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고린도전서 6장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
본 장에서는 바울에게 보고된 문제들 중에서 아직도 남아 있는 두 가지의 문제를 다룬다.
1. 법정에서의 논쟁 (고전 6:1-8)
죄를 범한 분당은 아마도 교회 안에 있는 이방인(헬라인)들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헬라인들은 법정이나 법에 대단히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헬라(그리이스)의 도시마다 법정과 공회가 있었고, 아들이 아버지를 고소하는 사례도 특이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근본적인 문제는 육성(肉性)이었다(3:1-4). 그리스도인들이 성숙되지 못하고 성장하지 않으면 서로 화목하게 지낼 수가 없다. 그들에게는 개인적인 문제들을 해결할 만한 영적인 분별력이 없었다. 지교회에서 회중들 사이에 법적인 소송 문제가 생겨 뿔뿔히 흩어진다면 얼마나 비극인가!
바울이 법정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롬 13장 참조). 왜냐하면 정부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설립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자들 사이의 문제가 불신자들에게 노출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한 그 법관이 영적인 문제를 처리할 만한 이해력이 없을 것은 물론이다(2:14-16). 고린도 교회의 회원들은 법정에 가서 서로를 고발하고 있었으며, 그로 인해서 교회의 간증을 파괴하고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개인적인 차이점들을 해결할 방안은 어떠한 것인가? 이들은 우선 올바른 영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영광 중에서 결정하게 될 크고 영원한 문제들에 비해 이러한 문제들은 얼마나 사소한 것인가! 교회는 세상을 심판하게 되떠, 또한 천사들을 심판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세상의 일들이란 액수로 따져서 얼마 되지 않는 하찮은 일들이다! 가치관이 왜곡되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의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하는 일보다 훨씬 중요하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문제점들은 마태복음 18장 15-17절과 고린도전서 6장 5절에 따라 조용하게 해결되어야 한다. 쌍방이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할 때는 이 문제를 처리하도록 신령한 형제 몇 사람을 초청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 문제가 교회 내에서나 또는 교회 밖에 알려진 것이라면 교인들은 한 무리를 지정하여, 이 문제를 검사하고 영적인 조언을 하도록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 신분을 상실하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보다는 돈을 잃는 편이 훨씬 낫다. 이것은 마태복음 5장 38-42절에 주어진 것과 같은 태도이다. 고린도 교회의 회원들이 대단히 육신적이어서 영적인 시각이나 지혜가 없었을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 교회는 다투는 파당으로 쪼개어졌다. “너희는 형제이니 서로 사랑을 나타내라!”고 바울은 외친다.
4절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에 관한 바울의 언급이 뜻하는 바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의문이 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우회적인 표현으로 “너희 교회에는 이러한 문제를 처리할 만한 지혜있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없는가?”라는 말을 했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 논란을 구원받지 않는 재판관에게 펼쳐 놓는 것보다는 너희 교회 안에서 겸손한 신자 앞에 내놓는 편이 훨씬 낫다.”
2. 세상에서 더럽혀짐 (고전 6:9-20)
우리가 고린도 교회 내의 무서운 죄들에 대하여 핑계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왜 이러한 죄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보다 부도덕에 대한 유혹이 심하고 악덕이 많았던 도시가 없었기 때문이다. 비너스(아름다움의 여신, Aphrodite)를 숭배하는 그 도시의 종교 자체가 종교라는 이름으로 매음을 하고 있었다.
이 신자들은 무서운 죄악의 생활에서 회복되었는데,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었다. 신자들 중 몇몇이 죄의 핑계를 찾고 있었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으며 이들이 야기시키는 모든 논쟁에 대해 분명하게 논박하고 있다.
1)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우리는 죄를 짓고도 천국에 갈 수 있다!”(9-11절)-
물론, 진실로 거듭난 사람은 잘못이 많다고 해도 천국에 가게 된다. 그러나, 새로운 출생은 새로운 본성을 가져오며, 새로운 본성이란 새로운 욕구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죄를 지을 능력을 가지고 있으나 욕구는 가지고 있지 않다. 죄를 안일하게 다루는 교리는 어떠한 것이라도 성경적인 교리가 아니다.
“속지 말라!” 바울은 전에 그들의 삶을 주관했던 무서운 죄들을 열거하고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희는...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피조물이며(고후 5:17), 이것은 옛 생활을 깨뜨림으로써 증명된다. 우리는 죄를 정련시켜버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나라에서 유업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2)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유가 있으니, 우리는 율법에서도 자유롭지 않은가?”(12-14절)-
물론 우리는 규율과 규칙들에서 자유롭지만 죄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결코 방종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내가 기뻐하는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데에 자유롭게 되었음을 뜻한다. 더구나 “죄를 지을 자유”란 최악의 노예 생활인 것이다.
사실상 그리스도인이면 죄의 권세 아래 있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의 몸에 이러한 욕구를 주신다면 하나님은 이러한 욕구를 사용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분명하다”고 누가 말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이다. 이러한 욕구들을 사용하라. 그러나, 남용하지는 말라. 우리의 몸은 주님의 것이다. 만일 사람이 죄 가운데서 산다면 그 죄가 그를 파멸시킬 것이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이다.
3)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나의 몸을 사용할 수가 없는가?”(15-20절)-
물론이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 자신의 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몸이다. 그는 자신의 피로 우리를 사셨다. 바울 시대에는 노예가 그 지방의 이교 성전에서 사역하는 제사장에게 저축을 함으로써 스스로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자유를 살 만큼 충분한 돈이 모여지면 자기의 주인을 사원으로 모시고 간다.
그러면 사제는 주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 노예가 이제는 특정한 신에게 속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려고 값을 지불하셨다. 이제 우리는 그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몸을 사용해야 한다.
다시금 우리가 몸에 대항하여 죄를 지을 때, 우리의 몸을 성전으로 삼으신 그리스도와 성령께 대항하여 죄를 짓는 것이 된다. 창세기 2장 24절은 두 사람이 “한 몸”이 되기 위하여 육체적으로 연합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인 자기의 몸을 어떻게 그런 무서운 죄와 연합시킬 수가 있는가? 그가 어떻게 성령의 전을 더럽힐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몸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몸을 돌보며, 몸에 옷을 입히고 몸을 데리고 다니며 몸으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몸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삼손과 다윗에게 일어났던 일들을 기억하라!
이 마지막 때에 우리는 성적인 죄들과 관련된 문제들이 증가하고 있음을 보고 있다. 우리는 감히 이러한 죄들에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딤후 3:1-7 / 5절은 세상 사람들이 아니라 신앙을 고백한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될 것이라고 언급한다). 세상의 태도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남다르게 굴 필요가 있는가!”라는 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도덕법을 위반할 수 있으며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게 됨은 슬픈 일이다.
성적인 죄는 우리의 몸을 사신 그리스도께 대한 죄이며, 우리의 몸에 거하시는 성령께 대한 죄이고, 우리 자신에 대한 죄이다(18절). 특히 젊은 사람들은 잠언 5장 1-23절, 6장 20-35절, 7장 1-27절을 읽고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 구절들은 알기 쉬운 부분이나, 성적인 방종에 대하여 경고를 하고 있다.
성인 그리스도인들은 데살로니가전서 4장 1-8절을 읽고 숙고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결혼서약을 깨뜨리는 데 대하여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을 경고한다.
이로써 교회의 죄들을 다룬 편지의 첫 부분이 끝나게 된다. 명심할 것은 이 모든 문제점들, 곧 분열, 부도덕, 논쟁, 세상으로 더럽혀짐은 공통된 한 가지 근원에서 온다는 점이다. 고린도의 신자들이 영적인 갓난 아이였으며, 주 안에서 성장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람들을 보고 있었으며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였다. 그들은 젖을 먹고 있었으며 말씀의 고기를 먹고 있지 못하였다. 그리고 기꺼이 죄를 시인하지 않았으며, 죄를 처리하지 않았다. 모든 교회 문제들은 교회 회원들의 생활에 나타난 개인적인 문제들과 죄들로부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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