠가 된다. 주님과의 관계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중심에 위치해 있다. 오직 주안에서만이 다툼의 한가운데에서 평안을, 죄악된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정직을, 그리고 상대주의적 가치관의 한가운데에서 진리를 간직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허리띠를 매고 의의 흉패를 붙이고, 그리고 평안의 신을 신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대장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분은 전쟁을 대비해 우리를 무장 시키실 것이다.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에베소서 6:16-17).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위임을 결행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어떤 이들은 단지 그들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의 보장을 기대할지 모른다. 또 어떤 이들은 단순히 자신의 죄 문제에 대한 해결을 생각할지 모른다. 나아가 더 높은 도덕률에 서약한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지옥으로부터의 탈출도, 죄된 습성을 버리는것도, 정의롭게 살아가는 것도 아닌 그 이상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는 각자 영적 전쟁에 있어서 하나님의 군대에 연합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탁한 이유는 모든 전장의 전방에서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새 왕국에 대해 충성을 맹세하였다. 그 왕국은 이 세상 신의 왕국들에 대해 위협적인 대상이다. 새 왕국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적들에 의해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 공격의 치열함으로 인해 모든 시민들은 시민 군대가 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우리의 노력을 연합해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적인 갑주를 입어야 한다. 반 정도 걸친 상태로 전장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미 갑주의 필수적인 세 요소를 살펴보았다. 모든 군인들에게 진리의 허리띠와 의의 흉패와 평안의 신은 필수적이다. 우리가 진리 안에 거하면서 그리스도의 의와 더불어 동행하고 하나님의 평안의 보호처에 들어감으로 적의 공격에 대해 놀라운 보장을 받게 된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러한 세 가지 갑주의 요소가 빠지게 되면 우리 자신은 적에게 노출이 되고 더구나 공격에 저지할만한 무기가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필수적이다.

 

전투를 위해서 필수적인 3가지 요소가 더 있다. 두 가지는 방어적인 것으로 믿음의 방패와 구원의 투구 이며 나머지 한 가지는 공격적인 요소로 성령의 검이다.

 

믿음의 방패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6:16).

 

믿음의 방패를 가지는 시점에서 우리는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세 가지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그 처음 세 가지 무장의 요소가 전장에서 결코 벗을 수 없는 허리띠, 흉패, 그리고 신이다. 다른 한편으로, 방패, 투구, 그리고 검은 실제 전투에 임할 시점에만 취하게 된다.

 

로마 군인의 방패는 전투시 매우 중요한 무기이다. 여기에서 말한 방패의 종류는 대략 2.5피트 폭에 4.5피트 높이나 되는 큰 것이었다. 그것은 가죽이나 금속으로 덮여진 나무로 만든 단단한 것이었다. 군인들은 이 방패를 사용하여 뒤로 밀리지 않았다. 때로는 그들의 방패를 들고 일렬로 서서 긴 방어벽을 만들어 적의 화살을 막아내는 방어벽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화살은 불꽃을 내며 적군을 향해 날아간다. 이러한 불붙는 무기가 무방비의 군대에게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지만 물에 젖은 가죽으로 덮여있는 방패는 훌륭한 방어막이 된다. 이 화살이 그러한 방패에 꽂혀 봐야 젖은 가죽으로 인해 무력화 될 것이다.

 

우리의 방패는 믿음의 방패이다. 이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신뢰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방패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의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 2:4). 신약에서는 이 선언에 대해 세 번에 걸쳐 인용하였다. 바울은 로마서 1장 17절과 갈라디아서 3장 11절, 그리고 히브리서의 저자는 히브리서 10장 38절에 인용하였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적 삶으로 들어가는 믿음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지속적으로 축복을 받는다고 하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보통의 믿음과는 다른 특별한 믿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믿음이다. 공기와 같이 비록 보이지는 않지만 비행기가 날도록 해 주듯이 믿음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연계로부터 영적인 세계로 초월하도록 해준다.

믿음에 의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는 보이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믿음은 혹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어렵고 이해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어린아이와 같이 믿는 것 뿐이다. 우리가 그분을 믿기를 선택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믿음은 원수의 모든 불화살들을 소멸시키는 우리의 방패가 된다. 이 불화살들은 사탄이 우리에게 쏜 유혹의 화살이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의심케 하거나 하나님을 불순종하게 하는 시험이 되기도 한다. 어떤 시험일지라도 그 믿음의 방패는 우리를 견고히 지켜 줄 것이다.

 

이 방패는 반드시 들고 있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방패가 된다면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믿음을 앞세워 서야한다.  진실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악의 불화살은 힘없이 꺼져 버릴 것이다. 바울과 같이 우리는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구원의 투구

 

로마의 군인들 중에는 아무도 투구 없이는 전장에 나가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머리에 일격을 받으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하지만 투구를 쓴 로마의 군사는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갖고 싸울 수 있다. 바로 이점이 왜 우리에게 투구가 필요한지를 설명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원의 투구이다. 구원을 말할 때, 우리는 몇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구원을 말할 때는 의화, 성화 그리고 영화를 포함한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사역으로 인해 의로움을 입었다. 이것은 우리가 용서받았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성령의 지속적인 사역에 의해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도록 성화되어 간다. 이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전 삶 속에서 지속된다. 예수께서 재림하셔서 우리가 그 분께로 갈 때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이로써 구원이 완성된다. 이 글에서의 핵심은 구원에 대한 전 차원적인 확신이다.

구원에 대한 확신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심어 준다.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 우리는 이 확신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 공격은 본질적으로 우리의 심중을 흔드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의 투구에 대한 중요성에 대해 알 수 있다.

 

우리의 적은 우리를 향해 낙담과 의심이라는 양날이 선 검으로 공격해 오고 있다. 그는 우리의 실패와 잘못을 비롯한 우리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들추어 낸다. 그는 우리가 구원에 대해,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의심을 갖기를 바라고 있으며, 결국 낙망하기를 바란다. 역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이 택하신 대부분의 종들은 좌절과 낙담의 고통스런 시간을 통과 해야만 했다.

 

때로는 이 좌절이 큰 승리를 거둔 후에 뒤따를 것이다. 우리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싸워 승리를 거둔 직후에 이사벨 왕비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받은 것을 기억한다. 그는 죽기를 원했으나 하나님은 죽도록 내버려 두시지 않으셨다. 이러한 상황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동일하게 있을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의 투구가 필요한 것이다. 사탄은 우리를 낙담시키고 무너뜨리기 위해 그의 모든 수단을 동원시킬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주게 될 것은 바로 구원의 투구이다. 욥이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소망을 잃지 않은 것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의 투구는 모든 공격들을 빗나가게 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구원의 투구를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다. 그가 죽으신 현장에 있던 두 도둑 사이에서 그분은 우리에 대한 사랑과 우리를 구속하시고자 하는 희망에 대한 위대한 언급을 하셨다. 확신을 원한다면 십자가를 바라보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구원의 투구는 우리가 적을 맞닥뜨렸을 때 필요한 확신을 가지게 한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내어 놓으셨으며, 심지어 우리의 가장 어두운 시간에서도 우리를 지지하실 것임을 알기 때문에 어떠한 공격도 견딜 수가 있는 것이다.

 

성령의 검

 

로마 군인들은 가죽 끈으로 묶은 짧은 칼을 그들의 옆구리에 지니고 다녔다. 그것은 백병전에서 가장 흔히 사용되는 무기로 공격과 방어에 모두 사용되었다.

 

우리의 검은 성령이다. 그것은 원수의 공격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성령의 검인 것이다. 이 성령의 검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다.

 

히브리서 4장 12절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견고한 사탄의 요새를 무너뜨릴 만큼 초자연적이고 강력하다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다. 그것은 영적인 무기이며, 따라서 우리는 적을 패배시키기 위해 효과적으로 이를 사용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 한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과 싸우실 때 이 영적 무기를 사용하셨다. 세례를 받으신 후 예수님께서 어떻게 시험을 받으셨는지를 기억해 보면, 사탄은 예수님이 하나님께 대해 의심하도록 시험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사탄은 예수님의 확신을 흔들기 위해 시도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말은 사탄의 공격 방법이다. 하지만 매 순간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을 물리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반격하셨다. 사탄과의 다툼을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위해서 그분은 성령의 검을 휘두르셨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보다 더 강한 것이 우리의 무기고에는 없다.

 

이 검이 단지 골방에만 비치되어 있다면 사탄의 공격을 받을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 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항상 활용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이 검과 친밀해질 때에 비로써 활용가능 하게 될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이 검을 손안에 두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과 친밀해 진다면 우리는 영적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적용할 수 있는 말씀들을 생각나게 하실 것ㅇ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닮게 생각하도록 우리의 마음은 훈련되어 질 것이다. 우리는 원수의 거짓말과 속임수를 간파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강력한 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