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창 25-27장 / 부정한 거래
이삭은 유명한 아버지(아브라함)의 아들이었고, 유명한 아들(야곱)의 아버지였다. 그래서 창세기를 공부할 때 “그를 빼놓기”가 쉽다. 이삭은 족장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던 반면, 그의 생애에서 흥미진진한 면은 다른 족장들보다 적다. 불행하게도 그의 생애의 말년은 초년에서와 같은 강한 믿음을 소유하지 못했던 것 같다.
1. 아버지로서의 이삭 (창 25장)
1) 구별된 가정(1-11절) -
사라가 죽은 후에 아브라함이 결혼한 것은 교회가 들림을 받아 신부가 신랑을 만날 때(24장)의 이스라엘의 “새로운 생활“을 상징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부가된 아들들은 이삭에게 주어진 신분과 같지 않음에 유의하자. 왜냐하면 이삭은 그리스도처럼 모든 것의 상속자이기 때문이다(히 1:2). 아브라함의 죽음은 믿음이 인간에게 주는 유익을 보여 준다. 그는 평화롭게(15:15), “수가 차서”(자기 생애에 만족하며), 믿음 안에서 죽었다(히 11:13- 이하).
세상의 사람 이스마엘의 죽음과 비교해 보자(17절).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에게 남긴 유산은 얼마나 놀라운가! 그의 경건한 모범(18:19), 장막과 제단(26:25),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들(26:2-5). 이 영적인 축복들은 아들에게 있어서 물질적인 부(富)보다도 훨씬 중요한 것이다.
2) 낙심한 가정(12-23절) -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이삭과 리브가에게 아들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결혼생활의 초반 20년 동안, 리브가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20, 26절). 이 영적인 심령을 가진 남편과 아내가 주님께 자신의 짐을 가지고 나아가게 됨을 보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약속을 생각했을 것이며, 기도 중에 기뻐했을 것이 확실하다. 아이들은 태중에서 싸움으로써 리브가를 괴롭혔다. 그녀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했다(약 1:5). 하나님은 그녀에게 두 민족이 태어날 것이며, 전례적인 관습과는 달리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택에 대해 절대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명확한 증거이다(롬 9:10-16). 하나님의 선택은 아이들의 행동에 기초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태어나기 전이며 아직 선이나 악을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격과 관계된 한에 있어서는 에서가 둘 중에서 보다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야곱이 선택된 사람이었다(엡 2:8-10).
3) 분열된 가정(24-34절) -
쌍둥이 형제들의 모습과 기질이 서로 반대였다. 장자는 털이 많이 나서 “에서”(털보)라고 이름 지었고 후에는 팥죽과 연관되어 “에돔“(붉다)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30절). 야곱은 에서의 발꿈치를 붙들고 마치 그를 붙들어 걸려 넘어지게 하는 듯 태어남으로써, “야곱 - 발꿈치를 잡는 사람”(책략을 써서 대신 들어앉는 사람, 음모가, 사기꾼)이란 이름이 주어졌다.
야곱은 집에 머무는 조용한 사람이었고, 에서는 정력과 모험으로 가득 찬 세상적인 사람이었다. 불행하게도, 에서는 영적인 인식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즐거워하기보다는 그의 육체에 음식을 공급하기를 원했다. 물론 야곱이 장자권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쓴 것은 하나님께서 25장 23절에서 말씀하신 그의 약속을 이행하실 것에 대해 의심했음을 보여 준다.
“믿음이란 꾀를 부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에서는 장자로서의 영적인 축복을 업신여겼다(신 21:17/대상 5:1-2). 그는 육신을 택했고 영을 택하지 않았다. 에서가 장막이나 제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읽지 못했으며, 26장 34-35절은 그가 세상적인 여인들을 사랑했음을 알려 준다. 히브리서 12장 16절은 에서를 “망령된 자”라고 설명하는데, 이는 “세상의, 보통의” 라는 뜻으로서 “성전 밖에서”라는 의미를 지닌 라틴어 프로파누스(profanus)에서 어원을 찾아볼 수 있다.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세상에서는 성공적이었으나, 하나님께는 실패하였다.
2. 순례자로서의 이삭 (창 26장)
1) 그는 그의 아버지가 당했던 유혹에 직면했다(1-5절/ 12:10- 이하 참조) -
이삭은 애굽을 향해 출발했으나 하나님은 은혜로써 그 여행을 중단시켜 멈추게 했다. 인간의 본성은 세대를 거쳐 내려오며 개선되지 않고 있다. 이삭은 그랄에 머물렀는데, 이곳은 국경에 접한 곳이다(10:19), 오늘날에도 많은 “경계선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이삭은 여기서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으나 영적인 축복은 받지 못했으며, 그 후 그곳을 떠났을 때에야 받았다.
2) 그는 아버지의 죄를 반복했다(6-11절) -
12장 10-20절과 20장 1-5절을 보자. 이 “반 거짓말”을 적용하였고 똑같은 결과가 왔다. 축복을 잃고, 간증을 잃고, 이방 왕에게 공식적인 문책을 받는다.
3) 그는 아버지의 우물을 다시 팠다(12-22절) -
우물이란 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한 하나님의 신성한 자원을 말한다(요 4:1-14). 아브라함이 이 우물들을 팠는데 대적들이 돌로 막았거나 물이 나오지 않게 했었다. 이 일은 오늘날에도 꼭 맞는 상황이다. 세상은 우리 조상들이 마셨던 영적인 우물들, 즉 기도와성경과 가정 제단, 교회 등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갔다. 옛 우물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 이삭은 그 우물들을 다시 열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이름으로 불렀고(18절) 당시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새 우물들을 몇 개 더 파나갔다.
4) 그는 자기 아버지의 하나님을 믿었다(23-25절) -
이삭이 가나안에서 멀어져 가는 한, 충돌을 겪어야 했지만 브엘세바(맹세의 우물)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이 그를 만나셨고, 적들과도 평화를 이루게 해주셨다(잠 16:7).
3. 축복을 주는 이삭 (창 27장)
말하기는 안 되었지만, 전 가족이 영적으로 좋지 않은 길에 들어서 있었다. 25장 28절에서 우리는 가정의 분열을 보았는데 이제 우리는 이 육적인 분열의 죄악된 결과들을 보게 된다.
1) 쇠약해지는 아버지 -
이삭은 이제 137세이며 죽을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실제로는 180세까지 살았다(35:28). 에서에게 축복을 주는 데에 성급한 것으로 볼 때, 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육신적인 계획임을 말해 준다. 25장 23절의 말씀을 잊었단 말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계획을 바꾸려 하고 있는가? 그가 자기감정에 어떻게 의존하는지 보자. 그는 만져보고, 먹고, 냄새 맡는다. 육체에 음식을 공급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보다 우선적임에 유의하자. 이삭은 전에 제단에 놓여졌던 몸이며 기꺼이 여호와를 위하여 죽으려 했었다! 얼마나 큰 변화인가!
2) 의심하는 어머니 -
하나님은 리브가에게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속임수를 쓰고 음모를 짜서 에서를 확실히 제외시키려 했다. 그녀가 오래 전에 한 것처럼 기도 중에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의 육신적인 계획에 의존한다. 이것이 관례가 되어, 후에 야곱은 이런 성품으로 특징 지워진다. 리브가는 자기 죄 값을 크게 치른다. 그녀는 아들을 다시는 보지 못했고(43-45절 참조), 에서가 고의적으로 그녀의 마음을 상하게 행동했으며, 그녀의 나쁜 본보기는 야곱으로 하여금 20년에 걸친 시련을 겪게 했다.
3) 속이는 아들 -
야곱이 자기 생애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알고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대신 자기 어머니에게 귀를 기울였다. 그들 둘은 그 계획을 성취하려고 얼마나 서둘렀던가! “믿는 자는 서두르지 않는다!” 염소로 사슴고기의 맛을 내었으니 리브가는 훌륭한 요리사였음이 분명하다. 야곱은 위선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 그의 목소리와 그의 손(말과 행동)은 일치하지 않는다.
19절에서 야곱은 아버지에게 세 가지 거짓말을 했다. “나는 에서입니다”, “내가 하였사오니”,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라고 말했지만, 그는 야곱이었고 어머니가 모두 요리했으며, 그것은 염소 고기였다. 27절에서의 그의 입맞춤은 속임수나 마찬가지였다. 야곱은 이 죄값을 치루었는가? 그렇다. 많이 치루어야 했다. 그는 아내를 맞는 일로 라반에게 속임을 당했고, 라반은 그의 품삯을 여러 번 바꾸었다. 또한 야곱의 아들들은 염소를 죽이고(37:31) 그 피를 요셉의 옷에 묻혀 주를 속이게 된다! “네 죄가 너를 찾아낼 것을 명심하라!”
4) 절망하는 형 -
히브리서 12장 17절은 에서가 눈물로 축복을 받으려 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자기 죄를 진실로 회개한 곳은 찾아볼 수 없다. 양심의 가책은 있었으나 진지한 회개는 없었다. 그는 자기가 잃은 것에 대해서는 대단히 슬퍼했으나 자기 죄는 슬퍼하지 않았다. 33절에 보면 이삭은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심을 깨달았을 때 크게 떨었다. 에서의 눈물이 이삭의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축복을 바꾸어 놓지는 못했다. 에서는 그의 동생을 살해할 계획을 짜서 보복하려 한다. 그리고 자기 아내들과의 문제를 일으킴으로 고의로 부모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하지 않았으나 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데 실패했다.
집 안의 죄는 언제나 비탄과 오해를 가져온다. 이삭과 리브가가 아들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결혼 초기에 그러했듯이 문제들을 놓고 계속 기도했다면, 하나님께서 자기 방법을 사용하시도록 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해 괴로움을 당했다. 우리는 나이가 많아진다고 해서 유혹되지 않거나 실패하지 않는 것은 결코 아니다.
14. 창 28장 / 벧엘에서의 야곱
1. 모험 (창 28:1-9)
창세기의 나머지 부분은 실제로는 야곱의 생애를 소개하고 있으며, 이 중에는 라반과의 시련(28-31장), 에서와의 시련(32-33장), 자기 아들들과의 시련(34장 이하)이 포함되어 있다. 요셉의 이야기는 사실상 야곱의 역사의 일부이다.
리브가가 야곱에게 집을 떠나라고 종용한 근본 이유는 에서의 진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27:41-46). 그러나 그녀는 야곱에게 경건한 아내를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핑계를 대었다(24:1-9). 에서의 세상적인 아내들은 가정에 문제거리였으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 밖에서 결혼할 때는 언제나 같은 경우를 당한다. 리브가는 사실상 적당한 때에 야곱을 데리러 보내려고 계획했다(27:45). 그러나 그녀의 육적인 모든 획책이 그러했듯, 이 계획도 실패했다. 야곱은 다시는 그의 어머니를 보지 못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이란 꾀를 부리지 않고 사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으며 집을 떠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야곱은 아버지의 신앙에 의존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야했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야 했다. 불행하게도 야곱이 참된 헌신의 장소에 오게 되기까지는 20년 이상이 걸렸다. 그는 그동안 불신앙과 반역에 대한 비싼 댓가를 치루었다. 6-9절은 육과 영의 대결을 보여주는 예증이다. 에서(육신)는 고의로 여호와께 불순종하여 가정에 훨씬 큰 슬픔을 안겨 준다.
길을 떠날 때 그는 젊은이가 아니라 적어도 77세는 되었다. 창세기 47장 9절은 야곱이 애굽으로 떠날 때가 130세였다고 언급한다.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간 때는 17세였으며 바로에게 나타난 것은 30세 때였다(41:46). 그렇다면 종으로 13년을 지냈다는 뜻이고, 7년의 풍년이 지나 2년째의 흉년이 들었을 때 야곱이 애굽으로 왔으니 요셉은 39세가량 되었다. 이 말은 야곱의 나이 91세 때에 요셉이 태어났다는 말이 된다. 창세기 30장 25절에 보면 요셉이 태어났을 때가 야곱이 아내들을 위한 14년의 수고를 끝냈을 때이므로, 야곱이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는 77세쯤임을 알 수 있다.
2. 벧엘의 꿈 (창 28:10-12)
그는 브엘세바에서 벧엘까지 약 70마일(112.6km)을 여행했다. 3일간의 여행이었다. 그 날 밤에 그는 “돌들 중의 하나”를 취하여 기대어 잤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땅에 이르는 사다리(또는 계단으로 번역하기도 함)를 보여 주셨다.
요한복음 1장 43-51절은 이 구절에 대한 신약의 설명이다. 즉, 사다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야곱은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완전한 모형이다. 어두움 가운데서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치고 있으며, 아버지의 집을 떠나, 죄로 마음이 무겁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사다리는 땅에서 하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그는 우리에게 천국을 열어 놓으셨고, 우리 생활에 하늘의 축복을 가져오시며, 그분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가실 수 있다. 야곱은 자기가 외롭고 황량한 들판에 있다고 생각했었으나 잠을 깨자 그가 천국 문에 갔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 구절을 요한복음 1장 43-51절과 관련지어 보면 야곱은 교활함(속임)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사람인 반면에 47절에 기록된 나다나엘은 교활함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하나님으로부터 야곱에게로 온 최소한 일곱 개의 기록된 계시들 중에서 첫번째 것이다(31:3/31:11-13/32:1-2/32:24-30/35:1/35:9-13/46:1-4). 사다리 위의 천사들은 하나님의 돌보심을 나타낸다. 천사들은 야곱이 에서와 상봉할 즈음, 야곱을 보호하기 위해 다시 나타났다(32:1-2).
3. 음성 (창 28:13-15)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환상은 속임수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야곱에게 확신을 주시기 위하여 친히 음성을 들려 말씀하셨다. 구원은 천사들로 말미암거나, 또는 환상을 보았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1) 땅(13절) -
이 약속은 아브라함에게 처음 주셨던 것으로서(13:14) 이삭에게 재차 확언되어졌던 것이다(26:1-5). 비록 유대인들이 모두 소유하지는 못했지만, 거룩한 땅은 그들의 것이다. 어느 날 이스라엘은 “자기 소유를 차지할 것이다”(옵 17절).
2) 자손의 번성(14절) -
이 말은 하나님이 야곱에게 아내를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한다. 다른 방법으로는 자손을 얻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13장 16절과 22장 17절을 보자. 오늘날에는 나침반이 가리키는 어느 곳에나 유대인들이 있다.
3) 하나님의 인격적인 임재(15절) -
이 구절은 야곱이 방랑하게 될 것을 암시해 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한다. 왜? 하나님이 야곱의 생애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틀림없이 그의 계획을 성취하실 것이다(빌 1:6/롬 8:28-29). 야곱이 앞으로 어려운 해들을 보내며 자기 죄의 결과를 거둬들이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셔 보호하시고 축복하셨다.
4. 서약 (창 28:16-22)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다!”라고 야곱은 외친다. “벧엘”(Beth-el)이 “하나님의 집”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그 밤의 경험은 그를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 곳의 이름도 바꾸었다.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기둥을 세워 제단을 삼고 기름을 부어 여호와께 바쳤다. 오랜 후 그가 벧엘로 돌아왔을 때, 야곱은 이 헌신의 행위를 반복했다(35:9-15). 이 믿음의 행위(비록 두려움이 동기였다고 해도)는 하나님께 자신을 헌납하는 야곱의 방법이었다. 빌립보서 2장 17절을 보자. “드릴지라도”라는 말은 “쏟아 붓는다”는 말이다. “베개”가 “기둥”으로 바뀔 때 이는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야곱의 서약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그가 “만일... 하시면” 이란 말을 함으로 하나님과 거래를 하고 있다는 견해와, 히브리어는 “만일“이 “왜냐하면...”으로 번역되기도 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나타내고 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사실상 성경에 나오는 첫번째 서약이다. 위의 두 가지 해석은 모두 사실인 것 같다.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으나 에서와 이삭에게 거래하던 방식으로 하나님과의 거래를 시도하는 “옛 사람”이 다분히 남아 있었다. 그에게는 “꾀를 부리는 것”이 습관이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일도 자기 방식으로 꾀를 내려고 했다. 이런 습관은 마침내 얍복강 나루에서 노출되어 처리되었다(창 32:1-). 야곱은 평화롭게 집으로 돌아갔다(창 35:27-29).
야곱은 십일조를 실행했다(22절). 그는 자기의 재물이 하나님의 지배 아래있지 않는 한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란 아무 의미가 없음을 깨달았다. 아브라함도 십일조를 했는데(14:20) 두 경우 모두 율법이 주어지기 전이었다. 십일조가 오늘날 은혜 시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모세 율법의 일부라고 말하는 사람은 옛 성도들이 십일조를 실천했다는 사실을 놓쳐버리는 것이다. 십일조는 그들을 인도하셨고, 보호하셨고, 필요에 따라 공급하신 여호와께 믿음과 순종을 표하는 것이었다.
야곱이 이후로부터 이 서약에 따라서만 언제나 산 것은 아니었다. 그는 호적수 라반을 만났는데 라반이야말로 음모가였다. 20년 동안 둘은 서로 꾀로 승부를 다투었다. 결국, 야곱은 단련이 되었으며 하나님은 그의 약속을 지키셨다. 사람이 자기 생애 가운데 “벧엘” 곧 하나님을 헌신적으로 만나 어떤 확정된 결정들을 내린 곳을 가지게 됨은 축복된 일이다. 그는 주를 떠날 수도 있었으나 “벧엘로 돌아와” 언제든지 약속을 되살릴 수 있는 것이다. 야곱은 두 가지 본성 간의 갈등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왜냐하면 그는 언제나 육신과 싸우면서도 자기 자신의 능력과 계획을 의존하려 한다. 하나님이 제멋대로인 자녀들조차 돌보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얼마나 좋은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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