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14장]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의 전도 사역
강해
바울과 바나바의 여행은 계속됩니다. 주님은 이들을 통해 표적과 기사를 보이셨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케 했습니다. 이고니온과 루스드 라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살아 계신 하나님을 증거했고, 성도들을 믿음에 온전히 세우기에 힘썼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떠해야 함을 바울은 그의 삶을 통해 증거해 나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금 안디옥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1. 이고니온에서의 바울
1) 두 사도의 증거
이고니온에 온 두 사도는 여전히 유대인의 회당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의 설교가 너무나 영향력이 있어서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셨던 것입니다. 두 사도는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며 표적과 기사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더욱 힘있게 은혜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고니온에서도 안디옥에서처럼 성공적인 사역이 계속되었습니다.
a. 유대인의 회당(약2:2)
b. 은혜의 말씀(고전1:23-25)
2) 두 사도의 피신
그러나 성공적인 사역 가운데도 다시 반대의 세력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악감을 품은 것입니다. 그러나 흥미 있는 사실은 원어에 나오는 3절의 접속사 '그러므로'입니다. 이것은 2절의 반대가 복음 전파를 위해 좀더 나은 기회를 제공했음을 뜻할 수도 있고 다른 의미로는 그 반대가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증거가 되어서 더 나은 복음 전파로 이끌었음을 나타낸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후자가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 성내에는 무리가 두 부류로 나뉘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유대인을 좇는 자와 두 사도를 좇는 자들이었습니다. 관원들과 유대인들의 핍박이 심해지자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로 피신했습니다.
a.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롬15:31)
b. 피신(마10:23)
2. 루스드라의 앉은뱅이
1) 쓰스와 허메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으로부터 약 29km 떨어진 동남방에 위치한 로마의 식민지요, 군사의 요충지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앉은뱅이를 고칩니다. 이 이적으로 인해 그 도시의 사람들은 바울을 허메(Hermes), 바나바를 쓰스(Zeus) 신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쓰스 신전의 제사 장들은 그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오해를 해명하고 이 사건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들은 바나바를 그 신들 중 위엄 있는 통치의 신 제우스로 여기고, 바울은 그 신의 대변자 헤르메스로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a.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행3:2)
b. 바울을 신으로 봄(행28:6)
2) 바울의 설교
루스드라 사람들로서는 만일 그들이 신이라면 마땅히 희생 제사의 예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예배를 위한 준비는 이 선교사들이 말리기 전까지는 잘 진행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가 알아듣지 못하는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곧 자기들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챈 두 사람은 깜짝 놀라 그 일을 막았습니다. 바울은 사람들의 행동을 말리면서 자기들도 유한한 사람이며, 만물을 지으시고 유지하시는 살아 계신 한 분 하나님의 사자일 뿐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또한 이들에게 적절한 메시지로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그들은 그 주민들에게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고, 땅을 기름지게 하고 곡식을 자라게 하는 비를 하나님이 주시며 그들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식물도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루스드라에서의 선교활동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사도들을 핍박함으로 방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a. 인간에게 제사함(단2:46)
b. 살아 계신 하나님(살전1:9)
3.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바울
1) 바울이 당한 환난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로 인해,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 신으로 숭배하려고 했던 그 사람들이 이제는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로 알고 끌어다가 성밖에 내버렸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죽지 않았고 다음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를 향해 선교 여행을 계속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에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남동쪽으로 96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더베는 로마 속주 갈라디아의 국경에 위치한 도시였고, 두 사람은 이때 여기까지밖에 여행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더베에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우고 나서 방향을 북서쪽으로 바꾸었습니다. 더베에서 바울은 그들이 왔던 길을 되밟아 가며 최근에 방문했던 도시들을 지나가면서 어린 교회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고 그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였습니다. 되돌아가는 여행이 시작된 것입니다.
a. 돌로 침(고후11:24-6)
b. 의인의 환난(벧전2:24)
2) 안디옥을 향하여
바울의 고향 다소는 더베에서 불과 16여 마일 떨어졌으나, 두 사도는 최근에 세운 교회들을 견고히 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권면과 약속으로 바울과 바나바는 신자들을 강하게 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권면의 내용은 많은 고난에 대한 예언이었고, 약속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감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후자는 분명히 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의 지상 통치를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자들은 교회뿐 아니라 조직에 있어서도 지도를 받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각 교회에서 자기들을 위하여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습니다. 이 장로들은 회당에서 온 성경에 정통한 유대인이었습니다. 회당의 장로들이 교회의 장로들이 된 것입니다. 그들은 왔던 길로 돌아가면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차례로 방문했고, 안디옥에서 버가를 거쳐 항구 도시 앗달리아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은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수리아 안 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안디옥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일전에 하나님 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에 이르러 하나님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보고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믿음의 문을 여셨음을 보고했습니다. 복음이 이방인들에게도 갔고 하나님께서 문을 여사 그들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a. 장로들을 택하여 세움(딛1:5-6)
b. 믿음의 문을 여심(골4:3)
결론
이렇게 해서, 그들은 몇 달 전에 자기들이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고' 떠났던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와 제1차 전도 여행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램시(Ramsay)는 이 1차 여행이 2년 4개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틀림없이 큰 감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더욱 감격케 했을 것은 이방인 교회로서 모교회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을 것입니다.
내용개요
본장은 앞장에 이어 바울의 제1차 전도 여행을 계속해서 언급하고 있다. 특별히 본장에서의 활동지는 핍박을 예상하고 찾아간 곳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까닭에 본장에서는 복음을 중심으로 한 긴장과 갈등이 구석구석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 내용을 '복음을 위한 사람들'과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로 구분할 수 있을 정도이다. 복음을 위한 사람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들 수 있고, 복음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불순종한 유대인들과 무지만 이방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불순종한 유대인들은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 선교에 제일 큰 걸림돌로서, 바울 일행의 진로를 방해했을 뿐 아니라 그들의 목숨까지도 노렸던 사람들이다. 이러한 내용의 본장은 이고니온에서의 전도(1-7절), 루스드라에서의 전도(8-18절), 안디옥으로 의 귀환 여행(19-28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단어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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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절. 표적. “징조, 표시”라는 뜻으로 보통 기념비, 경주에서 사용되는 푯대, 몸에 있는 인식표에 대해서 쓰여졌다. 신약 성서에서는 하늘이나 하나님에게서 온 표시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10절. 일어서라. 원어 <jAnavsthqi:아나스테디>는 '일으키다, 깨우다, 회복하다'라는 뜻으로 신약 성서에서는 예수의 부활이나 다른 특별한 사람들의 소생함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
13절. 제사하고자. 하나님께 대한 제사와 이방신들에 대한 제사 모두에 사용된 말이며 제물로 바치다, 죽이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16절. 세대에는. 주로 이 세상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예수께서도 이 말은 세대라는 의미로 사용하셨는데 이는 죄로 가득 찬 세상을 가리킨 말이었다.
19절.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았던 유대 민족을 가리키는데, 이들 유대인들은 예수의 적대자들로 나타나 있다.
23절. 택하여. 원어 <ceirotonhvsante":케이로토네산테스>는 '손을 들다, 선택하다'라는 뜻으로 투표를 통하여 어떤 직분을 맡을 자를 선택하는 것을 말한다.
신학주제 - 루스드라 주민의 신 개념.
고고학적 고증에 의하면 루스드라의 주인들은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을 숭배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더욱이 이들의 우상 숭배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그들의 저급한 문화 수준과 문맹이라고 할 수 있다. 루스드라 주민들이 바울 일행의 기적을 보고 그들을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의 방문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 기인한 것이다. 사실 루스드라에는 제우스에 관한 신화가 퍼져 있었다. 그 신화에 의하면 이들 두 신이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고, 이곳 루스드라 지방을 방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한 부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이 두 신을 경홀히 여겼으며 따라서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그 부부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홍수로 몰살시켰다는 것이다. 이 같은 관념에 사로잡혀 있던 주민들에게 바울과 바나바의 기적은 그들의 지나간 과오를 상기시켰음에 틀림없다. 또다시 자신들의 지역을 방문한 두 신을 소홀히 취급한다면, 또 다른 재앙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민들의 신 개념은 세상적 신 개념의 한 단면을 보여 준다. 이러한 주민들의 오해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하나님을 바로 증거하지 못했던 것이다.
영적교훈
바울은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치유한 근원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을 각각 쓰스와 허메라 부르며 제사를 준비했던 루스드라 주민들을 반대한 것이다. 이 같은 바울 일행의 단호한 거부는 인간의 신격화나 우상화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탈취할 수 없다. 하나님께 드려질 영광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성도들은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일이 없도록 항상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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