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사도행전22 - 행 21장(예루살렘에서의 바울)

JORC구원열차 2009. 7. 16. 13:52

21. 사도행전 21장 / 예루살렘에서의 바울

 

1. 예루살렘으로의 여행 (행 21:1-16)

 

지도에서 항로를 추적해 보라. “발견하였다”는 3절의 말씀은 “눈에 들어 왔다”는 뜻일 것이다. 바울과 그 일행은 배에서 짐을 내리는 동안 두로에 머물렀는데, 그 곳에 있는 신자들과 교제할 기회를 얻었다. 성령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고난 받을 것을 다시 경고하신다. 하나님은 바울이 그 곳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계획을 그의 영광을 위한 일로 바꾸어 놓으셨다.

 

5절에서는 “교회 구성원들”이 바닷가에 모여 기도 시간을 가지는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보게 된다. 부모들은 집에 있고 자녀들이 교회에 나온다거나, 아내와 자녀들이 다른 곳에 있는데 남편이 예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란 참으로 슬픈 일이다(20:36-38 비교).

 

일행은 돌레마이에서 하루를 머물렀다가 가이사랴에 있는 빌립의 집으로 갔다. 빌립은 사도행전 6장 5절에서 집사가 되었다가 8장 4절 이하에서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이제는 그의 가족과 함께 정주하였으며 영혼을 인도하는 데 분주했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집사 빌립은 복음 전도자 빌립이 되었다. “재능은 자기의 처소를 찾아가게 한다.”

 

결혼하지 않은 그의 네 딸들은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행 2:17). 물론, 하나님은 여자들에게 영적인 은사들을 주신다. 그러나, 신약은 남자를 다스리는 영적인 지도력이나 공식 모임에서 가르치는 일을 여자들에게 분명히 금지한다(고전 11:5/고전 14:33-40/딤전 2:9-15 참조).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전할 메시지가 있을 때 남자인 아가보를 사용하였음을 주목하자. 네 여인들이 있었으나 사용하지 않으셨다. 바로 이 예언자가 11장 27-30절에서 기근에 대하여 언급한 일이 있다.

 

극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아가보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지 못하도록 경고하였다. 그러나 바울은 “심령에 매임을 받아”(행 20:22) 그리스도를 위하여 결박되고 목베임을 당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준비되었다”는 말은 바울의 표어였다.

 

1) 어디서나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 로마서 1장 15절

2) 언제든지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을 준비가 되어 있다/ 사도행전 21장 13절

3) 제물로 드려져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디모데후서 4장 6절.

 

15절에 나오는 “행장”(carriages)이란 “짐”(baggage)을 뜻한다."

 

2. 유대인들과의 거래 (행 21:17-26)

 

사도들이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들인 것을 알면서도 그들이 행한 모든 일들은 옳은 일이라고 믿기가 쉽다. 바울의 서신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지만 그의 행위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안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록 그의 마음과 동기가 바르다고는 하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이 지혜롭다고 하겠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며, 그 곳에 도착한 후에도 또 다른 실수를 한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났으며(15장 참조) 이방인 중에 베푸신 하나님의 축복을 보고하였다. 바울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으며 교회 생활에 있어서 유대적인 면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수많은 유대인 신자들이 아직도 모세의 계명을 실행하고 있음을 20절에서 주목하자. 다른 어떤 곳보다도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기는 훨씬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희생제사를 드리는 성전이 바로 눈앞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과 은혜, 왕국과 교회 사이에 혼란이 있음을 보게 되는데, 오늘날 우리도 역시 같은 혼란에 빠져 있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이 모세의 율법에 저항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기하는 이 유대인들에게 입증해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나쁜 거래였으나 바울은 빠져 들었다. 그는 이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써서, 율법을 지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님과 율법으로 말미암아 성별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였고 그리스도인은 모세의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다는 것을 나타내었다. 이제 그는 유대인들과 타협할 목적으로 “종교적인 거래를” 하여 이 영감된 진리들을 모두 부정하고 있다.

 

바울은 서약을 마친 네 사람을 동참시켜 희생제사를 드렸으며 이레 동안에 전체의 사무 처리를 마쳤다. 이것은 나실인의 서약인 것이 분명하며 머리를 민 것으로 볼 때 더욱 그러하다(민 11:1-/행 18:18 에서 바울 자신의 행동을 보자). 이러한 속임수가 통했는가? 아니다! 그 결과, 바울은 체포되었다! 하나님께서 여러 도시에서 그에게 경고하셨던 바로 그 일이 실제로 발생하였다.

 

3. 성전에서 체포됨 (행 21:27-40)

 

이방에 사는 유대인들 중에서 바울을 아는 몇몇 사람들은 에베소 사람으로서 이방인인 드로비모가 사도 바울과 동행하고 있는 것을 보았고, 그가 금지된 지역에 이방인 친구들을 데리고 들어왔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거짓말이었으며,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이다. 야고보가 막으려고 했던 일이 그대로 일어나게 되었다.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든 관계없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믿음이란 속임수 없이 단순히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또는 즐겁게 하기 위해서 계획이나 책략을 사용하지 않는다.

 

바울은 성 밖으로 끌려가 돌로 맞게 되어 있었는데 성전 수비대장이 달려와 그를 구했다. 자주 반복된 예언이 성취되었다. 바울은 두 개의 쇠사슬에 묶였다.(33절/ 21:11) 군중들의 소요가 에베소에 있는 이방인들의 소요와 별다를 것이 없는 것에 주목하자(19:32). 사단은 혼란을 일으킨다.

 

수비대는 바울이 문제를 일으킨 악명 높은 애굽인이라고 생각했지만,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로마의 시민권을 사용하였다. 정부는 우리를 보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창설하신 기관이다(롬 13:1-). 복음의 촉진을 위하여 법을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바울이 층대에 서서 백성에게 손짓하여 히브리말로 연설하자, 이들은 조용해졌다. 다음 장에서 우리는 바울의 변호 내용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사도를 판단하는 죄를 짓고 싶지는 않지만 그가 두 가지 실수를 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가지 않도록 금했는데도 예루살렘으로 갔으며, 하나님의 은혜의 진리를 알고서도 유대인들과 타협하였다. 후자는 교리적인 잘못이고 전자는 실행의 잘못이다.

 

바울의 마음이 육신의 형제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를 만큼 그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예루살렘에서는 전하지 말라고 경고하셨었다(22:17-21). 안디옥과 에베소는 교회의 지속적인 중심이 되어 있어야 했다. 예루살렘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의 율법과 은혜에 대한 혼란은 무서울 정도로 대단하다. 촛대, 분향, 법의(法衣), 화려하게 장식한 대교회, 제단, 희생제사, 제사장직등, 이 모든 일들은 옛 언약에 속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폐지된 것이다. 은혜와 율법에 대한 이 같은 마귀의 혼합은 믿음에 무엇을 더함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 복음을 산출했던 것이다.

 

이러한 미신의 쇠고랑을 수 세기 전에 깨뜨린 것은 마틴 루터가 연구한 바울의 로마서였다. 그의 갈라디아서 강해는 속박이 있던 곳에 자유를 가져왔다. 그리고 수 세기를 거쳐 내려오며 하나님의 말씀에 진실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들의 생명을 내어 놓는 신실한 집단들이 존재해 왔다. 율법과 은혜를 혼합하지 말아야 한다. 복음의 진리와 자유를 그 무엇과도 타협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