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구약

잠언6 - 잠 26장(분노)

JORC구원열차 2009. 7. 3. 14:51

5. 잠언 25장 / 분노

 

이 부분의 주제는 분노인데, 의로운 분노가 있음에 유의하면서 시작하는 것이 좋겠다. 23절은 분노의 표정은 잡담을 침묵시킬 것이라고 가르친다! 예수께서는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셨다”(막 3:5).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라고 충고한다. 물론 우리는 죄에 대해 분을 발하는 것이며, 사람에게 분을 내는 것은 아니다.

 

잠언 27장 4절은 분노는 잔인하며 난폭하다고 경고한다. 분노는 육체를 상하게 할 수 있으며 살인으로조차 인도한다(마 5:22). 성난 부모는 자녀의 몸과 정서에 영속적으로 상처를 입힐 수 있다. 죄악된 분노는 육신에 속하며(갈 5:19-21)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수가 없다(약 1:19-20). 사단은 우리의 성난 말과 태도를 통하여 우리의 삶에 끼어든다(엡 4:26-27). 그래서 하나님은 “분노를 벗어버리라”(엡 4:31/골 3:8)고 주의시키신다. 화난 사람은 위험한 친구이며(잠 22:24/잠 29:22) 성난 여인은 가난한 여인이 된다(잠 21:9/잠 21:19/잠 25:24).

 

본 장에서 우리는 삶에 있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삶에 있어서 분노를 처리하는 데에 필요한 사항들을 배우게 된다.

 

1. 인내 (잠 25:8)

 

우리를 흔들어 놓는 말을 듣게 되는 순간 그 문제에 대하여 생각하거나 기도할 겨를도 없이 성을 내며 그 문제에 몰입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현명한 처사는 그 일을 끝까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이 허다한 죄를 가리운다고는 하지만(잠 10:12/잠 12:16) 우리가 어떤 죄에 빠져들기 위한 핑계를 찾으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조심성을 가지고 무엇이 개입되어 있는지 알라는 뜻이다.

 

“화를 더디 내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사이다(잠 15:18). 분을 내기에 성급한 사람은 어리석은 자로 취급을 받는다(잠 14:17).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지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라고 시편 37편 8절은 충고한다. 그러므로, 화가 날 때는 어떤 문제에 몰입하기에 앞서 멈추어서 기도하고 생각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여유를 가지며 하나님의 영이 내적인 평화를 주시도록 허락하라.

 

2. 비밀유지 (잠 25:9-10)

 

우리는 가장 먼저 어떤 사실을 “세상에 널리 알려” 모든 사람을 우리의 편으로 만들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말을 한다. “당사자에게 직접 말하되 다른 사람들이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마태복음 18장 15-17절에서 명령하신 그대로이며 이러한 방침이 가정과 교회에서 실천된다면 싸움과 분열은 줄어들 것이다.

 

신앙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면서도 사건의 당사자에게 말하지 않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물론 형제에게 견해 차를 말하는 데 있어서는 용기와 그리스도인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렇게 함으로써 영적으로 성숙하게 되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아마도 두 사람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때는 두 세 사람의 영적인 형제들로 하여금 돕도록 한다. 이때에도 실패하면 교회가 개입될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교회의 말도 듣기를 거절하면 그는 징계를 받아야 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라고 로마서 12장 18절은 말한다. 불행하게도 성경에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살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3. 지혜 (잠 25:11-14)

 

말은 우리 귀에 들리는 소리인 것만은 아니다. 말은 살아있고 능력있는 실제로서 우리를 도울 수도, 해칠 수도 있다. 잠언 25장 18절에서 솔로몬은 거짓말을 세 가지 무기들과 비교한다(싸움 방망이, 검, 화살). 그러나 11-14절에서는 말이 사랑의 열매(금사과, 또는 레몬이나 오렌지), 아름다운 장신구, 눈 덮인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얼음냉수가 될 수 있음을 본다.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우리는 바른 말을 사용해야 하며 바른 방식으로 제시하여야 한다. 은쟁반에 사랑스런 열매를 담듯이 “적절하게 말을 해야” 한다(욥 6:25 참조). 잠언 19장 11절에서는 신중함(사려분별)은 사람이 분내는 것을 막을 것이라고 언급한다. 어리석은 자만이 그의 마음을 모두 말한다(잠 23:11). 지혜로운 사람은 무슨 말을 어떻게 언제 해야 할지(잠 15:23) 심사숙고한다. 물론 이러한 영적인 지혜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은 틀림없는 일이다(약 1:5).

 

4. 부드러움 (잠 25:15)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는다!” 참으로 모순된 말이다. 이 말은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는 잠언 15장 1절과 유사하다. 어떤 사람이 비열하게 대하는 것에 대한 우리의 첫번째 반응은 그대로 되돌려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불에 기름을 더하는 격일 뿐이다(26:20-21/약 3:5 참조).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며, 우리를 비난하는 자들을 비난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벧전 2:20-23). 우리가 만약 범죄한 형제를 회복시키려 한다면, 우리들에게는 온유한 정신이 필요하게 된다(갈 6:1). 이것은 바울이 그의 회심자들을 대하는 방법이었으며(살전 2:7), 또한 신자들에대한 그의 명령이기도 하다(딤후 2:24).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폭풍이 아니라 “조용한 작은 목소리”도 사용하신다는 것을 배워야만 했다(왕상 19:11-13 참조).

 

우리는 온유함이 곧 연약함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으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온유함이란 조절을 받는 능력이다. 외과의사를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온유함에 있으며, 성령께서만 이 귀중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수 있으시다(갈 5:22).

 

5. 친절 (잠 25:21-22)

 

온유함이 친절함으로 이끌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로마서 12장 19-21절에서 바로 이 구절이 인용되어 있으며 신약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되고 있음을 알아보자. 분노의 불에 석탄을 붓는 대신(잠 26:20-21) 우리는 사랑과 친절을 보여줌으로 불을 끄는 데 도움을 줄 수가 있다.

 

마태복음 5장 9-12절을 읽고 그리스도께서 이에 대해 하신 명령을 알아보자. 어떤 사람이 징계를 받아야한다면 하나님께서 그 문제를 관할하실 것이다. “원수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친절한 행위들을 바른 동기로 성취하는 일에 유념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사람들에게 우리에 대한 책임을 지우거나, “돈을 받고 면제해 주거나” 한다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을 진지하게 사랑하며 그들을 돕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에게 상을 주실 것이다. 물론, 이러한 선한 행위들이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행해져서는 안 된다.

 

잠언 21장 14절은 이러한 일들에 비밀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암시한다. 솔로몬은 여기서 뇌물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친절은 기름과 같아서 요동하는 바다도 잔잔케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6. 절제 (잠 25:28)

 

절제는 문제의 핵심에 자리한다. 절제를 실행하는 그리스도인은 분노로 말미암아 파멸에 이르거나 다른 사람들을 파멸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구절은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는 16장 32절과 비교되어야 한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 그리고 자기 생활의 왕국을 다스린다는 것은 세계를 지배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당시 알려져 있던 전 세계를 정복할 수는 있었으나 자신을 정복할 수는 없었다. 물론 인간이 이러한 절제를 소유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통하는 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기” 때문이다(롬 5:17).

 

절제(기질의)는 성령의 열매들 가운데 하나이다(갈 5:22). 육은 사람에게 절제를 주지 못한다. 왜냐하면 육은 하나님과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가 필요로 하는 인내심을 얻게 되는 것은 절제를 통해서이며, 이에 대해서는 본 연구를 시작할 때 요약해서 살펴보았다. 만일 사람이 어떤 문제의 초기에서부터 절제를 행사한다면 잇달아 발생할 온갖 종류의 문제들에서 그를 구원할 것이다.

 

잠언 17장 14절은 분쟁의 시작을 댐에서 물이 새는 것으로 비유한다. 만일 주의하지 않으면 그 틈이 커져서 홍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 적게 샐 때에 막는 것이 사납게 날뛰는 홍수를 막는 일보다 훨씬 쉽다.

 

잠언 30장 33절은 다른 상황을 제시한다. 젖을 저으면 버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난다. 이 말이 주는 교훈은 명백하다. 분노로 강압하고 문제를 자극한다면 더많은 문제들을 산출할 뿐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 절제는 신자로 하여금 이러한 일들을 인내로, 그리고 지혜롭게 처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의로운 문제들에 대하여 의분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좋은 성품을 세우는 일에 도움을 준다. 물론, 우리는 불의나 죄에 대해서는 일어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혈기를 부리며 발끈 성을 낸다면 파괴적이 되는 것이다. 거룩한 분노는 보일러의 증기와 같아서 올바른 문제들로 향하게 하며 많은 유익한 일을 성취하게 한다. 자제력을 잃은 불의한 분노는 숲의 불과 같아서 조절할 수 없게 되며, 많은 유익한 일들을 파괴한다. 시편 19편 14절을 적용시키라!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