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린도전서 14장 / 교회 내에서의 질서
먼저 부탁하고 싶은 것은 본 장을 죽 읽어 나가며 “알지 못하는”이란 단어가 나올 때마다 줄을 그어 지우는 일이다. 바울은 “알지 못하는” 방언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선의적이지만 혼동을 일으킬 번역자들이 첨부시킨 말들이다. 성경에서 방언이란 말이 사용되는 곳들은 언제나 알려진 언어를 가리킨다(행 2:4/행 2:6/행 2:8/행 2:11).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은 그들 각자의 통용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행사를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다. 따라서 통역이 필요치 않았다. 고린도전서 14장 10, 21절에서 바울은 그가 알려진 언어에 대하여 논하는 것임을 분명히 언급한다. 이상한 “영적 지껄임”이거나 알려지지 않은 언어가 아니다.
1. 방언의 열등함 (고전 14:1-25)
오늘날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우월한 영성의 표시이며, 우리가 이러한 은사를 소홀히 하는 한 교회는 결코 영적일 수 없다고 믿게 하려 한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로 가르친다! 그는 방언이 왜 열등한 은사인지에 대하여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한다.
1) 방언은 교회에 유익하지 못하다(덕을 세우지 못함, 1-19절)-
우리가 언제나 명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은사들이 신자의 개인적인 즐거움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에 유익을 끼치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12:7). 은사들은 일을 위한 것이지 즐거움을 위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통역이 없는 방언은 교회에 아무런 가치도 없음을 매우 명백하게 밝힌다. 방언하는 사람이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면 그에게 아무 개인적인 축복을 가져오지 못한다(14-15절), “방언 운동”에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이 은사를 개인적으로 실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와 같은 실행을 정죄한다.
첫째로, 내가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 성령의 은사를 사용한다면 어떻게 교회에 유익이 될 수 있는가? 둘째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신은 그 일을 통하여 무슨 유익을 얻을 수 있는가? 육신과 마귀도 이러한 은사들을 흉내 내어, 연약한 신자를 굳건한 이해와 믿음에로 인도하는 대신, 편협한 감상주의적인 종교로 이끌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바울은 방언과 예언을 대조한다. 예언은 성령의 즉각적인 인도하심 아래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것으로서, 설교와는 같지 않다. 왜냐하면 설교자는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기록된 말씀을 통역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조점들을 눈여겨보자.
예언 |
방언 |
사람들에게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말함(3절) |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하여 하나님께 말함(2절) |
이해할 수 있음(2, 5절) |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이해하지 못함(2, 5절) |
교회에 유익을 줌(3-4절) |
자신에게 유익이 됨(4절) |
보다 큰 은사(5, 19절) |
보다 낮은 은사(5절/ 12:10) |
2) 방언은 신자에게 유익하지 못하다(20-21절)-
어떤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의 은사가 영적인 성숙과 보다 심원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나타내는 표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정반대라고 바울은 분명히 말한다.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젖먹이”였으며, “육신적”이었다(3:1-4). 그들은 자신들의 “영성”(8:1-2/10:12)을 자랑하였으나 바울에게서 경고를 받아야만 했으며,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배워야 했다.
13장 8-13절에서 바울은 은사들에 대한 그들의 감정적인 열심이 아직 어리고 성숙하지 못했다는 표시임을 설명한다. 성숙한 신자는 성령과 말씀을 소유하기 때문에 그를 받쳐 줄 정서적인 “버팀대”란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디한(De-Han)박사는 14장 22절에 대해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할 흥미로운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믿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영적인 그리스도인을 말하며,「믿지 않는 자들」이란 깊은 신앙이 없는 성숙하지 못한 신자들을 말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하여 감정적인 징표들을 주실 수밖에 없으시다. 그러나, 성숙한 신자는 자신의 생애를 정서적인 경험이 아니라 말씀 위에 건설한다.
3) 방언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하지 않는다(22-25절)-
사도행전 2장에서,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방언의 은사를 주셔서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과 말씀을 나눌 수 있게 하셨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신다는 표시가 되었으며, 이사야 28장 11-12절을 성취하는 것이었다. 사도행전에서 네 번 방언을 보게 되는데, 그 때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신다는 증거가 되었다.
① 사도행전 2장-방언은 오순절에 모인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증거가 되었다.
② 사도행전 8장-성령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임하셨음을 유대인 신자들에게 증거하였다.
③ 사도행전 10장-성령이 이방인에게 임하셨다는 증거를 보였다.
④ 사도행전 19장-에베소 신자들이 성령을 받았다는 증거로 나타났다.
그러나, 방언으로 인하여 믿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나오게 되는 일은 결코 없었으며, 특히 고린도 교회에서와 같이 방언에 대한 혼동을 일으킬 때는 더욱 그러했다. 그것은 또 하나의 바벨(Babel)이었다. 믿지 않는 방문객이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말들을 듣고 그리스도를 향해 결심하는 편이, 이해할 수 없는 혼란한 메시지를 듣는 편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2. 질서의 중요성(14:26-40)
1) 방언(26-28절)-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방언을 하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세 사람만 순서대로 할 것이다.
2) 예언(29-33절)-
두세 선지자가 말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그 메시지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는지 사단에게서 왔는지를 시험할 일이다(12:10 의 “분별의 영”이라는 은사를 눈여겨보자). 말하는 이들은 교회에 유익이 되도록 할 것이며 적절한 질서를 유지할 것이다. 만일 말하는 자가 “도취된다면” 이것은 성령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증거이다. 왜냐하면 성령이 일하신다면 절제가 있기 때문이다.
3) 교회에서의 여성(34-35절)-
이 구절들을 11장 5절 이하, 디모데전서 2장 12절과 연관시켜 생각하라. 아마도 여인들이 자기들의 은사들을 남용하며 위치를 떠나서 이들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은 여인들에게는 영적인 은사가 없다거나, 또는 여인들은 남성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들이 교회에서 자기의 위치를 떠난다면 교회에 덕을 세우는 대신 교회를 파괴할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은 또한 남자들이 아내들에게 영적인 진리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책임을 지운다. 이 일은 가정에서 할 일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아내가 남편을 가르치는 가정이 너무도 많다.
4) 말씀에 순종함(36-40절)-
“만일 너희들이 신령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증명할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의 말씀과 모순되게 역사하는 법이 없으시며, 이러한 은사에 관한 영역보다도 이 원리가 더 절실히 요구되는 곳도 없을 것이다. 방언과 감정적인 경험들을 강조하는 많은 교회들은, 성경의 이러한 기본적인 원리들을 무시하고 단지 영적인 것만을 주장한다.
3. 신령한 예배를 위한 조언
이제 바울이 교회에 일러 준 신령한 예배의 근본 원리들을 살펴보며 본 장을 마치기로 하자.
말씀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과 설교가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이다.
교회는 덕을 세워야 한다.
불신자들 앞에서 간증을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절제가 수반되어야 한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야 하며, 예의와 질서가 있어야 한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권위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
축복을 받기 이전에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초대 교회의 집회는 어떤 형식이 정해져 있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형식에 얽매이는 것을 피해야 하는 한편, 열광하는 것도 역시 피해야 한다. 계획된 예배라고 해서 그 예배가 신령하지 않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예배 자체를 인도하실 수 있듯이 이보다 앞서 계획하는 과정을 인도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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