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구약

창세기6 - 15~17장(이삭에 대한 약속) / 18~20장(소돔과 죄)

JORC구원열차 2009. 6. 2. 20:18

9. 창 15-17장 / 이삭에 대한 약속

 

이 장들은 신약에,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도달하는 영적인 진리를 풍성하게 캐어낼 보고(寶庫)이다. 12장 1-3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약속들을 요약하셨고, 13장 14-18절에서 이 약속들을 확대하셨다. 그런데 이제는 언약의 약속들을 보다 충분히 밝히신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의 아들과 오게 될 약속된 씨 곧, 그리스도와 관계가 있으며, 또한 가나안 땅과, 하나님이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우신 놀라운 계획을 다룬다.

 

1. 언약의 내용 (창 15장)

 

1) 배경 -

아브라함은 이제 막 왕들을 멸하고(14장), 소돔 왕의 큰 유혹을 물리쳤다. 이제는 하나님이 그를 격려하실 차례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를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 오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14:18)! 하나님은 우리의 보호(방패)가 되시며 예비(상급)가 되신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아브라함은 소돔 왕에게 보호를 받거나 그가 제공하는 재화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아브라함은 그가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 안에 가지고 있었다.

 

2) 탄원 -

아브라함은 상을 원하지 않고 상속자를 원했다! 그는 이제 85세였고 아들이 태어나기를 10년 간 기다려 왔다. 아들이 없으면 그의 모든 유산은 청지기 엘리에셀에게 돌아갈 것이었다. 12장 2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라고 약속하셨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이루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신과 청지기를 바라보던 자리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게 하심으로 그 탄원에 응답하셨다(5절).

 

6절은 성경의 핵심 구절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And he said AMEN to the Lord, and He put it to his account for righteousness-갈3:16/롬 4:3 / 약 2:26). 아브라함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율법을 지켜서 받은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율법은 아직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할례를 행함으로 받은 것도 아니다. 그가 할례를 받은 것은 99세 때의 일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3) 희생 제물 -

구원은 희생 제물에 근거를 두며, 언약은 피흘림을 요구한다. 그 시대의 관습으로는 계약하는 쌍방이 제물로서 죽인 동물들의 쪼개진 지체 사이를 걸어감으로 협정이 이루어졌다. 9절에 나오는 희생 제물 모두는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브라함은 희생 제물을 드리고 사탄(새들,마 13:19)을 쫓는 수고를 했으나, 아브라함이 잠들기까지는 실제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아브라함이 제물의 조각들 사이를 걸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나님만이(17절) 조각들 사이를 걸으셨다. 이 언약은 전적인 은혜이며 주께만 의존하는 것이었다. 아담처럼(2:21) 아브라함은 죽음 같은 깊은 잠에 빠졌고, 하나님을 도와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었다.

 

4) 보증 -

아브라함은 확신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인지 알고 싶어했다(8절).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필요에 응하신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희생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 이에 대한 확실한 보장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앞으로 일어날 사건들의 개요를 말씀해 주셨다. 곧, 이스라엘의 애굽 체류, 애굽에서의 고난, 4대 째에 구출될 것(출 6:16-26)과 약속된 땅을 소유하게 될 것 등이다. “이 땅을... 주노니”(18절)란 하나님의 말씀에 유의하자. 12장 7절에서처럼 “내가 주리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란 곧 그의 실행이시다.

 

이 장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최소한 일곱 가지의 단어 내지 문구 즉, “여호와의 말씀”, “두려워 말라”(1절) “상급, 후사와 유업”(3,7절) “믿으니, 의로, 여겼다”(6절)에 주목하자. 이 장에서는 아들이 아니면 후사가 될 수 없고(롬 8:16-17) 믿음이 없이는 의로워질 수 없으며(롬 4:3) 약속이 없으면 확신할 수가 없고, 고난이 없이는 축복이 없음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별들을 보게 되기에 앞서 날이 어두워야만 했다.

 

2. 언약을 시험하다 (창 16장)

 

하나님이 언약을 하셨으니 하나님이 성취하실 것이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은 다만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뿐이었다(히 6:12). 슬프게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다! 15장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행사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아내의 말을 듣고 불신앙을 나타냄으로써 성령으로 행하기를 멈추고 육신으로 행하기 시작했다.

 

“믿음이란 꾀를 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 둘은 하나님이 계획을 성취하도록 도와드리려 했다. 이 일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자녀를 주기 위해 늙기까지 기다려야만 하셨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 자신이 죽어 있어야 했다(히 11:11-12).

 

2절에 보면 사라는 3녀의 아기를 못 낳는 형편에 대해 하나님을 탓하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잘 대해주시지 않음을 넌지시 비친다(3:1-6). 그녀는 세상적인 방법을 취하여 애굽인 하갈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러나 이 모든 꾀는 실패한다. 육체의 일(갈 5:16-26), 곧 질투, 원한, 증오, 교만, 다툼이 나타난다! 사라는 주님께 “책임을 전가”하려 한다(5절). 그리고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그 책임을 돌린다(6절). 육신이 지배하도록 허락할 때 그 가정에는 무서운 분위기가 조성된다. 하나님은 그 결합을 인정치 않으셨다.

 

하나님은 하갈을 “사라의 여종”으로(8절) 부르신다. 구약에서 주의 천사(여호와의 사자)가 언급된 것은 이것이 첫번째이다. 이 분은 다른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하갈을 돌보시며 사라에게 복종하라고 지시하시고, 그녀의 아들이 들사람이 될 것이나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을 약속하신다. 이삭이 태어나자 이스마엘을 위하여 양보할 자리는 없었고 쫓겨나게 되었다(21:9- 이하). 이스마엘은 열 두 아들의 아버지가 되었고(25:13-15), 그 자손들은 세기를 내려오며 유대인들의 적이 되었다. “이스마엘”은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뜻이다(11절).

 

갈라디아서 4장 21-31절은 사라는 새 언약의 상징이며 하갈은 옛 언약의 상징이라고 가르친다. 하갈은 노예였고, 옛 언약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었다(행 15:10). 사라는 자유로운 여인이었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다(갈 5:1-이하). 이스마엘은 육신으로 낳았으며 그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율법은 육신에 호소하지만 육을 다스리거나 지배할 수는 없다. 이삭은 성령으로 태어났고 약속의 자녀(갈 4:23)로서 자유를 즐겼다. 사람들이 율법으로 돌아가 스스로 육신의 노예가 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추방당한 반면 이삭은 법적인 상속인이었다. 율법이란 결코 영속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여기 나오는 실제적인 교훈을 놓치지 말자. 우리가 하나님보다 앞서 갈 때는 반드시 문제거리가 있게 마련이다. 육신은 하나님을 돕기를 매우 좋아하나, 참된 믿음은 인내를 나타낸다(사 28:16). 믿음과 육신을, 율법과 은혜를, 약속과 자기 노력을 섞어서는 안 된다.

 

3. 언약의 상징 (창 17장)

 

이 장에 나오는 사건과 이스마엘의 출생 사이에 13년의 침묵이 흐른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신에 대해 죽음으로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이 그들의 삶 가운데 펼쳐지도록 기다리셔야 했다. 하나님은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엘샤다이)”, “모든 것에 넉넉하신 분”(cod Almight-El Shaddai/ the all-Sufficient one)으로 계시하신다. 이 장에 나오는 “내 언약”이란 말이 반복되는 것에 유의하자. 언약의 성취는 하나님께 달려있지 인간에게 달린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겠노라”는 문장이 반복되는 것에도 주목하자.

 

1) 새 이름들 -

“아브람”은 “높으신 아버지”(hish father)란 뜻이고 “아브라함”이란 “대중(大衆)의 아버지”(father of multitude)란 뜻이다. “사래”는 “다투기를 좋아하는”의 뜻인 반면에 “사라”는 “공주”를 뜻한다. 그들의 새 이름들은 바야흐로 그들의 집에 입주하게 되는 새로운 축복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을 택하여 왕과 여왕이 되게 하신다.

 

2) 새로운 징표 -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할례에 대한 첫 언급이다. 구약의 어느 곳에서도 할례가 인간을 구원한다고 가르친 곳은 없다. 할례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언약의 외적인 징표이다. 이것은 마음의 내적인 할례를 받은 사람들을 상기시킨다(신 10:16/신 30:6/렘 4:4/롬 4:10/갈 5:6). 이 의식(儀式)은 생후 제 8일에 실시되는 것이며(12절), 8은 부활의 수(數)이다. 말하기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유대인들은 육신의 의식을 의존했고 내적인 실제를 의존하지는 않았다(행 15:5).

 

오늘날 신자들은 새 언약 안에 있으며 참된 할례를 행하는데(빌 3:1-3) 이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영적인 체험인 것이다(골 2:9-15). 죄의 몸(옛 본성)은 제거했으며 이제는 육체로 살지 않고 성령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17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웃음은 믿음의 즐거운 웃음이고, 사라(18:12)의 웃음은 불신의 웃음이었다. “이삭“은 “웃음”이란 뜻이다.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물리치시고 이삭과 그의 씨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신다. 그러나 은혜로써 하나님은 이스마엘을 위한 특별한 축복을 정해 두셨다.

 

 

10. 창 18-20장 / 소돔과 죄

 

이 장에는 세 가지의 방문이 나오며 각각 영적인 교훈을 전해 준다.

 

1. 아브라함을 방문한 그리스도 (창 18장)

 

17-22절에 보면 세 사람의 하늘에서 온 방문객 중의 하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였다는 것이 명백히 나타난다. 3절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말에도 유의하자. 이 장의 큰 주제는 그리스도와 신자의 사귐이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친구”였기 때문이다(약 2:23). 19장에서 우리는 세상의 친구인 롯을 볼 수 있다.

 

1) 그리스도와 아브라함의 친교(1-8절)

이 구절은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사랑의 교제를 나타낸다. 아브라함은 마므레에 있었는데 그 말은 “비옥”(肥沃:fatness)이란 뜻으로, 그는 하나님의 충만한 축복을 즐기고 있었다. 장막은 그의 순례의 생애를 말해주며, “오정 즈음”이란 그가 빛 가운데 행하고 있음을 나타낸다(요일 1장). 그가 서두름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랑의 열의를 증명해 준다. 그는 그리스도를 편안히 모시기 위해 아낌없이 제공한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한다. 직역하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정착하셔서 집에 계시듯 편하시게 하고”가 된다. 그리스도를 집에 계시듯 편히 모신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교제하시기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모른다!

 

2) 사라의 불신앙의 고백(9-15)

이삭의 출생은 웃음과 관계가 있다. 이삭이란 이름의 의미는 “웃음”이다. 하나님이 아들을 주실 것이란 소식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은 신앙으로 즐겁게 웃었으나(17:15-18) 이 때 사라는 육적인 불신앙으로 웃는다. 우리는 왜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해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너무 어려운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누가복음 1장 34절에 나오는 마리아의 믿음을 주목해 보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으리이까?”(How shall this be!). 사라는 “내게 어찌... 있으리요?”(How can it be!)라고 말하고 있다. 이삭이 출생했을 때에야 사라는 영적인 즐거움 가운데 웃었다(21:6-7).

 

3)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을 신뢰하심(16-22절)

천사들이 소돔으로 떠나갔으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을 축복하시기 위해 뒤에 남으셨다. 놀라운 장면이 아니겠는가! 그리스도는 그의 친구에게 아무 것도 숨기지 않을 것이다.

 

요한복음 15장 14-15절을 보면 그의 친구에게 자기의 뜻을 나타내시겠다는 그리스도의 약속들이 있다. 시편 25편 9-14절을 읽고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 곳에 주어진 모든 환경에 대처하는지 보자. 아브라함은 소돔에 살고 있는 롯보다도 소돔에 대하여 더 잘 알고 있었다. 구별되어 성경을 읽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무신론적인 교수보다도 세상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다.

 

4) 롯을 위한 아브라함의 관심(23-33절)

이 젊은이의 세속성과 불신앙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롯에 대해 놀라운 사랑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변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를 변론하고 있음에 유의하자. 즉 하나님이 어떻게 사악한 사람들과 함께 의인을 멸망시킬 수 있으신가?(갈보리에서 하나님은 사악한 사람들 대신에 의로우신 한 분을 벌하셨다.)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얼마나 지속적이고 신중하게 중재를 벌이고 있는가! 열 명의 신자만 찾을 수 있어도 하나님은 온 성을 용서하실 것이었다. 19장에서 보면 롯의 가족은 아내와 두 딸을 합하여 네 명이지만, 딸들과 정혼한 사위들까지 해서 여섯이 된다. 그가 사위를 비롯해서 최소한 4명만이라도 더할 수 있었다면 하나님은 그 온 성읍을 남겨두셨을 것이다. 롯이 얼마나 큰 실패를 범하였는가!

 

2. 롯을 방문한 천사들 (창 19장)

 

그리스도는 저들과 같이 가지 않았다. 세상으로 타락한 사람의 집에서 그는 “집같은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2장 7-8절은 롯이 구원받은 사람이었고 주님과 연합하였으나 교제가 없었고, 아들은 되었지만 친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시사한다. 그는 “불 가운데서 얻은 것”처럼 구원받았다(고전 3:14-15).

 

롯이 이제는 장막이 아닌 집에서 살고 있는데(3절) 제단에 대한 언급은 없음에 유의하자. 천사가 도착한 것은 저녁이고 이 장의 대부분은 밤에 발생한 사건을 다룬다. 그것은 롯이 빛 가운데 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적인 롯은 그의 장막과 제단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잃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영적인 기준도 잃었다. 왜냐하면 군중의 육욕을 만족시켜 주기 위하여 결혼하지 않은 자기의 딸들을 거리로 내보내겠다고 감히 제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기 가족에게 있어서조차 그의 말은 신뢰받지 못하고 있었다(12-14절).

 

이 모든 일이 어디서 시작되었겠는가?

“롯이 눈을 들어...” 믿음으로가 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행하기 시작했으며, 세상에 속한 것들을 위하여 살기 시작했다. 그는 세상적인 여인과 결혼한 것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녀의 마음이 소돔에 있었고 그 도시를 뒤에 두고 떠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아침, 맑고 아름답게 동이 터오르자 사람들은 일상 업무를 시작하려고 했다. 그 때 심판이 임했다. 사악한 도시들이 완전히 멸망했으며 롯과 결혼하지 않은 그의 두 딸만이 살아서 피했다. 이것은 앞으로 임할 진노의 상징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평화롭고 안전하다고 생각할 때 멸망이 닥칠 것이기 때문이다(살전 5장). 여호와께서는 아브라함을 위하여 롯들 구해내셨다(19:29).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장차 올 진노에서 그의 교회를 구하실 것이다(살전 1:8/살전 5:9). 롯은 하나님이 진노를 퍼부으시기 전에 그외 교회를 휴거하시는 일의 예증이다.

 

롯의 말년은 흑암과 음탕으로 가득 찬다. 동굴에서 근친상간을 저지른다. 그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도시의 집을 위해 장막을 잃었다. 그런데 마침내 동굴에 살면서 자기 딸들로 말미암아 술 취하게 되었다. 이 끔찍한 사건의 자녀들 곧 모압족속과 암몬족속은 세기를 통해 유대인들의 적이 되어 왔다. 육이 영에 대항하여 싸운다. 어떤 사람이 그의 가족과 함께 어떤 장소에 정착하려 할 때 그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지 확신이 있어야 한다. 롯은 그릇된 곳을 택하였고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멸시켰다.

 

3. 아브라함의 그랄 방문 (창 20장)

 

롯은 이제 잊혀졌으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리로다!” 불행히도 이 장은 옛 죄의 반복이다. 아브라함은 또다시 그의 아내에 대해 거짓말을 한다(12:10-20 참조). 가장 신앙적인 성도라 해도 사탄이 그를 넘어지게 하지 못하도록 계속 깨어 있어야만 한다.

 

이 죄가 반복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브라함이 자기 생활에서 이 일을 심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주님께 그 일을 고백하고 용서를 받았지만 죄를 고백하는 것과 죄를 심판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우리의 죄를 심판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를 보시는 것처럼 참된 빛 가운데서 그 죄를 본다는 뜻이다. 죄를 미워하고 우리 생활에서 밀어내는 것이다.

 

13절에서 아브라함은 이 죄가 갈대아 우르로부터 따라다녔으며 불신앙의 “옛 생활”로부터 왔음을 시인한다.

 

신자가 비록 죄에 빠졌다 할지라도 신자와 불신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이방인의 법정(法廷)을 괴롭히셨고 아브라함을 보호하셨다. 하나님은 그 통치자에게 “네가 죽으리니(너는 죽은 사람이라!)”라고 하셨으나(3절) 아브라함을 선지자라고 부르셨다(7절). 이 말은 믿는 사람이 죄를 지어도 좋도록 허용되어 있다는 뜻이 아니라 우리가 비록 신실하지 못할 때라도 하나님은 신실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딤후 2:12-13). 물론 아브라함은 그 죄로 인하여 수치와 비난의 괴로움을 당했으나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 실제로 아비멜렉이 사라를 취했더라면 바로 그 다음 해에 이삭을 출생시킬 하나님의 계획이 깨졌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기심과 불신앙은 자기 자신의 생명과 유대민족의 장래를 거의 파멸시킬 뻔하였다. 불행히도 그들의 아들 이삭은 후에 이와 똑같은 속임수를 사용할 것이고(26:6- 이하) 똑같은 쓰라린 결과를 당할 것이었다.

 

“믿음이란 꾀를 부리지 않고 사는 것이다.”

- 18장과 19장에 나오는 두 가지 방문을 비교해 보면 흥미 있다.

 

아브라함 롯

그리스도께서 친히 방문하심 두 천사만 방문함

축복의 메시지(이삭) 죄를 선고하는 메시지

빛 가운데-정오 그늘이 질 때-저녁

장막 문에서 성문에서-소돔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힘을 얻음 롯이 하나님께 아무 영향력이 없음

소돔이 멸망하는 것을 보나 아무것도 잃지 않음 생명은 구했으나 그 밖의 모든 것을 잃음

세상에 축복을 끼침 슬픔을 가져옴(암몬과 모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