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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이정표/핵심성경연구-신약

고린도 후서2 - 고후 2장(바울의 사역(Ⅰ))

by JORC구원열차 2009. 7. 22.

2. 고린도후서 2장 / 바울의 사역(Ⅰ)

 

본 장에서 바울은 계획이 변경되었던 데에 대한 해명을 계속하며(1:15- 이하) 그 교회와 문제들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을 표명한다.

 

1. 교회를 향한 바울의 눈물 (고후 2:1-4)

 

11장 23-28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가 견뎌야 했던 많은 시련들을 열거하며, “모든 교회를 돌보는” 것이 가장 큰 짐이라고 말한다. 마치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이 그의 마음과 어깨에 지파들에 대한 염려의 짐을 진 것과도 같이(출 28:12-21) 참목자 바울은 그의 마음에 이 젖먹이 교회들을 품고 어깨에 메고 있었다. 눈물이란 영적인 사역에 있어 중요한 부분이다. 예수님께서도 우셨고, 바울은 눈물로 사역했으며(행 20:19/행 20:31), 시편 126편 5-6절은 눈물이 없이는 추수도 없다고 언급한다.

 

바울은 엄격한 아버지로서 교회를 방문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사랑하는 친구로서 방문하고 싶었다. 교회가 그의 마음에 기쁨이 되어야지 결코 슬픔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만일 그가 그들을 심히 꾸짖어 유감스럽게 만든다면 그들은 어떻게 바울에게 기쁨으로 돌려 줄 수가 있겠는가! 그는 교회가 문제를 바르게 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을 방문하면 그들의 교제가 기쁠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눈물로 젖은 편지를 썼다. 그는 편지에 엎드려서 울었다. 이것은 아마도 고린도전서를 가리키는 것 같다. 또는 보다 엄격했던 편지, 즉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한 편지였을 것이다.

 

1장에서 바울은 풍성한 위로를 주제로 하였으며, 여기서는 풍성한 사랑에 대해 다룬다. “사랑은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사랑이 있는 곳에는 다른 사람이 최선의 것을 누리는 것을 보고 싶은 부담감이 있다. 목회자들이 흔들리는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눈물을 영예롭게 하셨으며 교회 내에 그러한 죄가 없어지도록 역사하셨다.

 

2. 범죄자들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고후 2:5-11)

 

이 주제는 고린도전서 5장으로 돌아가게 하는데 여기서, 바울은 공개적으로 죄된 생활을 하는 사람을 징치하라고 교회에 권면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죄를 범한 사람만 그에게 문제와 슬픔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로 말미암아 괴로움을 당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교회를 소집하여 이 사람을 교제에서 내치도록 지시했었다. 이러한 징계의 행위는 그 사람을 슬픔과 회개의 자리에 있게할 것이었다.

 

그들은 이 일을 잘 해냈다. 그러나 너무 지나쳤다. 그가 죄가 슬픈 것임을 알고 자백을 했는데도 교회는 그를 다시 영접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를 용서하고 다시 받아 들이라”고 사도는 말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사단은 큰 슬픔으로 그를 멸망시킬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자주 죄를 범하는가.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잊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참된 회개가 아니면서도 비정상적으로 슬퍼하는 사단의 슬픔이 있는데, 이것은 양심의 가책이며 세상에 속한 슬픔이다. 베드로는 회개를 보였다. 그의 슬픔은 거룩한 슬픔으로서 그를 그리스도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그러나, 유다는 양심의 가책을 보였다. 그의 슬픔은 사단의 슬픔이며 세상의 슬픔으로, 그가 그리스도를 떠나 자살하도록 인도해 갔다.

 

사단은 우리가 용서받을 수 없다고 믿기를 원한다(슥 3:1-5/롬 8:31-39 참조). 만일 사단이 우리를 죄로 인하여 고소할 수 있고 실망에 빠뜨릴 수 있다면,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며 그리스도께 사용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용서하신다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만 한다(엡 4:32).

 

3. 그리스도 안에서의 바울의 승리 (고후 2:12-17)

 

바울은 에베소에서 빌립보로 여행한 이야기를 꺼낸다. 문제거리로 출발한 것이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이러한 일은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가. 부활절 아침에 무덤에 왔던 여인들은 실망으로 인하여 마음이 무거웠으나 위대한 승리가 있었던 것을 발견하였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찾지 못했으나 복음을 전파할 “놀라운 기회”를 발견하였다(롬 8:28).

 

시련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봉사의 문이 열려 있다. 요셉은 애굽에서 시련을 승리로 바꾸었으며,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그리고 바울은 드로아에서 그러하였다.

 

하지만 봉사가 평안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도를 만나기를 갈망하였으며 고린도에서 소식을 가져오기를 원하였다. 그는 드로아를 떠나 마게도냐(아마도 빌립보)로 갔으며 고린도를 완전히 지나쳤다. 그는 빌립보에서 디도를 만나 보고를 들었는데, 범법자가 징계를 받았으며, 고린도 교인의 대다수가 바울의 권위에 따랐고, 고린도에서 일들이 잘 되어 간다는 좋은 소식이었다. 이 소식은 바울을 대단히 기쁘게 하여 그는 편지를 쓰다 말고 잠시 찬양의 노래를 적어 넣었다.

 

14-17절에 나오는 모습은 모든 로마 사람들에게는 친근한 것이지만 20세기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승리를 거둔 장군이 전쟁터에서 귀국할 때는 나라에서 공식적인 시위행진을 벌였는데, 이 퍼레이드는 화려함과 영광으로 가득 찼으며 많은 향이 피워져 영웅을 높였다. 이 행진에서 군인과 지도자들이 영광과 찬양을 즐기는 반면에, 노예와 포로들은 죽음의 투기장을 향하고 있었다. 승리자들이 향기를 즐기는 동안 이것은 생명과 기쁨이었으나, 포로들에게는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인의 행진”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승리자로 묘사한다. 십자가에서의 죽으심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모든 적을 정복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승리에 동참하여 행진한다(고전 15:57).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이 행렬에서 향기(그리스도의 달콤한 향)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그리고 생활을 통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퍼뜨리기 때문이다.

 

이 향기는 다른 신자들에게 생명을 뜻하며 영원한 죽음을 향하는 불신자들에게는 죽음을 뜻한다. 요셉은 떡 맡은 관원장에게는 죽음의 향기요, 술 맡은 자에게는 생명의 향기였으며(창 40장), 예수님은 회개한 도둑에게 생명의 향기였다.

 

이것은 아름답고 도전을 주는 모습이다. 사람들에게 생명을 소개하는 것, 아니면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죽음으로 가도록 소개하는 것은 막중한 책임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일은 진지한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활은 사람들을 천국이나 지옥으로 인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기에 충분하겠는가?”라고 바울이 외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가능한 한 최선의 증인, 최선의 군사가 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누구인가?

 

3장 5절에서 그는 이 질문에 답한다. “우리의 만족(충분함)이란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 바울은 충만함(충분함)이란 단어를 이 편지에서 여러 번 사용한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필요들과(3:4-6), 물질적인 필요와(9:8), 육체적인 필요(12:7-10)를 만족시키기에 충분하심을 보여 준다.

 

17절에서 바울은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고소로 되돌아간다. 불행히도 오늘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상업화하는” 타락한 설교자들과 선생들이 있다. 여기서 타락했다는 말은 복음을 “하찮게” 생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장하는 데보다는 삶의 수단으로서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의 헬라어는 여관 주인, 행상인에 해당하는 단어에서 왔으며, 이익을 남기기 위해서 어떤 종류의 일도 한다는 개념이 들어 있다.

 

바울의 사역은 사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부담감이었다. 그는 인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섬기고 있었다. 그는 메시지와 방법, 그리고 동기에 있어서 신실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눈이 자신에게 머물러 있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에게 걸려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 두 장에서 우리는 바울의 사역이 고난과 슬픔으로 가득 찼었음을 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와 기쁨이 있었다. “우리의 만족은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이다.”