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열왕기상 19장 / 엘리야의 패배
18장에서의 승리의 장면과는 대조적인 장면을 본 장에서 보게 된다. 우리의 가장 큰 시련은 가장 큰 축복들 다음에 오는 경우가 많다. 믿음의 사람이 그의 눈을 주께로부터 옮김으로써 두려움의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의 종을 부드럽게 다루신다.
1. 하나님이 엘리야를 새롭게 하심 (왕상 19:1-8)
야고보서 5장 17절은 엘리야가 “성정이 같은 사람,” 즉 모든 신자들처럼 똑같은 시련과 실패를 당하는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임을 상기시킨다. 850명의 성난 선지자들을 대면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엘리야가 한 여인의 위협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그의 실패에도 육체적인 원인도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갈멜산에서의 대결은 그를 지치게 했으며 정서적으로 메마르게 했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몸을 잘 보살펴야 하며 특히 열띤 사역과 희생을 한 후에는 더욱 잘 보살펴야 한다. 그러나, 엘리야의 실패의 주된 원인은 영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세벨을 보았으며 여호와를 보는 데 실패하였다. 그는 이세벨의 위협을 들었으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을 잊었다. 그가 취했던 매 단계들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명령을 기다렸었다(17:2/17:8/18:2/18:36). 그러나 이제 두려움은 인내하지 못함으로 이어졌으며, 인내치 못함은 불순종으로 인도해 갔다(사 28:16).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보존하려고 한다.
선한 사람의 발걸음은 여호와께로부터 명령을 받는다(시 37:23). 그러나 불신하고 불순종하는 선지자의 발걸음은 그를 보다 나쁜 곤경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엘리야는 유다로 도망하였는데, 그는 아합의 딸이 여호사밧과 더불어 그 곳에서 통치하고 있는 것을 잊고 있었다(왕하 8:16-18). 그는 80마일(약 128km)을 여행하여 보다 큰 위험 속으로 들어갔다. 낙심하여 혼자 있기를 원한 엘리야는 시종을 남겨두고 황무지로 여행했다. 여행할 때는 다른 사람과 같이 행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이다”(창 2:18).
외로움과 의기소침은 대개 편승하기 마련이다. 육체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지쳐서 엘리야는 자려고 누웠다. 그의 취침 기도는 이러했다.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모세가 큰 실망의 때를 당하여 이런 기도를 했었으며 요나도 그러하였다(민 11:15/욘 4:3). 하나님을 바라보는 대신 엘리야는 그의 시선을 자기에게 두고 그가 행한 일, 그리고 그가 하지 않은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님은 은혜로 그의 종을 새롭게 하신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음식과 휴식이 필요한 것을 아셨으나, 그에게는 역시 영적인 자극이 필요하였다 엘리야는 음식을 먹고 잠이 들었다! 여기서 회개나 무슨 관심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아마도 그는 포기한 것 같다. 그래서 하나님은 두번째로 먹이셨다. 이제는 엘리야가 일어나서 다시 여행을 시작하였다. 여호와의 손은 일찌기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고(출 3장), 율법을 받았던 호렙산으로 엘리야를 인도해 갔다. 하나님의 자녀가 타락하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은혜로 돌보신다는 것을 아는 것은 격려가 된다.
2. 하나님이 엘리야를 책망하심 (왕상 19:9-18)
굴에서 그에게 임한 말씀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이셨다(9절). “네가 왜 여기있느냐?” 이 질문은 어느 때에나 우리 자신에게 물어도 좋은 질문이다. 엘리야의 대답은 다시금 그의 마음의 실망을 나타내었다. 그는 이스라엘 중 여호와께 충성된 자는 자신뿐이라고 여겼다. 자신의 교만과 자기를 변호하려는 욕망을 자백하는 대신 엘리야는 자기의 경우에 대해 여호와와 논쟁하기를 계속한다. 그래서 여호와는 그를 가르치기 위하여, 그리고 항복하는 자리로 이끌기 위하여 다른 방법을 사용하셔야만 했다.
여호와는 왜 바람과 지진과 불을 일으키셨는가? 한 가지 이유는 마음이 산란한 이 선지자를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게 하는 데는 많은 도구들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것이었다. 사실상 하나님은 자연 가운데서는 순종하는 종을 찾기에 어려움이 없다(시 148:1-8).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았다. 이 타락한 선지자에게는 이 일이 참으로 큰 문책이 되었다. 더구나 광풍이 지난 후에 세미한 음성이 임한 것은 하나님의 일이 언제나 크고 시끄러운 방법으로 행해지는 것은 아님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갈멜산의 기적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 민족 가운데 영적인 일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두는 일이 수반되어야 한다. 엘리야는 요란하고 큰 일이 성취되기를 원하였으나 하나님은 때로는 조용하고 작은 일을 더 좋아하신다. 우리가 할 임무는 하나님께 어떤 방법을 쓰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돌아가라.” 이것은 엘리야가 두 번이나 자신을 변호하려고 한 후에 그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14-15절). 하나님은 그에게 봉사할 또 다른 기회를 주고 계셨다. 엘리야는 수리아의 새로운 왕으로서 하사엘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예후를, 그리고 새로운 선지자로서 엘리사에게 기름을 붓게 된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의 실패에 대하여 불평하고 근심하기를 멈추고 사역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분명히 좋은 충고이다.
3. 하나님이 엘리야의 후임을 정하심 (왕상 19:19-21)
그 땅에 신실한 신자 칠천 명이 있다고 확신시킴으로써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격려하시는 방법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홀로 서 있을 때에 신자들은 어디에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일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를 다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신다. 이 점이 문제의 핵심이다. 이제, 엘리야의 사역은 종말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그는 계승자를 선택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선포하도록 준비시켜야 했다. 이 일도 엘리야에게 격려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그는 자기가 떠난 후에도 그의 일이 계속될 것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우리를 위한 실제적인 교훈이 있다. 우리가 만일 달아나는 대신 주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멧세지를 기다린다면 그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으로 격려해 주실 것이다.
엘리야의 첫 사역은 자기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지명하는 일이었다. 이 일은 엘리사가 들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을 때 엘리야가 자기의 겉옷을 그에게 던짐으로 이루어졌다. 이 행위는 이제 엘리사가 엘리야와 같은 능력과 권위를 가진 선지자라는 사실을 상징하였다. 엘리사는 자기의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오도록 승낙을 받고 싶었고 이 일은 허락되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이와 같은 작별은 며칠 걸려야 끝나는 것이 보통이다(눅 9:61-62 참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우리는 즉시로 따를 것이며, 다른 이들을 하나님보다 앞에 두어서는 안 된다.
엘리사가 황소를 죽이고, 농기구로 장작을 삼아 불을 피웠다는 것은 그가 결정적으로 과거를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자기의 뒤에 있는 교각을 불사른” 것이다. 이 잔치에는 엘리사의 가족뿐 아니라 이웃의 친구들도 참여하였다. 이들은 모두 그의 새로운 소명이 잘되기를 비는 마음으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잔치가 일단 끝나자 엘리사는 일어나 자기의 주인을 따랐으며 그에게 봉사하였다.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은 엘리야가 아니라 엘리사였으며(왕하 8:8-15) 예후에게 기름을 부은 사람 역시 엘리사였다(왕하 9:1-10). 그러나,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었으므로 그는 간접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기름 부은 것이다.
엘리사가 다른 열 한 사람(아마도 아버지의 종들/ 19절)의 도움을 받아 쟁기를 갈고 있었다는 것은 엘리사가 부유한 가정 출신인 것은 암시한다. 성경에서는 대개 바쁜 사람들을 부르셨음에 주목하자. 모세는 양들을 돌보고 있었고 기드온은 곡식을 타작하고 있었으며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은 고기 잡는 일에 바빴다.
느헤미야는 왕의 술을 맡은 사람이었다. 하나님께는 게으른 성도들을 위해 줄 자리가 없다. 엘리사가 가족과 가정과 물려받을 수 있는 부를 포기한 것은 분명히 믿음과 헌신의 행위였다. 엘리사는 엘리야가 승천하기까지는 뒷전에 머물러 있었으며(왕하 2장), 그 후에야 비로소 사역을 이어 받았다. 엘리야의 사역은 “지진과 불과 바람”의 사역이었으나 엘리사는 “조용하고 작은 음성”처럼 사역하였다. 물론 그의 사역에 있어서 심판을 받는 일도 있다. 왜냐하면 죄는 언제나 심판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엘리야의 생애에 있어서 이러한 경험은 낙담과 실의에 대한 좋은 경고이다. 우리가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우리를 사용하셨다는 것을 알려 주신다. “나만이 진리를 붙들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는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물론 칠천 명의 숨은 사람들이 엘리야의 편에 서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엘리야의 씁쓸한 태도가 그의 사역을 단축시킨 것 같다. 실망에 대한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이사야 40장 31절의 말씀대로 “여호와를 기다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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