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구약

창세기7 - 21~22장(이삭과 하나님의 시험) / 23~24장(이삭의 신부)

JORC구원열차 2009. 6. 2. 20:21

11. 창 21-22장 / 이삭과 하나님의 시험

 

이 두 장은 아브라함의 생애에 찾아왔던 세 가지 시험에 대한 기록이다. 참된 신앙은 언제나 시험을 받는다. 왜냐하면 시험을 통해서만 우리가 어떤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신앙의 시험은 성장과 승리의 기회이다.

 

1. 가족에게서 온 시험 (창 21:1-21)

 

가정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살기가 가장 힘든 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이미 그의 아버지와(11:27-32), 조카 롯과(12-13장), 그의 아내로 말미암아(16장) 가족에게서 시험을 받았다. 여기서는 그의 두 아들, 즉 십대 후반이었을 이스마엘과(16:16) 겨우 젖을 떼었을 세 살 가량의 이삭 간의 갈등을 보게 된다. 처음에 이삭의 출생은 기쁨과 웃음을 가져왔다(21:6/17:17/18:12를 비교). “이삭”이란 이름이 바로 “웃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 후 오래지 않아 이스마엘이 계속 그의 동생을 핍박함으로 대립이 생겼다. 여기 몇 가지 귀중한 교훈들이 있다.

 

1) 육(肉) 대 영(靈) -

이스마엘이 육의 자녀(16장)인 반면에, 이삭은 기적적으로 출생한 약속의 자녀였다. 이삭이 그 가정에 나타난 것은 아브라함에게 힘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이미 그는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였다(롬 4:19-20). 이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으로 된 것이었다. 육과 영, 옛 본성과 새로운 성품은 언제나 대립되기 마련이다(갈 5:16-24).

 

구원은 옛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으며, 옛 본성이 향상되거나 길들여지지도 않는다(롬 6-7장 참조). 옛 본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의 판단을 받아들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다.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사랑했고 그를 곁에 붙들어 두고 싶어했다(21:11/17:18 참조). 그러나 하나님은 “내어 쫓으라!”고 말씀하셨다. 로마서 6장은 육신을 이기는 유일한 승리는 육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것, 곧 자신이 죽었다고 간주하는 것임을 알려 준다. 옛 본성과 영합하는 그리스도인들은(롬 13:14) 반드시 갈등과 문제를 일으킬 것이다.

 

2) 옛 언약 대 새 언약 -

갈라디아서 4장 21-31절은 이 사건이 하나님의 이스라엘과의 옛 언약과 교회와의 새 언약을 상징하는 비유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중심 사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겠다. 하갈은 율법이라는 옛 언약의 상징으로서 바울 시대의 지상적 예루살렘과 동일시되었으며, 사라는 은혜의 새 언약의 상징으로, 천상적 예루살렘과 동일시되었다. 이스마엘은 육으로서 태어났으며 노예의 아들이었다. 이삭은 영으로 태어났으며 자유로운 여인의 아들이었다. 이 두 아들은 율법의 노예로 있는 유대인과 은혜의 자유 아래 있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각각 상징한다.

 

바울의 논점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갈(옛 언약)을 내어 쫓으라고 명령하신 데에 있다. 이는 하나님의 축복이 이삭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갈라디아서 3-4장에 기록된 바울의 논증은 이 모든 사실에 적중한다.

 

3) 인간의 방법 대 하나님의 방법 -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 정확해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최선의 길은 하나님의 방법이다. 하갈은 16장 10절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을 잊었다. 다른 말로 하면, 상한 심령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들을 붙드셨으며 그가 하신 말씀을 지키셨다. 우리가 그에게 순종한다면 그는 언제나 길을 열어주실 것이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다.

 

2. 이웃에게서 온 시험 (창 21:22-34)

 

그리스도인들은 “외인들”(those that are without)과의 관계를 주의해야 한다(골 4:5/살전 4:12/딤전 3:7). 아브라함은 그의 이방인에게 있어서 놀라운 간증적인 인물이었다. 우물을 둘러싼 갈등은 그의 이러한 인상을 파손시킬만한 것이었으나, 그는 좋은 방향으로 해결 지었다. 그가 사무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분명히 확정지었음을 유의하자.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자”(고전 14:40). 아브라함과 그의 이웃들은 적절한 선물을 교환하였고, 언약에 조인하기 위하여 적합한 제사를 드렸다. 이 계약이 이루어진 곳을 브엘세바, 곧 “맹세의 우물”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우물은 아브라함에게 기도와 친교의 장소가 되었다. 우리가 이웃 간에 또는 사업상 직면하게 되는 시험을 그리스도인의 방법으로 치르는 것은 중요하다(롬 12:18 참조).

 

3. 여호와로부터의 시험 (창 22:1-24)

 

사탄은 우리에게 있는 가장 나쁜 것을 나타내려고 시험(유혹)하지만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나타내도록 돕기 위해 시험하신다. 야고보서 1장 12-15절을 보자. 가장 극렬한 시험은 사람들로부터 오지 않으며 주께로부터 온다. 그러나 여기에는 언제나 가장 큰 축복이 따른다. 하나님은 결코 이런 방식으로 롯을 시험하지는 않으셨다. 왜냐하면 롯은 소돔과 세상이 그를 시험하는 낮은 수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주님과 가장 가까이 동행하는 성도를 하나님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시험 하신다.

 

1) 모형적 교훈 -

이 사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놀라운 모형을 보여주는데, 그는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 생명을 내어놓는 독생자이시다. 이삭과 그리스도는 둘 다 약속된 아들들이며, 둘 다 기적적으로 태어났고(물론 그리스도는 처녀의 몸에서 죄없이 나셨다), 둘 다 아버지의 마음에 기쁨을 주었으며, 둘 다 정해진 때에 출생하였다. 또한 둘 다 그의 형제들에게 박해를 받았으며, 둘 다 죽음에 임하여 순종적이었다.

 

두 젊은이가 이삭과 동행하였으며 그리스도는 두 도둑들 사이에서 십자가에 달리셨다. 이삭은 나무를 지고 갔고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셨다. 이삭은 아버지에게 질문을 했고, 예수께서도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물었다. 이삭이 생명을 구하게 된 반면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순종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이삭은 “죽은 것”과도 같았으며, 히브리서 11장 19절은 “비유로”(즉 상징적으로) 이삭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한 것이라고 말한다. 19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돌아왔으나 이삭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도 역시 하나의 모형이다. 왜냐하면 이 후의 기록에서 이삭은 그의 신부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24:62).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자신을 십자가에서 주시고 천국으로 돌아가셨다가 어느 날, 그의 신부인 교회를 맞이하러 오실 것이다.

 

2) 실천적인 교훈 -

진실한 신앙은 반드시 시험을 받게 마련이다. 물론 하나님이 이삭의 생명을 원하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원하셨다.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귀중한 존재였다. 하나님은 이삭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있는 우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싶으셨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약속을 쟁취할 것을 신뢰하면서도 하나님은 신뢰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 시험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었을까?

단 한 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한 것이다(히 11:17-19).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이 많아질 것을 약속하셨는데 이삭이 살아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시지 않으면 이 약속은 성취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거짓말하지 않으실 것을 알았으며 변치 않는 그의 말씀을 의지했다. “하나님이 빛 가운데 말씀하신 것을 어두움 가운데서 의심하지 말라!”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지체없이 순종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행하면 적절한 때에 다음 단계를 나타내실 것이다.

 

요한복음 7장 17절을 보자. 하나님의 응답은 단 몇 분이라도 때 늦게 오는 법이 없다! 꼭 필요한 때에 하나님은 수양을 공급하셨다. 이로 인해 아브라함은 이곳을 “여호와 이레, 곧 주께서 틀림없이 하시리라“고 이름 지었다.

 

3) 예언적 교훈 -

이 사건은 모리아산에서 일어났으며(22:2), 이곳은 성전이 세워진 곳이다(대하 3:1). 이삭은 “양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고 하나님은 수양을 공급하셨다. 그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통하여 왔다.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요 1:29)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산에서 볼 것이다”라고 하였고 그리스도는 성전에 모습을 나타내셨는데 그 다음, 갈보리산에서 죽임을 당하셨다.

 

요한복음 8장 56절을 보자.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4) 교리적 교훈 -

야고보서 2장 14-26절은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논한다. 야고보는 그가 주장하는 요점을 설명하기 위하여 이 사건을 실례로 제시한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순종으로 입증된다. 야고보서 2장 21절의 정확한 번역에 유의하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의로워진 것이 제단에 그의 아들을 바친 행위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가?” 아브라함은 이삭을 바칠 때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창 15:6). 야고보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가 행위로나 희생을 바침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니라, 순종하는 생활이 곧 구원받은 믿음을 증거한다는 것이다(롬4:1-5/갈 3:6- 이하 참조).

 

 

2. 창 23-24장 / 이삭의 신부

 

이 두 장은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는데 한 장에는 장례식이 나오고 다른 장에서는 결혼식이 나오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은 “산과 골짜기의 땅”이며(신 11:11),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어떤 경우에도 믿음으로 행했다(히 11:13-17). 23장에 보면 아브라함은 슬퍼하며 애곡하는 상주이지만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지 않다(살전4:13- 이하). 그는 이방인 이웃들 앞에서 훌륭한 간증이 되었다! 사라의 장사지냄은 이방인과는 아주 다른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서 처음 소유한 땅이 무덤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이상하게 보인다. 창세기 49장 31-32절은 여섯 사람이 여기 장사되어 있다고 밝히고 있는데, 복음의 메시지가 빈 무덤을 전하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룬다. 또한 아브라함이 그의 사무적인 문제에 있어서 조심성있게 다루고 있으며 모든 일들이 “관대하고도 질서있게” 행해지는 것을 주목하라. 믿는 사람들이 사무 상의 일을 처리함에 있어, 특히 불신자와의 거래에서 탐탁치 않게 의문의 여지를 남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는 영적인 교훈이 풍성한 24장에 중점을 두려 한다. 아브라함과 그의 종과 리브가를 통해서 세 가지 훌륭한 본을 보기로 하자.

 

1. 아브라함의 헌납의 모범 (창 24:1-9)

 

아브라함은 이제 140세이다(25:20/21:5). 하나님은 그에게 영적으로, 또한 물질적으로 축복하셨으나, 그는 이삭의 신부를 선택하는 문제에 있어서 확인하고 싶어한다. 물론 우리는 여기서 그의 아들(그리스도)을 위하여 신부(교회)를 선택하시는 하늘 아버지의 모습을 보게 된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을 위해 하나님이 적절한 여인을 제공하실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이삭은 하나님의 소유였다. 아브라함은 이전에 그를 제단에 바쳤던 일이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제공하실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다른 방식으로는 약속된 씨가 결코 태어날 수 없었다.

 

여인은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선택되어야만 하며 이방 여인들 중의 하나여서는 안 되었다. 이삭과 기꺼이 결혼하여 그의 부(富)를 나누어 가지길 원하는 아름답고 재능있는 가나안 여인들이 많았음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러나 이 일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6절과 8절에서 아브라함이 이 사실을 강조하는데, 오늘날 우리도 이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주 안에서만” 이 말은 고린도전서 7장 39-40절에 나오는 교훈이다. 또한 고린도후서 6장 14-18절도 읽어 보자. 부모들이 자녀들을 “사회로 밀어 넣으며” 주의 축복으로부터 밀어내는 것은 비극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이 아내를 구하러 우르(Ur)로 돌아가거나 또는 가나안 민족 중에서 아내를 취하게 하기보다는 아들을 미혼으로 남겨 두었을 것이다.

 

2. 종의 헌신의 모범 (창 24:10-49)

 

영적인 의미에서 보면, 종은 잃어버린 자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여 신부로 삼게 하는 일을 수행하는 성령을 상징한다. 그 종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성령의 사역이 그리스도를 알리고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종이 얼마나 자주 그의 주인과 주인의 아들을 언급하는지 주목해 보자.

그는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살았다. 이 장에서만도 주인이란 단어를 22번이나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성령은 그리스도를 나타내며, 이 땅에서 구세주의 뜻을 행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다. 종은 주인의 소유를 한 몫 가지고 갔는데, 이는 마치 성령께서 오늘날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엡 1:13-14) 우리가 어느 날 영광중에 누리게 될 거대한 부요의 작은 몫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는 것과 같다.

 

종은 또한 우리가 주님을 섬기려 할 때 우리에게 본보기가 된다. 이미 언급한 대로, 종은 그의 주인과 주인의 뜻만을 생각했다. 사실 그는 그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식사조차 돌보지 않았다(33절/ 요 4:31-32). 우리는 육체의 일들을 영적인 일보다 앞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종은 주인으로부터 명령을 받았고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았다. 그는 기도함으로 믿었고(사 65:24 참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위해 주님을 기다려야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서 성급하고 참지 못하는 성격은 마땅치 못하다.

 

종은 여호와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순종하는)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27절/ 요 7:17).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자, 그는 미루지 않았고 자기 임무를 수행하는 일을 서둘렀다(17절). 그 가정의 친절은 호의적이었으나 그는 자기 주인을 위해해야 할 일이 있었으므로 다른 모든 일들을 사양할 수밖에 없었다. 종이 집으로 돌아와서 주인에게 보고를 한 일에도 유의하자. 이것은 우리가 후일에 그리스도께로 나아가게 될 때 계산을 해야 하는 것과 같다. 종이 여행을 하면서 신부를 어떻게 가르치며 신랑을 어떻게 알리는지를 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스도는 성령에 대해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3. 리브가의 결정의 모범 (창 24:50-67)

 

또다시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한 상징을 본다. 천국에서 결혼식이 있을 때 교회가 그러할 것이지만, 리브가는 순전한 처녀였다(계 19:7-8).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양떼인데 그녀가 양떼 중의 하나로 간주된 점에 유의하자(요 10:7-18).

 

리브가는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 가족과 함께 집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종의 말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그녀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이삭에게로 갈 것인가? 결정을 내리는 데는 분명히 방해물들이 있었다. 오빠는 한동안 더 머물기를 원했고, 여행은 멀고 어려울 것이었다. 더구나 이삭은 정착된 집을 가지지 않은 순례자였으며,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야만 했다.

 

라반이 여동생에게 권한 것처럼 세상은 죄인에게 기다릴 것을 권한다(그러나 물질적인 것들을 얻을 때 라반은 서둘렀을 것이다/ 28-31절. 우리는 그가 정중한 예절로 종을 초대했는지 탐욕으로 초대했는지는 알 수 없다). 죄인들은 다른 모든 일들에는 바쁘면서도 영혼의 구원은 등한시한다. 이 시점에 이르러 리브가는 서둘렀으나(18-20, 28절) 그들은 그녀가 늑장부리기를 원한다. “여호와를 찾을 만한 때에 찾으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는 그녀의 결정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가겠나이다.” 이 믿음의 행동(“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벧전 1:8)이 그녀의 생애를 변화시켰다. 그녀는 종의 신분에서 신부의 신분으로, 세상의 고독으로부터 사랑과 동반의 기쁨으로, 빈곤에서 이삭의 부(富)로 생애가 전환되었다. 그녀가 이삭의 모든 부요함을 보았는가? 그녀는 그에 대하여 모두 알고 있었겠는가? 아니다. 물론 그렇게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보고 들은 것들이 그녀에게 가야 한다는 확신을 주었다. 오늘날 잃어버린 죄인들에게도 똑같은 일이 생긴다. 성령은 죄인에게 말씀하시며 그리스도의 일들을 보이시는데, 바른 결정을 내리기에 충분할 만큼 하신다.

 

(기록상으로) 이삭은 모리아산에 남겨졌었다. 왜냐하면 22장 19절에 아브라함만 홀로 언급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주님의 상징이다. 그는 우리 대신 죽으시려고 갈보리로 가신다. 그리고는 그의 신부를 기다리시기 위해 천국으로 돌아가신다.

 

창세기 23장에서 사라가 죽는데 이는 육신을 따르는 이스라엘이 제쳐짐을 말해 준다. 24장에서 종(성령)은 신부를 찾으러 간다. 이제 그 신부는 그녀를 영접하려고 나타난 이삭에게로 접근하고 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겠는가! 이 일이 오늘 일어날지도 모른다! 그들이 만났을 때가 저녁 무렵이었던 것처럼 그리스도가 그의 신부를 취하러 돌아오실 때, 이 세상은 어두울 것이다.

 

리브가의 믿음은 보상을 받았다. 그녀의 이름이 하나님의 말씀에 기록되었고, 이삭의 사랑과 부(富)를 나누었으며, 하나님의 계획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떠나기를 거절했다면, 그녀는 알려지지 않은 여인으로 죽었을 것이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